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고려 서북계 위치 추적 (4) ㅡ 봉집현(옛 철령위)은 현 번시시가 아니다
감방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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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서 고려와 인접한 요나라 신주의 위치를 고찰하면서 이 지역이 철령위 위치와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 지역이라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철령위의 위치를 사서탐색을 통해 다시 고찰하는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였습니다
몇 달 전에 저는 이곳에 게시한 몇 편의 글을 통해 명나라가 최초 설치한 철령위는 봉집현으로 그 위치가 혼하 근처에 있음을 과정적으로 논거한 바 있습니다
당시에는 철령위가 최초든 최종이든 한반도에 설치되지 않았다는 사실만을 논증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기에 봉집현의 위치가 한반도가 아닌 요동에 있었다는 사실만을 확인하고 생각을 그쳤는데
실제 게시글에서 예시로 들기까지 한 복기대 팀(인하대 고조선 연구소)의 관련 뉴스와 관련 지도의 주장하는 바가 제가 고찰한 내용과 다르다는 사실을 오늘에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복기대 팀에서는 봉집현이 혼하 근처에 있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들고 있음에도 동시에 현 철령시 동남쪽 500리에 있었다는 기록을 들어서
실제는 혼하 한참 아래의 번시시(本溪市)를 봉집현이자 철령위 최초 위치인 1388 년 철령위 위치로 비정하고 있습니다
1) 혼하에 있다
2) 현 철령위 동남쪽 500리에 있다
3) 번시시에 있었다
무엇이 잘못 된 것일까요?
저는 지난 고찰 당시에 혼하의 위치와 그 지류를 특별히 염두하지 않고 그저 요동에 있는 강 이름이라는 사실에 만족하였습니다
우선 本溪를 요사, 원사, 금사, 명일통지, 명사, 청사, 독사방여기요 등에서 찾아봤습니다
그러나 찾을 수 없었습니다
鐵嶺衛와 奉集을 중심으로 독사방여기요로부터 명사를 거쳐 요사로 역순으로 추적해 가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먼저 독사방여기요의 기록을 보겠습니다
新興城即衛治。本勃海富壽縣,為富州治,境有延津。遼更名延津縣,銀州治焉。金皇統三年,州廢,更置新興縣,屬咸平府。金末廢。元因之。明洪武二十一年,在衛治東南五百里故鐵嶺城,置鐵嶺衛,與高麗接境。二十六年,徙治於此,因故城修築,周五里有奇。又有故新興城,在今衛東。《遼志》云:故越喜國地,勃海置銀冶於此,因置銀州。遼改富州為銀州,以故銀州置新興縣屬焉。是也。金並入延津縣,又改延津為新興縣。
<독사방여기요>
1) 현 철령위(현 철령시) 동남쪽 500리에 옛(1388) 철령위가 있다 (在衛治東南五百里故鐵嶺城 置鐵嶺衛 與高麗接境)
그런데 철령위는 봉집현에 있었습니다 독사방여기요의 다른 기록에는 수상한 점이 엿보입니다
貴德城(沈陽中)衛東八十里。《遼志》:漢襄平縣地,契丹置貴德州寧遠軍於此,治貴德縣。金因之。元廢。又有奉德廢縣,在貴德州東。《遼志》:勃海緣城縣地,契丹置奉德州於此,尋降為縣。金省。
