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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월 29일 (금)

[한국사] 고려 서북계 위치 추적 (4) ㅡ 봉집현(옛 철령위)은 현 번시시가 아니다

감방친구 조회 : 2,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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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서 고려와 인접한 요나라 신주의 위치를 고찰하면서 이 지역이 철령위 위치와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 지역이라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철령위의 위치를 사서탐색을 통해 다시 고찰하는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였습니다

몇 달 전에 저는 이곳에 게시한 몇 편의 글을 통해 명나라가 최초 설치한 철령위는 봉집현으로 그 위치가 혼하 근처에 있음을 과정적으로 논거한 바 있습니다

당시에는 철령위가 최초든 최종이든 한반도에 설치되지 않았다는 사실만을 논증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기에 봉집현의 위치가 한반도가 아닌 요동에 있었다는 사실만을 확인하고 생각을 그쳤는데

실제 게시글에서 예시로 들기까지 한 복기대 팀(인하대 고조선 연구소)의 관련 뉴스와 관련 지도의 주장하는 바가 제가 고찰한 내용과 다르다는 사실을 오늘에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복기대 팀에서는 봉집현이 혼하 근처에 있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들고 있음에도 동시에 현 철령시 동남쪽 500리에 있었다는 기록을 들어서

실제는 혼하 한참 아래의 번시시(本溪市)를 봉집현이자 철령위 최초 위치인 1388 년 철령위 위치로 비정하고 있습니다

1) 혼하에 있다
2) 현 철령위 동남쪽 500리에 있다
3) 번시시에 있었다

무엇이 잘못 된 것일까요?
저는 지난 고찰 당시에 혼하의 위치와 그 지류를 특별히 염두하지 않고 그저 요동에 있는 강 이름이라는 사실에 만족하였습니다

우선 本溪를 요사, 원사, 금사, 명일통지, 명사, 청사, 독사방여기요 등에서 찾아봤습니다

그러나 찾을 수 없었습니다

鐵嶺衛와 奉集을 중심으로 독사방여기요로부터 명사를 거쳐 요사로 역순으로 추적해 가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먼저 독사방여기요의 기록을 보겠습니다

新興城即衛治。本勃海富壽縣,為富州治,境有延津。遼更名延津縣,銀州治焉。金皇統三年,州廢,更置新興縣,屬咸平府。金末廢。元因之。明洪武二十一年,在衛治東南五百里故鐵嶺城,置鐵嶺衛,與高麗接境。二十六年,徙治於此,因故城修築,周五里有奇。又有故新興城,在今衛東。《遼志》云:故越喜國地,勃海置銀冶於此,因置銀州。遼改富州為銀州,以故銀州置新興縣屬焉。是也。金並入延津縣,又改延津為新興縣。

<독사방여기요>

1) 현 철령위(현 철령시) 동남쪽 500리에 옛(1388) 철령위가 있다 (在衛治東南五百里故鐵嶺城 置鐵嶺衛 與高麗接境)

그런데 철령위는 봉집현에 있었습니다 독사방여기요의 다른 기록에는 수상한 점이 엿보입니다

貴德城(沈陽中)衛東八十里。《遼志》:漢襄平縣地,契丹置貴德州寧遠軍於此,治貴德縣。金因之。元廢。又有奉德廢縣,在貴德州東。《遼志》:勃海緣城縣地,契丹置奉德州於此,尋降為縣。金省。

奉集城,在衛東南。《遼志》:高麗置霜巖縣於此。勃海置集州,治奉集縣。契丹仍曰集州,又為懷眾軍。金廢州,以奉集縣屬貴德州。元縣廢。今為奉集堡,有鐵場百戶所,屬鐵嶺衛。《志》云:堡東去鐵嶺衛二百十里。

<독사방여기요>

1) 귀덕성은 심양위 동쪽 80리에 있다
2) 한 요동군 양평현, 요나라 귀덕주 영원군 자리이다

3) 발해 집주에 속했으며 봉집현에서 다스렸다
4) 요가 집주 회중군으로 삼았다
5) 금이 집주를 폐하고 봉집현을 귀덕주에 속하게 하였다

6) 지금(17 세기)의 봉집보인데 철 광산이 백여 곳이 있으며 철령위 소속이다
7) 명일통지에 따르면 봉집보는 철령위(요양 북쪽 240 리, 현 철령시) 동쪽으로 210리 가면 있다

