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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9-18 14:54
[기타] 요동정벌 당시 이성계가 격파해야될 명나라군 상황..
 글쓴이 : Centurion
조회 : 5,407  

hellouk_co_kr_20160918_144809.jpg


출처: 

http://hellouk.co.kr/normal.php?idx=210954

3만8천병력으로 

도합 230만 대군과 맞짱 떠야되는 상황.

명나라가 단순 오합지졸도 아니고,

몽골초원까지 쳐들어가 몽골기병 본거지까지 쳐들어가

북원 잔당까지 작살낸 직후의 상황.

전멸설계야. 이제 감 좀 잡히냐?

P.S

다소 필자의 과장과 오류, 
그에 대한 반론이 있긴 한데. 그래도 큰 차이는 없다. 

나폴레옹도 저런 일은 못한다.
시저로는 저런 싸움은 어렵고, 
알렉산더대왕 갖다놓아도 의문인데..??

자칭 "일당백"님은 가능하시겠죠?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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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국 16-09-18 15:11
   
1009~1125년 시기의 고려를 데려와야 할겁니다 그 당시 고려는 30만 군대는 쉽게 모을수 있었습니다 건국 초기에 정종이 편성한 광군이 약 30만,  고려 최정예 군사인 2군6위 병력 약 4만 5천

거란의 2차 침입 당시 강조가 30만이나 말아드신 뒤인데도

귀주 대첩 당시 고려군 규모가 20만이었고

특수부대였던 별무반의 규모가 17만에 다다르고  강감찬 윤관 척준경등 명장들이 제법있었지만


려말 당시 고려로는 명나라 치는건 사실상 xx행위죠 그당시 고려는 왜구들의 침입 홍건적의 침입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 인구가 엄청나게 줄었고 이시점 부터 고려는 망했다고 봐야죠 이때부터 일본이 우리를 인구로 앞서기 시작했습니다
Centurion 16-09-18 15:21
   
그렇지요.

최소한 30만 많게는 60만~100만이라도 동원해야됩니다.
(기병 위주라도 최소 30만?)

명나라가 말기쯤 되서
명나라군대가 이자성의 반란군한테 깨져나가고,

북부에선 15만 쯤 되는 청나라 팔기병들이 활동했지만,
명나라 요동쪽 병력 수십만을 상대했으나, 산해관을 못넘었죠.
(나중에 서쪽으로 빙 돌아서 넘어가긴 하지만..)

결국 이자성의 반란군이 명나라 멸망시킨 후...
오삼계의 만리장성 병력과 청나라 팔기군이 합세해서 대략 20만 이상의 병력으로..

다소 오합지졸이었던 이자성의 60만 대군을 일전으로 박살내고,
추후 오랜 각개격파와 토벌전을 진행하면서, 청나라가 세워졌죠.

문제는.. 명나라 초기 상황에선 청나라에게 기회였던..
그런 명나라 내부의 반란과 분열을 기대하기 어려웠다는 점이죠.

그만큼 명나라 초기랑 명나라 말기도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습니다.

게다가 명나라 주원장과 주원장 밑의 장수들이..
원나라 토벌군과 진우량 같은 강대한 세력을 상대로도 숫적 열세 속에서도 잘싸웠던..
명장들이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 이게 단지 숫자 싸움으로 가기도 어려웠지요.
스코티쉬 16-09-18 15:50
   
베트남이 저때 명나라한테 개기다가

명나라 망할때까지 몇백년간 지도에서 사라졌던걸로 아는데, 맞나요?
     
두부국 16-09-18 15:51
   
20년간 베트남은 명나라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스코티쉬 16-09-18 15:53
   
베트남이 중화권의 문명국이었다가 훨씬 오래 지도에서 사라졌던걸로 아는데,

그건 또 다른시대였나보네요
               
두부국 16-09-18 15:57
   
베트남은 중국한테 총 4번이나 지배를 받았습니다
Marauder 16-09-18 15:53
   
근데 병력수 계산할떄 중복인거 아님? 남만에있는 병사들을 다데려오는것도 이상하고...
     
Centurion 16-09-18 15:59
   
아무래도 제가 퍼온 글 필자의 오류가 좀 있는거 같은데..

제가 명나라 역사에는 그닥 밝지 않지만,

주원장이 오왕 시절에 병력이 대략 20~30만..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흡수하면서 이 세력권을 흡수하면서.. 대략 100여만 이상..
그리고, 양쯔강 이북 원나라 지역을 점령하면서.. 또 상당한 인구와 병력을 확보하니까..
대략 200만은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나중에 명나라 중후기쯤 되면 330만정도 잡으니까요.
물론 인구에 비해선 이것도 많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서달이나 남옥, 부우덕 같은 장수집단들이
대략 15~30만 수준의 군대를 이끌고.. 북원, 나하추 등 여기저기 정벌하러 다니는데..
주원장의 본대라고 하긴 어려운 정예 별동대랄까요..

그래도 이 집단들이 당시 원나라 잔당들을 막 격파하고 다니는 상태라..
요동정벌 시 일단 부딪힐 가능성이 매우 높은듯 합니다.

근데 이 병력이 이성계의 요동정벌군에 비해
일단 10배 정도에 달하기 때문에 무지 어렵다 싶네요.
Centurion 16-09-18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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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의 지배와 람선(Lam Son)반란
1407년 7월 명나라는 다이비엣(Dai Viet)을 중국 제국의 쨔오찌(Giao Chi)성 아래 포함시키고 중앙정부를 세운 후, 이 곳을 ‘부(Phu)’와 ‘주(Chau)’라는 행정단위로 나누어 1419년까지 지방통치체제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고위관료들은 모두 중국인들이었으며, 오직 하위계층 직무만이 이 지역의 토착민들에게 주어졌다. 그 당시 인구조사에 따르면 약 312만 9천 5백명의 주민과 약 208만 7천 5백명의 고산지대 부족들을 포함하여 총 520만명 이상의 인구가 거주하였으며, 이 외에도 인구조사에 포함되지 않은 이들이 다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명나라의 “통제체제(Order)”는 전국적으로 긴밀한 연결망을 가지고 있는 주둔군들에 의해 유지되었고, 그에 반하는 자들은 가혹하게 억압당했다.



본문 내 삽입이미지


명나라는 농지와 뽕밭 등에 대한 토지세와 인두세를 포함한 과중한 세금제도를 시행했을 뿐만 아니라 소금무역 또한 독점하였다. 16세에서 60세에 이르는 모든 사람들은 군역을 이행해야 했으며, 그 밖에 도로건설, 채굴, 진주조개 채집, 사냥, 등 여러 곳에 동원되었다. 1419년에는 인구 통제를 위한 족보제도가 의무화되었다.

이 밖에도 수천의 장인들과 학자들이 중국으로 보내졌는데, 이들 중에는 훗날 베이징의 궁궐을 설계했던 건축가 응웬 안(Nguyen An)도 있었다. 명나라는 사유재산을 착취하고 코끼리, 물소, 말 등을 비롯한 가축과 많은 귀중품들을 앗아갔다.
또한 베트남 사람들은 중국식 의복을 입고 중국식 관습을 따라야만 했다. 명나라 군대는 베트남 문화의 모든 흔적들을 파괴했으며, 특히 베트남어로 기록되어 있던 책들을 압수하여 불태워버렸는데, 이로 인해 15세기 이전 모든 문학작품들이 사라지는 커다란 문화적 재앙을 초래하였다.

람선(Lam Son) 항쟁과 독립전쟁
타인호아성(Thanh Hoa Province) 람선(Lam Son)지방의 지주 출신인 레 러이(Le Loi)는 1385년에 태어났으며 훗날 레왕조의 창시자가 된다. 명나라에 대항하여 저항운동을 시작하기에 앞서 레러이는 약 천명의 지지자들을 모았다. 1418년 2월 7일 람선에서 그는 스스로를 빈딘브엉(Binh Dinh Vuong) 왕이라 칭하며 명나라의 지배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모았는데, 이 중 유명한 학자인 응웬 짜이(Nguyen Trai)는 레러이의 고문이 되어 정치적 견해를 비롯해 군사 전략을 조언해 주었다. 훗날 이들은 항쟁군의 중심인물이 되어 수년간의 고군분투를 거쳐 람선 항쟁을 승리로 이끌게 된다.

항쟁운동 초기 레러이는 게릴라전을 통해 타인호아의 산간지역을 급습하였다. 그는 명나라에 여러 차례 승리하지만 그 과정에서 위태롭고 절망적인 순간에 처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군사들의 용기와, 지도자들의 결의, 관리들의 헌신으로 계속 저항해 갈 수 있었다.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민중봉기는 레러이를 위협하고 있던 명나라의 압력을 약화시켰다. 1420년 레러이 반란군은 마강(Ma River)의 둑에서 주둔하며 타인호아의 주도(州都)를 위협하기에 이르렀지만, 명나라 군대의 역습에 의해 1423년 또 다시 산 속으로 쫓기게 되었다. 하지만 전쟁에 지쳐있던 명나라 군대는 부와 명예의 유혹을 단호하게 거절해 온 레러이의 휴전 제안을 받아 들였다. 1424년 명나라는 다시 공격을 시작하지만, 휴전하는 동안 군대를 재정비할 수 있었던 레러이 군에게 큰 패배를 가져다 주지 못했다.

레러이는 Nguyen Chich의 조언에 따라 그의 부대를 이끌고 응예안(Nghe An)으로 이동하였으며, 지역 주민들의 큰 환영을 받으며 그곳을 군사 기지로 삼았다. 레러이 군은 명나라 군대의 요새를 차례로 점령해 나가며 응예안 전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고, 이 후 타인호아성과 응예안성 남쪽에 인접해있는 지역의 점령에 나섰다. 그 결과 1425년 말 응예안 성(Nghe An citadel)과 떠이도 성(Tay Do citadel)을 제외한 모든 남부지역이 명나라로부터 해방되었으며, 계속 되는 독립전쟁을 위해 대규모 후방 기지를 세웠다. 이리하여, 1426년 레러이는 역습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명나라는 브엉통(Vuong Thong) 장군의 지휘 하에 5만의 군사를 파병하였다. 명나라 지원병이 도착하기도 전에 레러이는 이미 홍하의 삼각주를 점령하고자 공격을 시작하고 있었다. 1426년 9월 레러이는 운남성(Yunnan)과 랑썬(Lang Son)에서 각각 진입하는 명의 군대를 막기 위해 두 개의 부대를 북쪽으로 파견하였으며, 또 한 부대는 수도로 행군하기 위해 파견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레러이 군대의 깃발을 보고 환호하는 가운데 혼란에 빠진 명의 군대는 그들의 요새로 철수하여 지원부대가 올 때까지 저항하였다.

같은 해 11월에 브엉통(Vuong Thong)의 부대는 수도 성벽 뒤에서 버티던 명나라 부대와 결합하였다. 총 10만의 군사력을 지니게 된 명나라 군은 역습 준비를 하지만, 수도 서부에 위치한 똣동(Tot Dong)에서 또 다시 대패하면서 요새로 퇴각하였다. 이 승리로 인해 베트남 군은 이 지역의 통치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레러이는 타인호아를 떠나 그의 군사들을 수도 주변에 배치하였다. 브엉통 장군은 휴전을 제안하였다. 응웬 짜이는 명나라 장군에게 보내는 답신에서 휴전 협정 조건으로 브엉통 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전쟁의 고통과 피해로부터 베트남 국민과 중국군을 지키자” 라는 뜻을 전달하였다. 

하지만 브엉통 장군에게 있어 휴전협상은 그저 시간을 벌어 더 많은 지원병을 모으려는 계략이었다. 베트남군은 포위를 유지한 상태에서 전초기지들을 점령해 가는 가운데, 응웬 짜이의 조언에 따라 명나라 군사들을 설득하는 전략을 펴기 시작했다. 즉, 명나라군의 패배의 불가피성과 베트남 민족해방운동의 강인함, 명 제국의 취약함 등을 설파하였고, 이로 인해 명나라 군사들의 사기는 현저히 저하되었다.   
1427년 10월 명나라의 보충부대가 두 부대로 나뉘어 도착하였다. 첫 부대는 리에우탕(Lieu Thang) 장군의 지도하에 랑썬(Lang Son)을 통해 진입한 10만 대군이었으며, 또 하나의 부대는 목타인(Moc Thanh) 장군의 지도하에 홍하의 계곡(Red River valley)으로 들어온 5만의 군사였다. 베트남 군은 이 중에서 중요도가 더 큰 쪽을 목표로 하여, 자신만만해하던 리에우탕(Lieu Thang)의 부대를 찌랑 골짜기(Chi Lang Defile)에서 급습하여 물리쳤다. 지휘관은 죽임을 당했으며 장군들을 포함한 3만의 군사들이 베트남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목타인(Moc Thanh) 장군의 부대는 두려움에 떨다가 뒤쫓아 오던 레러이의 군을 피해 즉각 달아났다.

명나라 증원부대의 패배 후 수도를 지키고 있던 브엉통(Vuong Thong)장군은 화의를 간청할 수 밖에 없었다. 1427년 12월 29일 레러이는 명나라 군에게 식량 보급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이동 수단을 제공하면서 브엉통 장군의 평화 협상을 받아들였다.

레러이와 응웬 짜이가 10년 간 이끌었던 독립전쟁은 제한된 자원으로 시작하였으나, 점차 강력한 기지와 군대를 갖추며 저항운동을 확대하였고 결국에 수많은 적들을 무찔렀다. 베트남 군은 게릴라전과 기동전을 겸비하여 적의 요새를 공격하였고, 정치적 항쟁과 군사적 행동이 함께 이루어졌으며, 적에게 자애를 베풀고 이유 없는 학살을 삼가하였다. 레러이는 많은 토지를 소유한 귀족계급이 아닌 지주계급 출신이었으며 응웬짜이는 폭넓은 지식을 가진 유교학자였기에, 이들은 성공적으로 민중들을 하나로 단결시켜 애국심을 불러 일으킬 수 있었으며,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결단력과 현명함으로 대처했다. 이렇듯 당시의 항쟁은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의 지지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적절한 전략과 전술들이 사용되었었다. 명나라는 다시는 다이비엣을 점령하려 하지 않았으며, 이후 중국과 다이비엣 간의 평화는 3세기가 넘게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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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베트남역사는 잘모르는데, 베트남 관광청 자료를 보니까..

명나라 영락제 때 쳐들어왔다가, 점령당하긴 했는데..

베트남이 20년에 걸친 독립전쟁 게릴라 전으로 몰아냈다는군요.
전쟁 16-09-18 16:00
   
그렇게 따지면 30만도 안되는 병력으로 1억이 넘는 명나라를 쓸어버린 만주족은?

자꾸 그런식의 합리화를 하니까 한국사가 쪼그라드는것임.
     
Centurion 16-09-18 16:10
   
위에 그거 적어뒀는데.. 댓글 안읽고 댓글 담?

워낙 초전에서 이자성 60만 대군이 20~30만 청 팔기군 +오삼계관영기병에게 쓸린 다음..
그 잔당들을 기동력을 활용해 각개격파하고 다니니까
가능했던게 바로 입관 이후 청나라의 정복전쟁임.

즉, 팔기군처럼 정예 기병 위주의 군대가..
비슷하거나 동수 아래의 농민보병 반란군 혹은 명나라 잔당들을 쓸고 다녀서 가능한건데..

조선은 솔까.. 고려말에 기병은 둘째치고, 보병들 숫자조차 끌어모으기 벅찬 상태임.
생각 좀 하고 댓글을 달기바람~
          
전략설계 16-09-19 19:05
   
니 눈에는..

조상님들 군대는 허접이고,
임란때 왜군이 최고지?

중국군대는 대적할 수 없는 군대고..
당태종은 왜 고구려를 못 이겼대?

저 고려군도 실전경험 단단한 군대다.. 전투 할만큼 한 군대야

여진 30만 얘기할 것도 없고.. 여진 3만에 사르후에 다 털리던 명군 아니든가..
두송, 마림, 유정 군대가 농민군이냐?

지 나라 고려군대는 까고..
명나라 군대 편들고 자빠졌네..
     
shrekandy 16-09-18 16:14
   
아니 누가보면 청나라가 30만이고 뭐고 끌고 먼치킨 장수들 드글드글한 초기 명나라를 멸망시킨줄 알겠네 ㅋㅋㅋ

오히려 청은 어찌보면 저 위에 나열된 명장급의 오삼계를 편으로 먹어서 가능했던게지 ㅋㅋㅋ
          
전략설계 16-09-19 19:01
   
이 C모, S모

세조때 조선군 40만,
조선후기 조선군 37만 떠드는 애들입니다.

애들이 말하는 병력 수 그냥 흘려들으세요
     
그노스 16-09-18 16:25
   
전쟁님의 말씀에도 공감이 가지만, 30만의 만주족은 대부분 기병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반면에 저 당시 고려군의 구성도는 공격 일변의 기병 위주였다고 보지는 않더군요.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에서 기병의 역할은 서양보다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만큼 센추리온님 말씀처럼 고려군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겁니다.
또 보통 이성계의 행적을 지지하는 측에서 자주 언급하는 부분이...잘 싸워서 그 땅을 뺏은 다음에는 어떻게 지킬건데... 임으로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고려말, 조선초에 중국과 대적하기에는 한반도 내부 사정과 대륙의 실정을 고려한다면...때가 좋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사람의 인력, 지형의 유리함, 하늘이 기회를 내려준다는 천시... 이 세가지를 모두 고려해도 무리한 계획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타샤 16-09-18 16:05
   
애초에 문제가 있는 글이네요.

우선 요동 정벌이지 중원 정벌이 아니에요.
중원까지 가서 주원장( 볼 수는 있으려나??)과 맞짱 뜰 전쟁이 아니다 이말입니다.


두번째로는 최영의 말대로 요동은 빈곳입니다.
여진족은 송화강 동쪽에 할거하고 있었고, 명나라까지는 아직 만주가 자기네들 땅이라는 인식이 없습니다.
만리장성 남쪽만 자기 땅이라고 생각하는거에요.

많은 장군에 대해선 잘 모르겠는데, 중국의 정벌이라는건 어디 어디를 학살하고 돌아다니는 그런거 없습니다.
가서 굴복 받고 바로 돌아오는겁니다.
따라서 요동은 말 그대로 빈땅 입니다. 거기서 우리가 "여긴 고려땅" 해도 명나라 입장에서는 달리 할말도 없어요.

설령 "야 요동 우리땅이다 내놔" 하면, 그때 생각해도 되요.


