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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3-08 18:44
[한국사] 7) 환단고기에서 밝혀주는 역사
 글쓴이 : 스리랑
조회 : 1,661  

광개토대왕비 비문 왜곡 사건은 환단고기에 의해 풀린다.



광개토대왕비에 얽혀 있는 문제의 내용은

 

"1884년 일본군 대위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가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가지고 귀국한 뒤, 광개토대왕비의 가장 오래된 탁본, 쌍구가묵본 일본육군참모본부가 비밀리에 해독작업을 진행하여" 라는 글에 나와있다. 일본은 중국, 한국을 정복하기 위해, 미리 군인등을 보내서, 지형 등을 탐사하게 하는데, 그들은 당시 한국의 영토가 아닌, 만주 지방에 커다란 석비를 발견한다.

 


청나라의 영토였지만, 만주족은 자신들의 기원인 중국 동북지방에 대해 신성시해서,아무나 못들어가게, 이 지방은 오래 동안 황무지같이 남아있었다.그러다가, 해금이 되고, 만주지방을 탐사하던 일본에 의해 이 커다란 석비가 발견된다. 이당시는 우리영토가 아니고 해서 이 비석의 존재에 대해 거의 잊고 있었다.



광개토왕비라 불리는 비석에 글자가 새겨진 것을 알게 된 일본은 비문 해석을 시도하고, 이 비문의 내용에 자신들 일본에 상당히 불리한 내용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19세기 후반은 일본이 제국주의로 무장하고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꿈꾸며 팽창하던 시기로, 자신들이 동아시아에 완전히 진출해 정복하게 될 경우를 대비해서 한국과 중국의 침략에 대해, 역사적인 정당성을 찾으려고 애쓰던 시기였다. 그래서 '고대 남조선경영론' 등을 내세우며 예전에 다스리던 곳을 우리가 다시 접수한다는 식의 이론을 만들어내려고 한다.




또한 자신들의 역사를 보다 화려하게 꾸미기 위해 애쓰던 때였기 때문에, 광개토 비문을 발견한 일본은, 이 비문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래서 일본 참모부는 일본군 대위 사코 가게노부를 보내 탁본을 하는 과정에서 고의로 비석의 글자들을 훼손하게 된다.



이 광개토왕비를 발견했을 때, 좀더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했는데, 위의 글에서 석회도부란 말이 있는데, 이 비석을 깨끗하게 하고 보수한다는 명목으로 비석에 함부로 석회를 바르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 군인들을 통해 광개토왕비 글자의 일부를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훼손하여, 일본이 옛날에 한국을 지배하였다는 문구로 해석되게 만든다.


이렇게 역사적인 기념물에 적힌 문구 마저 바꾸어서 자신들에게 이롭게 만드는 히스테리칼한 행동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일본이 팽창하여 군사력으로 동아시아를 제패하려던 욕망이 지나쳐서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래서 일본이 비석의 글자를 고쳤다는 주장이 많았는데, 1972년 사에키 유세이[佐伯有淸]도 참모본부가 비밀리에 저질러진, 비문 훼손의 사건과 이를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야망을 뒷받침하려는 도구로 사용하였다는 전말을 폭로하기도 하였다."



      


  광개토대왕비문 변조 


사꼬오 중위는 1884년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가지고 귀국한 뒤,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비밀리에 해독작업을 진행하여 1889년 {회여록(會餘錄)} 5집에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의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 등을 통해 임나일본부설을 공식화하였다. 이에 대해 정인보는 해석상의 모순을 지적하였고, 1972년 재일(在日) 사학자 이진희(李進熙)는, 일제가 사꼬오가 위조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비문을 파괴하고 3차의 석회도부(石灰塗付) 작업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문제의 비문 중 왜(倭) 이하 도(渡)·해(海)·파(破) 등 4자가 위조된 것임을 밝혀냈다. 또한 1972년 사에키 유세이(佐伯有淸)도 참모본부가 비밀리에 이 문제에 개입한 전말을 폭로하기도 하였다. 이어 1981년 이 비문을 연구해 온 이형구(李亨求)는 비문 자형(字型)의 짜임새(結構),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字體)의 불균형 등을 들어, '倭'는 '後'를, ' 來渡海破 '는 '不貢因破'를 일본인이 위작(僞作)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아울러 광개토대왕비문의 내용은 열제(烈帝)의 업적을 기록한 것이지 일본, 왜놈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 아니다. 왜는 고구려를 위협하던 세력들의 부수적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서는 왜를 격퇴한 광개토태왕의 기록을 통해서 광개토태왕비문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한번은 바다를 건너 이르는 곳마다 왜인을 격파하셨는데 당시 왜인은 백제를 돕고 있었다.  . 백제가 앞서 왜와 은밀히 내통하여 왜로 하여금 잇달아 신라의 경계를  침범하게 하였다. 이에 열제께서는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웅진.임천.와산.괴구.복사매.우술산.진을례.노사지 등의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도중에 속리산에서 이른 아침에 천제를 올리고 돌아오셨다. 이때에 곧 백제.신라.가락의 모든 나라가 조공을 끊이지않고 바쳤고 거란.평량(감숙성 지역)도 모두 평정 굴복시켰다. 임나와 이국, 왜의 무리가 신하라 칭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해동의 융성이 이때에 절정을 이룬다."   -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






고구려의 식민지 일본,왜

 

영락 10년(단기 2733,400)에 삼가라가 모두 고구려에 귀속되었다. 이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를 모두 임나에서 통제하여 열나라로 나누어 다스리면서 연정이라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서 직접 관할 하였으므로 열제의 명령없이 마음대로 하지는 못하였다. -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1147


 