같은 기록에서 전혀 사실 관계(기술 내용)가 맞지 않는 진술을 하고 있습니다

1388 년(명 홍무 21년) 철령위는 현 철령위 동남 500리에 있었다면서

그 철령위가 있던 봉집현이 현 철령위 동쪽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다른 기록들을 찾아 견줄 필요가 절실해 보입니다

鐵嶺衛洪武二十一年三月以古鐵嶺城置。二十六年四月遷於古嚚州之地,即今治也。西有遼河,南有泛河,又南有小清河,俱流入於遼河。又南有懿路城,洪武二十九年置懿路千戶所於此。又範河城在衛南,亦曰泛河城,正統四年置泛河千戶所於此。東南有奉集縣,即古鐵嶺城也,接高麗界,洪武初置縣,尋廢。又有咸平府,元直隸遼東行省。至正二年正月降為縣。洪武初廢。南距都司二百四十里。

<명사 지리지>

1) 홍무 21년(1388) 3월 옛 철령성에 설치
2) 홍무26년(1393) 4월 옛 은주 땅으로 옮기니 곧 지금의 치소가 자리한 곳(현 철령위, 현 철령시)


3) 현 철령위(현 철령시) 서쪽에 요하, 남쪽에 범하, 또 남쪽에 소청하가 있는데 모두 요하로 흘러든다
4) 동남쪽에 봉집현이 있는데 곧 옛 철령성으로
고려와 경계를 접한다

5) (철령위) 남쪽으로 요동도사(요양)가 240리 거리이다.

명사는 독사방여기요보다 후대의 사서이지만 명나라 당대의 역사 사실을 기록한 사서입니다
이러한 명사 지리지에는

1) 옛 철령성이 봉집현에 있었으며 그 지역이 고려와 접경을 이루었고
2) 그 옛 철령성이 있던 봉집현이 현 철령위 동남쪽에 있다

라고 적혀 있고 500리라 하는 수치는 없습니다

대체 동남 500리는 어디에서 비롯한 것일까요?

貴德州,刺史,下。遼貴德州寧遠軍,國初廢軍,降為刺郡。戶二萬八百九十六。縣二:
貴德倚。有範河。


奉集遼集州懷遠軍奉集縣,本渤海舊縣。有渾河。

<금사 지리지>

1) 귀덕주, 범하가 있다
2) 봉집(귀덕주 속현), 혼하가 있다

지도에서 범하와 혼하를 찾아보십시오 범하는 현 철령시 남쪽을 흐르는 강이고, 혼하는 범하 아래에서 흐르는 강으로 심양을 지나며 사하와 만나서 요양을 지나며 태자하와 만나 요하로 합쳐지는 강입니다 혼하 역시 현 철령시의 근처에서 심양, 요양 등을 지나는 강입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혼하에 있다는 봉집현이 뚱딴지 같이 그 수백 리 남쪽에 있다고 기록된 것일까요?

하여 문제의 ‘동남 500리’의 원처인 명일통지를 찾아봤습니다

瀋陽中衞在都司城北一百二十里本挹婁國地唐時渤海置瀋州遼置興遼軍後改曰昭徳金改為顯徳軍元改為瀋陽路治遼陽故城本朝洪武二十年置衞後又以城東北八十里撫順千户所城北四十里蒲河千户所來屬鐵嶺衞在都司城北二百四十里古有鐵嶺城在金衞治東西五百里接髙麗界洪武二十一年置衞於彼二十六年徙今治即遼金時嚚州故地也二十九年調所領左右千户所於城南六十里懿路城永樂八年復調中千户所扵懿路正統四年又調中左千户所扵城南三十里汎河俱仍屬衞

<명일통지>

찾으셨나요?

古有鐵嶺城在金衞治東西五百里接髙麗界

東南五百里가 아니라 東西五百里라고 돼 있습니다

즉 명일통지의 기록은 “금나라 (귀덕주의) 치소가 있던 옛 철령성(봉집현)은 고려와 동서로 국경을 500리를 접했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명일통지는 독사방여기요보다 2세기 앞 서서 나온 지리총서입니다

그런데 상기 명사 지리지와 독사방여기요의 다른 기록에서 보듯 ‘동남’과 ‘동쪽 210리’가 온 지리 정보와 명일통지의 ‘동서 500’ 지리 정보가 혼재돼 ‘동서’를 ‘동남’으로 바꿨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210리가 어떻게 500리가 되었는지 그 저의가 의심스럽습니다