奉集城,在衛東南。《遼志》:高麗置霜巖縣於此。勃海置集州,治奉集縣。契丹仍曰集州,又為懷眾軍。金廢州,以奉集縣屬貴德州。元縣廢。今為奉集堡,有鐵場百戶所,屬鐵嶺衛。《志》云:堡東去鐵嶺衛二百十里。
<독사방여기요>
1) 귀덕성은 심양위 동쪽 80리에 있다
2) 한 요동군 양평현, 요나라 귀덕주 영원군 자리이다
3) 발해 집주에 속했으며 봉집현에서 다스렸다
4) 요가 집주 회중군으로 삼았다
5) 금이 집주를 폐하고 봉집현을 귀덕주에 속하게 하였다
6) 지금(17 세기)의 봉집보인데 철 광산이 백여 곳이 있으며 철령위 소속이다
7) 명일통지에 따르면 봉집보는 철령위(요양 북쪽 240 리, 현 철령시) 동쪽으로 210리 가면 있다
같은 기록에서 전혀 사실 관계(기술 내용)가 맞지 않는 진술을 하고 있습니다
1388 년(명 홍무 21년) 철령위는 현 철령위 동남 500리에 있었다면서
그 철령위가 있던 봉집현이 현 철령위 동쪽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다른 기록들을 찾아 견줄 필요가 절실해 보입니다
鐵嶺衛洪武二十一年三月以古鐵嶺城置。二十六年四月遷於古嚚州之地,即今治也。西有遼河,南有泛河,又南有小清河,俱流入於遼河。又南有懿路城,洪武二十九年置懿路千戶所於此。又範河城在衛南,亦曰泛河城,正統四年置泛河千戶所於此。東南有奉集縣,即古鐵嶺城也,接高麗界,洪武初置縣,尋廢。又有咸平府,元直隸遼東行省。至正二年正月降為縣。洪武初廢。南距都司二百四十里。
<명사 지리지>
1) 홍무 21년(1388) 3월 옛 철령성에 설치
2) 홍무26년(1393) 4월 옛 은주 땅으로 옮기니 곧 지금의 치소가 자리한 곳(현 철령위, 현 철령시)
3) 현 철령위(현 철령시) 서쪽에 요하, 남쪽에 범하, 또 남쪽에 소청하가 있는데 모두 요하로 흘러든다
4) 동남쪽에 봉집현이 있는데 곧 옛 철령성으로
고려와 경계를 접한다
5) (철령위) 남쪽으로 요동도사(요양)가 240리 거리이다.
명사는 독사방여기요보다 후대의 사서이지만 명나라 당대의 역사 사실을 기록한 사서입니다
이러한 명사 지리지에는
1) 옛 철령성이 봉집현에 있었으며 그 지역이 고려와 접경을 이루었고
2) 그 옛 철령성이 있던 봉집현이 현 철령위 동남쪽에 있다
라고 적혀 있고 500리라 하는 수치는 없습니다
대체 동남 500리는 어디에서 비롯한 것일까요?
貴德州,刺史,下。遼貴德州寧遠軍,國初廢軍,降為刺郡。戶二萬八百九十六。縣二:
貴德倚。有範河。
奉集遼集州懷遠軍奉集縣,本渤海舊縣。有渾河。
<금사 지리지>
1) 귀덕주, 범하가 있다
2) 봉집(귀덕주 속현), 혼하가 있다
지도에서 범하와 혼하를 찾아보십시오 범하는 현 철령시 남쪽을 흐르는 강이고, 혼하는 범하 아래에서 흐르는 강으로 심양을 지나며 사하와 만나서 요양을 지나며 태자하와 만나 요하로 합쳐지는 강입니다 혼하 역시 현 철령시의 근처에서 심양, 요양 등을 지나는 강입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혼하에 있다는 봉집현이 뚱딴지 같이 그 수백 리 남쪽에 있다고 기록된 것일까요?
하여 문제의 ‘동남 500리’의 원처인 명일통지를 찾아봤습니다
瀋陽中衞在都司城北一百二十里本挹婁國地唐時渤海置瀋州遼置興遼軍後改曰昭徳金改為顯徳軍元改為瀋陽路治遼陽故城本朝洪武二十年置衞後又以城東北八十里撫順千户所城北四十里蒲河千户所來屬鐵嶺衞在都司城北二百四十里古有鐵嶺城在金衞治東西五百里接髙麗界洪武二十一年置衞於彼二十六年徙今治即遼金時嚚州故地也二十九年調所領左右千户所於城南六十里懿路城永樂八年復調中千户所扵懿路正統四年又調中左千户所扵城南三十里汎河俱仍屬衞
<명일통지>
찾으셨나요?
