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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1-06 16:26
[한국사] 금(金)은 어째서 고려혈통을 강조했을까요??
 글쓴이 : 설설설설설
조회 : 1,919  

아.. 일단 저는 금사(金史)가 한국사에 편입되는것에는 부정적입니다.

단순히 그들의 통치자 혈통이 고려인이라고해서 한국사로 편입된다는건 정말 말도 안된다고 보거든요.

그런데 이들의 출자에 대해서 어떤경로를 통해 최초언급이되었고 예내들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이런 언사를했을까?라는 단순한 궁금증이 생겨서 좀 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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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 中
“옛날 우리 태사()인 영가()가 일찍이, 우리 조상도 대국인 고려 출신이니 자손 대대까지 귀부하는 것이 도리에 맞는 일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현재 태사를 맡고 있는 오아속()도 역시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삼고 있습니다.(중략) " 

신증동국여지승람 황해도中
《금사(金史)》를 보면, “금 나라 시조의 이름은 함보(函普)인데 처음 고려에서 올 때 나이 벌써 60여 세였다. 형 아고내(阿古迺)는 불교를 좋아하여 고려에 머물고 따르려 하지 않으니 아우 보활리(保活里)와 함께 왔다.(중략) "

해동역사 지리고 中
《금사》 세기(世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금(金)나라 시조(始祖) 함보(函普)가 처음 고려에서 올 적에 동생인 보활리(保活里)와 함께 왔다. 시조는 완안부(完顔部) 복간수(僕幹水)의 물가에서 살았고, 보활리는 야라(耶懶)에서 살았다.

해동역사 인물고 中
금(金)나라 시조(始祖) 함보(函普) 
○ 금나라의 시조 함보는 고려 사람이다. 처음에 고려에서 왔을 적에 나이가 이미 60여 세였다. 그의 형인 아고내(阿古迺)는 부처를 좋아하여 고려에 머물러 있으면서 따라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후세의 자손들 중에 반드시 서로 모여서 살게 할 자가 있을 것이다. 나는 갈 수가 없다.” 하였다.(중략)

고려사절요 1109년 6월 기사中
1109년 6월기사
요불(여진사신) 등이 상주하여 아뢰기를, “옛날에 우리 태사 영가(盈歌)가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조종은 대국(고려)에서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기까지 귀부해야 한다 하였고, 지금 태사 오아속이 역시 대국을 부모의 나라로 알았습니다. 

고려사절요 1115년 1월 기사中
 혹자는 말하기를, “옛날 우리나라 평주(平州 지금 황해도의 평산)의 중 금준(今俊)이 도망하여 여진으로 들어가서 아지고촌(阿之古村)에 살았는데, 이가 금나라의 시조라 한다."고 하며, 혹자는 말하기를, “평주의 중 금행(今幸)의 아들 극수(克守)가 처음으로 여진에 들어가 아지고촌에 살면서 여진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는데, 고을태사(古乙太師)라고 하며 고을(古乙)이 활라태사(活羅太師)를 낳고 활라는 아들이 많았다. 장자를 핵리발(劾里鉢), 막내아들을 영가(盈歌)라 하였는데, 영가가 제일 영웅호걸스러워 여러 사람의 마음을 얻었다. 영가가 죽으니 핵리발의 장자 오아속(烏雅束)이 지위를 계승하고 오아속이 죽으니 아우 아골타가 섰다."고 한다.

금사(金使) 시조(始祖) 함보(函普) 中

금시조의 이름은 함보이고 처음 고려에서 나올 때 이미 60여 세였다.

함보의 형 아고내는 불교를 좋아하여 고려에 머물며 고려 밖으로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고 말하길

<후세의 자손이 반드시 서로 모일 것이니, 나는 가지 않겠다> 그러자 함보는 동생 보활리와 함께 고려를 떠났다. 시조는 완안부 복간수의 물가에 거주하였고, 보활리는 야라에 거주하였다.


금사(金使) 호십문(胡十門) 열전中

호십문이 고영창을 따르길 원치 않아 그 일족을 불러 모의하여 말하길 

<우리의 먼 조상 3형제는 모두 고려에서 태어났다. 지금 대성황제(아골타)의 조상은 여진으로 들어갔고, 우리의 조상은 고려에 남았다가 뒤에 고려에서부터 요나라에 귀부하였다. 우리와 더불어 황제는 모두 삼조(三祖/아고내, 함보, 보활리)의 후예다. 황제가 천명을 받아 대위에 즉위하여 요를 정벌하고 패망하게 하였는데, 내가 어찌 고영창의 신하가 될 수 있겠는가 >

시조(함보)의 형 아고내는 고려에 남았는데 호십문이 이와 같이 스스로 말한 것은 대개 호십문이 아고내의 후손임을 스스로 일컬은 것이었다.