명일통지에는 분명히 동서 500리로 돼 있으며 西와 南이 그렇게 비슷한 모양의 글자가 아니나 혹여 직접 목판본 원서를 확인하기 전에는 그 진위를 가리기 어럽다 하겠습니다

하여 다른 경로를 통하여 봉집현의 위치를 추적해 보겠습니다

奉集廢縣在撫順千户所南八十里古郫離郡地漢為險瀆縣髙麗為霜巖縣渤海改為奉集縣置集州金屬貴徳州

瀋陽中衞在都司城北一百二十里本挹婁國地唐時渤海置瀋州遼置興遼軍後改曰昭徳金改為顯徳軍元改為瀋陽路治遼陽故城本朝洪武二十年置衞後又以城東北八十里撫順千户所城北四十里蒲河千户所來屬鐵嶺衞在都司城北二百四十里古有鐵嶺城在金衞治東西五百里接髙麗界洪武二十一年置衞於彼二十六年徙今治即遼金時嚚州故地也二十九年調所領左右千户所於城南六十里懿路城永樂八年復調中千户所扵懿路正統四年又調中左千户所扵城南三十里汎河俱仍屬衞

<명일통지>

1) 폐지된 봉집현은 무순 남쪽 80리에 있다
2) 그 자리는 옛 비리국 땅이다
3) 한이 험독현으로 삼았고, 고구려가 상암현으로 발해가 집주의 봉집현으로, 금이 귀덕주의 봉집현으로 삼았다

4) 요양 북쪽 120리에 심양
4) 심양 동북 80리에 무순
5) 심양 북쪽 40리에 포하
6) 요양 북쪽 240리에 철령(현 철령시)
7) 옛 철령성은 금의 치위소(봉집) 자리에 있었는데 고려와 동서로 500리 국경을 접했다
8) 1388에 옛 철령성 자리에 설치했던 철령위는 1393에 요ㆍ금의 은주(여기서는 銀이 아니라 嚚을 씀)가 있던 옛땅인 지금의 자리(현 철령시)로 옮겼다

자,
상기 기록을 정리해 보면

1) 무순은 현 철령 동남쪽 약 4~50리
2) 봉집은 무순 남쪽 80리

이를 합하면
봉집은 철령 동남쪽 약 120~130리인데
현이 아니라 현에 있는 보인 봉집보와 철령위가 210리(독사방여기요가 인용한 명일통지, 정작 명일통지에서 해당 기록을 찾지 못 했음) 거리라는 기록에 근사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철령이 실제로는 심양 동북쪽에 있음에도 북쪽이라 한 방위감각(이런 사례는 사서에 비일비재하다)을 고려하여 볼 필요가 있으니

봉집현은

1) 혼하 근처
2) 요양과 철령의 사이
3) 요양과 무순의 사이
4) 심양과 무순 사이이되 심양 근처

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혼하는 심양을 지나 흘러간다


결론

1) ‘현 철령 동남 500 리 봉집현’ 설은 사서 교차 분석 결과 성립할 수 없다
2) 봉집현은 현 ‘심양ㅡ무순ㅡ혼하’ 근처에서 찾아야 한다

3) 고려 공민왕 때의 북방개척을 통하여 고려는 고려 전기인 11세기~12세기 초의 전성기 강역을 거의 회복하였고
4) 개국초 요동에 진출한 명나라는 혼하 일대까지 고려의 강역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5) 실제 심양 근처이자 고려와의 접경지대인 봉집현에 철령위를 설치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옛 심왕의 봉지인 요동 반도 전체와 한반도 내의 원나라 영역까지 탐을 내었다
6) 이로 인해 고려는 요동정벌을 시도하였으나 이성계의 반정으로 실패, 철령위를 북쪽으로 후퇴하는 성과를 얻었으나 결국 요동을 내어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7) 이후 조선의 서북경계는 혼하에서 봉황성으로, 다시 현재의 압록강으로 축소돼 오늘에 이르렀다
8) 그러나 한편으로 조선은 고려 전기 이래 우리의 강역이었던 동북계 선춘령ㆍ공험진 이남의 땅에 대한 권리를 명에게 계속적으로 주장하였고 세종 때는 적극적인 군사행동으로 그 지역을 재개척하였다


※ 고생을 많이 한 만큼 스스로 뿌듯함을 느낍니다. 복기대 교수팀에게 제 견해가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듭니다.