아유타는 삼국유사에서 서역(인도)이라 하였으나 이제 모든 고기(古記)를 살펴보면 아유타는 섬라暹羅(태국)이다. 그렇다면 인도의 아유타인이 혹시 대식국의 침입을 받고 쫓겨나서 이곳(태국)에 이르러 살게 되었던 것일까? 고려 말의 이명(李茗)이 지은 ≪진역유기 震域遺記≫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옛적에 백제 상인들이 바다로 아유타에 가서 재물과 보화를 많이 싣고 돌아올 때 그곳 사람도 백제 사람을 따라 왕래하여 날로 교류가 친밀해졌다. 그러나 그 풍속이 겁이 많고 싸움에 익숙하지 않아서 남의 제재를 많이 받았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태백일사에 현재 태국에 있는 아유타국과 백제 상인이 교역한 기록이 남겨져 있다.  이는 백제 해외경영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환단고기의 이 내용은 일본서기에 나와있는 백제가 동남아시아 국가와 교류했다는 근거(534년 백제가 부남국의 제물과 노비 2명을 전해 옴)기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 부남국: 지금의 캄보니아 지역에서 시작한 동남아시아 최초 고대 국가


백제금동대향로에 묘사된 코끼리의 서식지는 인도, 스리랑카, 말레이반도, 아시아 남동부 등이다.



섬라暹羅: 역사상 [명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명사 [외국열전]에 섬라조가 수록되어있다. 원음은 시암(Siam)이다. 1939년에 태국으로 국호를 변경하였다. 우리나라와는  이미 1393년(조선태조2)에 섬라 사신 장사도 등이 와서 공물을 바쳤으나 연산군 이후에는 왕래가 없었다.



대식국 : 곧 대식국大食國으로 중동 지방에 있었던 사라센 제국을 말한다. 고려 현종,정종때 송나라 상인들과 함께 고려에 여러 차례 조공을 바치고 무역을 하였다.








중국의 수많은 사서들과 환단고기가 증명하고 있는 대륙백제

 

요서 땅에 백제의 영지가 있었는데 곧 요서,진평이고 강남에는 월주가 있었으니 여기에 소속된 현은 첫째 산음, 둘째 산월, 셋째 좌월이다. (21세 문자제) 명치 11년(단기 2834, 501)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쳐서 취하고 군현의 이름을 바꾸어 송강,회계,오성,좌월,산월,천주라 하였다.


백제가 군사를 일으켜 제 노 오 월의 땅을 평정하고 관서를 설치하여 호적을 정리하고 왕의 작위를 나누어 봉하고 험한 요새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군역과 세금과 특산물 납부를 모두 본국에 준하여 하게 하였다. (상생출판 환단고기 완역본 번역 1113)

환단고기에는 백제땅이 요서,진평 등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고구려 21세 문자제 제위시에 요서,진평의 백제군을 군대를 보내 없앴다는 기록도 함께 나와 있다. 이러한 환단고기의 내용은 수많은 중국 사서에서도 증거하고 있다.

 


 

백제가 요서(遼西)를 경력한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사서는 《통전(通典)》을 비롯하여 《송서(宋書)》·《양서(梁書)》·《남사(南史)》 등에 다 들어 있으며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도 《북사(北史)》를 인용하여, "진대에 고구려가 요동을 빼앗아 차지했고, 백제도 요서 진평 2군을 빼앗아 점령하여 차지했다고 하였다.



특히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 이같은 사실을 그대로 전하고 있으며 아무런 이의를 달지 않았다. 이 책의 편자들은 자기들과 견해가 다를 때에는 반드시 안어(按語)라는 형식으로 주석을 하였다는데 일언반구 말이 없다. 도리어 백제의 강역에 대해 우리도 놀랄 만큼 남만주 일대부터 백제의 강역을 설명하고 있다.




참조: http://blog.daum.net/eodls4420/161

 





백제는 변진(弁辰)의 나라로 진대(晉代)에 일어나 번작(蕃爵)을 받았다. 스스로 백제군을 고려(고구려) 동북(중국측 방향:우리방향 요서)에 두었다." -[남제서] <백제전>


"그나라(백제) 본래 고구려와 함께'요동'의 천여리밖에 있었는데, '서진'때에 '구려(고구려)'가 이미'요동'을 다스리자, '백제'역시 '요서''진평' 2군의 땅을 점령하여 스스로'백제군'을 설치하였다." -[남제서] <백제전>






"백제 동성왕이 광양태수를 고달로,대방(중국 화북지역)태수로 조선태수를 양무로,광릉태수를 회매로, 청하태수를 모견으로, 조선태수 양무를 광릉태수로, 낙랑태수를 왕무로 임명하여 중국 남조에 승인을 요구하였다. 황제는 모두 들어주었다."

"이 해에(서기490년) 위나라가 또 기마병 수십만명을 징발하여 백제 국경선에 침공했으나,

모대가(동성왕) 사법명,찬수류,해례곤,목간나 장군에게 군사를보내 위나라 군사를 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남제서 권58] <동남이전 백제편>(양나라 숙자현)




"백제국이 진대로부터 시작하여 송, 제, 양대에 양자강 좌우를 차지하고 있었다."-[북사] <백제전>



"봄 정월…백제의 왕 여창을 사지절 도독 동청주자사로 삼았다."-[북제서] <후주기> , [삼국사기] <백제본기>




"백제란 조상이 동이다. 동이는 세 한국이 있으니 첫째 마한, 둘째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변한과 진한은 각각 열 두 나라가 있고 마한은 54국이나 된다. 그 중에 큰 나라는 인가가 만여 호가 되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가 되어 모두 합치면 도합 10여만 호가되는데 백제란 그 중의 하나이다. 그것이 후대에 점점 강성해져 모든 조그마한 나라들을 병합했다.



