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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5-31 11:29
[기타] 백제, 오월국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2,379  

1.jpg



「삼국사기:견훤전」

<당(唐)의 광화(光化) 3년이자 신라(新羅) 효공왕(孝恭王) 4년(서기 900년)이다. 사신(使臣)을 보내 오월(吳越)에 조회(朝會)하였다. 오월왕(吳越王)이 보빙(報聘)하고 이내 검교태보(檢校太保)를 더하고 나머지는 옛과 같이 하였다.

唐光化三年 新羅孝恭王四年也 遣使朝吳越 吳越王報聘 仍加檢校太保 餘如故>

 

<정명(貞明) 4년(서기 918년) 무인(戊寅 )....... 가을 8월 ......  사신(使臣)을 보내 오월(吳越)에 들여보내 말을 진상(進上)하니 오월왕(吳越王)이 보빙(報聘)하고 더해 중대부(中大夫)를 제수하고 나머지는 옛과 같이 하였다.

貞明四年戊寅 ....... 秋八月 ......  遣使入吳越進馬 吳越王報聘 加授中大夫 餘如故>

 

이 두 기사 외에 천성(天成) 2년과 차3년 즉 927년과 928년에 견훤과 왕건간의 서신에도 오월왕의 양국분쟁에 대한 중재의 기사가 실려 있다. 

[출처] 견훤의 시대의 오월국(吳越國)|작성자 sky_drum


초기에는 회계군을 오군(吳郡)이라고도 불렀다. 기원전 202년(한고제 5년) 유방이 항우를 죽여 서초를 멸하고 그 땅을 초나라로 삼아 한신에게 주면서, 회계군은 사수군·진군·동양군·설군·장군과 함께 초나라에 속했다. 기원전 201년(한고제 6년) 유방이 한신을 회음후로 격하하고 초나라를 둘로 나누어, 유고왕에 봉하고 동양군, 장군(鄣郡), 회계군을 봉토로 주었다. 아직 민월동우(東甌 : 동구라고도 함)는 멸하기 전이라서 민월의 지역인 야현과 동우의 지역인 회포현은 관할이 아니었다.


https://ko.wikipedia.org/wiki/%ED%9A%8C%EA%B3%84%EA%B5%B0


고려시대 귀순

태조 왕건 시절 오월국(吳越國) 사람들이 고려로 귀순·투항(저장성, 장쑤성 동남부, 푸젠성 동북부)

현종 때 오월국(吳越國) 사람들이 고려로 귀순·투항

현종 때 민월(越)사람들이 귀순·투항(푸젠성)

현종 때 중국 복건성의 천주(泉州)사람들이 귀순·투항(푸젠성)


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B%A5%99%EC%82%AC%EA%B4%80


오월국의 투항은 대륙 고려설이 아니라 백제의 대륙에 있었던 영토가 아닐까함

오월국은 오나라 월나라랑 다른나라로,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초나라가 다시 월나라를 멸망시킴.

오월국이 견훤의 후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것과

후삼국이 통일되고 고려가 건국되자 귀순자가 넘어온것.

당시 중원에서 민월과 동우(동구)를 다른 민족이라 인식하고 있었다는것.

백제의 대륙 영토에 대해서는 중국의 여러 역사기록도 있지만,

한국 사학계는 인정하지 않고 있음.


내가 아는게 틀릴리 없다 >> 선생님께 배운게 틀릴리 없다 >> 일본에서 배워온게 틀릴리 없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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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제국 17-05-31 13:05
   
주류사학계가 호구라서가 아니라

저것을 인정하는 순간

주류사학계의 밥줄이 끊기니까 목숨걸고 막는거지요
그노스 17-05-31 13:36
   
<고려사절요 권1 > 태조신성대왕(太祖神聖大王) > 태조(太祖) 18년 > 10월 >>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다

'옛날에 전씨(錢氏)가 오월국(吳越國)을 들어 송(宋)에 바쳤는데, 소식(蘇軾)은 그를 일컬어 충신이라고 하였으니, 지금 신라의 공덕은 그보다도 훨씬 훌륭한 것이다.'