古有鐵嶺城在金衞治東西五百里接髙麗界
東南五百里가 아니라 東西五百里라고 돼 있습니다
즉 명일통지의 기록은 “금나라 (귀덕주의) 치소가 있던 옛 철령성(봉집현)은 고려와 동서로 국경을 500리를 접했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명일통지는 독사방여기요보다 2세기 앞 서서 나온 지리총서입니다
그런데 상기 명사 지리지와 독사방여기요의 다른 기록에서 보듯 ‘동남’과 ‘동쪽 210리’가 온 지리 정보와 명일통지의 ‘동서 500’ 지리 정보가 혼재돼 ‘동서’를 ‘동남’으로 바꿨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210리가 어떻게 500리가 되었는지 그 저의가 의심스럽습니다
명일통지에는 분명히 동서 500리로 돼 있으며 西와 南이 그렇게 비슷한 모양의 글자가 아니나 혹여 직접 목판본 원서를 확인하기 전에는 그 진위를 가리기 어럽다 하겠습니다
하여 다른 경로를 통하여 봉집현의 위치를 추적해 보겠습니다
奉集廢縣在撫順千户所南八十里古郫離郡地漢為險瀆縣髙麗為霜巖縣渤海改為奉集縣置集州金屬貴徳州
瀋陽中衞在都司城北一百二十里本挹婁國地唐時渤海置瀋州遼置興遼軍後改曰昭徳金改為顯徳軍元改為瀋陽路治遼陽故城本朝洪武二十年置衞後又以城東北八十里撫順千户所城北四十里蒲河千户所來屬鐵嶺衞在都司城北二百四十里古有鐵嶺城在金衞治東西五百里接髙麗界洪武二十一年置衞於彼二十六年徙今治即遼金時嚚州故地也二十九年調所領左右千户所於城南六十里懿路城永樂八年復調中千户所扵懿路正統四年又調中左千户所扵城南三十里汎河俱仍屬衞
<명일통지>
1) 폐지된 봉집현은 무순 남쪽 80리에 있다
2) 그 자리는 옛 비리국 땅이다
3) 한이 험독현으로 삼았고, 고구려가 상암현으로 발해가 집주의 봉집현으로, 금이 귀덕주의 봉집현으로 삼았다
4) 요양 북쪽 120리에 심양
4) 심양 동북 80리에 무순
5) 심양 북쪽 40리에 포하
6) 요양 북쪽 240리에 철령(현 철령시)
7) 옛 철령성은 금의 치위소(봉집) 자리에 있었는데 고려와 동서로 500리 국경을 접했다
8) 1388에 옛 철령성 자리에 설치했던 철령위는 1393에 요ㆍ금의 은주(여기서는 銀이 아니라 嚚을 씀)가 있던 옛땅인 지금의 자리(현 철령시)로 옮겼다
자,
상기 기록을 정리해 보면
1) 무순은 현 철령 동남쪽 약 4~50리
2) 봉집은 무순 남쪽 80리
이를 합하면
봉집은 철령 동남쪽 약 120~130리인데
현이 아니라 현에 있는 보인 봉집보와 철령위가 210리(독사방여기요가 인용한 명일통지, 정작 명일통지에서 해당 기록을 찾지 못 했음) 거리라는 기록에 근사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철령이 실제로는 심양 동북쪽에 있음에도 북쪽이라 한 방위감각(이런 사례는 사서에 비일비재하다)을 고려하여 볼 필요가 있으니
봉집현은
1) 혼하 근처
2) 요양과 철령의 사이
3) 요양과 무순의 사이
4) 심양과 무순 사이이되 심양 근처
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혼하는 심양을 지나 흘러간다
결론
1) ‘현 철령 동남 500 리 봉집현’ 설은 사서 교차 분석 결과 성립할 수 없다
2) 봉집현은 현 ‘심양ㅡ무순ㅡ혼하’ 근처에서 찾아야 한다
3) 고려 공민왕 때의 북방개척을 통하여 고려는 고려 전기인 11세기~12세기 초의 전성기 강역을 거의 회복하였고
4) 개국초 요동에 진출한 명나라는 혼하 일대까지 고려의 강역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5) 실제 심양 근처이자 고려와의 접경지대인 봉집현에 철령위를 설치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옛 심왕의 봉지인 요동 반도 전체와 한반도 내의 원나라 영역까지 탐을 내었다
6) 이로 인해 고려는 요동정벌을 시도하였으나 이성계의 반정으로 실패, 철령위를 북쪽으로 후퇴하는 성과를 얻었으나 결국 요동을 내어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7) 이후 조선의 서북경계는 혼하에서 봉황성으로, 다시 현재의 압록강으로 축소돼 오늘에 이르렀다
8) 그러나 한편으로 조선은 고려 전기 이래 우리의 강역이었던 동북계 선춘령ㆍ공험진 이남의 땅에 대한 권리를 명에게 계속적으로 주장하였고 세종 때는 적극적인 군사행동으로 그 지역을 재개척하였다
※ 고생을 많이 한 만큼 스스로 뿌듯함을 느낍니다. 복기대 교수팀에게 제 견해가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듭니다.