그 나라는 본래 구려(句麗,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晉)대에 구려(句麗)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요서(遼西)와 진평(晉平)의 두 군(郡)의 땅을 차지하고 스스로 백제군(百濟郡)을 다스렸다." -[양서] <백제전>




"백제는 예부터 내려오는 동이의 마한에 속한다. 진(晉)말에 구려(駒麗)가 요동을 차지하니 낙랑 역시 요서 진평현을 차지했다."-[양직공도]




"백제는 군현을 담로'라고 부른다. 백제에는 22개의 담로가 있어 왕의 자제와 종족에게 나누어 웅거하게 하였다.(...)서기450년

백제 비유왕이 방물을 바치며 사사로이 대사'풍야부'를 서하태수'로 삼을것을 요구하고 역림,서림(기문둔갑)등점술서와 쇠뇌 등 '병기'도 요구하였다.(...) 황제는 이를 모두 들어주었다."-[남사] <백제전>



"백제의 영토는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중국남방 월주에 닿고 북쪽으로 바다를 건너 고구려 국경까지 남쪽은 왜국에 이른다. 백제는 동(한반도),서(중국대륙) 두 곳에 서울을 두고있다."-[구당서] <백제전>




"백제가 망한후 그 땅(한반도,대륙백제 영토)은 신라,발해,말갈에 의해 나눠어졌다."-[구당서] <백제전>, -[신당서] <백제전>




"처음 백가(百家)로서 바다를 건넜다하여 백제라 한다. 진대에 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요서와 진평의 두 군을 차지했다(현재의 유성(柳城)과 북평(北平) 사이)"-[통전] <제도사>(당나라 제상 두우 편찬)




"백제국이 양자강 어구를 좌안을 진대로부터 시작하여 송, 제, 양대에 이르기 까지 점령하고 있었고, 후위때에는 중원을 차지하였다."-[주서 49권] <백제전>




"백제국은 본래 고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 후 고려가 요동을 침략하여 차지하게 되었고 백제는 요서를 공략하여 소유하게 되었다. 백제가 다스리는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라 하였다."-[송서] <백제전>




"송서에서는 백제가 다스리던 곳으로 진평군을 거론하고 그 도성을 거발성이다 라고 하였다. 거발성은 진평성이다. 그 곳은 지금 금주,영원,광녕의 경내(요서 지역)에 있다. 백제의 또 다른 도성인'고마성'은 조선국(한반도)에 있다. -[흠정만주원류고] <대청제국 건륭제>




"금주, 의주, 애춘을 포함한 지역이 다 백제의 강역이다."-[만주원류고]




"백제왕은 동,서의 두성에서 거주하는데, 동쪽 성은 공주(충청도)로서 당시 국왕의 제2의 수도였다. 서쪽성은 지금의 부여현이니 양나라때 명농왕이 이산성에서 살았으며 성산으로도 쓰고 산동 영성현 동쪽에 있다." -[신당서 각외국전 지리고증] <대청제국 말기학자 정겸>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시에 강한 군사가 100만이고 남으로는 오(吳), 월(越)의 나라를 침입하였고,북으로는 유주,연,제,노나라를 휘어잡아 중국의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삼국사기] <최치원전>










환단고기는 백제의 시초와 건국과정을 자세히 알려준다.

 

사학계가 백제개국에 대해 정리를 못하는 것은 [환단고기]를 위서취급하기 때문이다.

 


 

 

소서노와 두 아들의 자립

 

고주몽이 재위할 때 일찍이 말하기를 “ 만약 적자 유리가 오면 마땅히 태자로 봉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서노는 장차 자신의 두 아들(비류와 온조)에게 이롭지 못할 것을 염려하다가. 경인년(BCE42년) 3월에 사람들에게 패대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다는 말을 듣고 남쪽으로 달려가 진,번 사이에 있는 바다 가까운운 외진 땅에 이르렀다.  

 


소서노의 어하라 피봉과 비류의 계승 


그곳에 산지 10년 만에 밭을 사서 장원을 두고 재산을 모아 수만 금에 이르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따르는 자가 많았다. 남으로 대수에 이르고 동으로 큰 바다에 닿는 5백리 되는 땅이 모두 그의 소유였다.   그리고 주몽제에게 사람을 보내어 글을 올려 섬기기를 원한다고 했다. 임금이 매우 기뻐하고 칭찬하며 소서노를 책봉하여 어하라라는 칭호를 내렸다. 13년 임인년에 이르러 소서노가 세상을 떠나고 태자 비류가 즉위하였다. 그러나 따르는 사람이 없었다.


 

 

 

온조의 백제건국

 

이때 마려 등이 온조에게 이르기를 “ 신들이 듣기를 마한의 쇠망이 임박하였다 하니 가서 도읍을 세울 때라 생각하옵니다” 하니 온조가 “좋다”며 허락하였다. 이에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 먼저 마한의 미추홀(지금의 인천부근)에 이르러 사방을 돌아다녀 보았으나 텅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오랜 뒤에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주: 북악산)에 올라 살만한 땅을 찾앗다. 그때 마려 , 오간 등 신하 열명이 간하였다.   “오직 이곳 하남 땅은 북으로 한수를 끼고 동으로 높은 산이 자리잡고 있으며 남쪽으로 기름진 평야가 열려있고 써쪽은 큰 바다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곳은 하늘이 만든 험한 지형과 땅의 이로움이 얻기 어려운 형세이오니 , 마땅히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다른 곳을 더 찾기 마옵소서”온조가 신하 열명의 의견을 쫓아 드디어 하남 위지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백제라 하엿다. 백 사람이 건너왔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뒤에 비류가 세상을 떠나자 그 신하와 백성이 그 땅을 바치며 복종했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 위지성 : 하남 위례성. 위지성의 위치는 고대사에서 오랫동안 풀지 못한 수수께끼였다. 1500년 동안 잊혀졌던 위지성은 최근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서울 송파구의 풍납토성으로 밝혀지고 있다.



* 어하라 : 고주몽 성제가 책봉한 백제 건국 과도기의 왕의 호칭, 백제 건국의 시초는 고구려의 제후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그 뒤에도 계속 백제왕을 어하라라고 불렀는데, 이는 고구려가 백제를 제후국으로 거느린 황제 국가였음을 내외에 과시한 것이다. [주서][백제전]을 보면 " 백제왕의 성은 부여씨이며 왕호는 어라하인데 백성들은 건길지라 불렀다"라고 하여 환단고기의 어하라와 기록상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백제 왕을 부르던 칭호임을 알 수 있다.








