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정부가 제 정신이 아닌었던 겁니다 정작 자국군인보다 명군을 더 잘먹였으니까요... 알다싶이 대다수의 전투는 조선육군에서 치루어졌습니다 왜 강화 이후 정유재란때 조선군이 열성적으로 싸우지 않은 이유는 저런 명군 때문이었죠.... 조선정부에서 또 명군을 믿고 해산시켜서 고향에서 농사나 짓게 하고.......
http://www.kwangju.co.kr/read.php3?aid=1445526000562010087 왜군들은 한 끼에 두 홉을 채 먹지 않았다. 당시의 한 홉은 요즘과는 달리 60㏄ 정도였으니, 1cc 부피의 쌀 무게를 1g으로 단순 계산하면 왜군들은 하루 6홉, 360g도 안 되는 쌀을 먹고 전투를 해 온 것이다. 평균적으로 보면, 당시 조선에서는 성인 남자의 한 끼 식사가 쌀 7홉이었으니 조선군은 왜군에 비해 끼니마다 무려 3.5배의 쌀을 더 먹은 셈이다.
사정이 이러니,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조선을 ‘대식국’이라고 불렀다. 다른 나라에서 하루 먹을 양식을 한 끼에 다 까먹은 셈이니 그런 말을 듣더라도 서운해 할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엔 그렇게 먹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실학자 홍대용은 중국에 다녀온 뒤 “그쪽 밥그릇은 꼭 찻잔만 하더라”라고도 했다.
일년 예산이 은 400만 냥이었던 명나라가 조선에서 7년동안 은 1000만 냥을(미곡은 별도) 넘게 소모했다고 하므로, 명군에 대한 저 정도 대우에는 딱히 불만 없으나,
조선이 자국군인 조선군을 차별하는 것을 넘어 명군 보급에 무리하느라 조선군을 굶어죽을 위기에 처하게 한 것에는 불만입니다.
<선조실록 39권, 선조 26년 6월 26일 기유 8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비변사가 문경 이하 중국군에 조달된 군량을 우리 군사에게도 먹이라고 청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우성전(禹性傳)의 장계를 보니 ‘문경 이하의 각참(各站)에 적치되어 있는 중국 군량이 무려 수만 석인데, 중국군만 먹이고 우리 군사에게는 전혀 지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 군사는 굶주리고 지쳐 전장에 나갈 수 없을 뿐 아니라 장차 길에서 굶어 죽을 염려가 있어 적과 서로 대치하고 있는 각진의 군사가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다.' 고 하였습니다.
현재 제독의 대군은 바야흐로 철수할 기세가 있고 저곳에 남아 있는 중국군도 많지 않은데 이미 조달된 군량을 우리 군사에게 공급하지 않는 것은 실책입니다.
각참에 적치되어 있는 군량을 덜어내어 우리 군사에게 지급하라는 뜻으로 호조 판서와 본도 관찰사에게 하유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