그리하여 철령위의 위치를 사서탐색을 통해 다시 고찰하는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였습니다
몇 달 전에 저는 이곳에 게시한 몇 편의 글을 통해 명나라가 최초 설치한 철령위는 봉집현으로 그 위치가 혼하 근처에 있음을 과정적으로 논거한 바 있습니다
당시에는 철령위가 최초든 최종이든 한반도에 설치되지 않았다는 사실만을 논증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기에 봉집현의 위치가 한반도가 아닌 요동에 있었다는 사실만을 확인하고 생각을 그쳤는데
실제 게시글에서 예시로 들기까지 한 복기대 팀(인하대 고조선 연구소)의 관련 뉴스와 관련 지도의 주장하는 바가 제가 고찰한 내용과 다르다는 사실을 오늘에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복기대 팀에서는 봉집현이 혼하 근처에 있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들고 있음에도 동시에 현 철령시 동남쪽 500리에 있었다는 기록을 들어서
실제는 혼하 한참 아래의 번시시(本溪市)를 봉집현이자 철령위 최초 위치인 1388 년 철령위 위치로 비정하고 있습니다
1) 혼하에 있다
2) 현 철령위 동남쪽 500리에 있다
3) 번시시에 있었다
무엇이 잘못 된 것일까요?
저는 지난 고찰 당시에 혼하의 위치와 그 지류를 특별히 염두하지 않고 그저 요동에 있는 강 이름이라는 사실에 만족하였습니다
우선 本溪를 요사, 원사, 금사, 명일통지, 명사, 청사, 독사방여기요 등에서 찾아봤습니다
그러나 찾을 수 없었습니다
鐵嶺衛와 奉集을 중심으로 독사방여기요로부터 명사를 거쳐 요사로 역순으로 추적해 가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먼저 독사방여기요의 기록을 보겠습니다
新興城即衛治。本勃海富壽縣,為富州治,境有延津。遼更名延津縣,銀州治焉。金皇統三年,州廢,更置新興縣,屬咸平府。金末廢。元因之。明洪武二十一年,在衛治東南五百里故鐵嶺城,置鐵嶺衛,與高麗接境。二十六年,徙治於此,因故城修築,周五里有奇。又有故新興城,在今衛東。《遼志》云:故越喜國地,勃海置銀冶於此,因置銀州。遼改富州為銀州,以故銀州置新興縣屬焉。是也。金並入延津縣,又改延津為新興縣。
<독사방여기요>
1) 현 철령위(현 철령시) 동남쪽 500리에 옛(1388) 철령위가 있다 (在衛治東南五百里故鐵嶺城 置鐵嶺衛 與高麗接境)
그런데 철령위는 봉집현에 있었습니다 독사방여기요의 다른 기록에는 수상한 점이 엿보입니다
貴德城(沈陽中)衛東八十里。《遼志》:漢襄平縣地,契丹置貴德州寧遠軍於此,治貴德縣。金因之。元廢。又有奉德廢縣,在貴德州東。《遼志》:勃海緣城縣地,契丹置奉德州於此,尋降為縣。金省。
奉集城,在衛東南。《遼志》:高麗置霜巖縣於此。勃海置集州,治奉集縣。契丹仍曰集州,又為懷眾軍。金廢州,以奉集縣屬貴德州。元縣廢。今為奉集堡,有鐵場百戶所,屬鐵嶺衛。《志》云:堡東去鐵嶺衛二百十里。
<독사방여기요>
1) 귀덕성은 심양위 동쪽 80리에 있다
2) 한 요동군 양평현, 요나라 귀덕주 영원군 자리이다
3) 발해 집주에 속했으며 봉집현에서 다스렸다