환단고기는 한,중,일 3국의 성씨의 기원에 대해서 밝혀준다.


인류 최초의 성씨로 5600년 전의 인물인 동이족 태호복희씨의 성인 풍(風)씨가 나왔으나 15대만에 끊어져 전하지 못하고, 그 후손이 패 관 임 기 포 이 사 팽씨로 나뉘어 살았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신시본기)


<밀기>>에서 말한다. 복희는 신시에서 태어나 우사의 자리를 세습하고, 뒤에 청구와 낙랑을 거처 마침내 진에 옮겨 수인,유소와 나란히 그 이름을 서방에 빛내었다. 후예는 갈리어 풍산에 살았으니 역시 풍을 성씨로 가졌다. 뒤엔 마침내 갈라져 패, 관, 임, 기, 포, 이 ,사, 팽의 여덟가지 성이 되었다 <태백일사 신시본기>

 



그후에 염제신농이 강수에 살면서 성을 강(姜)씨로 삼았다. 묘씨는 후에 백제 8대 성씨 (사(沙), 연(燕), 협(協), 해(解), 진(眞), 국(國), 목(木), 묘(苗)) 중 하나이다. 그리고 척신 세도정치로써 6세기 경부터 100여 년간 고대 일본을 지배한 최고의 권문인 소가씨는 바로 위의 8성 중 하나인 목씨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서기에 나오는 '일본 왕가의 뿌리'인 초대 진무왕부터 40세 지토왕에 이르기까지 모든 왕이 이땅에서 건너간 조선계이다.


9세기 초에 편찬된 신찬성씨록에도 당시 일본의 지배계급을 이루던 1182개 성씨 대부분이 한국계로 기록되어있다.

 


이와 같이 우리 한민족 성씨의 유래, 특히 한중일 3국 성씨로 환단고기의 전거로 의하지 않고는 그 뿌리를 구체적으로 살필수가 없다. 바로 이점에서 신교문화의 원전으로서 도가사서의 결정판인 환단고기는 깊이 연구할 만한 숱한 문제와 가치를 담고 있는 고대사의 보고이다.








강화도 혈구(穴口) 삼랑성(三郎城)의 뜻

 
密記에 云 「古者에 徙死無出鄕하고 合葬一處하야 表爲支石이러니
밀기    운   고자    도사무출향      합장일처       표위지석


後變爲壇하야 稱支石壇이오 亦祭石壇이라.」
후변위단      칭지석단       역제석단

在山頂而塹山爲城壇者를 曰天壇이오
재산정이참산위성단자     왈천단

在山谷而植木爲土壇者를 曰神壇이니
재산곡이식목위토단자     왈신단

今僧徒가 混以帝釋稱壇하니 則非古也라.
금승도    혼이제석칭단      즉비고야



『밀기密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옛날에 장사를 지낼 때는 마을을 떠나지 않고 한 곳에 합장하여 지석(고인돌)으로 표시를 하였다.
이것이 후에 변하여 단이 되었는데, 지석단 또는 제석단이라 불렀다. 산꼭대기에 땅을 파서 성단을 만든 것을 천단이라 하고, 산골짜기에 나무를 세워 토단을 쌓은 것을 신단이라 한다. 지금의 승려들은 이를 혼동하여 제석을 단이라 칭하는데, 옛날 우리의 고유한 법이 아니다.




護守三神하야 以理人命者를 爲三侍郞이니 本三神侍從之郞이오
호수삼신       이리인명자    위삼시랑       본삼신시종지랑

三郎은 本倍達臣이니 亦世襲三神護守之官也니라.
삼랑    본배달신      역세습삼신호수지관야

高麗八觀記에 亦曰「三郎은 倍達臣也라」하니
고려팔관기    역왈   삼랑    배달신야

主稼種財利者는 爲業이오 主敎化威福者는 爲郞이오
주가종재리자     위업      주교화위복자    위랑

主聚衆願功者는 爲伯이니 卽古發神道也라
주취중원공자    위백     즉고발신도야

皆能降靈豫言하야 多神理屢中也라
개능강령예언       다신리누중야



삼신을 수호하여 인명을 다스리는 자를 삼시랑이라 하는데, 본래 삼신(상제님)을 시종하는 벼슬이다. 삼랑은 본래 배달의 신하이며, 삼신을 수호하는 관직을 세습하였다.『고려팔관기』에도 역시 “삼랑은 배달국의 신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곡식 종자를 심어 가꾸고 재물을 다스리는 일을 주관하는 자를 업業이라 하고, 백성을 교화하고 형벌과 복을 주는 일을 맡은 자를 낭朗이라 하고, 백성을 모아 삼신께 공덕을 기원하는 일을 주관하는 자를 백伯이라 하니,곧 옛날의 광명[發] 신도神道이다. 모두 영靈을 받아 앞날을 말하였는데 신이한 이치가 자주 적중하였다.



今穴口에 有三郎城하니 城者는 卽三郎宿衛之所也오
금혈구    유삼랑성       성자    즉삼랑숙위지소야

郞者는 卽三神護守之官也라
낭자    즉삼신호수지관야

佛像이 始入也에 建寺稱大雄하니
불상    시입야    건사칭대웅


此僧徒之襲古仍稱이오 而本非僧家言也라
차승도지습고잉칭       이본비승가언야

又云「僧徒儒生이 皆隷於郞家라」하니 以此可知也라.
우운   승도유생    개예어낭가             이차가지야


 


지금 강화도 혈구에 삼랑성이 있는데, 성(城)은 삼랑이 머물면서 호위하는 곳이요, 낭朗은 삼신을 수호하는 관직이다. 불상이 처음 들어왔을 때 절을 지어 대웅大雄이라 불렀다. 이것은 승려들이 옛 풍속을 따라 그대로 부른 것이요, 본래 승가의 말이 아니다. 또, “승도僧徒와 유생儒生이 모두 낭가 朗家에 예속되었다”라고 하였으니 이로써도 잘 알 수 있다.(환단고기『태백일사』 「신시본기」)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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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통일 18-03-08 19:05
   
환단고기는 현재 진본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사본뿐이죠.
규원사화는 진본이라도 발견이 되었습니다.
환단고기는 진본이 발견되지 않는 이상 보류해 놓아야 하는 게 맞습니다.
     