--------

오월국 백성들이 고려에 투항한 것을 가지고 동족의식이라는 개념으로 해석한다면, 오월국의 군주가 중국 송나라에 나라를 들어바치며 투항한 것은 어떻게 봐야 하는지...

송나라의 소식(蘇軾)이 오월국 군주의 투항을 가리켜 충신이라고 일컬었다 하고, 고려가 그것을 인정하며 고려에 대한 신라의 투항과 비교하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님의 견해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잘 모르겠군요.
     
관심병자 17-05-31 16:58
   
태조(太祖) 건륭(建隆) 원년(960) 3월, 오월왕(吳越王) 전숙(錢俶, 錢弘俶)이 사신을 파견해와 즉위를 축하해 주었다. 이로부터 매년 조공하였다. 개보(開寶) 7년(974) 겨울 10월에 강남(江南, 南唐)을 정벌하면서 조서로 오월왕 전숙을 승주(昇州) ・동남행영초무제치사(東南行營招撫制置使)로 삼아 더해주었다. 이보다 앞서 전숙이 판관(判官) 황이간(黄夷簡)을 보내어 송나라에 입공(入貢)시켰는데 황제(皇帝, 宋太祖)가 그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돌아가 원수(元帥, 錢俶)에게 갑병(甲兵)을 훈련시키고, 강남에서 완고히 입조(入朝)하지 않으니 내가 장차 그들을 토벌한다고 말하라. 원수는 마땅히 나를 도와 사람들의 말에 현혹되지 말라 전하거라. 가죽이 없으면 털이 어디에 붙겠는가?[皮之不存, 毛將安附]'라고 하였다. 얼마 후 군사 기일을 은밀히 고(告)하자, 마침내 이러한 하명(下命)이 있었다.




개보 8년(975) 여름 4월, 오월왕 전숙이 이미 명령을 받들어 심승례(沈承禮)를 권지국무(權知國務)로 삼고, 스스로 병사 5만을 이끌고 상주(常州, 강소성)를 공격했다. 승상 심호자(沈虎子)가 '강남은 국가의 울타리[藩蔽]인데, 지금 대왕께선 스스로 그 울타리를 거두려 하시니 장차 어떻게 사직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라고 간했으나, 듣지 않았다. 나아가 그 관문의 성(城)을 쳤으며, 북계(北界)에서 남당군을 패배시켰다. 군사를 보내어 강음(江陰)과 의흥(宜興)을 공격해 모두 함락시켰고, 이윽고 상주도 뽑아버렸다. 강남주(江南主, 南唐 李煜)가 전숙에게 서찰을 전달해 말하길 '오늘 내가 없어진다면, 내일 군주께서 어찌 계실 수 있겠소? 천자(天子)는 단번에 땅을 바꾸고, 공훈도 갚을 것이니 왕(王) 역시 대량(大梁)의 일개 포의(布衣, 평민)에 불과하오'라고 하였다. 전숙이 이욱에게 답하지 않았다.




이욱의 서찰을 진헌하자, 황제가 우조(優詔)로 전숙을 칭찬했다. 개보 9년(976) 2월, 오월왕 전숙이 내조(來朝)했다. 앞서 황제가 오월국 사자에게 '원수(元帥)가 비릉(毗陵, 常州)을 함락시키는데 큰 공적이 있으니, 강남이 평정되길 기다렸다가 잠시 짐(朕)과 한차례 상견(相見)하러 온다면 오래된 생각을 위로하면서 곧바로 돌려보낼 것이다. 짐은 규폐(圭幣)를 세차례 잡아 상제(上帝)를 뵙는데, 어찌 식언(食言)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이때에 이르러 전숙이 그의 처(妻) 손씨(孫氏) ・아들 유준(惟浚)과 함께 입조하자 예현택(禮賢宅)을 하사해 머물게 하고, 황제가 친히 행차하여 연회를 베풀었으며, 포상하는 것이 대단히 후했다. 전숙에게 칼[劍]을 착용한 채로 대궐까지 올라와 조서에 이름을 쓰지 말도록 했다. 진왕(晋王)과 형제의 예(禮)를 받으라고 했으나, 전숙이 고사했으므로 중지시켰다.