4) 요가 집주 회중군으로 삼았다
5) 금이 집주를 폐하고 봉집현을 귀덕주에 속하게 하였다
6) 지금(17 세기)의 봉집보인데 철 광산이 백여 곳이 있으며 철령위 소속이다
7) 명일통지에 따르면 봉집보는 철령위(요양 북쪽 240 리, 현 철령시) 동쪽으로 210리 가면 있다
같은 기록에서 전혀 사실 관계(기술 내용)가 맞지 않는 진술을 하고 있습니다
1388 년(명 홍무 21년) 철령위는 현 철령위 동남 500리에 있었다면서
그 철령위가 있던 봉집현이 현 철령위 동쪽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다른 기록들을 찾아 견줄 필요가 절실해 보입니다
鐵嶺衛洪武二十一年三月以古鐵嶺城置。二十六年四月遷於古嚚州之地,即今治也。西有遼河,南有泛河,又南有小清河,俱流入於遼河。又南有懿路城,洪武二十九年置懿路千戶所於此。又範河城在衛南,亦曰泛河城,正統四年置泛河千戶所於此。東南有奉集縣,即古鐵嶺城也,接高麗界,洪武初置縣,尋廢。又有咸平府,元直隸遼東行省。至正二年正月降為縣。洪武初廢。南距都司二百四十里。
<명사 지리지>
1) 홍무 21년(1388) 3월 옛 철령성에 설치
2) 홍무26년(1393) 4월 옛 은주 땅으로 옮기니 곧 지금의 치소가 자리한 곳(현 철령위, 현 철령시)
3) 현 철령위(현 철령시) 서쪽에 요하, 남쪽에 범하, 또 남쪽에 소청하가 있는데 모두 요하로 흘러든다
4) 동남쪽에 봉집현이 있는데 곧 옛 철령성으로
고려와 경계를 접한다
5) (철령위) 남쪽으로 요동도사(요양)가 240리 거리이다.
명사는 독사방여기요보다 후대의 사서이지만 명나라 당대의 역사 사실을 기록한 사서입니다
이러한 명사 지리지에는
1) 옛 철령성이 봉집현에 있었으며 그 지역이 고려와 접경을 이루었고
2) 그 옛 철령성이 있던 봉집현이 현 철령위 동남쪽에 있다
라고 적혀 있고 500리라 하는 수치는 없습니다
대체 동남 500리는 어디에서 비롯한 것일까요?
貴德州,刺史,下。遼貴德州寧遠軍,國初廢軍,降為刺郡。戶二萬八百九十六。縣二:
貴德倚。有範河。
奉集遼集州懷遠軍奉集縣,本渤海舊縣。有渾河。
<금사 지리지>
1) 귀덕주, 범하가 있다
2) 봉집(귀덕주 속현), 혼하가 있다
지도에서 범하와 혼하를 찾아보십시오 범하는 현 철령시 남쪽을 흐르는 강이고, 혼하는 범하 아래에서 흐르는 강으로 심양을 지나며 사하와 만나서 요양을 지나며 태자하와 만나 요하로 합쳐지는 강입니다 혼하 역시 현 철령시의 근처에서 심양, 요양 등을 지나는 강입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혼하에 있다는 봉집현이 뚱딴지 같이 그 수백 리 남쪽에 있다고 기록된 것일까요?
하여 문제의 ‘동남 500리’의 원처인 명일통지를 찾아봤습니다
瀋陽中衞在都司城北一百二十里本挹婁國地唐時渤海置瀋州遼置興遼軍後改曰昭徳金改為顯徳軍元改為瀋陽路治遼陽故城本朝洪武二十年置衞後又以城東北八十里撫順千户所城北四十里蒲河千户所來屬鐵嶺衞在都司城北二百四十里古有鐵嶺城在金衞治東西五百里接髙麗界洪武二十一年置衞於彼二十六年徙今治即遼金時嚚州故地也二十九年調所領左右千户所於城南六十里懿路城永樂八年復調中千户所扵懿路正統四年又調中左千户所扵城南三十里汎河俱仍屬衞
<명일통지>
찾으셨나요?
