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건무 6년(A.D 30년)에 변군(邊郡)을 정리하였고 도위(都尉)도 이에 따라 폐지되었다. 그 뒤 현(縣)의 거수(渠帥)를 모두 현후(縣侯)로 삼으니 불내(不耐), 화려(華麗), 옥저(沃沮)등 여러 현(縣)이 모두 후국(侯國,후侯가 봉해진 현縣)이 되었다.
이적(夷狄)들이 다시 서로 공벌(攻伐)하였고, 오직 불내예후(不耐濊侯)만이 지금까지 여전히 侯國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해 공조(功曹) 주부(主簿) 등의 제조(諸曹,여러 관서)를 두어 예민(濊民)들이 모두 그 직을 맡고 있다. 옥저(沃沮) 여러 읍락(邑落)의 거수(渠帥)들이 모두 삼로(三老)라 자칭하니 즉 옛 현국(縣國)의 제도이다.
위 유리 이사금 40년대 이전 30년대의 위서 동이전 기록입니다 신라에 관한 기록은 찾지 못하였지만 불내, 화려현의 기록은 있네요 위치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 그리고 바다에 닿는다고 합니다
東沃沮는 고구려 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는데, 큰 바닷가에 접해 산다. 그 지형은 동북간은 좁고, 서남간은 길어서 천리 정도나 된다. 북쪽은 읍루(挹婁)·부여 (夫餘)와, 남쪽은 예맥(濊貊)과 접하여 있다. 戶數는 5천戶인데, 大君王은 없으며 邑落에는 각각 대를 잇는 우두머리(長帥)가 있다. 그들의 말은 고구려와 대체로 같지만 경우에 따라 좀 다른 부분도 있다.
예
濊는 남쪽으로는 진한(辰韓)과, 북쪽으로는 고구려(高句麗)·옥저(沃沮)와 접하였고, 동쪽으로는 대해(大海)에 닿았으니, 오늘날 조선 (朝鮮)의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다. 戶數는 2만이다.
옥저가 아니라 동옥저에 실려있는 이야기입니다 위에 기록은 모두 동옥저에 실려있어요 제가 한꺼번에 기록을 가져왔어야 됐는데 따로 따로 가져와버렸네요
東沃沮는 고구려 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는데, 큰 바닷가에 접해 산다. 그 지형은 동북간은 좁고, 서남간은 길어서 천리 정도나 된다. 북쪽은 읍루(挹婁)·부여 (夫餘)와, 남쪽은 예맥(濊貊)과 접하여 있다. 戶數는 5천戶인데, 大君王은 없으며 邑落에는 각각 대를 잇는 우두머리(長帥)가 있다. 그들의 말은 고구려와 대체로 같지만 경우에 따라 좀 다른 부분도 있다.
漢나라 초에 燕의 亡命客 衛滿이 朝鮮의 王이 되면서 沃沮의 [邑落들은] 모두 [朝鮮에] 복속케 되었다.
漢 武帝 元封 2년(B.C.109)에 조선을 정벌하여 [위]만의 손자 右渠를 죽이고, 그 지역을 분할하여 四郡을 설치하였는데, 沃沮城으로 玄菟郡을 삼았다. 뒤에 夷·貊의 침략을 받아 郡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니 지금의 이른바 玄菟의 故府라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옥저는 다시 樂浪에 속하게 되었다. 한나라는 그 지역이 넓고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單單大領의 동쪽에 있는 지역을 나누어 東部都尉를 설치하고 不耐城에 治所를 두어 별도로 領東 7縣을 통치하게 하였다. 이 때에 옥저의 [邑落도] 모두 현이 되었다.
후한 건무 6년(A.D 30년)에 변군(邊郡)을 정리하였고 도위(都尉)도 이에 따라 폐지되었다. 그 뒤 현(縣)의 거수(渠帥)를 모두 현후(縣侯)로 삼으니 불내(不耐), 화려(華麗), 옥저(沃沮)등 여러 현(縣)이 모두 후국(侯國,후侯가 봉해진 현縣)이 되었다.
이적(夷狄)들이 다시 서로 공벌(攻伐)하였고, 오직 불내예후(不耐濊侯)만이 지금까지 여전히 侯國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해 공조(功曹) 주부(主簿) 등의 제조(諸曹,여러 관서)를 두어 예민(濊民)들이 모두 그 직을 맡고 있다. 옥저(沃沮) 여러 읍락(邑落)의 거수(渠帥)들이 모두 삼로(三老)라 자칭하니 즉 옛 현국(縣國)의 제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