2개월간 머물다 돌려보냈는데, 단단하고 두껍게 봉지(封識, 封印)된 황색 보자기 한장을 내리면서 전숙에게 '도중에 은밀히 봐야만 하네'라고 타일렀다. 개봉해보자, 모두 군신(群臣)들이 전숙을 억류시킬 것을 요청한 상소문이었고, 전숙이 몹시 두려워하면서도 감동했다. 태종(太宗) 태평흥국(太平興國) 3년(978) 3월 기유일, 전숙이 재차 내조했다. 진홍진(陳洪進)이 영토를 헌납한 데 맞이해 두려워지자, 상표(上表)하여 오월국왕(吳越國王)의 책봉을 파직시키고, 조서에 이름을 적지 말라는 명령마저 천하병마대원수(天下兵馬大元帥)와 나란히 해제해 줄 것을 간청하면서 갑병(甲兵)을 돌려보내 귀환을 빌었으나, 황제[宋太宗]가 허락하지 않았다. 신하 최인기(崔仁冀)가 '송나라 조정의 뜻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대왕께서 속히 영토를 헌납치 않는다면, 조만간 화(禍)가 미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전숙이 좌우(左右)와 언쟁하며 불가하다고 하자, 최인기가 언성을 높여서 말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벌써 장악당했고, 더우기 본국과 1천리(里) 떨어졌는데, 생각컨대 새의 날개가 있다한들 날아서 떠날 뿐입니다!' 전숙이 마침내 계책을 결단하여 표문을 올리고, 그 경내(境內)의 13주(州) ・1군(軍) ・86현(縣)을 헌납했다. 전숙이 조정에서 물러나자, 오월국 장리(將吏)들이 비로소 눈치채고 모두 '우리 임금께서 돌아가실 수 없게 되었구나!'라며 통곡했다. 5월 정해일, 조서로 전숙을 회해국왕(淮海國王)으로 삼아 봉(封)하였으며, 전숙의 아우 전의(錢儀) ・전신(錢信)에겐 나란히 관찰사(觀察使)를 제수하고, 아들 전유준(錢惟浚) ・전유치(錢惟治)에겐 절도사(節度使)를, 전유연(錢惟演) ・전유호(錢惟灝) 및 족속(族屬) ・요좌(僚佐, 부속 관원)들한테도 차등있게 관직을 각자 제수해 주었다.




또한, 그 장교(將校)인 손승우(孫承佑)와 심승례(沈承禮) ・최인기(崔仁冀)도 나란히 절도사에 제수하면서 대우하고 위로해주는 것이 당시에 가장 으뜸이었다. 곧이어 양절(兩浙)에 명령해 전숙의 시마(緦麻) 이상 친족(親族)과 관내(管內)의 관리들은 출발하여 모두 변경(汴京, 開封)에 이르게 하니, [선박들만] 무릇 1044척에 달했다. 범민(范旻)을 권지양절제주군사(權知兩浙諸州軍事)로 임명했다. 범민이 '전숙이 그동안 자기 나라에 머무르면서 요역(徭役)과 부세(賦稅)가 너무 번잡하고 엄했습니다. 청컨대, 폐해를 모조리 덜도록 해주십시오'라고 상언하자, 그대로 따랐다. 태평흥국 8년(983) 12월, 전숙을 한남국왕(漢南國王)으로 고쳐 봉(封)하고, 천하병마대원수를 파직했다. 단공(端拱) 원년(988) 8월 무인일, 전숙의 생일을 맞이해 황제가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이날 저녁에 갑자기 사망했다.