이즈음 명나라의 전공이 많은 이유는 다 토사구팽을 위해섭니다.
장군을 그의 휘하 군사들과 함께 보냅니다.
그리고 항복 받아오면 좋고, 거기서 죽으면 더 좋고... 이거든요?

명나라는 이제 갓 건국했습니다. 그리고 건국후 해야 할일은, 건국 과정에서 무력을 지닌 장수들을 제거 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언제든 군사를 이끌고(경험이 풍부한 군사력이죠) 도성을 점령하겠다고 나설 수 있거든요.

왕이 6명이나 되는것도 같은 이유에요.
왕이라고 안해주면 도성으로 향할까봐 불만 무마 차원에서 올려준겁니다.

유방이(한고조) 한신을 어떻게 했나요?
똑같습니다. 송나라의 조광윤도 건국 후 제일먼저 군사력을 가진 장군들을 제거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해도 될 일을 안한겁니다.
불가능한 일을 안한게 아닙니다.


물론 최영이나 우왕으로서도 이성계는 마찬가지 존재였어요.

요동 가서 정벌하면 좋고, 거기서 죽으면 더 좋고...
     
Centurion 16-09-18 16:32
   
애시당초 서달이 이끄는 25만 대군이 원나라로 진격하고,
요동과 몽골초원에서 북원 잔당과 만주군벌 나하추를 굴복시킨 상황인데..
요동이 텅텅 빈땅일리도 없고, 명나라가 반격할 능력이 안된다는 것도 말이 안됨.

그리고 전투병만 치면3만 밖에 안되는데..
그걸로 어찌 몽골, 만주를 치고 다니던 최소 15~30만 대군이랑 싸움?

게다가, 주원장이 공신 숙청이니 했던것도 추후 일이고..
명나라 장수들은 대부분 주원장 잘 따르던 의형제급 인물들임.

그래서 저 당시엔 배신이고 뭐고 딱히 할 상황도 아니었슴.
근데, 훗날 남옥이라던가..
간이 부어서 공적 자랑하면서 불만 좀 품었다가.. 아주 피바람이 부는데..

주원장이 공포 독재체제 수준으로.. 조정 장악력이 강했슴.

그래서 주원장이 공신 숙청할때 죽어나간것만 수만명이라고 할 정도인데...
제후들이 반란일으키는 상황은 저 시기에 기대할 게 못됨.
차라리 무서워서 다 내려놓고 도망가려는 인간들마저 나올정도..
(물론 그런 상황도 주원장은 집요하게 감시하며 안놔줌)

그리고 이성계가 이미 오래전에 만주에서 요동 한번 점령하고 돌아왔슴.
이유는 병사들 먹을 쌀이 없어서였슴. 고려가 당시에도 병력 수급은 물론, 보급 상태가 안좋음.

명나라 초기 상황은 솔까 그렇게 내분이 일어나거나,
어떤 좋은 기회가 생길만한 빈틈이 별로 없슴.

애시당초 명나라 주원장 세력은
소규모 군대에서 출발해서, 이선장이나 유기 같은 책사들의 조언으로 민심 얻으면서,
눈덩이처럼 커지고, 다른 경쟁자들 다 제압하며 커진 형태라서.. 결속력도 나쁘지 않았슴.

글고, 솔까 잘못 건드려서...
공민왕 때 홍건적 10만이 고려로 쳐들어올 때처럼..
만약 요동에서 이성계 병력이 전멸하고 나면...
사실 이걸 물리칠 군사력을 과연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진..
당시 고려 상황에서 모을 수 있을지 상당히 의문스러운 상황임..

게다가, 철령위라는 거 설치 자체가..
이 "위"라는 게 바로 군사조직임. 건주위, 철령위.. 이런게 다 군사조직임.
즉, 빈땅이 아니라 군대가 딸려서 배치된다는 소리임.

그래서 고려군이 철령위 설치 타령하면서 넘어오는 명나라 병사도 수십명 죽임.

"같은 해 3월에 서북면도안무사 최원지(崔元沚)가 '명의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지휘 두 사람을 보내 군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강계(江界, 압록강의 경계)에 철령위를 두고 요동에서부터 철령까지 10리 간격으로 70여 곳의 역참을 설치, 역마다 1백 호씩 주둔하려 한다'는 보고를 하였고, 이어 명의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에서 요동의 백호(百戶) 왕득명(王得明)을 보내 철령위 설치를 고려에 통고하였다. 최영은 노하여 명의 방문(榜文)을 가지고 고려의 양계(兩界)에 온 명군 병사 21명을 죽이고 이사경(李思敬) 등 5명은 현지에 잡아둘 것을 명했다."
          
버섹 16-09-18 19:31
   
공신숙청이 추후의 일이 아닙니다.
개국공신이자 재상이었던 호유용의 모반사건이 위화도회군 8년 전인 1380년에 일어나 수만명의 공신들과 관리들이 목숨을 잃었어요.
1384년에는 개국공신 이문충이 독살당했고, 그 다음 해에는 강남 평정과 북벌 통일 전쟁에서 큰 공헌을 했던 노장 서달이 독살되었으며, 1390년에는 이선장 등 1만 5천명이 호유용 역모에 연루된 혐의를 다시 받아 처형되고, 1393년에는 남옥이 역모 혐의를 받은 2만 여명의 연루자들과 함께 처형되었어요.
게다가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킬 상황이 못된다니요? 주원장 사후이긴 하지만 주원장의 손자인 건문제가 왕들의 세력을 축소하려 하자 북경지역의 왕이었던 연왕이 반란을 일으켜 남경을 점령해 재위에 오른 것이 위화도 회군 14년 뒤입니다.
주원장이 첩보기관인 금의위를 설치해 조그마한 잘못이 있어도 사람들을 마구 죽였는데, 그만큼 당시의 정정이 불안하고, 나라가 어수선했다는 이야깁니다.
               
Centurion 16-09-18 20:04
   
맞는 말이긴 한데요.

그래서 황건적, 홍건적 같은 민중봉기라던가?
공신들이 단합해서 대규모 역모로 주원장이를 죽이려 들었다거나,
지방관들이 독립을 선언하고 중앙조정에 반기를 드는 군웅할거의
반란이 일어난 건 아니죠.

단순히공신 숙청은..
 미리 화근을 뽑아버리자는 주원장의 의지에 가깝구요.

내분으로 나라가 찢어지고, 약화되고 이런 상태에서..
국력이 약화되고 그래야 침공할 빈틈이 생기는데..

결국 연왕 주체가 주원장 장남의 아들을 누르고
제위를 찬탈하고.. 나라가 안정되어 버립니다.

그나마 육룡이나르샤에도 나오듯... 정도전의 요동정벌이 이 시기에..
중국 내전을 활용해 뒤통수 치고 요동 차지하는 쪽으로 시도되긴 했었죠.

다만, 위화도회군 시기에 주원장이 눈 시뻘겋게 뜨고 살아있고 강력한 전제권력으로
공신들을 잡아 죽이던 시기인데.. 나라가 뒤집히거나, 국력이 쇠약해졌던 시기냔 말이지요.

예를 들어 박정희 정권시절...
막걸리보안법 시절에 대통령 욕 좀 하면 남산에 끌려가 두들겨 맞던 시절인데..
이걸 어수선해서 나라가 뒤집힐 상황이라고 하면 글쵸.

공포가 지배하던 철권통치시절인데..

어수선하다고 하려면..
여기저기서 군웅이 할거하고, 반란터지고, 독립하고, 역모일어나고,
황제의 권력과 위신이 바닥에 떨어진 후한 헌제 시절 이런걸 말합니다.
사마씨의 진나라도 8왕의 난 이후 이렇게 막장화되었다가 5호에 털리죠.

그런 상황이 당시 중원의 명나라엔 없었다는 말입니다.
버섹 16-09-18 20:27
   
주원장이 후대의 평판이 좋지 않은 이유가 독재체제 구축을 위한 이와같은 무차별 살상 때문입니다.
박정희 예를 드셨는데 상황이 다르지요.
주원장은 박정희와 달리 개국공신을 한 사람도 살려 두지 않을 생각이었고 그렇게 했습니다. 공신 뿐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권세를 가진 신하는 검교라는 첩보조직을 통해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감시했어요.
오죽하면 황태자인 주표가 신하들을 의심하고 죽이는 일을 그만 두라고 고할 정도였겠습니까.
이런 공포와 불신만 가득한 군신관계에 무슨 의리와 신뢰가 있었겠습니까?
자신들의 목숨이 언제 날아갈 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인데, 외부에서 조금의 요동이라도 있으면 흔들릴 여지는 충분한 상황이었다고 봅니다. 주원장 사후 4년뒤에 반란이 일어나 새로운 왕이 즉위한 것만 봐도 당시 사람들의 심경이 어떠했는지 충분히 알수 있는 일이지요.
     
Centurion 16-09-18 21:59
   
개국공신 죽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공포 독재체제의 그 자체 상황을 말하는겁니다.

지금 북한도 김정은 2인자를 한순간에 죽이고 있죠.
그런데 반란의 기미가 보이나요? 쫄아서 아무 일이 안생깁니다.

김정은 때도 그랬습니다. 
중국 국경의 몇 군단인가.. 거기서 쿠데타 음모가 있었죠..
거기 간부들이 작당해서 김정은 죽이려고 했죠.
그런데 다 총살 및 숙청당하고, 부대해체되고, 김정일이 천수 다누리고 죽었습니다.

짜달시리 의리와 신뢰가 없어도, 김씨왕조가 벌써 저렇게 오래버티고 있는게 현실이죠.

북한은 적국이 세계최강대국 미국이고
선진국 대열에 오른 부유한 남한인데도 저리 버티는데...

게다가, 주원장이라는 명나라 창업자가
일개 행각승에서 홍건적에 들어가, 추종자들을 모아서
주변을 평정하고 원나라까지 격파해 황제까지 올랐고. 그 명나라엔 군대가 많단 말이죠.

반면, 이를 상대할 이성계의 병력은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진 고려의 3~4만 병력이란 말이지요.
보급과 병력 충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이와중에 이성계가 몽골지역의 북원과 나하추의 만주를 평정한
15만 기병이 포함된 20~30만 명군 정예 별동대와 싸워서 이기고, 판을 흔든다?

게다가 님이 말한
주원장 사후 4년 뒤 그 반란으로
새로운 왕이 된 사람은..주원장의 아들 연왕 주체란 말이지요.
(물론 이것도 2대황제 건문제 주윤문이 번왕들 군권과 작위를 뺏는터라 발생한 일임)

물론  문약한 2대황제이자,
주원장의 태자의 아들인 주윤문은 주원장의 손자구요.

즉, 삼촌과 조카 사이입니다.

게다가, 나름 몽골을 상대로 전승을 거둘만큼,
무인의 기질을 타고난 연왕 주체가..자기 밑에 강력한 군단을 거느리고도..
30만, 50만, 계속 수십만씩 계속 충원되서 몰려오는..
건문제의 토벌군한테 궁지에까지 몰리게 됩니다.

그러다 건문제의 나약한 처신과 잘못된 지휘에
궁지에서 빠져나와 오히려 적군을 격파한 뒤
파죽지세로 치고 들어가 남경을 점령해서 이깁니다.

그리고, 여기서 나름 방효유나 건문제 쪽 여러 충신들이 죽고요.

즉, 님이 말한 것과 다르게..이게 만약 조선군 4만으로 진격했으면...

연왕 주체가 겪은 상황보다 더 심각한 궁지에 몰렸을게 뻔합니다.
연왕 주체는 그래도 주원장 아들인데다. 북경지역 연나라의 왕으로..
서달과 상우춘이라는 주원장의 명장들도 간혹 졌던 북원을 전승으로
격퇴할 정도인데도 저랬고, 심지어 주원장이 장자승계원칙만 아니었으면,
태자로 임명하고 싶을 정도의 걸출한 인물이었단 말이죠.

그래서 주원장은 물론 조정 대신, 공신들 사이에서도 눈도장 찍을만한 인물인데...
그런 주체도 저렇게 반란 일으키자, 거의 수십만 대군의 끝없는 토벌전에..
망할 뻔 했습니다. 이민족인 고려의 4만 병력이 요동으로 쳐들어갔으면...
사실.. 답이 없죠. 북원과 만주를 평정한 20~30만 대군..+ 연왕 주체의 병력..
저 뒤에서 또 계속 몰려올지 모를 수십만 대군까지 감안 한다면 말이죠..

요동만 딱 회복하고 조약맺고 끝낼 수 있는 상황이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계획한게 1397년이고 왕자의 난으로 1398년 8월 사망하는데..
연왕 주체의 정난의 변은 1398녀 8월에 터져서 1402년 7월에 마무리 됩니다.
즉, 4년에 걸쳐 30만,50만, 그 뒤로도 계속 수십만 대군의 장벽을 뚫어야 했단 말이지요.

이걸 권력누수가 전혀 발생되지 않은 주원장 생전에... 했어야 된다는게.. 이게 참..
          
버섹 16-09-18 22:36
   
북한을 비교하셨는데, 박정희 비교 때도 그랬지만 님은 항상 단편적인 시각으로만 비교를 하시는 것 같군요. 좀 객관적으로 포괄적으로 판단한 후에 비교를 해 주세요...
북한은 이미 60년동안 공고하게 독재체제를 유지해 온 나라이고, 명나라는 건국한지 얼마 안 된 나랍니다.
같은 선상에 놓고 독재의 강도를 비교하는 건 무리가 있는 것 같네요...

그리고 전 조선군 4만이 진격해서 정벌에 성공했을 거라고 말한 적 없습니다.
다만 님이 위에 퍼온 글은 중복에 과정을 섞어 공포심마저 유발하게 적어 놓은 게 황당해서 댓글 단 겁니다.
마치 중국인이나 조선족이 중국의 대단함을 자랑하듯 기술해 놓은 것을 퍼온 것 같네요.
어느 나라든 흥망성쇠를 겪기 마련입니다. 명나라는 막 성하고 흥하든 나라이고 고려는 저물어가던 나랍니다.
그런 두 나라의 군사력을 저런 식으로 비교하는 게 올바른 평가라고 봅니까?
두부국님의 말씀처럼 고려 초기의 강성하던 군사력과 비교해야 옳은 것이지요.
고구려는 수나라, 당나라의 130만 대군을 몇 차례나 물리친 경험이 있습니다.
전쟁의 결과는 병력만놓고 판단해선 안된다고 봅니다.
               
Centurion 16-09-18 22:55
   
주원장 생전엔 권력누수 현상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 뒤의 2대황제 건문제 주문윤이 문약한 스타일임에도..
황권이 확립되어 있었다는게 문제죠.

자기 삼촌들인 번왕들을 하나 하나 불러서 군권,작위 박탈해서..
xx하는 번왕이 나올 만큼요.

그 번왕 중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진 연왕 주체가.. 그래서 반란을 일으킨겁니다.

그리고, 그 건문제 주문윤의 명령에 따라, 공신들과 공신들의 아들들이..
군대 이끌고 연왕 주체의 반란군을 제압하러 갔구요.

단순히 공포 독재를 떠나서, 주원장의 카리스마든,그 어떤 영향력이..
공신 대규모 숙청에도 불구하고.. 그 뒤의 2대 황제까지 연결되었다는 것이죠.

주원장의 가장 큰 공신 중 하나인 서달의 아들 서휘조도 그런 케이스입니다.
연왕 주체를 격파했으나, 건문제의 지시로 철수하죠. 그러다 나중에..
주체가 남경을 점령하고, 제위에 올라서... 나를 따르라~ 명령해도..
심지어 주체의 마누라의 동생 즉, 자신의 처남인 서휘조가 이걸 안따릅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딱히 님이 생각하는 주원장의 공신숙청이..
명나라 공신집단의 충성심을 와해시킨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명나라 초기 기세가 쭉쭉 뻗어서 최전성기를 달리는 시점을 말하고 있는거에요.

이건 뭐.. 국운상승기의 최절정기 시즌을
지금 어떻게 정면 돌파하자는 소리를 하니까, 반론을 하는겁니다.

미국이 1,2차대전 끝나고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시점에..
미국에 전쟁 거는 소리랑 비슷하다구요.

미국이 쇠퇴할 때도 아니고..
거의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의 콧털을 건드리는 상황말이죠.

당시 명나라가 작은 나라도 아닙니다.
세계에서 병력대가리수가 1위 찍은 나라에요.

우리는 공민왕 때 홍건적 10만에 개경 털리고,
왜구 3만~5만쯤에..병력피해가 막심한 세월 지나.. 
이걸 제압하려고 20만 대군을 동원하기도 했었지만...

국가가 망조가 들어..
당시 우왕이 이성계에게 4만, 최영에게는 3천 정도 쥐어준게..
고려의 국력의 한계란겁니다.

이걸 뭔, 조선족, 짱개가 명나라 찬양하는 글처럼 파악하십니까?

대단함을 자랑하는게 아니고 "정난의 변"으로 검색 좀해보세요.
나도 그거 보고, 객관적인 전쟁사를 다루는 측면에서 서술하는거니까.

흥망성쇠를 논하는데.. 지금 명나라 최전성기 즉, 흥~~성~~하던 시기에...
고려가 망~~쇠~~하는 시기의 전쟁을 말하는거잖습니까?

(그 연왕 주체가 3대 황제에 오른 때부터가 명나라 역사의 최전성기입니다.)

수나라 군대 113만 물리칠 때 고구려군 예상규모가 30만입니다.
고구려 망할 때 인구가 70만호 가까이 되구요.. 즉, 비상시국에 1호 당 남자 1인 징발하면..
70만도 뽑죠.

근데.. 고려는 요동출병 당시 내부사정이 정말 개판이었습니다.
권문세족들이 산과 강을 경계로 땅을 다 차지하고, 백성들은 대부분 노비신세에..
전국토가 왜구한테 유린당하고, 약탈과 살인에 인구는 줄어들고,

심지어 드라마 정도전에도 나왔듯..
왜구 잡으러 다니던 고려군도 왜구에 엄청나게 깨져서 몰살당합니다.

고려 전성기 때 30만씩 동원하던 시즌 얘기 꺼낼 때가 아니에요.
명나라가 그 땐 없었는데요. 그 땐 요나라 거란과 남송이 있던 시절입니다.

나라가 그리 망조도 안든 시절이고.
               
Centurion 16-09-18 23:48
   
참고로 위키 좀 읽어보시길...

https://namu.wiki/w/%EA%B3%A0%EB%A0%A4%20%EB%A7%90%20%EC%99%9C%EA%B5%AC%EC%9D%98%20%EC%B9%A8%EC%9E%85

https://namu.wiki/w/%ED%99%A9%EC%82%B0%20%EB%8C%80%EC%B2%A9?from=%ED%99%A9%EC%82%B0%EB%8C%80%EC%B2%A9

이건 고려말 왜구 침입 시기 때 내용입니다..