스리랑 18-03-08 19:19
   
2월 7일 날 올렸던 글 내용입니다.

인류사의 여러 경전들을 돌이켜 보라. 수백 수천 년의 세월 속에서 끊임없는 가필과 재편집을 통한 보정 작업 끝에 오늘날의 경전이 되지 않았는가. 주역(周易)은 태호 복희씨로부터 공자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고, 도덕경은 왕필이 덕경과 도경의 본래 순서를 뒤집어 재구성한 것이다.

 

동서양의 고전과 각 분야의 소중한 문화원전 가운데 순수하게 원본 그대로 전하는 것은 거의 없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동서양의 종교 경전이나 의학, 불멸의 고전은 반드시 숱한 보정작업을 거쳐서 거듭난 것이다. 이처럼 동서양의 모든 고전은 그 전승과정에서 적잖은 첨삭과 교정이 이루어졌지만 그 누구도 이것을 문제 삼지 않는다.




우리가 잘 아는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처음에 책 이름이 『태사공서太史公書』였다. 여러 손을 거치면서 다른 사람의 글이 잘못 뒤섞여 들어가고, 몇몇 대목은 망실된 상태로, 수백 년이 지나 『사기』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뿐만 아니라 판본의 연대조차 확실하지 않은 사본들이 전하지만 오늘날 『사기』를 위서라 말하는 사람은 없다.


삼국유사도 초간본은 없고 조선시대 판본만 전한다. 판본들 사이의 차이도 상당하다. 조선 중종(1512년) 때 간행된 정덕본을 기준으로 하여 기존 판본들을 대조하면 연표인 ‘왕력편’에만 5천5백여 글자 가운데 30여 곳이 다르다.


삼국사기도 1981년에 발견된 고려 때 판본을 기존 판본과 비교한 결과 오자誤字가 무려 3백여 개에 이른다. 이처럼 우리 고대사의 근간이 되는 두 사서도 판본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오자, 탈루, 중복 등 다양한 오류가 있다. 그러나 오늘의 학계에서는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는다.



동서양의 종교 경전도 다르지 않다. 오늘의 모든 불교 경전을 석가모니가 직접 저술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경은 동서양의 많은 언어로 수없이 번역되었고, 여전히 그 자체로 부처의 진리 말씀으로 받아들여진다.


공자의 가르침이 잘 나타나 있는, 유가의 경전 『논어』는 어떠한가? 처음에 이 문헌은 그 이름이 없었고 누가 지었는지 확실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논어』를 위서라 말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신구약新舊約 성서는 어떠한가? 구약성서를 구성하는 책은 대부분 언제, 어떻게 기록되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환단고기를 위서라 주장하는 식민사학자들의 관점으로 만일 동서양 경전과 각 분야의 고전을 재단한다면, 이 숭고한 인류문화 유산은 끝없는 의혹과 시비만 던질 뿐, 진정한 고전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동양의학의 성서인 황제내경은 황제 헌원을 가탁하여 전국시대를 거쳐 한 대에 성립되었고, 불교의 화엄경도 분리되어 있던 경전들이 수차례의 결집을 거쳐 후대에 합쳐진 것이다.
          
남북통일 18-03-08 19:33
   
하지만 현재 삼국사기의 진본은 전해 내려오고 있죠.
환단고기와 감히 비교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당연 모든 사서들은 편향적이고, 오류가 많습니다.
하지만 모두 진본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환단고기는 진본-x
그리고 사기, 삼국사기, 삼국유사, 환단고기를 비교해서 어느쪽이 오류가 더 많을까요?
               
스리랑 18-03-08 20:21
   
삼국사기는 환단고기와 감히 비교하지 못한다고요?

삼국사기가 어떤 책인가 볼까요.
가생이에 2월 3일에 올렸던 글입니다.


우리의 시원 역사를 단절시키고 파괴한 여러 손길이 있었다. 그 가운데 첫째가, 중국에 의한 역사 왜곡과 그 왜곡 내용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우리 유학자들의 존주사대尊周事大 사상’이다.


공자가 주창한 유교는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요, 그 밖의 민족은 중국에 예속된 오랑캐에 불과하다는 중화주의(中華主義)를 제창한다. 유학을 국가 통치 이념으로 삼은 고려와 조선의 존화(尊華) 사대주의자들은 이 중화주의 사관을 그대로 답습하였으니, 그들이 우리 역사에 끼친 해악은 너무나 심각하다.


고려의 유학자들은 한민족의 국통(國統) 맥이 기자조선에서 위만조선, 남삼한, 신라로 연결되는 것으로 왜곡하였다. 그에 앞장 선 인물이 고려 중기 때 김부식이다.


김부식은 묘청의 북벌운동을 진압하고 우리민족의 고유사상, 낭가사상(郎家思想)을 말살한 경력을 가진 삼국사기의 저자로 신라의 독자적인 연호사용을 사대정신에 위배된다고 비판하고 우리민족을 침략한 당나라 이세민을 우리 당태종(我唐太宗)”이라고 칭하였다.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는 철저하게 비아(非我)의 입장에서 서술한 책으로 우리 역사를 편찬할 때 발해사(渤海史)를 논하지 않았을 정도로 중국을 지극 정성 섬기며 삼국사기 서술 주체가 중국이고, 객체가 한국이다.