==========


함보가 고려출신이라는건 당시 완안부 여진족들에게서 처음으로 나온 언급인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진족들은 문자를 이용해서 기록을할줄 모르기때문에 훗날 금(金)을 건국하고나서야 자기들의 첫 기록을 남겼지요.


그리고 금시조 함보의 후손 금태조아골타는 시조함보로부터 4대정도 걸쳐서 나온 인물이구요.

문자와예악등 기초적인 문화산업 조차 못하는 여진족들인데 어떻게 몇대를 걸쳐서도 자기들의 조상이 "고려" 출신이라는걸 기억할수 있었는지 궁금하네요.


분명히 몇대가 거쳤는데 불구하고 자기들이 남긴 기록에도 " 우리의 옛 조상은 고려출신인데.. " 라는 구절이 꽤 많지요. 뭐랄까.. 자기들의 고려혈통을 꽤 강조하는듯한 느낌이 많이듭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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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카라스 17-11-06 16:37
   
고조선은 로마와 같습니다.
로마의 갈리아가 프랑스가 되고, 스파니아는 스페인이, 브리타니아는 영국이 되었지요.
전 유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로마처럼
고조선 역시 몽고인을 낳고 말갈인을 낳으며, 계승국 또한 끊임없이 요와 거란 금나라 등 북방의 패국을 낳았지요.
이런 한반도가 어떻게 노예와 식민의 역사입니까?
     
햄돌 17-11-06 17:46
   
우리가 노예와 식민의 역사면

중화 한족이랑 열도는 어떻게 되는거임?
          
아스카라스 17-11-06 17:53
   
가축이죠.
          
설설설설설 17-11-06 18:02
   
열도는 진심으로 가축의 역사죠 ㅋㅋㅋㅋ 자칭 반만년 삼류국가인데 ㅋㅋ

한국보다 역사 천년 이상짧어..

그마저도 야요이시대 한반도도래인들의 대량이주로 역사 시작.

고대시대는 뭐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고려시대에는 고려-일본간의 진봉 무역 성립으로 고려에게 조공해

조선시대에는 불교문화구걸하고 임진왜란에서 도자기나 쌔벼가고 조선통신사 요구하고 ㅋㅋㅋㅋㅋㅋㅋ
               
아스카라스 17-11-06 18:25
   
조선 때 일본사신이 팔만대장경 달라고 궁궐 앞에 무릎꿇고 1인시위하다 가기도 했죠 ㅋㅋㅋㅋㅋ
세종대왕께선 또 "어차피 필요없잖아 이제"하고 선뜻 줄려다가 신하들이 극구반대해서 "끙..알앗어"하셨고..
                    
설설설설설 17-11-06 18:31
   
완전 열도인들의 모순이죠. 조선왕조를 비하하면서도 정작 조선에서 뽑아먹을수 있는건 많이
 뽑아먹었죠 ㅋㅋㅋㅋ 뭐 애초에 왜구들 역사자체가 해적질의 역사이니 뭐
                         
아스카라스 17-11-06 19:05
   
후지고 외진 해적소굴이다가 동북아에서 처음으로 기를 펴고 으르렁대니까
그렇게 우러러보고 동경하던 한국인을 미개하다고 까고 있습니다...
요나라가 고려한테 굽신대다 강해지니까 조공요구할 때도 이랬을까요
     
설설설설설 17-11-06 18:04
   
고조선이 몽고인을 낳고 말갈인을 낳았다는건 이건 뭐 ;;;

어쨋거나 여진,거란등 북방이민족에게 끼친 영향은 꽤 있다고 봅니다.

특히 여진은 어마어마 하구요.
          
아스카라스 17-11-06 18:23
   
동호가 오환선비가 되고 오환선비가 몽골인이 되었다던데요..
말갈은 숙신이고 숙신은 읍루며 또 고조선의 영향권에 있었구요
읍루는 그냥 같이 있던 민족이네요 따지고보면..
               
