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음력 4월 15일
부산진 전투
새벽부터 시작된 공격에
정3품 절충장군 부산진첨절제사 정발 이하 병력 600여명과
백성 2천이 결사항전하였다
정발 장군은 이전부터 북방과 중앙 비변사에서 능력을 인정받던 장수였으며
조선 조정은 전쟁의 위협이 커지자 불과 전쟁발발 몇개월 전에
그를 최전방인 부산진에 부임시킨다
몇 개월간 수성을 위한 노력과 병사들의 훈련에 박차를 가했던 정발 장군이었지만
침공한 왜군의 수는 조정은 물론 그 역시 예상치 못한 규모로 중과부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군이 이른 새벽부터 시작한 1차 공격은
수비군의 격렬한 저항에 막혀 7시에 공격을 중지한다
수 시간동안 교착상태에 빠졌지만,
왜군이 10시경부터 부산진성의 약점을 파악하여 두 방향으로 공격하자
병력을 나눌 수 밖에 없었던 조선군은 결국 정오 12시에 성문을 돌파당한다
이후 2차례의 시가전이 벌어졌지만 결국 해가 지기 전에 부산진은
완전 함락당하고 군민 3000여명은 학살당한다
조선군민의 저항이 없을걸로 예측했던 왜군의 입장에선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후에 조선 통신사 황신에게 일본 장수 마츠우라 시게노부는
"우리는 부산진 전투에서 좌절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하며,
포루투갈 선교사 프로이스의 기록에도
"거의 전원이 전사할 때까지 싸웠다",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히 높은 훌륭한 병사들"
"가죽흉갑과 철제투구, 개머리판 없는 소총과 수많은 터키식 활로 무장했다"
라고 적고 있다
왜군은 곧이어 인근에서 마찬가지로 수성을 하던
다대포진과 서평포진의 격렬한 저항을 가볍게 제압하고
다음날인 음력 4월 15일 동래성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