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낙랑국의 쇠퇴
낙랑국은 한 때 한반도 중북부 지역을 장악하고 강원도 지역까지 진출하여 신라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 정도의 강국이었다. 하지만 낙랑국은 최리왕 대에 이르러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이 과정에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가 등장한다. 낙랑국의 멸망을 논한다면 빼놓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대무신왕 12년 (서기 32년) 여름 4월,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沃沮)에서 유람하고 있었다. 그때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그곳을 다니다가 그를 보고 물었다.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로구나. 그대가 어찌 북국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리오?”
위의 기록은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대무신왕조의 기사이다. 나는 이 기록에서 낙랑왕이 호동왕자에게 북국 신왕의 아들이 아니냐고 묻는 부분에 주목하고자 한다.
당시 낙랑국의 북쪽 즉, 살수 이북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고 있었다. 바로 고구려가 급격히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전쟁의 신이라고 불리는 대무신왕(大武神王)이 등극한 이후, 고구려는 동쪽으로는 개마국과 구다국을 정벌하고 서쪽으로 한(漢)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 북쪽으로는 부여를 공격하여 부여왕의 목을 베는 무시무시한 성장을 이룩하고 있었다.
당시 살수 이남의 낙랑국은 이런 고구려의 성장에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특히, 당시 낙랑국은 남쪽으로 백제와 신라 정복에 주력하고 있었기에, 북쪽의 안보 위협은 커다란 독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낙랑국의 왕인 최리의 입장에서는 북쪽의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었다.
우리나라의 역사 뿐만이 아니라 세계의 역사를 보면, 국가 간의 혼인은 우호관계를 맺기 위한 도구로써 자주 사용되어 왔다. 즉, 낙랑왕 최리는 북쪽의 고구려와 혼인 관계를 맺어 북쪽 경계를 안정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낙랑왕 최리가 호동왕자에게 북국 신왕의 아들이 아니냐고 물은 것은 의도적인 접근일 가능성이 높다.기록을 계속 살펴보자.
대무신왕 12년 (서기 32년) 그 후, 호동이 본국에 돌아와서 남몰래 아내에게 사람을 보내 말하였다.
“네가 너의 나라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을 찢고 나팔을 부수어 버릴 수 있다면 내가 예를 갖추어 너를 맞이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못하다면 너를 맞이하지 않겠다.”
이전부터 낙랑에는 북과 나팔이 있었는데, 적병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소리를 내기 때문에 그녀에게 그것을 부수어 버리게 한 것이었다. 이에 최씨의 딸은 예리한 칼을 들고 남모르게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과 나팔의 입을 베어 버린 뒤에 호동에게 알려 주었다. 호동이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하였다. 최리는 북과 나팔이 울지 않아 대비를 하지 않았고, 우리 병사들이 소리 없이 성 밑까지 이르게 된 뒤에야 북과 나팔이 모두 부서진 것을 알았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낙랑국에는 저절로 소리를 내는 북과 나팔이 있었다. 이는 당연히 구라이다. 아마, 이 북과 나팔이라는 것은 낙랑국의 제사 도구가 아니었을까 한다. 고대는 제정일치 사회이다. 즉, 국가의 왕은 제사를 담당하기도 했었다. 스스로 소리를 내는 북과 나팔이라는 것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신성한 물건이었을 것이다. 당시에 종교라는 것은 지금보다 역할이 훨씬 거대했기 때문에, 제사도구인 북과 나팔을 없앤다는 것은 낙랑국의 구심점을 잃는 것과 같다. 고구려는 이를 알고 있었기에, 낙랑국의 제사도구인 북과 나팔을 없애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낙랑공주는 여기에 이용되었다. 기록을 계속 살펴보자.
대무신왕 12년 (서기 32년) 그는 마침내 자기 딸을 죽이고 나와서 항복하였다
결국 낙랑국은 고구려의 전략에 넘어가고 왕이 항복하였다. 그런데 기록을 살펴보면 이상한 부분이 있다. 낙랑국의 왕은 분명 서기 32년에 고구려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기록을 계속 보면
유리이사금 1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