당시 공민왕 때부터 우왕 시기, 위화도회군 근처 무렵까지 쭉 적혀있죠.

고려군이 대략 6만 정도로 나옵니다.

그만큼 고려 말기 상황이 개판이었습니다. 

고려 전성기 때를 갖다붙일 수가 없죠.

https://namu.wiki/w/%EC%A0%95%EB%82%9C%EC%9D%98%20%EB%B3%80

https://ko.wikipedia.org/wiki/%EC%A0%95%EB%82%9C%EC%9D%98_%EB%B3%80

이건 정난의 변 관련 위키입니다.

참고로 연왕 주체의 북경지역 군대 북쪽에 위치한 "요동 주둔군"도
나중에 건문제의 편에 서서  연왕 주체의 반란군(=정난군)을 공격하다 패합니다.

주체의 병력은 수만~12만이라고 적혀있고,

건문제의 병력은 50만~ 80만이라고 적혀있는데..

실제론 초기에 13만+ 50만 + 20만 + 30만?
그 이후에도 계속 병력이 몰려와서 확실치가 않네요.
그노스 16-09-18 22:09
   
전 센추리온님의 견해에 어느 정도 공감합니다.
그 당시 중국의 내정이 불안했다하면 결국 상대적인 것이 고려도 역시 불안해서 실제로 왕권 교체까지 일어났는데요.
내정에선 최영을 위시로한 국왕 근위세력, 이성계의 사병세력, 이성계를 추종하진 않지만 이미 유교에 감화되어 중국과의 전쟁에 반대하는 세력 등등.
남으로는 아직도 왜구의 침입을 경계해야 하는 상황에서 언제 끝날지 모를 장기전을 규모가 큰 중국과 벌이기엔 무리가 있었다고 봅니다.

비교가 좀 그렇지만 이라크가 이란을 공격해서 전략적 거점 다 차지하고나선 자기들은 이제 만족했으니 전쟁 끝을 선언했지만 당연히 더 거대한 이란이 가만히 있지 않고 반격을 했지요.
지난날 고려 윤관의 여진 정벌을 개인적으로 정치적인 면에서 높게 평가하지만 군사적으로는 분명히 실패였습니다.
유목민과 농경민족의 특성을 동시에 가진 강력한 기병을 보유했던 고구려와는 다르게 분명 공격형 군대에서 고려는 그 한계를 보였고, 고려는 분명 고구려는 아니었습니다.
고려가 여진과 전쟁을 먼저 시작했고 땅을 스스로 돌려주는 과감함을 보이며 체면 유지하고 스스로 전쟁을 끝낼수 있었지만, 명과의 전쟁은 다르지요. 고려가 잘싸워 요동을 점령하고 나서 이라크 마냥 전쟁끝을 선언할수도 없고 여진전쟁때 마냥 요동땅을 명에게 다시 내준다고 대국 체면에 명이 보복없이 그냥 얌전히 누구처럼 '앞으로 고려쪽에는 기왓장 하나 안던지며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겠다' 고 할까요.
하물며 위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얼마후 왕권이 다른 성씨로 교체될 정도로 고려의 국론이 분열된 상황인데요.

기병으로 대륙에서 장거리를 빠르게 이동하며 엄청난 수의 민중을 잔혹하게 학살하며, 그보다 더 빠르게 그에 대한 공포심이 적 민중을 휩쓸어 종당엔 스스로 무너지고 내분을 야기시키는 심리전을 바탕으로해서 결국 더 큰 규모의 적을 무찌른 유목민 군대.

명처럼 통일제국이 아니라 국민당, 공산당, 군벌로 나뉘어 벌이던 중국의 내전에 끼어들어 압도적인 화력을 앞세워 나름 효과적인 공군을 앞세운 기계화군대(전차는 의심스러웠다지만)를 가졌던 저 아랫 나라 군대.

고려에게는 인력면에서나 요동이라는 넓은 지형적 약점, 하늘이 기회를 내려준다는 천시를 모두 염두에 둔다면 저들에 비해 불리한 점이 많았다고 봅니다.
전쟁은 확실히 이길수 있다고 판단될때 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완벽한 계획에서도 언제든지 변수가 생기니까요. 믿을만한 예비병력도 없이 끝없는 전쟁에 뛰어든다는건 전 반대입니다.
먼저 공격을 받았다면 혹 모르지만 저런 현실을 무시하고 명예와 고토 회복을 위해 전쟁을 벌이는건 동의할수 없고, 저도 치뤄낼수 없는 자신없는 전쟁을 조상이 못했다고 조상탓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지금 중국도 내정이 불안하다면 불안하지요.
소수민족 문제, 민중간의 엄청난 경제격차, 권력을 집중시키려는 시진핑에 대한 지방 세력의 반발(지난번에 군사반란 계획도 미리 차단되었지요) 등등.
그렇다고 이때다 싶어 지금 진짜로 무력을 앞세워 북진통일하고 지금의 중국과도 전쟁벌여 간도 찾아오고, 대륙백제 찾아오자는 주장을 진심으로 얼마나 많은 한국 사람들이 할수 있을까요.
저 전쟁에 반대하면 우리 모두 이성계가 되는 것인지...
전쟁망치 16-09-18 22:27
   
애초에 명이기 전에 원나라 였던 시절에 온갖 몽골기병 전술부터 유목민의 문화까지 흡수한 대륙에서
거기다가 여러 민족으로 나눠진 제후국들까지 이미 하나의 정권에 통합이 되어 있으니

각개격파 하기는 당시 명나라로써는 쉬웠겠죠.
저때는 어쩔수가 없었음.

각 제후국들이 점점 스스로의 독립심을 못지켜내고 큰세력아래 모여서 살기를 원했었나봅니다
     
그노스 16-09-18 22:31
   
그런거보면 유럽의 다원화가 부럽습니다.
     
Centurion 16-09-18 23:03
   
주원장도 회족이란 썰이 있더군요..
고려인(?)이라는 카더라 썰도 있긴 하죠.

생긴거 보면 아주 못생겼습니다.

꿈꾸는자 16-09-19 06:54
   
고려 요동정벌당시 명나라 요동군 약 4만....주원장이 진우량을 물리치고 주위의 적들을 평정하고 북벌을 단행하면서 원나라 수도 대도로 진군할때 동원한 총병력은 30만...겨우 30만으로 원나라를 만리장성밖으로 몰아내고 중국을 통일함...발제글 쓰신분 아주 말도 안되는 병력을 쓰셨네요..현실을 모르는...고려가 요동정벌을 단행할시기와 그 이후에도 중국사서엔 당시 주원장이 신하들과 얘기할때 고려가 20~30만 대군을 동원해서 쳐들어오면 어떻게 막나하고 몇번이고 걱정했던게 여러차례 기록되어있음...모르면 찾아보시고....그리고 명나라 장부상의 군대와 그것도 중복계산한 군대를 아주 엄청나게 많게 표현하셨네요 ㅋㅋㅋㅋ...
영락제 주체가 남정해서 건문제와 황제의 자리를 두고 싸울때 주체의 군대가 겨우 수만명에 불과했는데...50만을 휘하에 둬요 ㅋㅋㅋ...진짜 웃고 간다...중국에서 만든 당시 역사를 기록한 사극만 봐도 당시 영락제 주체의 군대가 얼마나 적었는지 잘 나타나는데 ㅋㅋㅋㅋ
     
shrekandy 16-09-19 11:56
   
주원장이 20만 쳐들어오면 어쩌냐고 한건 고려가 아니라 조선으로 압니다만....
쌈바클럽 16-09-19 07:55
   
그만큼 힘들다는 건 이해하겠는데 황제 스테이지까지 이성계가 도달했다면 명나라는 이미 100만명 가까운 사상자가 있던지 그정도가 아니더라도 어찌됐던 100만명을 전투에 투입해서 국고를 쓰고도 패배한 상태인데...

다시 황제가 100만명을 또 징집해서 출정한다니 잠깐사이에 200만이나 되는 군대를 움직인다는게 아무리 명이 대국이라고 해도 좀 말도 안되는것 같아요.  그쯤되면 망국테크 아닌가요? 그 단계에는  요동근방 세력을 싹다 이미 토벌한 상태이니 고려도 고구려 고토 수복을 어느정도는 했겠는데요;; 몽골과 손 잡으면 명이 어찌 쉽게 원정을 오겠어요.

황제가 기세좋게 100만 대군으로 원정올게 아니라 고려와 몽골이 밀고 내려오지 않을까 조마조마할 타이밍인듯
한데 말이죠.ㅋㅋ
     
Centurion 16-09-19 13:20
   
판타지가 아니구요.

명나라 주원장이 대충 그 시기 통일할 때..
원나라 탈탈 승상이 80만 대군을 끌고 홍건적을 토벌합니다.
주원장이는 밑에 한 20~30만 대군을 이끌었고, 진우량이는 한 60만 대군, 장사성도 주원장과 비슷했죠. 그 외 군벌, 원나라 예비병력 합쳐도 200만 가까이 굴러다녔던 시대고..
그걸 양쯔강 이남 통일하고, 북부로 진격해서 원나라 기반을 흡수한게 명나라 초기 군사력이란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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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하추

무칼리의 후예로 그의 집안은 요동 지방의 군사적 책임을 대대로 맡아왔다. 원나라가 멸망하고 막북으로 후퇴하던 시점에서 심양을 근거지로 스스로 행성승상(行省丞相)이라 칭하며 만주 지방에 세력을 뻗쳤다. 그는 북원의 아유르시리다르와 함께 협력하여 명나라를 압박하는가 하면 만주지방 비롯해 한반도 북부 전역까지 야심을 드러냈는데 1362년 2월 고려의 역신 조소생(趙小生)과 탁도경의 잔당과 함께 수 만의 병력을 이끌고 동북면 쌍성[1]을 공격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동북면병마사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게 함흥평야의 대회전에서 참패하여 조소생, 탁도경의 잔당을 완벽히 뿌리뽑았으며 나하추의 한반도 진출도 좌절시켰다. 나하추는 이때의 전투에서 이성계에게 크게 감명받아 그는 공민왕과 이성계에게 예물을 보내며 화친을 맺었다. 고려에서는 그에게 정1품의 벼슬인 삼중대광사도를 주었다.

이후 나하추는 요하를 엿보면서 세력 확장을 꾀하였으나 중원에서 새롭게 발흥한 명나라의 주원장은 풍승과 남옥에게 20만 군사를 출병시켜 나하추의 근거지인 금산을 점령하였다.

이때 나하추는 하늘을 보며 탄식하며 말하기를, “하늘이 나에게 이 무리를 거느리지 못하게 하는구나”라고 하였다. 그가 명나라에 항복하자 그의 군사 약 20만명이 투항하였고[2], 해서후(海西侯)에 봉해져 운남정벌에 나섰다가 병으로 사망하였다.

《太祖實錄》 卷182 洪武 20년 6월 丁未條 “得其各愛馬所部二十餘萬人”

https://namu.wiki/w/%EB%82%98%ED%95%98%EC%B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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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7년(홍무 20년) 정로좌부장군(征虜左副將軍)으로 임명되어 대장군(大將軍) 풍승(馮勝)과 함께 북원의 태위(太尉) 나하추(納哈出)를 정벌하기 위해 출정하였다. 2월 3일, 풍승이 이끄는 군대가 통주(通州)에 도착하였고 경주(慶州, 지금의 내몽골 바린 좌기 부근)에 원나라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남옥을 보내 원나라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뒤이어 군대를 이끌고 추격하여 나하추가 금산(金山) 일대에 주둔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나하추가 사람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였다. 남옥 등은 나하추가 거짓으로 항복하는 것을 알아채고 그를 생포하여 돌아왔다. 이 때 나하추의 군대가 모두 명나라에 귀순하였다.

나하추를 토벌하는 동안, 풍승이 죄를 입어 남옥이 대장군(大將軍)에 임명되어 계주(薊州)에 주둔하였다. 이 때 원 순제의 손자 토구스 테무르가 즉위하여 명나라의 국경을 위협하였다.

1388년(홍무 21년) 남옥이 15만의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여 대녕(大寧)을 지나 경주(慶州)에 도착하였다.

정탐을 통해 원나라의 주력이 쿨룬 부이르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여 남옥이 빠른 속도로 진격하여 백안정(百眼井)으로 이동했다. 백안정에서 쿨룬 부이르까지는 40리 정도에 불과했으나, 원나라 군대의 흔적을 확인할 수 없자 남옥은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려고 했다. 정원후(定遠侯) 왕필(王弼)이 반대하며 계속 진격할 것을 주장하였다. 남옥이 여기에 동의하여 왕필을 선봉으로 삼고 신속하게 진격하였다. 원나라는 명나라의 군대가 마초가 부족하여 깊숙히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방비하지 않고 있었다. 때문에 명나라의 군대가 진격하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왕필의 군대가 원나라의 진영으로 돌입하자 크게 당황하여 맞아 싸웠지만 당해내지 못했다. 태위(太尉) 만자(蠻子) 등이 전사하고 그 무리가 모두 항복하였다. 원나라의 황제 토구스 테무르와 태자 천보노(天保奴) 등 수십 명만이 가까스로 도망쳤다. 남옥이 기병을 파견하여 추격하였으나 잡지 못했다.

둘째 아들 지보노(地保奴)와 여러 비빈과 공주 이하 수백명을 사로잡았고 뒤에 다시 오왕(吳王) 타아지(朵兒只)와 대왕(代王) 달리마(達里麻)를 비롯하여 평장(平章) 이하의 관리 수천 명, 남녀 7만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원나라 황제의 옥새와 인신 등을 손에 넣었다.

남옥이 다시 합라장영(哈剌章營)을 공격하여 포로와 가축 수만을 사로 잡아 돌아왔다. 회군하여 양국공(涼國公)에 봉해졌다. [2]

https://ko.wikipedia.org/wiki/%EB%82%A8%EC%98%A5_(%EB%AA%85%EB%82%98%EB%9D%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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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까 요동의 나하추가 20만 대군 이끌다 항복하고,
원나라 잔당인 북원이 저렇게 망했다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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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요동 정벌은 가능하였나


만약 북원을 치러 간 명나라의 15만 병력이 북원을 부순 후에 고려의 공격을 그냥 경고성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진짜 침략 시도로 판단하여 고려로 전면 진공한다면 막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현지인들의 민심이 고려 쪽으로 확실히 돌아서려면 명군을 몇 차례는 격파해야 했을 테고, 5만에 불과한 고려군으로 두 배가 넘는 명군과 야전에서 정면 대결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니 결국 이성계는 정면 충돌을 피할 공산이 큰데 명군이 요동 수복이 아닌 전격전으로 치중할 경우 고려로 들이닥칠 것이고 몽골과 맞서던 때처럼 산으로 도망쳐 방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때문에 요동과는 별개로 수도인 개경이 함락되고 명이 한반도에 주둔했을 가능성도 크다. 사실 당시 명나라는 몽골에 원정까지 가서 대도시(카라코룸, 상도 등)들을 잿더미로 만들고도 물자가 남아돌아 베트남과 티베트에 교전을 거는 한편 조선은 얼마 전까지 왜구가 하도 설쳐서 명의 정규군과 무장을 비교하면 농민군 수준인 홍건적에게도 중요 도시들이 함락될 정도로 국력이 떨어졌었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이성계도 바로 보급을 걱정할 정도로 물자가 넉넉하지 않았기도 했다. 더구나 이전의 서술과 다르게 몽골 세력은 유목 국가라 적어도 군사력 면에서는 고려, 조선보다 약체로 단언하기 힘들며 외형적인 전력으로는 만주족이 조선을 유린하기 시작할 때보다 강했던 적이 많다. 또 군사적 중요성을 가진 화기[20] 역시 압도적으로 우수하다고 보기가 힘들기 때문에 당시 명과 교전했던 국가들과 비교하여 병종에 있어서도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상대적인 비교를 하기 위해 무장의 질이나 병서를 살펴도 딱히 우월성이 보이지는 않는다. 참고로 명과 교전한 몽골과 베트남 등은 패배했고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며 넘치는 보급으로 화포를 사용해 도시를 초토화시키던 당시 명군을 생각하면 고려, 조선도 이기든 지든 많은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컸다. 이성계 역시 명장이니 매우 잘 싸워서 이기면 되지 않나라고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명을 공격한 대표적인 명장인 누르하치 역시 명군의 무장 상태들을 고려하여 명군이 약체화 되어가고 있을 때 움직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명장이라고 무슨 기적을 일으켜서 이기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누르하치는 생각보다 조심성이 많은 성격이라 좋은 관리가 부임하여 명군의 무장과 보급이 일시적으로 강화된 것 같으면 황제의 삽질로 해고될 때까지 기다리기도 했었다. 그리고 명과 긴장 상태에 있었던 이성계와 이방원 역시 간간이 정탐을 해서 나온 결론이다. 물론 구체적인 방안으로 명과 긴장 상태가 높아지던 국가들에 명의 대부분 병력이 묶이는 순간을 노리면 어떻게 가능성이 있을 수 있으나 당시 교통과 통신 수준으로는 그 타이밍을 잡기가 힘들며 설사 잡을 수 있었어도 그 보고를 받았을 때는 상황이 이미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

결국 구체적으로 볼 때 명나라가 고려의 요동 공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대몽고, 여진 정책을 고려와 명 양국이 어떻게 수립하는지, 그 외에 명나라가 서방이나 남방으로부터 위협을 느끼고 얼마나 병력을 배치해야 한다고 여길지에 따라 성공률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군사적인 문제이지만 그 이전에 국제 정치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북원, 베트남, 티베트 등과 적대하면서도 요동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고 군대를 보내기까지 한 마당에 명과의 충돌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정말 고려가 요동을 공격해 점령한다면 명의 주적에 바로 고려가 포함될 것임은 자명했다. 그렇다고 해서 팽창주의적 성향을 가진 명이 사방[21]에 배치한 군사력을 고려에 모두 투사할 것이라고 보기에는 어렵지만 고려의 사정은 명의 예상보다도 좋지 못했다. 고려가 여요전쟁이나 윤관의 여진 정벌 때처럼 수십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는 여력이 되었더라면 말이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만, 여말선초의 상막장을 겪은 고려가 동원할 수 있었던 군세는 5만 남짓. 명이 밑에 서술된 병력을 투입한다면, 고려가 비록 명의 군사 작전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겠지만 단기간에 어떻게 하기는 아무래도 힘들었다. 그러면 "장기적으로 가면 되지 않나?"라는 의문도 있을 수 있으나 우선 보급도 좋지 않고, 거기에 고려 내부에도 정치적인 문제가 있었으며, 명이 팽창주의를 천명해 사방에 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고려 역시 얼마 전까지 피해를 입히고 있었던 일본이 어떻게 움직이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장기전으로 들어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비록 일부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이성계가 왜구를 격퇴하며 일본도 많은 피해를 입은 것처럼 묘사되기도 하지만 일본사를 참조하여 볼 때 꾸준히 인구와 국력을 쌓아 강성해진 일본의 저력[22]은 이미 고려 말에 보통 사람들의 생각보다 대단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당시 고려, 조선 사람들도 최소한 군사적 문제에서 그 심각성을 알고 있었고 또 중국사나 일본사를 보면 일본의 세력 역시 상인들을 통한 정보망이 있었기 때문에 고려의 주력군이 명군과 교전하느라 묶이는 신세가 된다면, 단순한 해적들이야 정리가 어느 정도 되어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고려를 약탈하기도 했던 지방 정규군들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는 일이었다.지방 정규군까지 전멸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으나 일본사의 행적을 보면 잘만 살아있다. 이러한 이유들은 많은 사람들이 요동 정벌의 실현성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원말명초 시기 명나라는 요남 지역에 정료도위(定遼都衛)를 설치하여 요동에 대한 영향력을 보이기 시작했고, 상당한 숫자의 군사 세력이 요동에 주둔하게 되었다. 정료위의 명군은 위(衛)라는 군사적 단위에 의해 구성되었는데, 이 지역의 위는 최종적으로 25위에 달하였고 그 유명한 철령위 역시 이러한 25위 중에 하나다. 25위가 모두 갖추어지게 되는 것은 나중의 일이지만 명나라는 고려의 2차 요동 정벌, 곧 위화도 회군 직전인 1387년 이전까지 13위를 갖추는데 성공한다.