감방친구 17-11-06 18:30
   
동호ㅡ 오환, 선비, 거란, 실위

말갈ㅡ고구려에 복속돼 고구려인이 된, 고구려 초기부터 5세기까지  정복 흡수된 만주ㆍ한반도 북의 소국, 종족들입니다

숙신ㅡ>읍루ㅡ>물길ㅡ>흑수말갈ㅡ>흑수여진

말갈은 고구려인, 흑수말갈은 피지배상태로 언어와 풍속이 여타 말갈과 다름(당연히 고구려와도)

흑수말갈은 가장 야만적이고 원시적인 부족

발해 멸망 후 발해지방민들(말갈)과 흑수여진이 남하하여 연해주부터 남만주, 한반도북부에서 세력이 이리저리 규합되며 여진족이 형성
                    
아스카라스 17-11-06 19:05
   
오환선비가 몽골이 되었단 얘기를 분명 봣는데.. 그래도 깔끔한 정리 감사합니다
흑수말갈은 이름값을 했네요
감방친구 17-11-06 16:40
   
저도 고민하는 문제인데요

저 시기 기록의 대미는
금나라 황제가 고려황제에게 보낸 국서 내용이죠

형인 금황제가 아우인 고려황제에게 보낸다로 서두를 연 다음에 고려는 부모의 나라라는 문구가 나오죠

편지 의도는 나한테 조공하고 종주국으로 모셔라, 신하국이 돼라임에도 저런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죠

저렇게 많이 발견되는 기록으로 볼 때 실제 저 시대 여진족들은 스스로 그렇게 여기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동여진, 서여진 할 것 없이 고려의 변경을 드나들며 살고 있었고
또 고려사람, 발해사람들과 섞여 살았구요

원체 흑수말갈은 인구가 소수였고 금을 세우기 전 만주의 부족을 통합하는 소용돌이에서 발해ㆍ고려인들이 많이 여진족화 되었으리라 추정이 가능하고

나중에 요동의 발해인들을 접수하며 발해여진본동일가를 프로파간다로 내세울 적에도 근거가 없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고 또 그 프로파간다가 먹혀 들어서 요나라 멸망 시키고 금을 굳건히 세우누데 발해인들이 큰 기여를 하지요

다수의 일부가 훗날 사민되어 팽처리를 당했다지만 금의 중심세력으로서 끝까지 간 발해인들이 있던 것도 사실이구요
     
아스카라스 17-11-06 16:48
   
신기하네요. 나는 형이고 너는 아우다 조공해라, 와 같은 요지이면서 서두로는 너네가 부모의 나라다 라고 시작을 하니
동족의식을 가지며 또한 고려를 민족의 중추이며 뿌리이자 주체로 보는 것을 당연시한다니
뿌리가 같음을 알되 통보할건 통보해야겠다 하는 얘긴가요?
아마르칸 17-11-06 16:47
   
완안아골타 본인가문은 신라계 김씨왕가가 핏줄이고
외가는 발해출신이고 하니깐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정욱 17-11-06 16:53
   
왜 금사가 한국역사가 아니닙까? 알렉산더 대왕 후손이 만든 이집트.시리아.이락.이란.졸단 모두 그리스.메사도니아 역사로 편입되어 있음. 오직 신민사학만 거부하고 있음.
     
고이왕 17-11-07 06:41
   
그럼 기자조선은 중국역사입니까? 그리고 궤변이네요 무슨 프롤토레리아 왕조 이집트랑 셀레우스키 왕조가 그리스 역사에 포함되어 있습니까?  재외 한국인 이면서 서양사를 읽어보시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촐라롱콘 17-11-06 16:56
   
만약 완안부 시조가 고려인 주장이 사실이라고 치더라도....

완안부의 시조인 함보가 혹은 신라출신, 혹은 고려출신이라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후삼국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10세기 초기에 북만주 완안부로 이주한 듯 합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정통성 확보 차원에서 조상이 신라 혹은 고려출신임을 강조하고 
족보를 위조했을 개연성이 더욱 클 것입니다.
여진... 그 중에서도 야성이 가장 살아있는 북만주 생여진 땅 깡촌출신인...
다시말해 문명의 척도에서는 여진중에서도 가장 후진적인 북만주의 완안부 입장에서
고려는 심리적으로 거의 범접할 수 없는 문명국이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예로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 역시 그들의 가계를 중국 당나라 황족출신이라고 신분세탁했으니.... 

완안부가 12세기 초무렵 흥기하기 이전 시기에는 실질적으로 고려와 관련성이 거의 없는 배경 가운데
여진 중에서도 문명의 기준에서 보자면 야성-야만적인 특성이 강하다는 것도 가장 큰 이유입니다.