그의 열렬한 모화(慕華,중국의 사상을 숭상하여 섬김)정신은 망국멸족(亡國滅族, 나라와 민족을 함께 망하게 함)의 사대사관의 전통이 되어 후세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위징 등이 쓴 『수서(隋書)』에 이런 구절이 있다. “고구려(高句麗)가 교오불공(驕傲不恭)해서 제장토지(帝將討之)라.” 고구려가 교만하고, 오만하고, 공손하지 않아서 수양제가 장차 토벌을 하려고 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고구려를 아(我)로 바꿔놓고는 "아(我)가 교오불공(驕傲不恭)해서, 제장帝將, 이걸 상장토지(上將討之)라.


우리나라의 역사를 쓰면서, 우리가 교만하고 오만해서 중국의 임금이 치려고 했다… 는 식으로 쓸 수가 있을까? 참으로 황당한 내용인 것이다. 이처럼 "김부식은 비아(非我)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또 하나 예를 들면, 신라 650년 진덕여왕 4년에 당나라 고종의 ‘영휘’라는 연호를 처음 쓴 부분에 대해서도 주석을 달기를, “옛날에 법흥왕이 연호를 스스로 썼는데, 아, 편방(偏邦,중국의 변두리)의 소국으로서 왜 연호를 쓰나?


당 태종이 꾸지람을 했는데도 연호를 고치지 않다가, 650년에 고종의 연호를 갖다 쓰니, 허물을 능히 잘 고쳤다고 할 수 있도다” 이런 식이다. 이것이 국보로 보존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의 역사서에 나오는 구절들이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사정이 이러하니 중국의 입장에서 쓰여진 사대주의 책이라고 비판받아도 피해갈 수는 없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통해서 중국을 흠모하고 존중하는, 존화사대주의 사상을 정립한 것이다. 그가 지은 삼국사기는 그 이후의 모든 역사왜곡의 기본 원전이 되었다. 한국을 점령한 일본제국주의자들도 바로 이 책을 얼씨구나 하고 악용하여 소위 반도사관, 식민사관, 왜식사관을 날조해 낸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그러한 사관에 따라 학교에서 역사공부를 하고 있다.



그는 삼국사기를 저술하면서 고구려를 계승한 대진국(발해)의 역사는 완전히 지워버린 반면, 같은 시대 신라 역사는 망하는 날까지 세세히 기술하였다. 그러면서도 신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것은 사대정신에 위배된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묘청, 정지상 등이 고토 회복을 위한 발판으로 벌인 서경천도 운동을 벌였을 때, 김부식을 대표로 하는 집권층 유학자들이 이것을 권력 장악을 위한 음모라고 몰아붙였다.



유교를 국교로 신봉하는 조선은 개국 초 춘추(공자)와 자치통감 강목(주자)만 사필(史筆)로 여기고, 한민족 정통사서들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압수 소각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역사,철학,종교,문화의 중요한 자료들이 말살되었다.


주체적인 사관을 주장하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서 죽임을 당하는 최악의 상황이였다. 그래서 우리역사가 사대주의 사관에 의해서 철저히 왜곡되고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모든 역사가 왜곡이 되었다.


태종은 서운관(書雲觀)에 보관되어 있던 고유사서들을 공자의 가르침에 어긋난다하여 소각하였으며, 세조에서 성종까지 3대에 걸쳐 전국 관찰사에게 사서 수거령을 내렸다. 이렇게 우리의 정통 사서들이 소실된 것은, 오늘날 우리 역사의 올바른 인식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고 있다.


한민족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중국측 사료와 이 땅의 사대주의 사서에 크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광해군 때 청 태조 누루하치가 보낸 국서를 보면 조선의 사대 근성이 적나라하게 고발되어 있다.


“요동은 본시 조선의 국토다. 지금 명나라 사람들이 그 땅을 빼앗았는데, 너희는 명나라가 원수인 것도 모르고 도리어 신복하고 있다”고 조선을 꾸짖고 있다. 그리고 더욱 가관인 것은 조선 유학자들이 보였던 중국의 사상을 숭상하여 섬기는 모화정신(慕華精神)이다. 이것은 진실로 한국사의 뿌리를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망국멸족(亡國滅族)의 표본이다.


세종 때 최만리는 훈민정음 제정 반대 상소를 올리면서 “조종(祖宗)” 이래 지성으로 중국을 사사(師事)하고 모두가 중국 제도를 본받아 왔는데 만약 훈민정음이 중국에 전해지는 날에는 사대모화에 부끄러운 일이라“하였다.


조선의 학자들은 명(明)을 ‘본조(本朝)’,즉 ‘내 나라의 조정’이라 부르며, 우리의 역사에 대해 ”단군시대는 아득한 태고시대라 증명할 수 없고, 기자(箕子)가 봉해지고 나서야 겨우 문자를 통했으며, 삼국시대 이전은 별로 논할 만한 것이 없다“고 폄하하였다(대동야승(大東野乘) 기묘록별집(己卯錄別集)



또한 명나라 군주를 ‘우리의 황상(皇上)이라 하고, 명나라 조정을 ’천조(天朝), 또는 ‘성조(聖朝)로 불렀다(본국청개종계주본(本國請改宗系奏本) 기자께서 동쪽으로 오셔서 가르침을 베풀었으니 오랑캐가 바뀌어 중국인[夏]이 되었고 드디어 동쪽의 주(周)나라가 되었습니다['숙종실록(肅宗實錄)' 7, 9]”라고 하였다.



옛날 유학자들의 의식이 다 이렇게 되어 있다. 유가문화의 썩어빠진 역사의식으로 인해 나라가 망해 버렸다. 伏草 최인(崔仁)은 이 같은 행태를 두고 ‘조선은 한일합병으로 망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전에 한중합병으로 망하였다’라고 일갈하였다.



조상의 비문 첫 머리에 유명조선(有明朝鮮:명나라에 속한 조선)을 내세우고, 조선 백성을 명(明)의 신민(臣民)이라 하고, 한문은 진서(眞書)로 존중하면서 한글은 언서(諺書)로 무시하였으니, 분명히 한중합병이라는 것이다. 고려와 조선 역사를 돌이켜보면, 참으로 혼 빠진 민족이 아니고 무엇인가.