古有鐵嶺城在金衞治東西五百里接髙麗界
東南五百里가 아니라 東西五百里라고 돼 있습니다
즉 명일통지의 기록은 “금나라 (귀덕주의) 치소가 있던 옛 철령성(봉집현)은 고려와 동서로 국경을 500리를 접했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명일통지는 독사방여기요보다 2세기 앞 서서 나온 지리총서입니다
그런데 상기 명사 지리지와 독사방여기요의 다른 기록에서 보듯 ‘동남’과 ‘동쪽 210리’가 온 지리 정보와 명일통지의 ‘동서 500’ 지리 정보가 혼재돼 ‘동서’를 ‘동남’으로 바꿨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210리가 어떻게 500리가 되었는지 그 저의가 의심스럽습니다
명일통지에는 분명히 동서 500리로 돼 있으며 西와 南이 그렇게 비슷한 모양의 글자가 아니나 혹여 직접 목판본 원서를 확인하기 전에는 그 진위를 가리기 어럽다 하겠습니다
하여 다른 경로를 통하여 봉집현의 위치를 추적해 보겠습니다
奉集廢縣在撫順千户所南八十里古郫離郡地漢為險瀆縣髙麗為霜巖縣渤海改為奉集縣置集州金屬貴徳州
瀋陽中衞在都司城北一百二十里本挹婁國地唐時渤海置瀋州遼置興遼軍後改曰昭徳金改為顯徳軍元改為瀋陽路治遼陽故城本朝洪武二十年置衞後又以城東北八十里撫順千户所城北四十里蒲河千户所來屬鐵嶺衞在都司城北二百四十里古有鐵嶺城在金衞治東西五百里接髙麗界洪武二十一年置衞於彼二十六年徙今治即遼金時嚚州故地也二十九年調所領左右千户所於城南六十里懿路城永樂八年復調中千户所扵懿路正統四年又調中左千户所扵城南三十里汎河俱仍屬衞
<명일통지>
1) 폐지된 봉집현은 무순 남쪽 80리에 있다
2) 그 자리는 옛 비리국 땅이다
3) 한이 험독현으로 삼았고, 고구려가 상암현으로 발해가 집주의 봉집현으로, 금이 귀덕주의 봉집현으로 삼았다
4) 요양 북쪽 120리에 심양
4) 심양 동북 80리에 무순
5) 심양 북쪽 40리에 포하
6) 요양 북쪽 240리에 철령(현 철령시)
7) 옛 철령성은 금의 치위소(봉집) 자리에 있었는데 고려와 동서로 500리 국경을 접했다
8) 1388에 옛 철령성 자리에 설치했던 철령위는 1393에 요ㆍ금의 은주(여기서는 銀이 아니라 嚚을 씀)가 있던 옛땅인 지금의 자리(현 철령시)로 옮겼다
자,
상기 기록을 정리해 보면
1) 무순은 현 철령 동남쪽 약 4~50리
2) 봉집은 무순 남쪽 80리
이를 합하면
봉집은 철령 동남쪽 약 120~130리인데
현이 아니라 현에 있는 보인 봉집보와 철령위가 210리(독사방여기요가 인용한 명일통지, 정작 명일통지에서 해당 기록을 찾지 못 했음) 거리라는 기록에 근사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철령이 실제로는 심양 동북쪽에 있음에도 북쪽이라 한 방위감각(이런 사례는 사서에 비일비재하다)을 고려하여 볼 필요가 있으니
봉집현은
1) 혼하 근처
2) 요양과 철령의 사이
3) 요양과 무순의 사이
4) 심양과 무순 사이이되 심양 근처
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혼하는 심양을 지나 흘러간다
결론
1) ‘현 철령 동남 500 리 봉집현’ 설은 사서 교차 분석 결과 성립할 수 없다
2) 봉집현은 현 ‘심양ㅡ무순ㅡ혼하’ 근처에서 찾아야 한다
3) 고려 공민왕 때의 북방개척을 통하여 고려는 고려 전기인 11세기~12세기 초의 전성기 강역을 거의 회복하였고
4) 개국초 요동에 진출한 명나라는 혼하 일대까지 고려의 강역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5) 실제 심양 근처이자 고려와의 접경지대인 봉집현에 철령위를 설치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옛 심왕의 봉지인 요동 반도 전체와 한반도 내의 원나라 영역까지 탐을 내었다
6) 이로 인해 고려는 요동정벌을 시도하였으나 이성계의 반정으로 실패, 철령위를 북쪽으로 후퇴하는 성과를 얻었으나 결국 요동을 내어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7) 이후 조선의 서북경계는 혼하에서 봉황성으로, 다시 현재의 압록강으로 축소돼 오늘에 이르렀다
8) 그러나 한편으로 조선은 고려 전기 이래 우리의 강역이었던 동북계 선춘령ㆍ공험진 이남의 땅에 대한 권리를 명에게 계속적으로 주장하였고 세종 때는 적극적인 군사행동으로 그 지역을 재개척하였다
※ 고생을 많이 한 만큼 스스로 뿌듯함을 느낍니다. 복기대 교수팀에게 제 견해가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