만약 함보가 실제로 고려출신이라 하더라도 그를 비롯한 그의 가족 몇몇에 불과했을 것이며
이는 완안부로 흡수되어 몇 대가 흐르면서 그대로 흡수되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조선태조 이성계의 선조가 전주-강원도를 거쳐 함경도까지 이주했던 규모인 수 백명 가량의
무리가 이주했다면... 당장 완안부 내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했음은 물론 완안부를 처음부터 주도할만한
세력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머지않아 완안부 자체에 신라 혹은 고려문화와 기술이 당장 이식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려사, 요사, 송나라 기록을 보더라도 완안부가 이전시기부터 신라 혹은 고려의 영향을
받았다는 근거가 될 만한 단서는 없습니다.

그리고 함보 이주설이 시살이라 하더라도... 기록문화가 전무한 완안부의 특성상
함보로부터 영가-오야속-아골타 시기는 200년 가까운 시차가 발생하는데....
이는 거의 전설의 고향 수준의 아득한 옛날입니다.
물론 기록문화가 없는 부족이 조상으로부터 구전되는 아야기에 대한 기억력은 더욱 뛰어나지만....
     
설설설설설 17-11-06 17:06
   
죄송합니다만 고려가 당나라 황족 출신이라고 주장했던건 아예 경위 자체가 다릅니다.

작제건의 설화/당황실 연계설등은 김관의의 창작물일 가능성이 99.99%에 수렴한다고 생각됩니다.^^;

고려시대에도, 조선시대에도 엄청나게 비판을 받았습니다.

고려사에도 명백히 아래와 같이 적혀 있습니다.
이제현이 찬하면서 김관의를 격하게 비판하였고, 고려사 집필자들도 이렇게 김관의를 비판하였습니다.


고려사 찬수中
이제현(李齊賢)은 일대의 이름난 선비로서 어찌 아무런 견해없이 경솔하게 그 당시 임금의 세계(世系)를 논의하였겠는가. 그 숙종(肅宗), 선종(宣宗)이라 한 것을 《당서(唐書)》로써 상고하여 보면 숙종(肅宗)은 어려서부터 일찍이 궁전 밖을 나가 본 적이 없으니 과연 원(元) 나라 학사(學士)의 말과 같다고 하겠다. 선종(宣宗)은 비록 광왕(光王)에 봉해졌다고는 하나 《당사(唐史)》에는 심왕(瀋王)을 봉지(封地)로 내보내는 제도가 없었고 그 난리를 만나 화를 피하였다는 설도 선록(禪錄)과 잡기(雜記)의 두 설이 다 근거한 바가 없는 것으로서 믿을 것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하물며 용녀(龍女)의 일은 어찌도 그리 허황되고 괴이하기가 이다지도 심한가. 《태조실록(太祖實錄)》은 정당문학(政堂文學) 수국사(修國史) 황주량(黃周亮)이 편찬한 것이다. 황주량은 태조(太祖)의 손자인 현종(顯宗)대에 벼슬하였으므로 태조(太祖) 때의 일은 듣고 볼 수 있던 터이니 그 선대(先代)에게 추증(追贈)한 일에 있어서는 사실에 의거하여 이를 쓴 것이다. 정화 왕후(貞和王后)를 국조(國祖)의 부인으로 삼아 3대(代)로 하였으되 거의 한마디도 세상에서 전하여 내려오는 설에는 언급되지 않았다. 김관의(金寬毅)는 의종(毅宗) 때의 하급관리이며 또 태조(太祖) 때로부터 260여 년이나 지났으니 어찌 당시의 실록을 버리고 후대에 와서 상고함이 없이 잡되게 나온 글을 믿겠는가

요약 : 현종조 당대의 명신 황주량이 편찬한 태조 실록을 믿어야지, 사관도 아닌 허무맹랑한 김관의 따위를 믿겠는가?

김관의는 고려 의종때 병기를 제작하는 군기감의 하급관리로, 민간의 설화를 모아
왕대종록(王代宗錄), 편년통록(編年通錄)를 기록 하였습니다.
즉 태조로부터 약 250여년이 흐른 뒤에, 민간의 설화등을 짜집기해서 고려 왕실의 계보라고 만든 것입니다.
쉽게 단순하게 이야기하자면, 왕실에 아부하기 위해 만든 <우리 고려 왕실 킹왕짱>이라는
<민간에 전하는 고려 왕씨 족보이야기>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인마냥 흘러 흘러, 훗날의 당황실의 후예니 하는게 왕실까지 전해진 것이구요.