감방친구 17-12-19 18:38
뉴스에 제시된 번시시(복기대 팀이 봉집현으로 추정하는) 위치는 잘못 됐다
아래 지도의 본계가 번시(본계)시의 위치이다
뉴스 지도의 위치는 번시시 위치가 아니라 봉황성 위치에 가깝다



감방친구 17-12-19 20:28
현재 제 개인의 과정적 결론은

1) 고려와 요의 서북계(최대)는 현 잉커우(영구)에서 태자하,
혼하 중상류를 따라 범하, 철령을 지나는 라인

2) 고려와 요의 경계로서의 압록강은 현 혼하 중상류, 혹은 태자하

3) 학야성과 보주, 정주는 현 요양과 잉커우 근방으로서, 태자하와 혼하가 만나 요하와 함께 바다로 흘러드는 그 일대

4) 강동 6주는 철광ㆍ은광ㆍ금광이 산재하고 여진족의 활동이 빈번하여 경제적ㆍ군사적 중요성이 압도적인 곳으로서 현 무순, 철령을 지나 그 동북 지역(신주)까지

5) 1)의 선과 공험진ㆍ선춘령 선을 이으면 고려 전기 전성기 강역의 면모에 근사할 것
doradora 17-12-19 22:57
님말대로면 공민왕때 3차이상의 요동정벌은 전부 날조가 되는건가요? 애초에 고려땅이였으니
감방친구 17-12-19 22:58
뭘 보시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감방친구 17-12-19 23:00
3) 고려 공민왕 때의 북방개척을 통하여 고려는 고려 전기인 11세기~12세기 초의 전성기 강역을 거의 회복하였고

ㅡㅡㅡ

왜 그러세요?
doradora 17-12-19 23:09
전 님글 몇줄만보고 안읽었습니다.
다만 제가 알고있는 역사로는 우왕 공민왕때 한때 요동공격해서 요동성점령했고 그후 성을 포기하고 다시 원 세력에 돌려준걸로 알고있습니다. 님주장이 공민왕때 강역회복했다면 요동포기는 없었다는 건지 그걸 묻고 싶은거에요
감방친구 17-12-19 23:19
주장을 적은 게 글인데 글을 안 읽고 주장이 무엇이냐 묻는 건 왜 그러시는 건데요?

원 세력에게 돌려줬어요?
처음 듣는 말인데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어요?
doradora 17-12-19 23:29
오해가 있으신가본데
저는 님말 틀렸다고 한적도 없고 그냥 제가 알고있는 역사는 그렇다고 한겁니다. 님은 요동포기는 언급하지 않으시길래 님이 부정하시는 건가 물어본거구요
인터넷에 공민왕 요동포기만 검색하셔도 안정복 발언을 비롯한 여러 관련자료 나오네요
감방친구 17-12-19 23:33
글을 안 읽으셨다면서요?

1)님말대로면 공민왕때 3차이상의 요동정벌은 전부 날조가 되는건가요? 애초에 고려땅이였으니
2)전 님글 몇줄만보고 안읽었습니다.

왜 이러세요?
감방친구 17-12-19 23:37
님의 질문에 대해 저는 본문에서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뭘 보고 그러시느냐고 제 본문 글 제시하면서 되묻는 거잖아요

(님말대로면 공민왕때 3차이상의 요동정벌은 전부 날조가 되는건가요? 애초에 고려땅이였으니 )라는 님 질문에

"고려 공민왕 때의 북방개척을 통하여 고려는 고려 전기인 11세기~12세기 초의 전성기 강역을 거의 회복하였고"

한 본문 글을 발췌해 확인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님이 돌연 말을 바꿔서 원에 돌려주고 포기 운운 하시길래 알려달라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이 글은 봉집현의 위치를 고찰하는 글이고요
비좀와라 17-12-19 23:39
요동은 심양왕부 소속 이고요. 심양왕부는 고려왕부의 속하지역으로 원사에서 원나라 조정이 고려 영토라 공식 인정한 지역 입니다.

요동정벌은 고려왕부가 심양왕부의 반란을 진압 한 것 이지 외국 특히 원나라 싸운 것이 아니죠.

원나라 장수 납합출 같은 경우는 고려 왕부가 심양 왕부의 반란을 진압 후에 심양 왕부 세력이 기황후에게로 도망가서 고려왕부에 간섭을 요청해서 기황후의 명으로 고려와 싸우게 되는 것 이고요.

이 것도 이성계에게 완전 개 박살나서 실패로 돌아 갔지만 심양왕부의 일부분을 무단 점거 하게 되는 것 입니다.

요동을 원나라에 돌려 준 적도 없고 원나라에서 내 놓으라 한 적도 없습니다.

