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됐든 결국은
서기 44년 ~ ? 에 지금의 서북한 청천강 이남 ~ 까지가 한나라 땅이었군요
1. 낙랑국 세력이 고구려로부터 독립하고자 자청하여 한나라에 귀속을 하였고
2. 비록 낙랑국의 선택이 자립자존을 위한 방편적 선택이었다 할지라도 고구려 본기에 '살수 이남이 한나라 차지가 되었다'라고 돼 있는 것에 보듯이 고구려는 그곳을 한나라 땅이 됐다고 인식을 하고 있고
3. 그러나 대무신왕 정벌 이후 낙랑유민이 신라로 망명했다1)는 것과 맥국2)이 등장하는 것, 화려ㆍ불내3)가 등장하는 것, 신라를 괴롭히는 존재가 낙랑ㆍ말갈에서 백제ㆍ말갈로 교체된 것4), 그리고 그밖에는 이후로 낙랑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진 것
4. 그리고 백제사에서는 이보다 36년 일찍 낙랑이 사라지고1) 245년 후에 낙랑군과 대방국 (군국)이 등장하는 건2) 에서 관찰되는 바
5. 기존의 낙랑국이 고구려 정벌을 전후하여 그 위세가 급격히 약화되었다는 것을 추측케 한다
6. 이후의 한나라 속방으로서의 낙랑국은 한나라와 한반도 국가 및 제 집단을 이어주는 경제ㆍ문화의 중개자 역할을 하였다 보여진다
7. 요동의 우리 조상들은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하여 이미현도군을 한 요동군 지역으로 몰아붙여 기존의 현도군 지역을 차지 했으며 요심의 동남, 동, 동북 지역을 회복하여 이러한 태세에서 고구려가 건국되었고 또 백제가 뒤를 이어 요동반도 태자하 이남에 자리를 잡았으며
8. 고구려는 서기 1세기부터 지금의 요하 동서의 땅을 두고 한나라, 공손씨, 위, 모용선비 등과 경쟁하였으며
9. 태조대왕의 요서 10성에서 보이듯 빼앗고 뺏기는 생동활활한 각축이 벌어졌으며
10. 후한서, 위서, 태강, 진서 지리지에서 나타나 듯이 중국계 왕조의 현 요서, 요동지역의 군현은 위축, 교치되어 3세기 중후반에 이르면 만리장성 안팎으로 물러간다
11. 246 년 고이왕 대에 245년의 침묵을 깨고 백제의 동쪽에 등장하는 위ㆍ진의 호동이교위 소속의 반독립 세력인 군국으로서의 낙랑, 대방 등은 고구려가 양평일대를 제외한 요동의 대부분을 차지한 상황에서 기존의 위치가 아니라 요서지역으로 교치, 축소된 것으로서의 낙랑, 대방이며 요서의 주인이 공손씨, 위, 진, 모용씨 등으로 엎치락뒤치락 하는 근 100 년 사이 어느 시간의 지점에 힘의 대립이 현 요하에 집중된 상황에서 백제가 현 난하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에 거점을 마련했다 추정이 가능하나
12. 어떤 숨은그림으로 백제가 3세기 요서의 판도에 끼어있는지 찾아야 할 것이다
13. 또 1세기~3세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현서북한 지역의 낙랑국은 중국계 정권에의 예속력을 상실하고 문화ㆍ경제의 터미널 역할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고구려에 동화되었다 판단된다
14. 또 요서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족계 이주자들을 다수 받아들였으리라 추정 가능하다
15. 3세기 관구검의 침입은 고구려가 서안평을 공격하여 야기된 것인데 서안평은 현 요하 동안에 있다가 서안으로 교치되었다
16. 백제와 고구려의 군사적 충돌의 그 처음은 4세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