송사기사본말(宋史紀事本末) 11권, 오월국이 귀부해오다
http://egloos.zum.com/epoque/v/4084997
          
그노스 17-05-31 17:38
   
네, 읽어봤는데 인용글이 길어서 제가 놓친 부분이 있는지 모르지만,

오월왕 전숙이 송 태조에게 귀부한 내용인데, 이것이 오월국과 고려 사이에 어떤 동족의식이 있었다는 근거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면 제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송 태조가 전숙의 귀부를 받아들이고서 결국 뒤통수를 쳤으니 송나라와 오월국 간에 동족의식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인가요?

저는 투항 사례를 가지고서 님처럼 동족의식을 언급하기는 부족하다는 의미로 님께 의문을 제기한 것이지 송나라와 오월국 사이의 동족의식을 제가 강조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말씀드렸지요.
님처럼 투항한 것을 가지고 동족의식이라는 개념으로 해석한다면...이라고 제가 단서를 붙인 것 말입니다.

아니면 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가지고 제게 어떤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관심병자 17-05-31 19:06
   
처음에 즉위를 축하하고 조공하는건 일상적인 외교관계지만,
송과 오월은 힘에 의한 복종관계로 볼수있습니다.
그후 어느정도 사이가 좋았다고 볼수있으나,
마지막에 나라를 받친건 왕이 송나라에 억류된 상태에서 마지못해 내놓게 된겁니다.
후대의 송나라 학자눈에는 충심으로 보일수도 있겠지만,
받친게 아니라 뺏긴거죠.
                    
그노스 17-05-31 19:42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만,

당연히 나라를 들어바치는데 동족에게 바치든 이족에게 바치든 그것을 기꺼워할 군주는 없지요.
(혹 사료에 화기애애 했다고 해도 저도 안믿었을 것임)

그러나 그 과정이야 어쨌든 송나라와 오월국의 결말을 고려가 결국 인정하고 그 사실을 고려에 대한 신라의 투항 사실과  비교할 정도였다라는 것을 제가 인용해서 말씀드린 것이고,

제가 궁금했던 것은 말씀하셨던 고려와 오월국 사이의 동족의식입니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관심병자 17-05-31 20:15
   
송과 오월의 합병은 과정이야 어찌됐든 평화적인 합병입니다.
오월국의 왕족이나 신하들중에는 불만이 있을수도 있겠습니다만,
난민이 발생하거나 재산을 잃거나 목숨걸고 탈출해야할 상황은 아닙니다.
아무 연관이 없다면 황해를 건너 고려땅까지 와서 귀순할 이유는 없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관심병자 17-05-31 19:41
   
인동장씨(仁同張氏)의 대동보에는 장보고의 아버지인 백익(伯翼)은 중국의 절강성에서 태어난 중국인이었는데, 신라 땅을 자주 왕래하다가 귀화한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이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장보고는 마치 중국인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기록들을 근거로 삼고,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는 신라인이 틀림없다. 그때에는 이미 신라인들이 절강 등 강남지방에서 거주한 사실로 보아 오히려 반대로 중국으로 건너간 재당 신라인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보고의 활동과 동아지중해 질서 (한국 해양사, 2014. 3. 31., 학연문화사)

장보고의 부친 백익의 출신지인 절강성은 저장성으로 오월국이 위치했던 지역과 겹칩니다.
이런 가족사는 사서보다 족보가 더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족보가 사라지면 사라졌지 정세나 외부환경에 따라 고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원홍장 설화(심청전)가 전해내려 오는 지역도 저장성지역 입니다.

비류가 세운 미추홀을 인천으로 확정하는 이유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미추홀은 바닷가이고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잘 살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지리적으로 보아 지금 인천의 땅에 잘 맞는다.

바닷가이고  땅이 습하고 물이 짠곳이 전세계에 인천밖에 없겠습니까?
단순히 한반도로 좁혀보더라도 후보지가 수십군대는 나올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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