현종조에 7대 실록을 편찬하면서, 당대의 최고의 학자이자 명신인 황주량이 태조 실록을 편찬하면서
3대 조종에 대해서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김관의를 거치면서 작제건 설화며, 용녀 설화며, 당황실 설화가
짜집기 된것이지요.


고려사 세계에 이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실게 된 이유도 고려사 세계 말미에 나옵니다.

고려사 찬수中
오호(嗚呼)라, 예로부터 인군(人君)의 세계(世系)를 논하는 무리가 괴이(怪異)한 말을 한 것이 많고 간간이 억지로 끌어다 붙인[附會] 말이 있는 것이니 후세(後世)의 사람이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 실록(實錄)에 기재(記載)되어 있는 3대(代)를 추증(追贈)하였다는 것을 올바른 설(說)로 삼고 김관의(金寬毅) 등의 설(說)도 세상(世上)에서 전하여 내려온 지 오래 된 것이므로 아울러 부기(附記)하여 두는 바이다.

즉, 태조 실록의 3대 추증 이외는 모두 김관의의 설일 뿐입니다.
다만 고려사에 기록하는 것은 이런 설도 있다는 것 뿐이지, 고려사 찬자들이 이것이 옳다 해서 넣은게 아니란 이야기이죠.
     
설설설설설 17-11-06 17:10
   
그리고 완안부여진인들이 자기 조상들이 고려출신이였다는걸 강조한건

태초부터 여진사람들 입에서부터 나온겁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정통성 확보 차원에서 조상이 신라 혹은 고려출신임을 강조하고 
족보를 위조했을 개연성이 더욱 클 것입니다.
확실히 이럴 가능성도 다분하구요.

금사(金使) 호십문(胡十門) 열전中
호십문이 고영창을 따르길 원치 않아 그 일족을 불러 모의하여 말하길
<우리의 먼 조상 3형제는 모두 고려에서 태어났다. 지금 대성황제(아골타)의 조상은 여진으로 들어갔고, 우리의 조상은 고려에 남았다가 뒤에 고려에서부터 요나라에 귀부하였다. 우리와 더불어 황제는 모두 삼조(三祖/아고내, 함보, 보활리)의 후예다. 황제가 천명을 받아 대위에 즉위하여 요를 정벌하고 패망하게 하였는데, 내가 어찌 고영창의 신하가 될 수 있겠는가 >

실제로 고려에서 태어난 고려사람으로서 이와 같은 부분이 계속해서 시대가 갔어도 잊지 않고 기억할수도 있는거구요.

금사(金使) 시조(始祖) 함보(函普) 中
금시조의 이름은 함보이고 처음 고려에서 나올 때 이미 60여 세였다.
함보의 형 아고내는 불교를 좋아하여 고려에 머물며 고려 밖으로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고 말하길
<후세의 자손이 반드시 서로 모일 것이니, 나는 가지 않겠다> 그러자 함보는 동생 보활리와 함께 고려를 떠났다. 시조는 완안부 복간수의 물가에 거주하였고, 보활리는 야라에 거주하였다.

자기들 역사서 시작이 이렇게 시작하는걸 뭐 어떡하나요.

전 당연히 금사가 한국사로 편입된다는건 말도 안된다구 보구요.

궁금증은 시대가 100년 이상은 흘렀는데 여진인들이 그걸 기억하고 있다는게 신기해서 궁금증을 가지게됬습니다.
     
감방친구 17-11-06 17:16
   
완안부의 족보세탁설은 그저 무책임한 추측이죠
족보세탁으로 보기에는 금사, 고려사, 만주원류고, 송막기문 등 교차검증 사서가 충분하구요

고려사에는 그런 얘기 없는 것으로 압니다
제가 지난 주에 왕건부터 선종 대까지 근 200 년을 읽었는데못 봤습니다
고려사에 있다면 어디 있는지 알려주세요

다만
ㅡㅡㅡ같은 예로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 역시 그들의 가계를 중국 당나라 황족출신이라고 신분세탁했으니.... 