명나라의 군사 단위에 있어 1위는 일반적으로 5,600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25위가 최종적으로 갖추어진 상황에서 명은 요동 지역에서 15만의 군사력과 최소 40만이 넘는 인적 자원을 요동에 배치했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나하추 항복 직전 - 고려의 2차 요동 원정과 위화도 회군 직전인 1387년 무렵에는 13위까지 설치되어 있었으며, 이는 명나라가 일단 6만 5천 이상의 병력을 요동 방면에 투입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이 정도만 해도 고려의 공요군과 맞먹는 수치인데 북원 전선이 어느 정도 안정될 경우 투입될 병력은 북원과의 전쟁에서 잃을 병력을 빼도 공요군을 압도한다. 반면 공요군은 점령 과정에서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을 병력으로 이들을 모두 상대해야 하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이는 당시 고려군 지휘관들에게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을 것이다.

https://namu.wiki/w/%EC%9C%84%ED%99%94%EB%8F%84%20%ED%9A%8C%EA%B5%B0#s-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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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주원장도 고려의 20만 대군이 쳐들어오지 않을까 걱정했던 적이 있는데..
위화도회군 당시 고려군 전체규모는 6만이었다는거고..
그 중 4만~5만이  이성계 밑에 있었고.1만이 최영 밑에 있었습니다.

이게 당시 권문세족이 산과 강을 경계로 온 국민을 노비로 만들어서 그런 것인지..
공민왕 때 홍건적, 왜구, 원나라 세력과 수없이 충돌하면서, 병력자원이 고갈된 것인지..

아니면 둘 다 인지는 모르겠으나,
왜구 토벌 과정에서도 사실 고려가 병력을 쥐어짰는데, 생각외로 적은 규모가 모입니다.
왜구보다 숫적으로 크게 우세하다고 보지 못할... 1~2만명정도.?

그래서 홍산대첩에선 이성계가 10배나 많은 왜구를 이겼다.. 뭐 이러는데..
이성계 직속 사병들인 동북면에서 데려온 병사가 대략 1500~2000명입니다.
이걸로 이성계가 여기저기 많은 공을 세우고 다닌거구요.

하여튼 고려가 그렇게 왜구에 시달리면서도 병력자원이 없는건지..
고려의 조세 행정 기능이 마비되서 그런건지.. 권문세족의 사유화가 심각해선지..
나라 꼴이 정말 엉망이었단 말입니다.

북원의 만만찮은 전력과 요동군벌 나하추의 20만 대군이 깨지고 항복하는데..
전투병으로 치면 3만, 비전투인원 포함 4만 정도 되는 군대로.. 이걸 깨부수러가야되는겁니다.

게다가, 딱히 당시 고려군이 기동성 좋은 기병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대체로 보병 비율이 높았고..

오히려 명나라 남옥이 15만 기병을 이끌었네,
명나라의 25만~30만 대군이 몽골과 요동에서 돌아다니는 상황이란 말이죠.

심지어 요동에는 13위가 배치되어 5,600 X 13 = 6만 병력이 배치완료된 상태였고..
이렇게 치면 대략 30만 이상의 병력이 지금 고려군이 당장 부딪힐 가능성이 높고..

그 후 기적적으로 승리해도..
명나라 주원장이 작심하고 "징집"도 아닌 통일 당시 확보한..
200만 정도의 상비군 전력을 투입한다면 골 때린단 말입니다.

즉, 기적적으로 30만 명군을 격파해
요동을 정벌하고 멈춰서 협상해서 인정을 받으면 되긴 한데..
이걸 과연 주원장이 심보로 받아주겠어요?

왜구 3만 정도에도 당시 전국토가 쑥대밭이 된게 고려상황이에요.
그나마 우왕시기보다 상황이 나았던 공민왕 때 10만 홍건적한테 개경이 함락되었구요.

지금, 원나라를 북쪽으로 쫓아내고,
북원에서 8만의 포로를 잡고, 요동의 20만을 항복시킨
명나라 세력하고 고려 4만 병력이 전면전 하는 소리입니다.
ost하나 16-09-19 11:25
   
우~하하...
본문 글이 판타지급으로 부앙부앙 합니다,,,이건 뭐 패배주의를 정당화 하는 글이군요
구름위하늘 16-09-19 12:47
   
전쟁은 총력전이기는 하지만,
실제 전투에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그 총력의 1/3도 안됩니다.

지역군은 각 지역을 지키는데 사용하는 것이고,
기동력을 가지고 이동해서 싸울 수 있는 전력은 십분의일도 안되죠.

어디서 싸우느냐에 따라서 적이든 아군이든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의 한계는 서로 있습니다.
구름위하늘 16-09-19 12:52
   
참고로 명나라 군대 구조를 설명한 자료를 첨부합니다.

http://www.yangco.net/new0822/?doc=bbs/gnuboard.php&bo_table=1china_11&page=2&wr_id=4

10. 명나라
명나라도 기본적으로 원나라의 군제를 답습했다. 즉 민간인과는 구분되는 군호(軍戶)를 작성해 군호에 등록된 병사로 군대를 충원한 것이다. 원나라와의 차이점은 원나라가 군인들에게 몇 가구를 배정해 한 명의 병사를 지원하게 한 데 비해 명나라는 군인 중에 일부를 땅을 경작하게 하는 이른바 둔전제(屯田制)적 성격이 강했다는 것이다. 즉 국경지방에서는 3명의 병사 근무할 때 7명의 병사는 경작을 하고, 내륙지방에서는 방어군(근무하고 있는 병사) 대 둔전병(농사를 짓고 있는 병사)의 비율이 2: 8이었다. 따라서 명나라의 정부장부에 등록된 병사가 전성기에는 280만 ~330만 에 이르렀지만 실제로 복무하고 있는 병사는 대략 100만 여명 안팎이었다. 명나라의 병사는 원나라와 마찬가지로 대대로 병사가 세습되는 제도였다.
     
Centurion 16-09-19 13:34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다만, 훗날 정난의 변을 보면..
연왕 주체가 겪는 상황보다 고려군이 겪어야 될 상황이 낙관적인 상황은 아닌 듯 싶습니다.

4만 병력 정도로.. 둔전병이라고 보기 어려운 북방지역을 휘젓고 다니던
서달과 남옥의 30만 대군 정도랑 충돌은 예상되는 암울한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듯 합니다.

고려가 요동만 먹고 협상하려 해도,
명나라쪽에서 이미 피도 보고, 땅도 잃고, 체면을 구겼는데.. 가만히 있진 않겠죠?

나중에 이성계가 즉위 2년차에 군적에 20만을 올렸다는데..
아무래도 권문세족에 대한 토지개혁의 결과로써 나타난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다만, 20만이 동시 출격할 상황은 아니고,
이 역시 번상병 개념과 정군, 봉족 개념으로 따진다면..
실질 병력은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시절인 6만 수준에서 크게 개선되진 않은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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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군역의무자는 1393년 20만8000명에서 증가하여,
1477년에는 정군 14만6000여 명과 봉족(보인) 36만여 명을 합하여 50만여 명에 이르렀다.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4052268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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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구름님 말씀대로 하더라도
대략 고려군 6만 VS 명군 100만의 싸움..
최소 공요군 4만 VS 30만(요동군 + 원정군)의 싸움이 되겠지요.
Centurion 16-09-19 15:01
   
그리고 추가적으로.. 둔전제 말인데요.
제가 생각해보니, 당시 명나라의 둔전제는 아무래도
식량소모나 군사비용을 조금이나마 줄여보려는 의미가 강하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보급이 원활하지 않은 시절, 최전방에서 식량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조조나 제갈량도 둔전을 실시했다거나..
서양에서도 1차 대전 때에도 조금 주둔이 길어질거 같으면..
주변공터에 순무를 심었네.. 이런 이야기가 나오죠.

제가 강산풍우정이란 드라마를 재밌게 봤는데..
거기서 오삼계가 숭정제를 만나서, 명나라 북방군에서 군사반란이 일어났으니
군량을 달라고 애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숭정제가 군량을 주긴 주는데,
오삼계가 식량 수레를 갖고 가는게 아니라, 은자가 가득 담긴 상자를 들고가더군요.

임진왜란 때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었죠.
이여송의 군대가 은자만 달랑 들고와서 현지에서 사먹으려다 낭패를 보았지요.
비록 만력제가 100만석을 조선 국경에 실어보냈다고 하는데, 이거 나르기가 힘들어서..
수송이 지체되었구요.

결국 명나라군은 주변 농민이나
농민들 쌀을 사들여 공급하는 상인들에게 돈주고 사먹으면 되었다는 소리겠지요.

비록 세월의 간극이 대략 100~200년 이상 차이가 난다지만..
둔전제라는게 당시 병사들에게 지급될 식량과 보급, 군사비용을 절감해보려는 노력으로 보입니다.

현대판 둔전제를 실시하고 있는 북한의 경우.. 휴전선 GP에서도 조차 농사를 짓고 있지요.
그렇다고 해서,  이 북한의 둔전병들이 유사시 전투에 투입이 안되는 상황도 아니라고 봅니다

농사짓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농사일을 몇천평씩 제대로 하려면 매일 붙어있어야 되기도 하지만..
몇백평 수준의 작은 텃밭에 주말농장 개념으로 관리하는 분들도 계시죠.

즉, 조선이 정군과 봉족, 보인 개념으로...
 정군은 교대로 번상하고, 보인은 그걸 경제적으로 보조하다보니,
실제 병력은 적었던것과 달리..

명나라군은 병력은 일단 많이 뽑아놓고, 군사예산 절감차원에서 둔전을 실시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인구대비 병력으로 보더라도...
명나라가 1.5억 인구에 330만 병력(인구의 2.2%)을 유지하는 것과

조선이 4~5백만에서 많게는 1천만 인구에
정군 18만 정도(1.8%)에 보인 35~46만(3.5~4.6%) 수준,
정군+보인 합계를 인구비율로 따지면 53만~64만(5.3%~6.3%)을 둔걸 비교해보면..
(조선인구를 500만으로 잡으면, 저 비율의 2배)

명군처럼 조선이 인구의 2.2%를 잡으면 대략 11~22만 병력이 나오고..
정군을 교대 없이 모두 투입하면 적게는 6만, 많게는 18~20만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물론, 보인의 경제적 부담이 평상시의 3~4배는 될것입니다만..)

조선 태조 이성계가 20만 병력을 정군과 보인개념 없이 묶은 것인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게 맞다고 하면 좀 해볼만 하겠지만..
만약 조선초기 20만이 정군 6~7만에 보인 14만의 합계였다면 실로 골치아픈 일입니다.

아무리 고려말이 막장이긴 했어도, 병역인구가 저렇게 줄은것은 심각한 일입니다.
다행히 저게 정군 20만에 보인 40~50만이 빠진 수치라면..
훗날 성종~중종시기보다 군사력이 높았다는 뜻인데

1388 년 4~5만 대군을 이끌고 돌아선 위화도 회군 후
1392년 조선을 건국해, 태조 2년 무렵 작성된 군적에서
20만 대군이 존재했던건 좀 신기한 일입니다.

이게 권문세족에 대한  토지개혁의 성과로써...
권문세족의 노비에서 해방된 양인들이 대폭 늘어서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만약에 제가 태조 이성계 상황이었다면..
양반과 노비계급 등 병역면제 계층을 싸그리 없애고..
100만호로 추정되는 조선의 모든 가구마다 1호 당 1인이 군복무하도록 법을 정하고,
대략 100만 대군을 군적에 올린 후..
농사 안짓는 겨울쯤에 예비군훈련처럼 3교대 정도 돌려서 전투력을 유지하고,

평시에는 대략 6등분해서 2개월씩 번상시킴으로로써, 대략 16만의 상비군을 확보하고..
전시에는 대략 3등분해서 4개월씩 번상시킴으로써, 대략 33만의 군대로 침공을 계획할 수 있겠죠..

국영 말 목장을 대폭 늘려서.. 기병을 대략 15만 정도 육성한다면.. 더더욱 좋고 말이죠.
기병 15만+보병 20만쯤 되는 병력으로 요동정벌을 했다면... 그래도.. 명나라랑 해볼만 했을겁니다.

그리고, 비상시국일 경우
1호 당 1인, 즉 5인~10인 가족당 1명의 남자를 차출해서 군대를 굴리고..
나머지 4~9명의 식구가 그 1인의 식량과 군사비용을 보태주는 형태로... 허리띠를 졸라맨다면..
100만군대도 잘하면 굴릴 수 있었겠죠.

그러면.. 한방에 요동먹고,
명나라랑 자웅을 겨뤄서 북 중국을 삼키고,
다시 양쯔강을 건너 명나라 멸망시키고 중원을 차지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정도는 되어야, 주원장 시기 명나라랑 한판 떠볼만 하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그래도 주원장의 명나라보단 병력이 반도 안되긴 하지만..

요동에서 잘하면 여진족 수만 기병을 추가로 얻고,
몽골이 연합해주면 기병 수만명을 추가할 수 있겠군요.
거기다 북중국을 집어삼키고,, 여기서 병력을 점령지에서 차출하면 되긴 하겠으나..
요나라나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 등 이민족국가들이 북중국을 차지한 후..
어떻게 한족 병력을 차출했는가? 이것에 대한 자료조사, 고민과 논의가 필요하지 싶네요.
구름위하늘 16-09-19 15:29
   
공민왕/우왕/태조의 3번에 걸친 요동 정벌 계획 (실제 진행은 공민왕 때 뿐이고, 그마저 엉망인 진행으로 실패)이 있었다는 점에서 아주 불가능한 계획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시적인 성공을 했다고 해도
윤관의 동북9성 사례와 같이 그걸 유지할 수 있었냐는 관점에서는 비관적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정말 상황이 잘 풀려서 요동을 10년만 유지할 수 있었다면
만주평야의 곡창 지대와 거기서 길러지는 기병을 배경으로 크게 성공할 수도 있을 가능성은 있었다고 생각하네요.

결국 도박이고, 역사의 당사자들은 주사위를 던지는 입장이었겠죠.
     
Centurion 16-09-19 16:29
   
확실히 구름님은 저보다 아는게 많으시고 논의할만한 분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다만.. 구름님이 언급하신..
여진족 상대로 17만 대군을 투입한 윤관이 처한 그 시절보다도..
어떤 면에선 더 어렵지 않나 생각됩니다.

저도 윤관 시절 역사를 살짝 들여다보니..
나름 여진족도 수만명을 동원할 정도로.. 위기의식을 가졌던 시기였지만..
고려군이 수천 단위 병력도 전멸하고,
척준경이 윤관이나 다른 장수들을 구출해주는 그런 대목이 종종 나오지요.

그렇게 9성 반환과 화평을 맺은 후
윤관이 상대했던 오야속의 친동생 아골타가 족장이 되어
3천여명으로 요나라 10만 대군을 격파하고
다시 1만으로 몇십만을 격파했네.. 이런 이야기가 나오구요.

그런 전투력을 가진 금나라가 요나라를 몰아내고 제국을 세운것은..
정말.. 기적적이고 세계 역사에 유래를 찾기 힘든 군사적 성공이었습니다.

다만, 명나라가 북원을 격파하고, 나하추를 굴복시킬 때..
이 명군을 상대할만한 군사세력(기병 중심의..몽골, 만주도 꺽인 시점)도
찾아보기 힘든  상황인데..

기병이 주력병종도 아닌 고려군이...
과연 기병세력이 풍부한 몽골을 꺽은 명군의 상대가 될련지 이게 좀 걸리는 부분입니다.

한마디로.. 명군은 원나라의 군사적 전술, 병종체계 같은
패러다임을 어떻게든 극복한 집단인것이죠.

저도 명나라는 딱히 좋아하긴 커녕 싫어하는 사람입니다만,
명나라와의 전쟁은 이기기 어렵다고 생각하는게 그런 여러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고려군이 금나라 여진족급이라고 해도..
금나라는 몽골에게 밀려서 패망했고, 몽골은 다시 명나라에게 패배했고,
고려는 과연 어찌될련지...

물론 홍건적이라는 명나라의 모태세력과의 충돌경험은 있습니다만..
제가 볼땐.. 고려군이 아무리 이성계 지휘 아래서도.. 무쌍을 찍을 거 같지 않습니다.

어쨌든 정말 기적을 바래야 되는 상황인듯 싶습니다.
Centurion 16-09-19 15:39
   
그리고 더불어..
위에 댓글 중에 절 패배주의니 조선족이니 짱개니 뭐니 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저는 초딩시절부터 집에 얼마 없던 위인전, 역사책, 역사 백과사전을
하도 반복해서 읽어서..책표지가 떨어져나가도록 읽은 전쟁사 덕후구요.
(전략 시뮬게임은 동서양 가리지 않고 턴제든 RTS든  아주 즐겨 합니다.)