단재 신채호는 외래종교, 외래사상에 물들어 역사와 문화를 다 잃어버린 가련한 한민족에 대해 이렇게 통탄하였다.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利害) 밖에서 진리를 찾으려함으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
                    
남북통일 18-03-08 20:42
   
누가 김부식이 사대주의자라는 걸 모른댑니까?
환단고기는 출처가 명확하지 않다고요.
삼국사기는 그 출처가 명확하고요.
그리고 전 세계에서 인정해주는 정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묻는 말에 제대로 답해보세요.
출처가 분명하지 못한 환단고기, 전 세계적으로도 정사로 인정받는 삼국사기
뭐가 더 신뢰성이 있습니까?
                         
스리랑 18-03-08 21:13
   
환단고기 책을 제대로 읽어보고 말씀하시지요??
환단고기는 출처가 분명합니다. 

당신은 삼국사기를 신뢰하지만 나는 환단고기를 더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스리랑 18-03-08 21:18
   
가생이에 2월 7일 날 올렸던 글입니다.


환단고기 책은 일본인이나 중국인이 쓴 책이 아니라 독립군 홍범도 장군과 오동진장군 두 사람의 자금지원으로 펴낸 책이다.

그런데 왜 그들은 환단고기 책을 증오하다 못해 오히려 저주하는 것일까?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중국과 일제가 저지른 역사 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사서이다. 그런데도 일제 식민사학 추종자들이 그들의 영달과 직결된 자신들의 아성을 방어하기 위해 뿌려 놓은 위서 바이러스에 많은 국민들이 감염이 되어 있다.


위서론자들의 본질적인 이유는 식민사학이 붕괴되어 자신들의 기득권이 상실 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환단고기』를 전해준 분들이 대부분 절식(絶食)으로, 또 일본 제국주의 침략주의자들에게 잡혀서 사지가 잘리고 그렇게 무참하게 죽었다. 이『환단고기』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병도선생 이후 지금 강단 사학은 식민사학의 큰 틀은 전혀 극복이 안돼 있다
 
 
운초 계연수선생은 1911년에 만주 관전현에서 스승 해학 이기(李沂,1848~1909)의 문중에서 전해 오던 『태백일사』(8권으로 구성)와 다른 4권의 정통 사서를 한 권으로 묶어 간행하였는데, 1920년 만주 관전현, 압록강 부근의 조선인의 사설학교 배달의숙(倍達義塾)에 일본 헌병대가 들이닥친다.




이 학교는 독립운동가인 석주 이상룡 선생과 송암 오동진 장군이 출연, 설립한 뒤 일대 독립군 및 그 자녀들에게 조선의 역사와 혼을 가르쳐오던 터였다.


일본 헌병들은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계연수선생을 체포하고 계연수선생과 여러 교사들이 수집하고 연구한 책과 저술, 자료 등 3천여 점을 강탈해 헌병대로 실어갔다고 한다. “헌병대가 강탈한 온갖 자료들 가운데는 당연히『환단고기』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일본 헌병들은 운초 계연수선생이 『환단고기』를 펴낸 바로 그 인물인 것을 알고는 온갖 고문을 가하고는 팔다리를 다 잘라서 압록강에 내다버렸다. 그렇게 토막토막 잘려진 선생의 시신을 동포들이 수습하던 장면을 직접 목격한 분이 그의 제자인 한암당 이유립 선생이다.
                         
남북통일 18-03-08 21:21
   
그러면 환단고기 진본을 제시하셔야죠.
그리고 계연수 선생에 대한 링크 첨부 부탁드립니다
                         
스리랑 18-03-08 21:21
   
이유립 선생은 평안북도 삭주의 유지이자 독립운동가인 해학 이기의 제자 이관집의 아들이고 열세 살부터 배달의숙에서 계연수선생에게서 배웠다. 계연수선생과 이관집 선생은 일찍부터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환단고기桓檀古記”』를 가지고 북한에서 내려온 이유립 선생이 대전에서 한 20년을 살면서 60년대 전후로 해서 “커발환“이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그분이 남한에 내려와서 고등학생과 대학생, 또 뜻이 있는 사람들에게『환단고기』를 대전 은행동에서 우리의 역사 원본을 가르쳤다. 그 가운데 양종현이라는 제자가 지금 청주에 살고 있다.


그런데 그 분의 증언을 작년과 재작년에 한 열다섯 시간 정도 직접 들었는데, 양종현씨는 60년대에 다른 사람들하고 이유립 선생님 면전에서 신해년 1911년에 나왔던『환단고기』의 초간본을 가지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박창암 장군이 쓴 자유지에 이유립 선생이 60년대에 기고를 하기 시작할 때는 환단휘기로 책을 소개 했었다‘라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 양종현씨는『환단고기』로 쓰여져 있었던 초간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증언을 하고 있다.



운초 계연수 선생이 우리의 시원역사를 선언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였기 때문에 일제에 잡혀서 죽도록 맞고 사지가 잘려서 압록강에 버려졌는데, 그 시신이 건져질 때 흐느껴 울던 열다섯 살 소년이 바로 한암당 이유립이다. 이유립 선생이 그 명을 아주 무섭게 가슴속에 새겼을 것이다.



예로부터 민간에 비장되어 온, 안함로의『 삼성기 상』, 원동중의『 삼성기 하』,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 범장의『 북부여기』, 일십당 이맥의『 태백일사』, 이 다섯 종의 책을 한 권으로 엮은 책이『환단고기桓檀古記』다.


신라 고승高僧 안함로(安含老,579~640)에서 조선조 이맥(李陌,1455~1528)에 이르기까지 거의 천 년 세월에 걸쳐 다섯 사람이 저술한 사서가 하나의 책으로 묶여진 것이다. 이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글들을 편집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삼성기(三聖紀)라는 책은 세조실록에도 그 책 이름이 나온다. 민간에 이미 알려져 있었다는 얘기다.