단지 기황후가 무단으로 심양왕부 편을 들어서 고려내정에 간섭을 했을 뿐 이죠.
doradora 17-12-19 23:39
본성 나오시네 ㅋㅋ 그렇게 초딩논리하고 싶으신가요?ㅋㅋ 왜 이러세요..?
왜 보고싶은거만 보이시나요? 몇 줄봤다고 언급했고 전문을 안읽었다는 소리입니다 한국 말은 끝까지 보십시오 ㅎ
하긴.. 요동포기도 모르는 자기세계관에 빠진자와 무슨 이야기를 하겠나요.. 제가 님글 안읽었다고 삐진거는 이해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방구석에서 열심히 주장만 하십쇼!
감방친구 17-12-19 23:40
그만 하세요
진정해진… 17-12-20 01:47
"전 님글 몇줄만보고 안읽었습니다"
네, doradora님이 잘못하셨네요. 글을 읽지도 않고 반대함은 명백한 잘못입니다.

합당한 근거를 가진 논설들이 모이고 모여, 과거 역사적 사실에 가까워 지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트로이 전쟁이나 히타이트의 역사가 허구로 취급받았지만 현재는 실존했던 정사로 취급받는 바와 같이, 현재의 우리 역사관도 영원히 옳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언제나 절대적인 옳음'이란, 존재할 수 없음을 고려해주세요.
Marauder 17-12-20 02:59
본성 나오시네 ㅋㅋ 그렇게 초딩논리하고 싶으신가요?ㅋㅋ 왜 이러세요..?
왜 보고싶은거만 보이시나요? 한국 말은 끝까지 보십시오 ㅎ 정작 자기도 다안읽었으면서 심각하네요... 글보면 당연히 써있는 내용일 뿐인데 초딩수준의 투정이라니...
딱보니 댓글이 너무 개념이 없어서 다들 당황하신거같은데 미약한상식인 1. 공민왕의 요동정벌 2. 요동포기가 윗글의 내용과 부딪힌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여기 사람들이 몰라서 지적안하는게아님. 안부딪히기 때문에 지적을 안하는것임
Marauder 17-12-20 03:03
원나라때 고려강역 일부를 뺏긴건 팩트. 또한 요동정벌의 목적지인 요동성은 심양즉 원래 고려왕의 봉지이기 때문에 강단사학으로보든 재야사학으로 보든..
 원나라에게 뺏기기 이전 고려의 강역이 넓든 좁든 전혀상관이 없음.
마지막으로 조선의 영토가 결국 압록강 부근으로 축소되었기 때문에 영토상실또한 문제없음. 걍 논리적전개를 안보고 역사에 끼워맞추기식으로 글을보니 이딴 댓글이 나오죠.
올바름 17-12-20 08:53
'님글 안읽었다고 삐진' 이라고 할게 아니죠 님은 기본 자세와 예의가 안돼있네요 뭐가 그리 당당한건지..
감방친구 17-12-23 11:42
봉집현을 본계시에 비정하면
무순 남쪽 80리라는 명일통지의 기록에 비교적 합치하지만
혼하에 있다는 금사의 기록에 배치가 된다.
본계는 혼하가 아니라 태자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령위 설치 당시와 가까운 때의 지리서인 명일통지는 명나라 당시에 인식한 봉집현의 위치를 어느 사서보다 현실 반영했다고 보이고
금사와 배치가 되는 위치는 현의 크기, 그리고 그 현의 늘고 줆을 고려한다면 납득될 수 있는 사안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무순 남쪽 100여리에 위치한 본계를 봉집현에 비정한 복기대 팀의 주장은 사실기록의 교차 검증을 통해 타당하여 수긍할 수준이라고 판단된다

그러나 명일통지에는 분명히

東西五百里接髙麗界

라고 적혀 있으며

在衛治東南五百里故鐵嶺城 置鐵嶺衛 與高麗接境

라 적은 독사방여기요의 기록은

그 전대 기록인 금사, 명일통지, 그리고 동일서 내의 다른 기록과의 교차 검증을 통해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잘못된 기록임이 확인되는 바

여말선초의 철령위 제문제의 거론에 있어서 확실한 언급과 비판이 필요하다고 본다

명일통지의

東西五百里接髙麗界

기록은

무순ㆍ본계 기점으로
소자하ㆍ혼한ㆍ태자하 등지의 동쪽 기점과 요하만의 서쪽 기점을 연결한 선의 거리가 500 리에 근접함을 지도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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