제가 전쟁사 덕후다보니.. 초딩때엔 친척집 서재에서, 
시립도서관 생긴 뒤 중고딩 시절엔 시덥잖은 수준이긴 하지만,
역사책, 역사소설, 병법, 책략, 이런거 매주 2~3권씩 대출해서,
중고등학교 시기에 수백권 읽은 사람입니다.

제가 위키 백과를 주로 언급하는것은 제가 요즘 책을 잘 안읽기 때문이기도 하고,
솔까, 중고딩 때 국사, 세계사 전교 1등하던 제가 굳이 그 내용보고, 교차검증해가면서..
검색질 좀 해보면.. 구라나 틀린 정보가 아닌걸 확인하고 올리기 때문입니다.
(제가 볼 땐 위키러들이 수준이 상당히 높아요. 최소 전쟁사 관련 까페 고수들입니다.)

솔까, 제가 초중고딩때 읽은거에 비하면..
요근래 역사학자들이 쓴 내용들이  그때 제가 배운 것에 비해
아주 깊이가 있어서 제 지식이 별게 아닌걸 잘압니다.
심지어 가생이 동아게나 밀게에 저보다 날고 뛰는 밀리, 역사 고수들 많죠.
(전 아주 라이트한 사람이라 취미생활 덕력도 항상 얄팍합니다.)

다만, 본래 병법이나 전략가라는게.. 질 싸움은 안하는게 도리에요.
일말의 작은 가능성 믿고, 미친 짓을 하는것은.. 정말 궁지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을 때 하는겁니다.

손자병법에도 나오죠.
질 싸움은 피하고, 이왕 해야할 싸움은 이겨야 되며,
싸우기 전에 이겨놓고 싸워야 되며, 싸우지 않고 이기는게 가장 좋다.

이게 전략의 기본입니다.
괜히 불리한데 무조건 싸우고 보는게 애국이고, 용감한게 아니에요.
그건 만용이고, 필부의 용기라고 하죠.

나라의 이익을 극대화시키는게 전략가의 목표인데..
나라를 망국으로 몰아가면 그 또한 잘못된겁니다.

때론.. 월왕구천처럼.. 와신상담의 지혜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구름위하늘 16-09-19 16:28
   
제가 백인대 님을 뭐하고 할 리가 없죠 ^^
많은 좋은 자료와 지식에 항상 감사합니다.

제가 워낙 다양한 의견을 좋아하는 지라,
간혹 반대되는 의견 같이 보이는 것을 제시해도 이해해주십사 합니다.
          
Centurion 16-09-19 16:35
   
구름님이 아니라.. 저기 몇분들보고 이야기 하는것입니다.

구름님은 평소에 많은 지식을 전달해주시는 분이라
제가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배우는 것도 많구요.

단지 몇몇 분들이 악플성에 가깝게
패배주의, 짱개, 조선족 드립을 하시길레 말이죠. ^^
               
전략설계 16-09-19 19:15
   
구름위하늘님도 불가능한 계획은 아니라 하자나..

<패배주의는 니가 패배주의고 ^^>
                    
Centurion 16-09-19 19:43
   
병자야 왔니?
전략설계 16-09-19 18:38
   
C모 (닉 써주기도 아까워)

이 인간은 외국 군대만 보믄 오줌싸고 떵쌀 인간이네..

나와서 한 것 없이 돌아간 1전 1패 전적의 왜군은 세계적 강군이라 그러고..
너는 왜군, 명군 얘기만 나오믄 밑으로 흘리지..

그럼 고려는 명이 철령위 설치하는거 그냥 보리? 그냥 봐?

복기대가 요동이라곤 하는데, 이익이 성호사설에서 철령 동쪽은 영동(강원도), 서쪽은 절령(岊嶺) 이북인 평안도로 밝혔는데.

함경도땅 명한테 바치자는거냐?

니같이 외국군대 얘기 나오면 바지로 줄줄 흘리는 인간들만 있었다면.. 이 나라 없어

수양제 130만 쳐들어오는데 머더러 싸워?
거란 40만이 쳐들어오는데 머더러 싸우냐고?

고려의 요동출병은 명을 정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토를 지키기 위함인데..
병력수에 쩔어서..
우리 영토 지키지 말고 포기하자고?

참고해..

1387년 12월 명나라 철령위 공론화
1388년 2월 철령위는 원나라가 지배한 땅으로 명의 것이다 고려에 통보
1388년 3월 명, 철령위 설치 시작
1388년 4월 고려 요동에 출병 (이때 명군 몽골과 전쟁중, 요동이 비어있는 상태)
1388년 5월 위화도 회군
1388년 6월 명, 철령위 설치 중단

고려에 몇년 치 조공 뜯어먹던 기세등등한 명이 왜 철령위를 포기했을까..
니 같이 싸우기도 전에 바지 질질 적시는 애들만 있었으면 철령위가 아니라 나라 다 넘어간다.

이 나라에 최영장군처럼 너같지 않은 사람이 있었기에 중국 성이 안 된거여.
왜군은 세계최강이고, 명군은 겜두 안 되는 수백만 군대고..
머더러 한국사람으로 사냐? 지금은 중국하고 겜 되냐?
그냥 중국으로 넘어가..

말이 요동출병이지.
고려의 요동출병은 우리 영토 뜯어 먹을라는 명에 대한 방어전이야..
주라는거 다 주고 나면 좁은 땅에 남는게 어딨어..

내 시간아~
     
Centurion 16-09-19 19:46
   
갑자기 얘가 약먹고 헤까닥 했나?

나한테 철령위 타령을 왜 하냐?

최영장군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이성계랑 신진사대부가 전쟁 안하고 외교로 퉁친것도 크단다.

1388년 5월 위화도 회군
1388년 6월 명, 철령위 설치 중단  <- 지가 써둔게 뭔지도 몰러?
          
전략설계 16-09-19 21:31
   
너한테 왜 철령위 얘기를 하냐고?

고려 출병 이유가 명나라 철령위 설치야.
왜 고려가 출병했는 지도 모르고 명나라 군대 최고 하는구낭..

왜 니 말대로 허접때기 고려군대가 출병할 수밖에 없었는가 이유는 알아야지.

고려가 명하고 퉁치다 안 돼서 출병한거여?
퉁쳐서 될꺼 같으면 머더러 출병하냐?

출병 안 하고 퉁치지.
퉁치는게 안 되니까 출병한거야. 병자야

철령위 설치도 일방적인 설치고.
당시 분위기가 명이 고려에 5년치 조공 삥뜯던 시절이야..

니 말대로,
명이 북원이고 티벳이고 베트남이고 다 뚜들겨 패는 천하무적인데.
머더러 퉁치냐?

니 지도에 써논 것만 230만이다.

230만이 고려 말 한마디 무서워 통보하고 설치하던거 중지해?
설치하던 3월하고 중지하던 6월 사이에 뭐가 있냐.

고려 출병이 있어..

명나라 군대 천하무적 군대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인제는 고려 말 한마디에 쩌는 병자 군대됐냐?

전략원잠 도입하자 했다 -> 공격원잠 도입하자 했다 -> 항공모함 도입하자 했다,
요즘 정신줄 놓고 사는구낭..

230만 천하무적 명군이 고려 말 한마디에 철령위 설치를 포기해?
니가 생각해도 정신이 이상하지
전략설계 16-09-19 19:08
   
글쓴이 C모는,
조선후기 조선군 37만이란 인간입니다. 참고들하세요

백성들이 양반을 사서 군대 갈 사람도 태부족한 조선후기에
일본 전국시대 석고 2.5까지 동원해서 37만이란 인간인데.

이 인간 병력수는 대충 듣고 흘리세요.
     
Centurion 16-09-19 19:54
   
그리고 이게 또 내가 조선 "후기" 병력이 37만이라고 주장한것처럼개수작을 피우냐?

나는 조선후기(고종 대한제국 무렵) 때
신식군대, 즉 친위대, 진위대 합쳐서 2만도 안된거 지적하는 사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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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實役 위주의 군역제도는
성종 8년(1477)에 467,716명(正軍 134,973명, 保人 332,745명)의 군역 의무자를 파악하였다.0675)

그런데 실역 위주의 군역제도는 16세기에 자연재해가 계속되는 가운데 布納化로 변질되어 군역 의무자를 파악한 軍籍은 과세 장부로 바뀌어갔다.

이런 변질 속에서도 중종 4년(1509) 12월의 군적은 정군 177,322명, 雜軍 123,958명을 파악하였다.0676) 중종 18년 12월에도 다시 정군 186,691명, 잡군 125,074명을 파악하였다.0677)

중종대에는 2차의 군적 개수와 함께 호구도 두 차례 조사할 수 있었다. 중종 14년에 호 754,146, 구 3,745,481, 중종 26년에 구 3,965,253명을 조사하였다.

(중략)

이렇게 군사력 증강의 필요성이 높아짐으로써 군역 대상자 파악을 위해 인조 3년에 호패법 시행이 다시 시도되었다. 호패의 위조, 미착용에 대한 엄한 벌칙(참형)을 내세워 1년만에 男丁의 수를 103만 명에서 226만 명으로 증가시키고(이때는 私賤의 노비도 포함했던 것 같다), 이를 근거로 이듬해에 군적 개수작업에 착수하였다.

임란 이전부터 내려오는 군적의 군액이 40만 명이며0680), 이 가운데 戶·保를 합쳐 251,679명이 虛位란 것도 처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반민의 피폐가 심했기 때문에 개수작업은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고, 정묘호란으로 조정이 강화도로 피난하는 길에 민심 이반을 두려워하여 호패 관련 문적들을 모두 한강변에서 불사르고 말았다.

(중략)

정군 177,322명은 정상적인 상태라면 436,212명의 보인을 가지게 된다.

성종 8년의 정군과 보인의 비율이 2.46명이므로 이를 중종 4년의 정군수에 곱하면 위의 숫자가 산출된다. 정군과 보인을 합친 613,534명이 곧 당시의 총 군역 의무자(군적에 오른자)가 된다. 그러나 이때의 군적 조사 결과가 왜 정군과 잡군의 수만을 제시하고 보인의 수를 빠뜨렸는지는 알 수 없다.
 
0677) 정군 186,691명을 중종 4년의 경우와 같은 방법으로 계산하면 보인 459,262명, 양자를 합친 총액은 645,954명이 된다.


http://contents.history.go.kr/mfront/nh/view.do?levelId=nh_030_0050_0030_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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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설계 16-09-19 21:34
   
어디서 발을 빼?
그럼 shrekandy <-- 애가 병자된다  ㅎㅎㅎㅎㅎㅎㅎ
          
Centurion 16-09-20 03:23
   
빠가냐? 군적에 군액 40만 안보여?
전략설계 16-09-19 19:13
   
지도를 봐도 요동에 명나라 군대 없구만..

고려가 언제 요동에 죽치고 있었냐..

우왕이 언제 명나라 정복하라고 했냐? 하다가 안 되면 빽하믄 되지..

해보지도 않고 중국군대 병력수만 보고 바지에 질질 흘리기는..

지 입으로 패전했다면서 임란 때 왜군 세계 최강이라고 난리 부르스를 치더만..

니가 그렇치 멀..

그럼서 고려군대는 별거 아닌 것처럼 까네..

그럼 요동정벌 준비하든 정도전은 미쳤냐?

니보다 정도전이 요동상황을 몰라서 요동정벌 준비했겠냐..

남들 가만 있는데 혼자서 중국 병력수에 놀래서 바지에 질질하고 자빠졌네
     
Centurion 16-09-19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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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말명초 시기 명나라는 요남 지역에 정료도위(定遼都衛)를 설치하여 요동에 대한 영향력을 보이기 시작했고, 상당한 숫자의 군사 세력이 요동에 주둔하게 되었다. 정료위의 명군은 위(衛)라는 군사적 단위에 의해 구성되었는데, 이 지역의 위는 최종적으로 25위에 달하였고 그 유명한 철령위 역시 이러한 25위 중에 하나다. 25위가 모두 갖추어지게 되는 것은 나중의 일이지만 명나라는 고려의 2차 요동 정벌, 곧 위화도 회군 직전인 1387년 이전까지 13위를 갖추는데 성공한다.

명나라의 군사 단위에 있어 1위는 일반적으로 5,600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25위가 최종적으로 갖추어진 상황에서 명은 요동 지역에서 15만의 군사력과 최소 40만이 넘는 인적 자원을 요동에 배치했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나하추 항복 직전 - 고려의 2차 요동 원정과 위화도 회군 직전인 1387년 무렵에는 13위까지 설치되어 있었으며, 이는 명나라가 일단 6만 5천 이상의 병력을 요동 방면에 투입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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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간 또 암것도 안 읽고 지 내뇌망상 주장하네.

그리고 내가 언제 임진왜란 일본군이 세계최강이라고 하디?

이 인간이 또 남의 발언 왜곡해서 개수작이네.

1592년 기준 세계에서 대가릿수 1등은 명나라군이고, 당대 유럽 최강은 스페인군이고,

스페인군 쪽수가 20~30만에, 화승총 비율이 꽤 높았다고 하는데,

스페인의 맞수인 오스만 투르크도 대가릿수는 한꺼번에 30만 이상씩 동원하는 강국이었고,

동아시아 일본이 대략 쪽수가 30만 이상 동원에 화승총 비율 높은걸 따져보면..

당시 세계적으로 군사력 상위권이랬지. 내가 언제 일본군이 세계최강이었다고 했냐?

와. 윽수로 졸렬한 왜곡질이네. ㅋㅋㅋ

그리고, 정도전은 1397년~98년에 요동정벌 준비했고..

명나라에서 대규모 내전인 '정난의 변' 일어나기 전에.. 이방원한테 죽는다.

즉, 요동정벌은 명나라가 당시 태조 이성계를 인정하지 않은 꼬장에 대응하는 것과

사병혁파를 위한 일종의 "수단"이었다는 썰이 나오는거야.

넌 육룡이나르샤도 안봤냐? 어차피 한국 사람 아니니 관심도 없지 ㅋㅋㅋ
          
전략설계 16-09-19 21:43
   
한족이 언제 요동을 지배했냐?
고구려 이전 시대로 가야돼?

니 대갈로 판단해서 지금 중국 생각하지 말라니까.. 병자야

려말에 요동은 한족꺼란 인식이 없던 시대였다니까.

왜군 세계최강이라고 숭상하고,
명군 230만 천하무적이라고 숭상할라고.

고려군대 기병 없다고 까더만,
정도전 요동정벌계획까지 인제 썰이라 비하하네..

너 대단하다~
제발 너머가라~ 작은 나라에 왜 사니?


그래서 최영, 정도전이 니보다 요동을 모르냐고?
               
Centurion 16-09-19 21:54
   
눈까리로 쳐 보면서도 못읽냐? 시신경세포가 끊어졌니?

그리고 연왕 주체의 제위 찬탈 내전인 '정난의 변' 에도 명나라 요동주둔군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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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경륭이 황제에 받은 병력은 무려 50만 명에 달했다. 모두 연왕은 이제 박살나리라고 간주했지만, 주체는 되려 이 소식을 듣고 "저 놈들이 나를 도와주는구나. 이경륭 그놈이 무슨 재주가 있단 말인가?" 하고 껄껄 웃어버렸다(……).

이경륭이 북진할 때 요동에 있던 장수인 오고, 경환, 양문은 요동병을 이끌고 영평(永平)을 포위하고자 진군하였다. 양방으로 적을 둔 난감한 상황이었지만, 주체는 "어차피 이경륭 저 놈은 겁 많아서 함부로 공격하지 않는다"고 무시하고는 장옥 등과 함께 오고를 먼저 공격해 쫓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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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난군이 대패한지 불과 한달 뒤인 5월, 급하게 구원하러 오는 요동의 군대를 격파한 정난군은 숨 돌릴 틈도 없이 남진하였다. 이에 성용은 황급히 전함을 이끌고 회수 남안을 장악하여 정난군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정난군의 장수 주능과 구복이 몰래 부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 성용의 후방을 공격하여 그 부대를 격파하였다. 그 후에 철현의 부대 역시 패배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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比燕兵漸逼,帝命遼東總兵官楊文將所部十萬與鉉合,絕燕後。文師至直沽,為燕將宋貴等所敗,無一至濟南者
연왕이 경사에 점차 육박해오자, 황제가 요동총병관(遼東總兵官) 양문(楊文)에게 명하여 거느린 부(部) 10만을 거느리고 철현을 합쳐, 연의 후방을 끊게 하였다. 양문의 군대가 직고(直沽)에 이르러, 연의 장수인 송귀(宋貴)에게 패배하여, 단 한사람도 제남에 이르지 못했다. ─ 명사 철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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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amu.wiki/w/%EC%A0%95%EB%82%9C%EC%9D%98%20%EB%B3%80

요동에 어디 병력이 없단거야?
철령위 설치하러 들어온 병력 자체가 바로 명나라군대야.

철령"위"에 위" 글자 자체가 군사편제라고. 이거 내가 몇번 말해줬냐?






그리고 내가 고려군에 기병이 없다고 했냐? 기병이 주력이 아니라고 했지?

이거 ㄹㅇ 웃긴 인간이네.

고려는 애시당초 30만 대군 동원해서 거란 물리치던 시절에도.. 기병이 주력이 아니야.
강조가 지휘할 당시 주력이 대부분 보병이라 '검차'라는 수레를 이용해서, 기병 돌격을 막아냈다.

하여튼 밀알못에 전쟁사라곤 쥐뿔도 모르니, 이딴 사실도 모르지.

고려가 요동정벌군에도 말을 2만마리 정도 넣었다곤 한다만..
(그렇다고 이게 기병 2만인지, 수송용 군마가 포함된건지 알수 없다만..)

일단 요동에 이미 13위 명군 6만5천 병력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공격군이 군마 2만 필 있다고 이길 상황이냐? 무슨 공성전하는데 말타고 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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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요양행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북원 세력은 원나라의 유익(劉益)이 명나라에 항복한 이후, 급속하게 요동의 나하추 세력을 중심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나하추의 세력은 사서에 "소속 10여만으로, 송화강 북쪽에 있다."[3]고 일컫어질 정도였는데, 그 절정기에는 한때 20여만 가까이 되기도 하였다. 나하추는 이러한 세력을 이용해 명나라의 요동 진출을 막고 있었다.

