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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월 28일 (목)

[한국사] 서안평(西安平)의 위치

감방친구 조회 : 3,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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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아래 글에 붙이는 글입니다
담배가 떨어져서 담배를 사오고 또 밥을 먹고 이어서 씁니다

아래 글에서 주류 사학계의 평양 고정론의 모순과 '평양동황성' 해석에 있어서의 사실 편취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서안평 역시 이 문제에 직결돼 있습니다
ㅡ 평양의 위치
ㅡ 주류 사학의 사실 편취

주류 사학, 즉 이른 바 학계 통설에서는 서안평을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에서 바라 본 압록강 건너 편으로 비정하고 있습니다

미천왕이 서안평을 빼앗아 서북한의 낙랑군과의 교통로를 차단하고 이어 낙랑군을 멸하여 차지했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평안북도 의주 압록강 맞은편. 전한대(前漢代)에서 진대(晉代)까지 요동군(遼東郡)에 소속되어 있던 현(縣)으로, 왕망(王莽) 때 일시 북안평(北安平)으로 그 이름이 바뀌기도 하였다. 이곳은 요동지역과 평양방면을 연결하는 교통로상의 요지였다.]

한민족문화대백과 서안평
http://m.terms.naver.com/entry.nhn?docId=574310&cid=46620&categoryId=46620

http://m.terms.naver.com/entry.nhn?docId=574311&cid=46620&categoryId=46620

그런데 앞의 글에서 미천왕은 낙랑군을 빼앗은 게 아니라 약탈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주류 사학계에서 서안평서안평현을 달리 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서안평서안평현을 가리킨다고 보고 있습니다

주류 사학에서는 서안평을 두고 요동지역과 평양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요지라 설명하는데 서북한에 낙랑군이 있었다면 낙랑군과 평양이 동시에 한 자리에 있게 되는 일이 벌어집니다(동천왕, 247 년)

그리고 고구려의 서안평 공략은 미천왕 대에 국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고구려 초부터 계속된 요동ㆍ현도ㆍ낙랑군의 공략과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다음의 기록들을 보십시오

○ 태조대왕 94 년 (서기 146), 가을 8월, 임금이 장수를 보내어 한나라 요동의 서쪽 안평현(安平縣)을 습격하여 대방(帶方)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노략질하였다
秋八月 王遣將 襲漢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 동천왕 16년(서기 242), 임금이 장수를 보내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하여 깨뜨렸다.
十六年 王遣將 襲破遼東西安平

○ 미천왕 12년(서기 311)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요동의 서안평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十二年 秋八月 遣將襲取遼東西安平

ㅡ 遼東西安平縣
ㅡ 遼東西安平
ㅡ 遼東西安平

태조대왕 시기만 서안평현으로 돼 있을뿐 내용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주류 사학에서는 태조대왕 시기만 '요동의 서쪽 안평현'으로 해석하고 나머지는 '요동의 서안평(현)'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류 사학의 이러한 해석은 서안평(현)을 압록강 하구 북안으로 비정하는 것과 함께 자승자박적인 심각한 모순에 빠집니다

일단 한나라의 요동 서쪽 안평현이 어디인가 보실까요?

한서 지리지를 보면 안평현은 탁군에 속한 현입니다
ㅡ 안평현(安平縣), 도위(都尉)가 다스린다. 왕망이 말하기를 광망정(廣望亭)이라 하였다.

탁군은 오늘의 하북성 지역입니다
태조대왕 시기의 요서 10 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주류 사학계가 오히려 요서보다 더 서쪽에 있는 안평현을 약탈했다고 말하는 형국인 것입니다

태조대왕 시기의  遼東西安平縣은 요동의 서쪽 안평현이라 해석하면 안 됩니다 낙랑태수와 대방태수가 거론되는 것으로 보아 요동군 서안평현으로 해석해야 옳습니다

즉  태조대왕, 동천왕, 미천왕은 모두 요동군의 서안평현을 습격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서안평현은 어디일까요?
주류 사학에서는 압록강 하구의 북안으로 비정하고 있다는 것은 위에서 거듭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중국 사서의 기록은 다릅니다

○ 요사 지리지
ㅡ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 본래 한(漢) 요동군(遼東郡) 서안평(西安平)의 땅이다.

요나라의 동경이 오늘의 요녕성 요양시인 것은 다들 아실 겁니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요나라의 다른 서울은 이보다 동쪽에 위치할 수 없겠죠?

요나라 상경임황부는 오늘날의 내몽골자치구 통요 지역으로 비정됩니다 오늘날 요서지역의 북쪽이죠

요나라는 5 경을 두었는데
상경임황부 ㅡ 내몽골자치구 통요
동경요양부 ㅡ 요녕성 요양시
중경대정부 ㅡ 하북성 평천(平泉)
남경석진부 ㅡ 북경시
서경대동부 ㅡ 산서성 대동시
로 각각 비정됩니다

3 세기 당시의 진서 지리지의 기록을 보더라도 결코 서안평현이 압록강 북안에 위치할 수 없습니다
후한 말기부터 한의 동북방 군현이 한의 요서 지역과 함께 서쪽으로 축소 되어 이미 진서 지리지와 태강 지리지가 쓰여진, 혹은 기록한 3 세기 말 당시에는 낙랑군이 지금의 난하 안쪽까지 교치된 사실을 이미 지난 글에서 다룬 바 있습니다