이 이야기는 설화의 내용인데

신라 설화인 거타지설화를 베이스로 당 숙종을 엮어서 이른 바 작제건 설화를 만들어 후삼국통일 과정에서 민간에 유통시켜 프로파간다로 사용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설은 중국에도 알려져서 중국을 방문한 고려사신에게 사실인지 물으니 고려사신이 듣보라는 식으로 반응하며 부정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고려의 작제건 설화와는 달리
금시조 이야기는 설화가 아니라 엄연히 그들의 국사인 금사, 또 후대의 청나라 황제가 직접 편찬한 흠정만주원류고에 적혀있고
당시대 송나라 사가, 고려 사가가 직접 적었고
또 금나라 초대황제가 고려에 보낸 국서에도 나오는 내용입니다

족보날조 운운 하며 작제건 설화에 비할 게 아니죠
작제건 설화는 명나라 주원장 고려인 설화에 견주는 게 어울립니다
감방친구 17-11-06 17:02
   
그런데 여진족들은 문자를 이용해서 기록을할줄 모르기때문에 훗날 금(金)을 건국하고나서야 자기들의 첫 기록을 남겼지요.

그리고 금시조 함보의 후손 금태조아골타는 시조함보로부터 4대정도 걸쳐서 나온 인물이구요.
문자와예악등 기초적인 문화산업 조차 못하는 여진족들인데 어떻게 몇대를 걸쳐서도 자기들의 조상이 "고려" 출신이라는걸 기억할수 있었는지 궁금하네요.

ㅡㅡㅡㅡㅡ

저는 기독교 신자가 아닙니다만 혹시 신약성경을 읽어보시전이 있나요?

거기에 보면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났고 하는 게 수십 대를 이르다가 마지막에 예수에 이릅니다

지금은 덜하지만 근대까지도 종족이 중요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래서 일가의 뿌리와 조상들의 행적을 아이들에게 가르칩니다

문자로 기록됐을 때는 책을 펴놓고 읽히며 설명하는 식으로
문자가 없을 시에는 말로 이야기로 들려주지요

지금은 여가를 영화ㆍ티비 ㆍ인터넷 ㆍ컴퓨터 게임 등으로 보내지만 이런 것이 없을 때는 책을 읽었습니다

또 많은 시간을 대화를 하며 이야기를 하며 보냈구요

조선시대에는 이야기꾼이 있어서 동네마다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해주며 생활했습니다

서양의 고ㆍ중세 배경 영화를 보면 음유시인들이 역사와 영웅들의 이야기를 노래로 지어 부르고 외우고 다니는 게 나옵니다

인디언이나 몽골의 토속 음악에도 역사적인 전투나 조상들의 일을 다룬 노래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시에 이런 일화가 있었다는 게 기억납니다
상륙한 대군 앞에 말을 탄 한 일본인 장수가 혼자 나서며
일기토를 하려 합니다
ㅡ 나는 어디에 사는 어느 가문의 누구고 아버지는 누구고 조상들은 누구고 하는 식으로 자신을 소개하다가 화살받이가 돼 죽었다고 합니다

요즘의 우리의 경우도 책으로 읽은 적이 없음에도
자기 아버지 고향이 어디고 어머니는 어느 학교를 다녔고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났고 할아버지는 뭐 하시는 분이었고 외할머니는 뭐 하시던 분이고 아버지의 증조할아버지 대까지 어느 고장에서 큰 부자로 살았다느니 만주에서 뭐 했다느니
하는 집안내력을
얼추는 알고 있죠

왜 그렇겠습니까
오며가며 무수히 듣고 컸기 때문이죠
     
아스카라스 17-11-06 17:19
   
왜군 장수가 당당하게 자기소개하다 활맞고 죽은 건 좀 웃프네요
도배시러 17-11-06 18:35
   
신라방
신라출신인데 신라가 사라지고 고려가 존재하니 조상 함보를 고려인이라 하는것.
백제 사람인데 본국이 신라인에게 먹혀 갈곳이 없어 모여 살았는데 신라방이라 하는것.
     
아스카라스 17-11-06 19:16
   
신라방이 나라잃은 백제인이나 고려시절 신라인들의 마을을 일컫습니까??
          
도배시러 17-11-06 20:05
   
고려시절은 고려방이 되고, 통일신라때는 신라방이 되는거죠.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나라 일본이 D로 바뀌면 D인이라 불러야죠.
관심병자 17-11-07 08:12
   
금이 말했던 '고려'가 왕건의 '고려' 일수도 있지만,
주몽의 '고려' 일수도 있죠.

금황제의 서신에서 부모의 나라면서 아우의 나라라면 문맥이 이상하죠.
금의 부모의 나라는 주몽의 '고려'로 해석하면 맞아들어갑니다.
왕건의 '고려' 역시 주몽의 '고려'를 계승하니,
형제의 나라라는 표현이 되는겁니다.
     
월하정인 17-11-07 11:53
   
금사(金史) 계보 보시면 아시겠지만 왕건의 고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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