이 나하추는 아직 세력이 절정에 오르기 전인 1362년 조소생(趙小生) 등의 회유로 고려를 침공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나하추는 고려의 장군이었던 이성계에게 연거푸 패배했다, 이성계의 이 승리는 원나라와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고려의 동북면 영토를 원나라 침략의 위협에서 확고하게 탈출하게 만들고, 고려의 영토임을 각인시킨 승리라고 평가된다.[4]

이성계에게 패배한 이후 나하추는 이후 고려에 대한 공격의사를 포기하고 고려와 평화 관계를 유지하며 오히려 긴밀한 연결을 취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하추의 세력은 북원의 본거지에 대해 주력하고 있던 명나라에게 큰 위협이 되었는데, 나하추는 1372년 11월 요동의 명군 전초기지인 우가장(牛家庄)을 공격해 창고를 불태워 양식 10여만을 없애고 명군을 무려 5,000명이나 몰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우가장은 명나라 초기 요동해운의 마지막 종착지로써 요동 최고의 군량 보급창고가 있었던 장소이다. 따라서 나하추의 이 승리는 명나라의 요동 보급로를 차단하고, 요동에서 장기적 포석을 다지려는 명나라에게 치명적인 패배가 되었다고 평가된다.[5]

1372년 1월 서달이 당한 대패와 같은 해 11월에 일어난 우가장의 승리는 북원에게 큰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이후에도 나하추는 1374년 11월의 요양(遼陽) 공격, 1375년 12월의 대규모 공세 등 지속적으로 명나라를 군사적으로 압박하였다. 하지만 이 시도는 명나라의 적절한 대처에 막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고, 오히려 나하추 쪽이 회복하기 힘든 피해를 입고 만다. 그러자 나하추는 고려와의 외교적 연대에 주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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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 20년, 풍승(馮勝]에게 명령하여 정로대장군(征虜大將軍)으로 삼아 영국공(潁國公) 부우덕, 영창후(永昌侯) 남옥을 좌,부우장군으로 삼아, 남웅후(南雄侯) 조용(趙庸) 등 보병과 기병 20만을 거느리고 이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중략) 나하추는 대적할 수 없음을 헤아리고, 나리오의 말로 인하여 항복을 청하였다.

《명사(明史)》 풍승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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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하추의 투항은 요동 지역 뿐만 아니라 전몽골에 심대한 타격을 안겨주었다. 특히 북원의 토구스 테무르(脱古思帖木児) 정권은 재기 불가능 정도의 타격을 입었는데 이는 나하추가 투항함으로써 요동지역 접근이 차단되었고, 그렇게 된 이상 북원 정권은 일개 초원의 유목민 정권으로 남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후 몽골 투항자는 굴비를 엮듯 줄줄 딸려오기 시작하여 나하추가 투항한 이후에는 20만 호, 토구스 테무르의 패배 이후에는 최대 60만 호에 달하였다.

골칫거리였던 나하추 세력이 붕괴되면서 명나라는 큰 자신감을 얻었고, 이제 더 이상 북원과 고려의 연대를 고려하며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이러한 자신감은 충분히 근거가 있는데, 나하추의 항복으로부터 1년여 뒤, 위화도 회군의 불과 얼마 전 명나라의 대규모 군대는 초원으로 진군하여 북원 정권을 완전히 괴멸시켜 버렸다.

**********************************************

홍무 21년, 3월 남옥에게 명하여 군대 15만을 거느리고 이를 정벌하게 하였다. (중략) 창졸간에 그 앞에 이르자, 크게 놀라, 맞아 싸웠으나, 적을 패배시켰다.

《명사(明史)》 남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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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년 3월, 명나라의 15만 대군은 북원의 수도를 급습하여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었다.

 남옥은 포로만 무려 8만명 가까이에 이르는 승리를 거두었고, 이 시점에서 북원 정권은 완전히 멸망했다.

달아난 북원의 군주 토구스 테무르는 이수데르(也速迭児)라는 인물에게 살해되었는데, 이 이수데르는 과거 쿠빌라이 칸에게 패배한 아리크 부카의 후예로써 긴 시간이 흘러 아리크 부카의 후예가 쿠빌라이 칸의 후예에게 복수를 한 셈이 되었다. 이후 이수데르는 소위 타타르(Tatar)라고 불리우는 정권을 세워 나중에는 오이라트와 더불어 명나라의 골칫거리가 되지만, 당장은 남옥에게 당한 대패 때문에 본인들 수습도 어려운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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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간 나하추를 항복시킨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예 북원 정권을 괴멸 시키려 했을 정도니, 당시 명나라는 군사적, 외교적 행보에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던 판이었다.

더 이상 고려가 다른 나라와 힘을 합치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었기에 다시 강경책으로 나서게 된 것이다.

고려의 입장에서는 나하추의 투항 이후 명나라의 공격이 직접적으로 가능해졌다는 불안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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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amu.wiki/w/%EC%9C%84%ED%99%94%EB%8F%84%20%ED%9A%8C%EA%B5%B0

어차피 우기기 밖에 못하는 저렴한 인간이라..
내가 작성한 것도 아니고, 역사적 앞뒤 전후 맥락 다 살펴 보면..
뻔한 이야기를 내가 힘들여 적을 필요 없다.

이미 요동에 명군이 들어와서,
요동의 지배자 나하추랑 싸우다 나하추 20만 군대 항복시키고,
몽골초원의 북원 멸망시키던게 1388년 위화도 회군 직전 상황이다.

너같은 아큐는 어차피 남들이 열심히 분석하고 공부해서..
치밀한 논의 끝에 결론 내려서 적어둬도.. 말귀를 못알아 쳐먹고.. 헛소리 삑삑하것지.
     
Centurion 16-09-19 20:02
   
**************************
원말명초 시기 명나라는 요남 지역에 정료도위(定遼都衛)를 설치하여 요동에 대한 영향력을 보이기 시작했고, 상당한 숫자의 군사 세력이 요동에 주둔하게 되었다. 정료위의 명군은 위(衛)라는 군사적 단위에 의해 구성되었는데, 이 지역의 위는 최종적으로 25위에 달하였고 그 유명한 철령위 역시 이러한 25위 중에 하나다. 25위가 모두 갖추어지게 되는 것은 나중의 일이지만 명나라는 고려의 2차 요동 정벌, 곧 위화도 회군 직전인 1387년 이전까지 13위를 갖추는데 성공한다.

명나라의 군사 단위에 있어 1위는 일반적으로 5,600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25위가 최종적으로 갖추어진 상황에서 명은 요동 지역에서 15만의 군사력과 최소 40만이 넘는 인적 자원을 요동에 배치했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나하추 항복 직전 - 고려의 2차 요동 원정과 위화도 회군 직전인 1387년 무렵에는 13위까지 설치되어 있었으며, 이는 명나라가 일단 6만 5천 이상의 병력을 요동 방면에 투입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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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간 또 암것도 안 읽고 지 내뇌망상 주장하네.

그리고 내가 언제 임진왜란 일본군이 세계최강이라고 하디?

이 인간이 또 남의 발언 왜곡해서 개수작이네.

1592년 기준 세계에서 대가릿수 1등은 명나라군이고, 당대 유럽 최강은 스페인군이고,

스페인군 쪽수가 20~30만에, 화승총 비율이 꽤 높았다고 하는데,

스페인의 맞수인 오스만 투르크도 대가릿수는 한꺼번에 30만 이상씩 동원하는 강국이었고,

동아시아 일본이 대략 쪽수가 30만 이상 동원에 화승총 비율 높은걸 따져보면..

당시 세계적으로 군사력 상위권이랬지. 내가 언제 일본군이 세계최강이었다고 했냐?

와. 윽수로 졸렬한 왜곡질이네. ㅋㅋㅋ

그리고, 정도전은 1397년~98년에 요동정벌 준비했고..

명나라에서 대규모 내전인 '정난의 변' 일어나기 전에.. 이방원한테 죽는다.

즉, 요동정벌은 명나라가 당시 태조 이성계를 인정하지 않은 꼬장에 대응하는 것과

사병혁파를 위한 일종의 "수단"이었다는 썰이 나오는거야.

넌 육룡이나르샤도 안봤냐? 어차피 한국 사람 아니니 관심도 없지 ㅋㅋㅋ
디바2 16-09-19 20:00
   
최영이 병신이었나보죠.
병신이 지주제도모르고 중국치라고 이성계에게  군대보냈군요.
ㅋㅋㅋ.
     
Centurion 16-09-19 20:18
   
최영은 최영대로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역사적 위인에게 욕설하지 맙시다.

물론, 당시 고려 국력 상황을 보면, 왜구한테도 시달려서..
위화도 회군 직후에 정지 장군이 왜구 토벌하러 내려갔을 정도라고 하니..
병력부족이 심각한 상황 맞습니다.

그래도 워낙에 명나라가 고려를 땅내놓으라 압박했으니..
최영이 참을 수 없어, 요동정벌을 주장한겁니다.

그래서, 요동정벌군이 가다가 빽~ 하면서 돌아왔고..
그걸로.. 명나라도 고려가 기개가 있다고 생각해서..
철령위 물리고, 이성계 일파랑 협상해서 우호관계로 돌아선겁니다.

최영이 없었으면, 명나라가 간뎅이가 부었을것이고,
이성계가 없었으면, 전면전 벌어져서 병력부족으로 역습당해..
더 비참할 꼴 볼 수 있었다 이거죠.

물론, 대몽항쟁 시절처럼.. 전국민이 다 들고 일어나서..
베트남처럼 20년 독립전쟁해서 몰아낼 수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당시 홍건적, 원나라, 왜구 3대 세력,
그리고 내부의 권문세족의 탐욕에 나라 꼴이 엉망이 된 상태에서,
그나마 토지개혁하고, 나라도 어느 정도 정비되고, 
평화상태가 오래 지속되었던 것도..
그 입으로만 용감한 사람들이..함부로 비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이겁니다.

거참.. 고려말에 왜구들한테 깨져서 수군 본진이 기습당해 병사 5천명이 죽고,
이후 왜구 토벌에 나선 사근내역 전투에서 9원수 중 2명이 죽고,
이거 지원하러 온 베테랑 장수 이성계가
하도 잔혹하게 죽은 시체가 많아 몇일간 밥도 못먹고,

쳐들어온 왜구가 길흉을 점친다고,
2살 여아를 닭 잡듯 잡아  점을 보고 그럴만큼..
나라꼴이 개판이었단 말이죠.

왜구보다 병력수도 딸려서. 이성계가 홍산대첩에서 10배의 왜구와 싸워 이겼다..
이 소리가 나오던게 고려 말 상황인데.. 

그래서 요동정벌을 주장한 최영조차도..
우왕한테 병력 3천명으로 어떻게 왜구를 막냐고 하니까..
우왕이 나라에 병력 먹일 군수가 부족하니, 일당백으로 싸워라.

이 상황에서 지금 수십만 대군, 2백만 대군하고 전쟁하자는게 황당한겁니다.
고려 초중기 거란하고 여진족 때려 잡을 때 상황이 아니에요.
          
전략설계 16-09-19 21:58
   
이런게 패배주의구나..

이미 역사속에서..
명의 철령위 설치에 불만을 품은 고려가 시위 목적으로 출병해,
직후 명이 철령위 설치 중당해 성공한 출병이구만..

왜 지난 역사를 가지고,
혼자 명군 230만 천하무적 군대 떠들믄서 바지 질질 흘리냐..

어쩌자고?
630년 뒤에 <명나라 군대는 위대하니까> 출병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지금 그 말 하는거여?
임란때 온 왜군 위대하듯이, 인제는 려말 명군도 위대하다 그 말하고 싶은거여?

끝난 역사고, 당초 출병의 목적를 이룬 성공작인데..
<왜군 세계최강>이라고 그렇게 나한테 개기더만,
<명군 200>만 타령 입에 달고 있네

불쌍하다. 인간아
왜군 군대 그렇게 흠모하면 가라 가~
               
Centurion 16-09-19 22:44
   
이 인간은 숫자계산을 못하는건가?

전쟁시뮬게임도 안해보고, 전략설계 닉달고 깝치는건가?

마린 1마리로 마린 50마리 잡아야 돼.

니가 지금 어디서

짱개 때려잡을 분 모집~ 써붙이고..5만명 모집해서..

무국적 게릴라로..
현재 중공군 230만 작살내고 오면 내가 인정해준다.ㅋㅋ

요즘 중공군이 260만이고 예비군이 230만이라는데.. 별거 아니네.

전략설계 일당백 장군님 계시면~ 뭐.. 그까이꺼 콧방귀로 다 쓸어버릴듯.. ㅋㅋㅋ
                    
전략설계 16-09-20 03:37
   
9줄을 썼는데 1줄도 의미가 없네..

깨갱하는걸로 알께 ^^. 니가 내 밥이지 멀 ㅎㅎㅎㅎㅎㅎㅎ
꿈꾸는자 16-09-19 22:14
   
명나라 건국부터 멸망까지 전쟁에 동원한 최대 병력은 약 50만....
멸망할때까지 그 이상은 동원해본적없다는...중국을 통일한 왕조들이 여러개지만 50만이상의 병력을 전쟁에 제대로 동원해본 왕조는 수나라와 당나라정도...나머진 다 제대로된 기록조차없는 중국특유의 허위과장병력....
왜???...장부상의 병력이며 50만이상의 정예군은 제대로 유지하기 어려움....
     
전략설계 16-09-19 22:36
   
드라마지만.. 징비록에서
명나라 황제 "조선에 보낼 수 있는 병력이 얼마야"
신하 "5만 정돕니다"

300만은 다 어디가고..

결국 그 5만에서 10만 보내다가.. 재정 거덜나고..
사르후에 보낸 것도 한 10만 보내나가 나가 떨어지니까.. 다시 칠 계획을 못했죠..
명 말기는 인구도 많아요.

요성종도 40만 고려로 보냈구만..
그 40만 군대를 상대하고 10만 황실정예기병 보내니 전멸시켜버린게 고려인데..
어뜬 인간 혼자 열나게 230만 떠들고 혼자 전의 상실합니다.

우리가 언제 만만한 군대 상대했나요.
수양제 군대
당태종 군대
요성종 군대
몽골 군대 (몽골에 항복하고 나라가 안 없어진 것은 고려밖에 없다고 하네요. 역사저널 교수님이)

전부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들이죠..
그런 군대와 싸운 게 고구려, 고려인데..

혼자 패배주의에 쩔어서 쌩난리를 치네요.
저번에는 <임란때 왜군 위대하다>고 난리 치더만
          
Centurion 16-09-19 22:59
   
에고~ 이런 이런~ 그래도 드라마는 보기라도 했구나.

병력
1차 : 조승훈, 3000명
2차 : 이여송, 4만 3000명
3차 : 유정, 10만 명
4차 : 만세덕, 14만 명
총병력 : 28만 6000명

https://ko.wikipedia.org/wiki/%EC%9E%84%EC%A7%84%EC%99%9C%EB%9E%80_%EA%B5%B0%EB%8C%80_%EB%AA%A9%EB%A1%9D#.EB.AA.85.EB.82.98.EB.9D.BC

너를 보면 너의 무식이 너무나도 웃기다 못해.. 이젠 불쌍해 보일지경이다.

나랑 그렇게 말을 섞고,그렇게 알려줘도,
그냥 읽어만봐도 다 아는 상식 수준의 지식이 1mg도 안스며드는거 보소.

명나라 만력제

https://namu.wiki/w/%EB%A7%8C%EB%A0%A5%EC%A0%9C#s-5


만력 20년(1592년)에 영하 지역의 몽골 무관인 보바이가 영하의 난을 일으켰다. 흉노족의 항장이었던 보바이는 만력 19년(1591) 조주에 일어난 반란을 기병 3천으로 평정하였는데, 그를 시기한 명나라 관헌들은 보바이군한테 보급도 제대로 해주지 않고 오히려 사사건건 방해하였고, 결국 피꺼솟한 보바이는 반란을 일으켜, 명나라는 이 반란을 진압하느라 은 200여만냥을 소진했다.

또한 중국 남부에서는 양응룡의 난이 일어나는데 이 반란 또한 진압하는데 수백만냥을 지출해야 했다. 황제라는 사람이 이렇게 만력삼대정(萬曆三大征)(영하의 난+임진왜란+정유재란+양응룡의 반란) 진압에 들어간 돈은 은자 1200만냥이 넘어가는데, 이는 1년 전체 국가 예산인 은자 600만냥의 2배가 넘는 양이였다.

이러한 만력삼대정 뿐만 아니라 활동이 거세진 여진족들을 막기 위해서 매년마다 전체 예산의 3분의 2정도를 국방비에 퍼부을 수 밖에 없었고, 이로써 장거정이 땜빵해 놓은 북로남왜는 부활해버렸다

*************

만력삼정 진압에 든 비용만큼이나 만력제의 무덤 건설 비용[22]은 엄청났다. 진시황? 깊이 67m, 총 면적 1,200평방미터나 되었으니.

자녀에겐 더 후했다. 아들인 복왕 주상순을 장가 보내는데 은자 2,400만 냥을 쓴 적도 있다는 기록도 있다. 그것도 임진왜란 직후이자 양응룡의 난이 진압되지도 않은 1599년에. 이쯤 되면 만력삼정 쯤은 핑계로 보인다.

이러한 낭비가 본질적인 것은 아니라는 반론도 있는데, 만력제 말기의 명나라의 재정은 수년간 흑자를 기록했다는 것이 그 이유. 뒤에 보면 태창제가 그 넘치는 자금을 써먹기도 하고.

하지만 그 풍부한 재정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세금 증액 때문일 뿐이었고, 은광에 부여된 '광세(鑛稅)의 화'로 그 결과 소주(蘇州)와 산동의 임청(臨淸) 등지에서 민란이 잇달아 일어났다는 점에서 낭비도 큰 문제가 맞다. 물론 황제의 태업으로 이 낭비를 막기 위해 어떤 정치적 노력도 없었다.[23]

심지어 누르하치를 대비하기 위한 군비가 모자라 황제 개인계좌인 내탕금에서 이를 충당하자는 신하들의 의견[24]까지도 거부. 한마디로 낭비한 게 맞다.

[22] 800여만 냥, 2년간 전국 토지세 총 수입에 맞먹는다고.

[23] 심지어는 금은이 생산되지 않는 지방에도 광세가 물려졌다. 그러나 1602년(만력 30) 만력제가 지병으로 죽을 지경까지 가자 무슨 생각이었는지 갑자기 광세를 모두 폐지하고 쫓겨난 이를 모두 복권 시킨다는 어명을 내리면서 풀리나 싶었는데, 바로 그 다음날 쾌차해서 그 계획을 뒤집어 엎는다. 심지어 황제를 도와 광세를 물리던 환관들도 반발했으나 거기에 더해 건청궁과 곤녕궁을 확대중건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런 개판인 상황이니 난이 일어나지 않는 게 이상하겠지.