○ 진서 지리지 평주 요동국(遼東國), 진(秦)에서 세워 군(郡)으로 하였다. 한(漢) 광무(光武)는 요동(遼東) 등을 청주(青州)에 속하게 하였고 후에 되돌려 유주(幽州)로 하였다. 관할하는 현은 8개이고 가구수는 5400이다.
양평현(襄平縣), 동이교위(東夷校尉)가 있는 곳이다.
문현(汶縣)
거취현(居就縣)
낙취현(樂就縣)
안시현(安市縣)
서안평현(西安平縣)
신창현(新昌縣)
역성현(力城縣)


요동군(遼東郡)의 감소 상을 보십시오. 인구와 가구수가줄었다는 것은 기존의 인구와 영역을 상실했음을 의미학니다. 특히 한나라 시대와 3 세기 전후 진나라 시대의 감소폭을 보십시오 현은 18에서 8로, 가구수는 1/10 로 줄었습니다. 이러한 양상은 요서군, 현도군, 낙랑군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나라(한서 지리지)
ㅡ 가구수는 55,972이고 인구수는 272,539명이다. 현은 18개이다.

후한(후한서 군국지)
ㅡ 성은 11개이고 가구수는 64,158이며 인구수는 81,714명이다. # 이 기록은 가구수와 인구수 대비가 맞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군현의 상황에 비추어 인구가 한나라에 비해 절반 가량 줄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진나라(진서 지리지)
ㅡ 관할하는 현은 8개이고 가구수는 5,400이다.

북위(위서 지형지)
ㅡ 현은 2개이고 가구수는 131이며 인구수는 855명이다

서안평현이 요나라 상경임황부 자리에 있었다는 요사 지리지 기록을 취하지 않더라도 서안평현이 압록강 북안이 될 수 없으며 3 세기 당시에는 한나라의 본래의 위치에서 지금의 하북성 방향으로 옮겨간 것을 충분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감방친구 17-12-04 04:44
고구려 개국 초부터 4 세기까지 계속된 고구려의 소위 한군현 공략은
기존의 한군현 자리를 고구려가 차지하고
또 중국계 왕조들은 그 군현을 서쪽으로 계속 교치해 가는 과정이였으며
특히 3~4 세기는 새롭게 강자로 등장한 선비족과 고구려가 지금의 요서지역에 대한 패권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한 역사입니다

결국 이 대결은 광개토대왕ㆍ장수왕대에 이르러 고구려의 완전 승리로 결판이 납니다
감방친구 17-12-04 05:21
후한 말부터 심화된 중국계 왕조의 요서지역에 대한 지배력 약화와 상실은

또한
양서ㆍ송서 등에 기록된 백제 관련 '약유요서'에 실마리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감방친구 17-12-04 06:31
앞서서 태강 지리지는 명칭만 태강이 붙었을 뿐 진서 지리지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고찰한 바 있습니다

이를 만약 시기 기준을 태강 지리지의 3 세기 말에 맞출 경우와 삼국사기 미천왕 기록에 맞출 경우에 고구려의 활동 영역은 달라집니다

전자에 맞출 경우 고구려는 미천왕 대인 4세기 초에 하북성까지 공략했다고 볼 수 있으며
후자에 맞출 경우 고구려 미천왕 시기의 활동에 따라 진나라의 영토가 하북성까지 축소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후자를 따를 경우
진서 지리지의 내용은 4 세기 초 미천왕 대의 고구려의 영토확장의 반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미천왕

3년(서기 302) 가을 9월, 임금이 병사 3만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공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三年 秋九月 王率兵三萬 侵玄菟郡 虜獲八千人 移之平壤
12년(서기 311)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요동의 서안평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十二年 秋八月 遣將襲取遼東西安平
14년(서기 313) 겨울 10월, 낙랑군을 침범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十四年 冬十月 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
15년(서기 314) 봄 정월, 왕자 사유(斯由)를 세워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 남쪽으로 대방군(帶方郡)을 침공하였다.
十五年 春正月 立王子斯由爲太子 秋九月 南侵帶方郡
16년(서기 315) 봄 2월, 현도성을 침공하여 깨뜨렸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가을 8월, 혜성이 동북쪽에 나타났다.
十六年 春二月 攻破玄菟城 殺獲甚衆 秋八月 星孛于東北
감방친구 17-12-04 06:45
진나라는 고구려의 침략으로 영토를 일부 상실했고 뒤 이어 모용선비의 활동으로 지금의 요서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합니다

미천왕이 314 년에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공한 것은
312 년 낙랑군을 멸망시킴에 따른 진출이 아닙니다
312 년 기사는 낙랑군을 멸망시켰다고 적혀 있지 않습니다

314 년 남쪽으로 대방 침공은
개국 초부터 계속된
요동과 현도에 대한 공략으로 기존의 요동ㆍ현도 땅을 고구려가 상당수 차지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이에 따라 요동과 현도군이 서쪽으로 졸아드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구려는 자연스럽게 기존의 낙랑군이었던 대방군의 위에 영토를 두게 된 것입니다
감방친구 17-12-04 06:49
우리 역사의 여러 중요 쟁점에 있어서
주류 학계에 의한 기존의 통설이 실상 1차 사료를 제대로 고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직접 확인하면서
주류 학계와 그들의 주장에 대한 불신감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감방친구 17-12-04 07:00
주류 사학계는 위서 오환선비동이전을 삼국사기보다 더 신뢰하면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불신하는 태도를 취하여 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삼국사기 기록에서 우리에게 불리한 기록만을 취사선택하는 행태를 보여왔다

삼국사기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13 세기 고려의 사서 편찬자들이 기존의 우리 역사서뿐만 아니라 기존의 역대 중국사서를 바탕으로 교차검증하여 재구성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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