신라, 백제 전후부터 내려오던 고귀한 우리의 역사 기록을 거반 망라해서 묶어 놓은 책이다. 신라 때부터 마지막 왕조 근세조선 때까지 당대의 최고 지성인 다섯 분이 천년에 걸쳐서 기록한 것이다.


“예로부터 전해오던 한민족의 고유사서들 대부분은 전란이 빈번하여 사서들이 소실된 경우가 많았고 외적에게 탈취되어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궁궐과 많은 절, 건물들이 불에 타면서 그곳에 있던 서적들도 소실되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유학에 물든 조선 조정은 우리 고유 사서를 민간으로부터 수거하여 궁궐에 비장하였다가 전란이나 화재로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환단고기』에는 『신지비사神誌秘詞』, 『진역유기震域留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조대기朝代記』, 『고기古記』, 『밀기密記』, 『대변경大辯經』, 『삼한비기三韓秘記』,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고려팔관 잡기高麗八觀雜記』 등 현재 전해지지 않는 고유 사서의 이름이 나온다. 이렇게 한민족사의 참 모습을 확인시켜 줄 사서들이 거의 다 사라져버린 지금, 『환단고기』와 『단기고사檀奇古史』, 『규원사화揆園史話』,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 등 몇 종의 책들이 겨우 전해지고 있다.



『단기고사』는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대진국을 세운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大野勃이 발해문자로 쓴(729년) 책이다. 전수 과정의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1959년 국한문으로 번역되었지만, 6·25 사변 때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단기고사』는 구전되어온 자료를 토대로 복원된 것이다. 『규원사화』는 그 서문에 의하면, 북애노인北崖老人이란 인물이 숙종 2년(1675년)에 지었다. 총 다섯 부분으로 나눠져 있으며, 환인, 환웅, 단군의 삼성조시대를 모두 다루고 있다.


『제왕연대력』은 신라시대 최치원이 지은(890년경)대표적 저술 중의 하나로 신라 역대 왕력이다. 원본은 일제 때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재 홍종국洪種國이 필사한(1929년) 필사본만 전한다. 고조선의 1세, 2세 단군에 대한 서술이 나온다.



『환단고기』를 조작했다고 하는 위서론을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를 하는데 첫째는 1911년에 나왔던『환단고기』의초간본이 없어졌다는 얘기를 하고 있지만, 일본이 환국을 뿌리 뽑아서 우리민족의 환국과 배달과 단군조선의 역사를 말살시켜버린 것을 보면『환단고기』의 초간본을 그들이 분명히 본 것이다. 신해년 1911년은 일제에 의해 사서 수거령이 내려진 해였다.



후대 사람들한테 한민족사의 뿌리역사와 혼이 담긴 『환단고기』가 전해져야 되는데, 자칫 잘못하면 일제에 의해서 빼앗길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계연수 선생은 제자 이유립에게 1980년에 공개하라고 했던 것이다. 실제로 이유립 선생이 죽기 직전 책이 나왔다.


1980년도 직전까지는 이승만 정권부터 박정희 정권의 군부통치 유신체제 시절로 표현의 자유가 금지되던 시기였다. 때문에 80년 서울의 봄 이후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시대에 그동안 음지에서 숨어있던 민중서적과 금서들이 봇물터지듯 나왔다. 결과적으로 계연수 선생은 적절한 시기에 환단고기를 세상에 알리라고 하는 유언을 남겼던 것이다.



행촌 이암(杏村 李灸,1297~1364)선생의 후손 가운데서 현손인 고려 중종( 中宗) 15년(1520년) 이맥李陌(1455~1528)선생이 찬수관(撰修官)이 되면서 자기 윗대 할아버지로부터 전수내려온 단군세기(檀君世紀)라든지, 조선 왕조에서 살아남았었던 우리의 역사서를 집대성 해서 여덟권의 『태백일사太白逸史』書를 냈는데, 그 첫 번째 책이 바로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다.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를 읽어봐야 이 동북아 역사의, 역사 정의가 바로 잡힐 수 있는 것이다.
                         
남북통일 18-03-08 21:25
   
님이 제시한 증거는 이유립의 제자가 증언한 내용입니다.
객관적인 자료를 제시하셔야죠.
이유립이 친일인지 독립운동가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환단고기는 그 진본이 밝혀질때까지는 보류를 하는게 사료를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남북통일 18-03-08 21:28
   
님은 제 요지를 제대로 이해 못한 것 같군요.
환단고기를 무조건 부정하는건 아닙니다.
다만 진본이 규원사화처럼 밝혀지면 그 때 연구가치가 생기는 겁니다.
그게 사료를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그리고 환단고기는 천문기록이나 그 외 맞는 부분이 부분부분 있습니다. 다 틀렸다는게
아니죠.
하지만 환단고기 내용의 핵심인 환국, 신시배달국의 존재는 상당히 미약한 자료입니다.
교차검증 대상이 규원사화이고, 그 계보 역시 규원사화랑 다르죠.
일단 환단고기는 보류해두고, 규원사화는 연구해 볼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스리랑 18-03-08 21:43
   
위에 댓글들을 자세히 보시고, 그동안 1번~ 7번까지의 글 제목 "환단고기에서 밝혀주는 역사"라는 내용을 보시면 남북통일께서도 생각이 바뀌실 겁니다.
6시내고환 18-03-08 23:14
   
“요동은 본시 조선의 국토다. 지금 명나라 사람들이 그 땅을 빼앗았는데, 너희는 명나라가 원수인 것도 모르고 도리어 신복하고 있다”고 조선을 꾸짖고 있다. 그리고 더욱 가관인 것은 조선 유학자들이 보였던 중국의 사상을 숭상하여 섬기는 모화정신(慕華精神)이다. 이것은 진실로 한국사의 뿌리를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망국멸족(亡國滅族)의 표본이다.
누르하치가 다 존경스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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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다문화] 아메리카 원주민은 중국인의 후예이다 ㅋㅋㅋㅋ (11) 고이왕 09-17 2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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