*****************************

1년 전체 국가 예산인 은자 600만냥

보바이 난 진압비용 200만냥 + 임진왜란 비용 700~800만냥 + 양응룡의 난 = 1200만냥
복왕 주상순 결혼비용 은자 2400만냥
만력제 본인의 무덤 건설비용 800만냥.
 
그 외 만력제 개인 자산(내탕금)이 명나라 전체예산보다 많았슴.

*******************************

야.. 이런 초보적인 이야기는..

역사게시판도 아니라, 그냥 유머게시판에도 나돌만큼..

명나라 F4 하면 줄줄이 나오는 얘긴데.. 전멸이 넌  도대체 아는게 뭐냐?

진짜 신기한 인간이네.

명나라는 당시에 병력이 문제가 아니라, 돈이 문제야.

군인들이 돈 못받았다고 파업일으키고 반란일으키던 시절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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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4대 암군 중에서도 단연 원탑. 누구나 인정하는 명나라 멸망의 근본 원인.

심지어 청나라 때 쓰여진 정통사서인 명사에서조차 명나라를 멸망시킨 장본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명사에는 "명나라가 망한 것은 숭정제 때가 아니라 만력제 때였다"고 써있을 정도.

한마디로 황제 한 명이 나라를 어떻게 말아먹는가를 몸소 보여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붙은 별명은 파업(태업) 황제.

게다가 그런 주제에 명나라 황제들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길었다. 총 48년.
그런데 그 중 30년 간의 업무 거부라는 사상초유의 일을 벌였다.[2]
업무 거부에 대한 해석도 꾀병, 병, 정치에 대한 환멸
황제의 복지개선 등등으로 가지각색이다.

******************************************************************
               
전략설계 16-09-20 03:36
   
많이도 배껴왔다..
먼 소리냐?

할 말 없는 것드리 꼭 배껴오더라..

5만-10만.. 끝으머리에 14만 왔다.. 그래서??
뭐가 어쩐다고?

그래서 저 지도에 있는 230만 정도가 실제로 조선에 왔다고?
3천-14만 파병했자나..

14만도 다 끝날 때 왔자나..

그래서 임란때 명군 숫자가

내가 언급한,

수양제 군대
당태종 군대
요성종 군대

이 군대보다 많다고?
먼 소리 하는 지를 모르겠다..

안 되믄 막 배껴다 푸냐?
먼 소린지 니 하고 싶은 얘기를 또이 또이 해봐?

3천~14만이 어쩐다고?
많다고?

수양제 130만 앞에서 바람잡냐?

고려는 10만 황실정예기병도 전멸시켰다..
어디다 들이대..

그러고 명나라 황제 돈 많다고?
어쩌라고?

그래봐야 여진 3만한테 정예병 다 쓸리자나..
장군들 멍청한 것도 능력이다..

니기 명나라 군대는 돈 많고 14만까지 나오니까..
고려는 허끕때기라고??

말좀 말같이 좀 해라 병자야~
먼소린지 하나 못 알아묵겄다
니가 그렇지 멀.. 밀린다 그거지..

이 소리 저 소리, 못 알아먹을 소리, 혼자 알아먹을 소리 지껄임서
물탄다 그거지.

그게 아니면 또이 또이 얘기하라고
전략설계 16-09-19 22:14
   
우리나라 전쟁사에서 가장 감동적인 대목이
최영의 요동출병이라고 생각합니다.

눈물이 펑펑 나와도 부족하지 않죠.

홍건적한테 두들어 맞어.. 정규군같은 왜군 휩쓸어..
툭허믄 병자호란 왜 못 싸웠냐 하믄 임란 때문에 나라가 피폐해서..

국가가 희미해지는 순간에도 고려는 자존심을 보였습니다.
어뜬 미친 인간이 명나라 200만 드립하면서 우리 민족의 마지막 자존심을 욕되 보이는데..

고려의 북진정책, 조선의 사대정책.. 이 차이임..
자다가 깨도 고려는 기회가 있으믄 나가... 상대가 누구든..
본능임 본능..
정말 요동을 지배할 가능성이 높지 않더라도.. 일말의 가능성만 보여만 튀어나간 정신..

그나마 고려 조상들이 그렇게라도 했으니.. 한반도라도 안 뺏기고 살고 있는거임..

어뜬 모지리같이 싸워보지도 않고 시작하기도 전에 <명나라 200만> 천하무적 쩔어서 질질 흘렸다가는..
오늘 이 땅 뺏기고,
내일 저 땅 뺏기고..
저 존심 없는 정신으로는 없어요.. 우리가 발 디디고 살 땅땡이이 없어요

나는 최영장군이 얼마나 존경스러운지 모릅니다.. 그 기백이
우리같이 작은 나라는 뒤로 무르다 보면 다 뺏겨요..

박근혜가 중국한테 잘 보인다고 전승절 중국 핵무기 행진하는데 갔다가..
바로 뒤 북한 4차 핵실험때 시진핑에 전화했는데.. 그 친철한 시진핑이 쌩까고 전화 안 받자나요..
개성공단 폐쇄하고 박근혜가 쎈 모습 보이니까, 대북제재에 나서고 전화 통화 했잖아요..

어뜬 모지리같이 명나라 200만.. 알아서 흘리고 쩔어서는 절대 중국 상대할 수 없어요
작은 나라는 객기라도 있어야 살아요.
말했듯이 21세기 현대외교도 똑같이 적용되고요.

저 모지리같이 명나라 200만 할게 아니라..
중국도 약점이 많아요. 내가 언제 글한번 올렸는데..
큰 나라는 적이 많아요..

동아시아에서 사드로 불붙으니까.. 중국 밑에 인도에서 국경선에 탱크 100대 추가배치하고..
미사일 배치하고..
중국은 죄다 적입니다.
왜 고려 3만 압록강까지 왔다 돌아갔는데.. 명이 철령위 설치 중단했겠습니까..
적이 많아서 그래요.

고려와 전쟁에 휘말리고 장기화 되면..
수나라처럼 망하거나..
거란처럼 성장동력을 잃거나..
건국하자마자 휘청거리게 됩니다.

중원에 비해 한줌도 안 되는 땅 깨끗히 포기한 것도 <큰 나라는 적이 많기 때문입니다>
저 모지리같이 명군 200만, 이렇게 흘리지만 않고 정신만 차리믄 21세기에도 중국 고개 빳빳이 들고 살 수 있어요
중국은 주변이 죄다 적이거든요..

국방부에서 사드배치 발표하고 온 뉴스가 중국의 경제제재에 쫄아있을 때..
발표 바로 뒷날 밀계에 <중국의 경제제재 없다> 글 올린 것도..
이런 중국의 약점을 알기 때문입니다.

600년전 명이 3만 출병한 고려에 눌려서 철령위 설치 중단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중국 못 까붑니다. 쫄지 마세요 16-07-09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military&wr_id=219255&sca=&sfl=wr_name%2C1&stx=%EC%A0%84%EB%9E%B5%EC%84%A4%EA%B3%84&sop=and
(댓글 보면 사드발표 직후 사람들 중국에 엄청들 쫄았죠)

중국의 약점은 '크다는 것' 16-07-14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military&wr_id=221305&sca=&sfl=wr_name%2C1&stx=%EC%A0%84%EB%9E%B5%EC%84%A4%EA%B3%84&sop=and

조선세조 40만, 조선후기 37만, 려말 명군 230만 이런거만 하지 말고..
명군 230만이어도 3만 고려에 쩔어서 철령위 설치를 포기한 내막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조선세조 40만, 조선후기 37만, 임란때 왜군 세계최강, 려말 명군 230만
<-- 이런 애들하고 같이 말 주고 받기가 시간 아깝네요.
 
말 같지 않은 소리 좀 작작좀 써라;;
     
Centurion 16-09-19 23:03
   
위에 최영 장군 욕하는 댓글에
최영 장군 욕하지 말라고 적은 나를 매국노로 몰아가는 졸렬한 클라스 보소..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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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 쓰던 나보고 뭔 개수작이냐?

조선을 중국 속국으로 갖다바치려고 안달난 인간이.ㅋㅋ
          
전략설계 16-09-20 02:59
   
어쩌라고?

위에 명나라 230만 지도까지 그려감서 바지에 질질 싸고 있는 병자가 있는데.

니 눈엔 안 보이냐?
     
Centurion 16-09-19 23:14
   
그리고 대가리랑 양심이 있으면 좀 인정을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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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實役 위주의 군역제도는
성종 8년(1477)에 467,716명(正軍 134,973명, 保人 332,745명)의 군역 의무자를 파악하였다.0675)

그런데 실역 위주의 군역제도는 16세기에 자연재해가 계속되는 가운데 布納化로 변질되어 군역 의무자를 파악한 軍籍은 과세 장부로 바뀌어갔다.

이런 변질 속에서도 중종 4년(1509) 12월의 군적은 정군 177,322명, 雜軍 123,958명을 파악하였다.0676) 중종 18년 12월에도 다시 정군 186,691명, 잡군 125,074명을 파악하였다.0677)

중종대에는 2차의 군적 개수와 함께 호구도 두 차례 조사할 수 있었다. 중종 14년에 호 754,146, 구 3,745,481, 중종 26년에 구 3,965,253명을 조사하였다.

(중략)

이렇게 군사력 증강의 필요성이 높아짐으로써 군역 대상자 파악을 위해 인조 3년에 호패법 시행이 다시 시도되었다. 호패의 위조, 미착용에 대한 엄한 벌칙(참형)을 내세워 1년만에 男丁의 수를 103만 명에서 226만 명으로 증가시키고(이때는 私賤의 노비도 포함했던 것 같다), 이를 근거로 이듬해에 군적 개수작업에 착수하였다.

임란 이전부터 내려오는 군적의 군액이 40만 명이며0680), 이 가운데 戶·保를 합쳐 251,679명이 虛位란 것도 처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반민의 피폐가 심했기 때문에 개수작업은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고, 정묘호란으로 조정이 강화도로 피난하는 길에 민심 이반을 두려워하여 호패 관련 문적들을 모두 한강변에서 불사르고 말았다.

(중략)

정군 177,322명은 정상적인 상태라면 436,212명의 보인을 가지게 된다.

성종 8년의 정군과 보인의 비율이 2.46명이므로 이를 중종 4년의 정군수에 곱하면 위의 숫자가 산출된다. 정군과 보인을 합친 613,534명이 곧 당시의 총 군역 의무자(군적에 오른자)가 된다. 그러나 이때의 군적 조사 결과가 왜 정군과 잡군의 수만을 제시하고 보인의 수를 빠뜨렸는지는 알 수 없다.
 
0677) 정군 186,691명을 중종 4년의 경우와 같은 방법으로 계산하면 보인 459,262명, 양자를 합친 총액은 645,954명이 된다.


http://contents.history.go.kr/mfront/nh/view.do?levelId=nh_030_0050_0030_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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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논문급에서 발췌한 내용을 댓글에다 갖다 붙여도. 이 인간은 외면하네.

한두번 겪어본 일도 아니고, 한 수백번 이상 겪은 일이지만.. ㅋㅋㅋ
          
유수8 16-09-20 02:57
   
전략이는 걍 어디서 주워들은 풍월들은 많은애라 지 딴에는 닉처럼 무슨 설계급을 할 수 있다고 근자감 쩌는 애라...

괜한 시간 낭비하며 쟤를 이길라고 하지 마세요..
쟤는 절대 자기 주장을 포기하고 상대의 팩트를 인정하는 사과 안합니다..

지 멋에 살고 뇌내 망상 쩌는 애라 걍 ..... 그러려니 하심이 편함..

애가 좀 궤변에 요상한 논리로 횡설수설하는데 문제는 글에서 명료한 의지 및 방향성이 없다는것..
즉.. 얘가 논하고 싶은 논점이 뚜렷하지 못함으로 인해 결론은 말은 주러리 잘 늘어놓지만 신념이 보이지 않으니 그것은 사실 자신의 내면에서 남들에게 꼬투리 잡히거나 팩트 공격당할까 두려움을 지닌 소심한 인간이라..

지나친 팩트 공격하면 얘 부들거리며 멘붕 심하면 나중에 접시에 물 떠놓고 고민합니다...
사람하나 살리는셈치고 걍 이쯤에서 고만 상대해주세요.... ㅋ

암튼 저도 덕분에 글 잘 봤습니다. ^^
               
전략설계 16-09-20 03:05
   
근데 너는 여태 말 한마디를 못하다가..

팩트 공격당할까 두려움을 지닌 소심한 인간이라
<-- 뒤에 숨어 있지 말고 나와서 공격좀 해봐라. 너한테 반룬줌 받고 싶다.

11줄 쓰고 역사 얘기 한마디를 못하네.. 니같은게 '공격'같은 소리한다

"덕분에 글 잘 봤습니다"
<-- 넌 이것만 해.. 넌 나서지 말고 평생 이것만 하라고 만든 캐릭이여 

너도 명나라 230만에 C모처럼 질질 흘리냐?
미리 바지에 흘리는거 지지한다 그거지
                    
Centurion 16-09-20 04:30
   
팩트폭력 당하니 뜨끔하냐? 전모야~ ㅋㅋ
너 불쌍해서 접시물에 코박을까봐.. 나도 살살 해야겠다.
               
Centurion 16-09-20 04:38
   
솔까, 쟤는 어디서 주워들은 풍월도 거의 없이
자기 머리속에서 판타지를 막 지어내서 쏟아내는 거 같습니다.. 

암만, 밀리, 역사 입문자라도 저런 두뇌회로 꼬인 소리는 안하니까요.
정상적인 사람이면, 이치를 따져가고, 논리적으로 짚어주면 다 이해를 하거든요.

게다가,
아무리 제대로 된 학술개념과 정의를 알려줘도 못알아먹고,
학계에서 약속되고 정의된 용어를 통해서가 아니라,
지 내뇌망상 용어와 기준으로 토론을 멋대로 하려는걸로 봐서..
가방끈도 무지 짧은게... 중고등학교도 정상적으로 다닌거 같지가 않습니다..
다녔다고 해도 아주 공부를 지지리도 못했을게 확실한 듯 싶습니다.

접시에 물 떠놓고, 고민할 거 생각하니 살살 해줘야 겠네요 ㅎㅎㅎ

별로 영양가 없는 글인데, 또 재밌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
          
전략설계 16-09-20 03:19
   
//C모

병자야 그건 군적이자나?
어뜬 병자가 그걸 병력이라고 하냐?

한국군을 63만이라고 하지 누가 예비군 포함해서 400만이라고 하냐?
세조때 조선군 40만 이렇게 얘기함 병자라니까..

병력이람 편제에 들어 무기 들고 있는 사람을 얘기하지.
제대하거나 전시 소집될 예비군을 얘기하냐고?

군병력과 군적은 별개다
하고 싶은 말이 조선 전기 군적으로 수십만 된단 소린데..
그거는 관심이 없고 여태 논쟁감도 아니었어..
니 혼자 물 탈라고 삘소리 하는거여.

암튼 군적부로 말 돌릴라 하지 말고,
너는 조선 세조때 조선군 병력(군적부 말고) 40만 아니다 그거지?

그럼 조선 세조때 40만, 조선후기 37만 떠든 shrekandy <-- 애가 병자네..

그러고 말 끌지 마..
이렇게 쓸데 없는거 쓰지 말라구.. 물탄다고 진게 안 진게 돼...
니가 뛰고 날고 물속으로 잠수해도 부처님 손바닥이야

한국해군 잠수함 얘기를 해도..
너 : 전략원잠 도입해서 핵보복하자
나 : 온 세상이 공격원잠 얘기하는데 핵도 없는데
      밀계서 전략원잠 도입 얘기하면 병자된다

너 : 공격원잠가자는 얘기다. 그래야 빠른 중국원잠 추격하지
나 : 중국원잠은 중국해군기지서 매복해야 되는데 미쳤다고 거기 매복하냐?

너 : 대잠기로도 잡는데.
나 : 잘해봐야 매시간 1-2대 떠 있는 대잠기로 넓은 바다서 머를 잡냐.
      해군 잠수함 함장도 매복아님 잠수함 못 잡는다 했다

너 : 항모전단 가자..
나 : 미친 눔아 헛소리 작작해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끌지 말라고..
언제 한번 니 어록 정리해준다

병자같은 소리 더 하지 그냥 GG쳐..
군적부 얘기 여기서 누가 관심 있다고 하고 자빠졌냐?
평생 물타먹고 살아라..

조선후기는 또 37만이라매?
평민들도 양반신분 사서 징집대상 줄어드는 판에..
일본 전국시대 들먹임서까지 조선후기 37만이라매??

그것도 군적부였다고 물탈래?
               
Centurion 16-09-20 04:25
   
어이구~ 나는 중종시기 자료 올리고 있고만, 무슨 조선 후기 타령이야.
넌 조선 중종이 조선 후기 사람으로 보여? ㅋㅋ

게다가, 이 인간은 우물에서 숭늉 찾나?

내가 슈렉캔디님으로 보이냐?
왜 질문을 나한테 던지노? 너 약빨았냐?
내 아이디가 C모가 아니라 슈렉캔디님으로 보이냐?

글고, 내가 분명히 군적에 40만 올라있다고 했었지.
임진왜란 때 17만 동원된 편제도 보여줬었고.

글고, 워낙에 조선이 상대적으로 세금이 적고, 양민들 부담이 적은 편이라고 말했을건데..

유목민족이나 춘추전국시대였으면.. 1호당 병력 1명 차출인데..
조선은 한 100만 호 있다 치면.. 그 100만호에서 1호당 1명 차출이 아니라..
3~4호 당 1명 차출이니까~ 당연히 군복무하는 정군을 보인 2~3명이 바치는 형태니까..
딴 나라였으면 100만 대군 뽑아낼거, 꼴랑 20만도 안되는 병력 뽑아내는거야.

근데, 그 원칙이 대규모 전쟁나면 그대로 유지될 줄 아냐?
(임진왜란은 고려 때 거란과의 전쟁과 달리 곡창지대 + 인구밀집지역인 삼남지방이 쓸려서 그런거고. )

그냥 평소에 전쟁 안나니까, 윽수로 널널하게 군사제도를 짠거라고..

태국인가 저기는 징병제이긴 한데,
제비뽑기로 운좋으면 군대 안간다잖아.그런 맥락인거야.

게다가, 조선 중후기 되면, 조선 인구가 팍팍 늘어서..
군적에 올라있는 군액이 104만명에 육박하고, 정군 수가 18만 정도에 속오군도 10만명 좀 안되다가, 속오군이 늘어서 20만명까지육박한다. 즉 정군 18만 + 속오군 20만 합치면 40만에 가까워진다. ㅇ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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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104만명의 군액 가운데 중앙군인 경군의 경우, 정군이 16만 6654명, 보인이 47만1859명으로 합계 67만 5773명으로, 당시 전체병력의 약 2/3에해당되는 규모였다.  17세기의 군액 증강은 중앙군의 확대에 촛점이 맞추어졌으나, 그에 따라 중앙군의 비중은 지방군을 배 이상 능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중앙군의 정군/(정군+보인) 비율은 24.66% 이고..
이걸 군적에 오른 군액 104만명에 대한 비율을 구해 보면,
대략 256,476명의 정군과 보인 783,524명이 나온다.

여기에 지방군의 주력으로
임진왜란 이후 편성된 속오군 또한 병력 규모가 꾸준히 증가하여,
병자호란 직후인 인조 14년(1636) 7월의 조사에 따르면
평안도를 제외한 전국의 속오군은 86,000명이었으나,
그로부터 45년이 지난 숙종 7년(1681)에는 전국적으로 약 20만명에 달하고 있었다.

-노영구,국방대학교 군사전략학부 교수, [군사혁명론과 17~18세기 조선의 군사적 변화]

http://blog.naver.com/lord2345/220640032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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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까, 저 시점에서도 조금씩 뒤로 가면 갈수록 인구 늘어나서..

군적에 올라가는 병력수는 점점 커진다.

그럼 25만6천명의 정군 + 속오군 20만 더하면 45만 병력이 나온다. ㅇㅋ?
Centurion 16-09-20 05:02
   
한국해군 잠수함 얘기를 해도..
너 : 전략원잠 도입해서 핵보복하자
나 : 온 세상이 공격원잠 얘기하는데 핵도 없는데
      밀계서 전략원잠 도입 얘기하면 병자된다

=> 내가 예전부터 전략원잠 이야기 한참 했다만, 병자 취급 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 인간아.
      솔까, 영, 프급 핵무장, 혹은 이스라엘급 비공식 핵무장, 아님 일본급 핵무장 준비상태를 유지하자고,
      실컷 주장해왔지만, 반대는 커녕.. 요즘 밀게 분위기나 국민들 분위기가 핵무장이 대세야. 인간아.
      너같이 멀쩡한 조선도 중국 속국이라 주장하는 짜장이나 싫어하지. ㅋㅋ

(참고로 전략원잠 보유론자는 밀덕들 중에 많이 분포해있다. 오래전부터.
 최민수 나오는 '유령'이란 영화는 아냐?)

너 : 공격원잠가자는 얘기다. 그래야 빠른 중국원잠 추격하지
나 : 중국원잠은 중국해군기지서 매복해야 되는데 미쳤다고 거기 매복하냐?

*****************************************
=>

중국, '미국 견제‧전쟁 억제' 위해 태평양에 '핵무장 잠수함' 보낸다
http://m.focus.kr/view.php?key=2016052600165812174 포커스뉴스

********************

2006년 10월, 중국의 쑹(宋)급 잠수함 1척이
오키나와 해상에서 작전 중이던 미국 항공모함 키티호크에 어뢰사정권 내인 9㎞까지 접근해 수면으로 부상했다.
http://news1.kr/articles/?1462249

******************************* 

'오바마 눈앞 무력시위?' 중국 군함, 알래스카 앞바다 첫 출현

http://media.daum.net/m/channel/view/media/20150903084123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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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간은 밀게 그렇게 들락거리면서, 일당백 헛소리하더니, 밀게에서 뉴스기사는 안보나?

넌 도대체 눈뜨고 하는게 뭐냐?

디젤잠수함이 오키나와에서 미군 항모전단 앞에 튀어나오고,
중국 수상함이 미해군기지, 미국 알래스카 근방 지나다니는데..
장거리 뛰려고 만든 원잠이 중국 연해안에만 쳐박혀 있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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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 대잠기로도 잡는데.
나 : 잘해봐야 매시간 1-2대 떠 있는 대잠기로 넓은 바다서 머를 잡냐.
      해군 잠수함 함장도 매복아님 잠수함 못 잡는다 했다

=> 진짜 단세포네.  구소련 잠수함 전력은 아냐?
      그 엄청난 물량의 구소련 잠수함 잡으려고 미국이 설계한게 일본 해자대 대잠전력이야.
     
      어차피, 일본열도, 오키나와, 대만, 필리핀 이 것만 틀어막으면.. 중국 해군전력도 빠져나가기 힘들고.
      북한 고물 잠수함 빨빨 돌아다니면, 미국 원잠이 앞에서 추적할 거고, 비상시국이면.
      일본의 그 많은 대잠초계기 띄워서라도 미국이 잡겠지. 어차피 쪽본도 북한핵 쳐맞을까봐..
      북한 잠수함 쫓는데 협력할게 뻔한거고.

      어이구.. 전략설계 닉이 아깝다. 이 정도 뻔한 일도 예상 못하는 머리로 일당백 타령이나 하고 다니니.
 

너 : 항모전단 가자..
나 : 미친 눔아 헛소리 작작해

=>이거 또 버릇 나왔네. 내가 항모전단 가자디? 이 인간이 장난치나?
    난 중국의 영토야욕 분쇄를 위해서 전략원잠 보유를 주장하고 있는데.. 이 인간이 또 지 머리에서
    내뇌망상해서 내가 항모보유론자인 듯 왜곡질하네. ㅋㅋㅋㅋ

    너 내가 항모 보유 주장한 글 찾아와봐. 못찾아오면 알지? 구라치면 손모가지 퐉!!
    최소 니 닉 탈퇴라도 걸고 구라쳐 인간아.

    물론 돈 좀 썩어나고 전력증강 우선순위 문제해결 다 되면 장만해서 나쁠거야 없지.
    근데 당최 내가 기억도 못하는 항모보유론은 언제 타령했단거야?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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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중구난방으로 끌지 말라고..
언제 한번 니 어록 정리해준다

=> 뭔 어록을 남의 댓글을 지 머리속 필터링한걸 요약해서 적어두냐?
      게다가 없는 말 지어내고..  넌 어록이 뭔지 몰라? ㅋㅋㅋ

    정말 궁금해진다. 너 의무교육 받고 학교는 제대로 나왔냐?


********************

병자같은 소리 더 하지 그냥 GG쳐..
군적부 얘기 여기서 누가 관심 있다고 하고 자빠졌냐?
평생 물타먹고 살아라..

조선후기는 또 37만이라매?
평민들도 양반신분 사서 징집대상 줄어드는 판에..
일본 전국시대 들먹임서까지 조선후기 37만이라매??

그것도 군적부였다고 물탈래?

*******************************

위에 국방대학교 군사전략학부 노영구 교수 글 적어뒀다. 밥오팅아.
ㅉㅉㅉㅉ
ost하나 16-09-20 11:47
   
본문글이나 댓글이나...
이건 뭐 판타지 무협지 수준입니다...
지식이 너무 풍부하고 똑똑해서 노예근성이 글로 나타난걸로 보입니다

명 초기는 요동땅이 명의 세력권이 약하던 때이고
명나라도 요동이 자기의 땅으로 인식 자체가 약했습니다
원나라가 한때 지배했으니 이제 우리가 지배한다는 식이죠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니 요동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려하는건 당연하고 옛 땅을 수복하려 했던것이고
고려가 요동을 포기함으로서...
요동땅이 중국으로 완전하게 넘어온건 명나라때가 처음입니다


그 당시 동북에있는 요동은 고려와 명나라가 다투어 차지하려는게 당연하고요
명나라도 시대상으로 원나라를 정리하고 내부세력을 잠재우고 공고히 할때입니다
자칫 고려와 전쟁을 벌여 대규모 원정군을 보내 제대로 승리하지 못하면 명나라도
한순간에 역사에서  사라질 수 있는 때입니다

땅을 차지하기 위해선 외교전을 통해서 서로의 양보를 얻어내고 더 이상 내밀 패가 없을때 하는게 전쟁이죠.

명나라의 액션 한 방에 고려는 너무 큰 요동을 버려버렸어요
명나라는 요동을 거져 먹었고

고려는 하늘이준 기회를 살리지 못했고요...

본문글이 참으로 웃깁니다
최영장군이 보낸 군대가...
요동 정벌군인지 명나라 정벌군인지 기본도 모르고 있네요
최영장군은 요동을 정벌하라고 군대를 보냈지 명나라를 정벌하라고 군대를 보내지 않았는데 말이죠

중간수역의 땅을 차지하려고 충돌하면 서로의 명분을 채우는 쪽에서 실리 취하고 양보하는 것이고
명나라도 고려와 전면전을 선포하고 원정군을 보내려면 국운을 걸고 하는것입니다...쉬운게 아니란 이야기죠

최영장군이 호구도 아니고 산전수전 다 격은 명장이 승산없는 요동정벌을 계획했겠습니까
승리할 수 있는 확률이 높으니까 요동 정벌군을 보낸거여요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 없습니다
기회는 쉽게 오는게 아니거든요

명나라가 초기에 군을 수백만명을 운용할 수 있다는 것도 판타지고
갑자기 요동 정벌군이 명나라 군대 수백만과 싸워야 한다니 참으로 뜸금없는 이야기 입니다


다시한번 이야기 하지만
너무 지식이 풍부해서 탈입니다
본문 글 내용이 무협지 마냥 부앙부앙 하고 패배주의와 노예근성의 글입니다...
     
Centurion 16-09-20 13:39
   
환타지가 아니구요~

저 시절 요동이라는게 명나라 군대가 이미 왔다갔다 하고,
병력이 배치되어 있던 지역이란 말입니다.

어떤면에선 쳐들어가기 더 나쁜 베트남, 티벳 같은 지역도..
당시 명나라가 침공을 했어요.

그런데 나라가 이미 홍건적, 왜구, 원나라 잔당하고,
공민왕 때부터 전쟁으로 이미 피폐해져서, 나라에 병력이 6만밖에 없는데.
그 중 4~5만을 떼어다가 명나라군 6만~7만이 기다리는 요동 13위
(이게 1388년 위화도 회군직전 요동에 배치된 명군)

얼마전 요동군벌 나하추의 20만과 전쟁해서 굴복시키고 간 명나라군,
몽골까지 쳐들어가 북원의 포로를8만이나 획득하며, 쿠빌라이 계 가문을 멸망시킨 명나라군,
이 명나라 15~30만 별동대와 전쟁을 벌여야 되는 상황이란 말이죠. (이게 1387년 일)

그리고, 저건 제가 작성한게 아니라, 웃대글 퍼온겁니다.
밑에 코멘트를 읽어보셨으면 무슨 말인지 알겁니다.
근데, 오류는 있어도, 크게 틀리지 않다는거죠.

승리할수 있는 확률이 엄청 낮았어요.
최영장군이 대단한 분이긴 한데, 당시에 기세등등한 명나라 쪽수를 누르기엔..
고려가 너무 망가져있었단 말이죠.

그저, 당시 고려는 "자존심" 하나로.. 핍박해오는 명나라군대와 일전을 계획한겁니다.
워낙에 주원장이가 무례하게 굴며, 고려를 어차피 밟아버리겠다 이런 각오로 핍박했으니까요.

고려도 차라리 그 전까지
북원, 나하추와 연계해서 명나라를 칠려는 생각이 아주 없었던게 아닌데..
요동정벌 시작할 당시에 이미 그 두 세력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북원이 다른 징기스칸의 후손 가문으로 연결되긴 하는데, 이때부터는 타타르로 분류됨)

그래서 고려만 덩그라니 남은 상태에서, 주원장이가 철령위 설치 통보하고,
예전부터 북원이랑 짝짝궁했니 마니 갈궈대니, 최영장군이 그런 결정을 한겁니다.

뭐 아주 패기넘치는 결정이긴 한데, 승리할 확률이 거의 없는 전쟁이고..
최영 장군 손에 남은 중앙군이 3천(일각에선 1만 정도 된다고 추측)..

당시 이성계가 왜구 토벌하러 다닐 때도 병력손실이 심했는지..
왜구를 2~3만 예상하는데, 고려의 토벌군이 1만명~많아야 2만으로 숫적열세였단 말이죠.
얼마나 왜구들이 기고만장했던지, 고려의 수군 군영을 직접 공격해서, 고려군 5천을 죽입니다.

고려가 거란이나 여진족과 싸울 때처럼 17만 별무반, 30만 광군을 동원할 그런 상황이 아니였고, 심지어 왜구의 노략질에 관리들 녹봉도 지급못했던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그런 왜구들을 무찌르긴 했다만, 계속 쳐들어오고 있었고,
심지어 위화도회군 직후 일부 병력이 왜구 토벌하러 갑니다. 이게 당시 고려 상황이에요.

굴욕(?)적인 '위화도회군'으로 나라가 세워지긴 했다만,
명나라는 고려가 반발한 철령위를 뒤로 물렸고,
태조 이성계도 처음에는 고명을 받기 위해 저자세로 나갑니다.
그러나 명나라가 계속 꼬장을 피우고, 사신을 죽이는 행위에 격분해서.

이성계를 어찌 설득했던지..
정도전이 요동정벌 계획하며, 사병혁파를 하는 등 일을 추진하다,
1차 왕자의 난으로 죽습니다.

어쨌든 명나라에선 최전성기에, 무골이었던 팽창주의 황제인 영락제 주체가
반란을 일으켜 조카를 몰아내고 황제에 올랐고, 이 때 건문제(조카 주문윤)의
계속 쳐들어오는 군사력에 당시 연왕 주체의 군대가 망할뻔도 했어요.

저 위에 다 적어뒀는데, 그 근거를 안보고, 자기 할말만 하면 끝납니까?


한명기 교수의 G2 시대에 읽는 조선 외교사


제국 전환기마다 한반도 ‘핏빛’…임진·정묘·병자, 그다음은?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98798.html

“조선은 아침 한끼 거리” 주원장 협박의 본뜻은…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00835.html

명-북원 세다툼 틈타 ‘요동정벌’ 칼 빼든 공민왕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02991.html

‘조선’ 국호 받는 등  명에 조아렸지만 ‘요동정벌’ 야심 계속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05120.html

‘왕자의 난’에 무산된 요동정벌이 남긴 유산은…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07217.html


이거라도 좀 읽어본 다음 고려 상황에 대해서 논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저는 본래 꿈이 고토회복이라,
고토회복 참 좋아합니다만..
고려 말 상황은 워낙 막장시절이라 안되는건 안되는거에요.~

굳이 요동정벌하려고 하면,

우리야 팔기군이나 몽골기병 15만을 확보하며,
북송 쇠퇴기, 명나라 쇠퇴기 이런 쇠퇴기에 치고 나가야 되는데,
농경민족이니 최정예 기병 15만 확보가 말처럼 쉽지도 않고,
그만한 질이 나오기 어려우므로,
요동정벌 계획하려면 최소 30만 대군은 준비해야될겁니다.
(참고로 북원이나 나하추 세력은 그 정도의 세력이 있어도 망했습니다)

제가 저 위에 30만에서
최대 100만 대군을 준비해야 된다는 썰을 안읽고 노예근성 타령하세요?

그게 당시 상황 고려하면,
주원장부터 주체까지 이어지는
국력 최전성기인 명나라를 상대해볼만한 군사력 수요입니다.

뭐 비슷한 예로... 인조 때 병자호란으로 굴욕당한 조선이..
청나라를 북벌하겠다는 계획과도 비슷하겠군요.

효종부터 숙종 기간이 순치제 강희제 같은 청나라 군주 시절인데..
이를 상대로 북벌 추진하던거랑 거의 같은 수준의 일이
바로 저 시절 요동정벌 이야기입니다.

참고로 강희제는 여진족 출신이라도,
중국사에서 최고의 황제 5손가락에 뽑히는 명군주구요.
삼번의 난을 제압하고, 대만의 정씨 세력 제압하고, 나선정벌 하던 당시 군주입니다.

그나마 효종때에는 국력이라도 고려 말보다는 훨씬 나았죠.
최소 인조 때 남한산성에 갇혀 있을 때.. 근왕병이 8~9만이 올라오고,
조선의 중앙군이 5만, 수군이 3만쯤 되는 등..
홍타이지가 끌고온 청나라 팔기군 숫자 14~18만에 비해서 질적으로는 좀 떨어져도..
양적으로는 한번 비벼볼만했죠.

그런데, 고려는 그게 아니란 말이죠. 질도 장담을 못하는데. 양이 중과부적란 말입니다.
     
전략설계 16-09-23 00:39
   
Centurion <-- "패배주의와 노예근성의 글입니다..."

ost하나님 정확한 식견이시네요 ^^

C모 애가 글에서 보듯 <황제폐하 만세>, <왜군 세계최강>
외국군대에 노예근성 있는 독특한 애고,
멀 해보지도 않고 패배주의에 쩔어 최영장군을 개~ 또라이를 만드네요.

C모야~
그럼 정도전도 또라이냐?
링크는 왜 걸었냐? 그걸 링크를 왜 걸었어?

니가 최영, 정도전보다 그 시절의 요동을 잘 알어?
     
전략설계 16-09-23 00:50
   
언제 요동이 중국 한족것이었냐?
지금 생각만 하지 말라구

요동은,
명 앞에 몽골
몽골 앞에 금나라
금나라 앞에 요나라
요나라 앞에 발해
발해 앞에 고구려다 병자야~

한족한테 요동은 다른 나라 땅이여..
저기 한나라 시절이나 가봐야 중국 한족께 되는 땅이라구..

최영의 요동출병 1,000년은 더 거슬러 올라가야.. 중국 한족께 된다구..
명이 북원땜에 올라가긴 올라갔지만..
그래서 요동은 주인이 없는 땅이라구..

지금하고 그때 고려 사람들하고 요동에 대한 인식이 전혀 다르다니까..
왜 한족에 주냐 그거야..
해보지도 않고 우는 소리만 하냐.. 이 패배주의, 노예근성아~
퍼즐게임 16-09-20 17:21
   
사실상 고려가 요동을 먹을 기회는 공민왕의 요동정벌이 마지막이라고 봐야죠.
그나마 보급선만 수월했다면 가장 가능성 높았는데.
당시 이성계가 사불가론을 펼치며 반대했던게 결코 허언만 있던건 아닌 만큼
이성계가 무예로 요동벌에서 부우덕까지 격퇴시켰더라도 정작 유지할 능력은 힘들었을 겁니다.

워낙 원나라가 고려 국력을 피폐시켜놓은게 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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