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 계신 회원분들께선 아마 만쭈리라는 네이버 역사블로거를 잘 아실수도 있으실텐데요
일단 역사 잘 아시는분들로부터 좋은 소리듣는 사람은 아닙니다...
꽤 한국사, 특히 조선사를 매우 비관적으로 보는것으로 아는데요
문제는 워낙 글을 재밌게 써서 많은 인터넷 유저들이 진짜인줄 알고 만쭈리 블로거가 쓴 글을 교차 검증 없이 믿기도 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또 이 만쭈리 블로그를 저격하시는 분 (가르친링 블로거)을 어제 우연히 찾았는데 글을 재밌게 쓰셔서 나눠볼까 합니다
그럼 즐감하시길 바랍니다 (다만 글이 매우 깁니다)
아 추가로 글이 좀 어지러울수 있는데 글의 전개는 대충
-만쭈리 내용 언급
-가르친링 회원의 반박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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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amka999&logNo=130190696765&parentCategoryNo=&categoryNo=&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View
글이 엄청 길고 중간에 읽어야할 글도 많습니다다. 스크롤 확인하시고 읽어주시길.
: 역시 한국의 근세사는 유럽과는 물론 당대 동아시아와 비교해도 몇백년은 뒤쳐진 역사였지.
: 글쎄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딱히 그렇지는 않은듯한데 근거라도 있나요?
: 물론이지 우선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단어에서만 보아도 조선은 상업계층을 외면한 중세의 국가였다고.
: 거기서부터가 일단 오류군요. 일단 그 단어가 등장하는건 춘추전국시대가 맞습니다만 당시에는 유학이 국가교학(國家敎學)으로 자리잡기전이니 사(士)라는 단어는 무력을 사용하는 지배층이라고 봐야합니다. 실제로 공자의 활동시기에 선비는 문무를 모두 갖추는것을 미덕으로 삼기도 했었죠.
더욱이 상업을 천시하지않는다고 했는데 중국 역사 내내 제일 높은 비율을 담당하면서 심심하면 돈을 뜯긴게 상업 계층입니다. 명나라시기부터 상업에 높은 영업세를 거두는건 아예 전통이 되어버렸고 청나라의 공식외국무역상인인 공행(公行)은 심심하면 정해진 세금 외에도 다른 세금을 내야했고 이후에도 정부의 물품조달이나 세금에 무기력하게 대응했습니다. 심지어 남경조약의 배상금조차 일부 이들이 조달했죠.
한편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상업의 변화에 대해서 조선 정부는 깊은 관심을 기울렸습니다. 대표적으로 17세기, 그러니까 당신이 그렇게 싫어하는 예송논쟁 전후에 서인과 남인은 각각 재부민산론(財富民散論= 상업활동의 자유로움을 추구하여 재부가 민에게 있어야 한다. 화폐를 각 관청에서 자유롭게 주조하자고 주장했다,)과 이권재상론(利權在上論=상업활동에 대한 통제를 통해 그 이권이 국왕에게 돌아가야야 한다. 국가의 화페 제조 독점을 주장했다. 상평통보가 바로 전형적인 이권재상론의 산물이다!)으로 다투였고 결과적으로 이 두 주장은 이전에 말한 붕당정치에서 말한대로 고르게 수용되었습니다.
또한 임진왜란의 피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상업에 관련된 논의는 폭주하기 시작합니다. 상업적 영농의 확대, 소금,산삼,은광의 개발,국가주도의 상업 활성화, 선박과 수레의 개선, 금속화폐의 주조와 유통등이 그것이지만 이것을 주장한 북인(北人)이 몰락하면서 대부분 폐지되었고 이후에는 (남인의 입장이 반영된) 소금전매제,공물작미론(=대동법), 동전 주조및 유통으로 바뀌게 됩니다. 17세기 후반에는 한편 토지제도를 두고 서인(노론)은 대지주의 견제를 통해 중소지주와 농민의 보호를 통한 성리학적 사회의 완성을 추구했고 남인은 완전한 토지 개혁을 통해 지주제를 폐지한 뒤 소농중심의 사회로 가고자 노력했습니다. 즉 주자학의 한계를 비판하고 원시,한당유학,비유교적 제도의 장점을 끌어모은 새로운 현실극복을 노력한 것이지요. 이들의 이러한 주장의 산물이 바로 중농학파입니다. 한편 서인은 농업보다는 상업의 개혁에 치중합니다. 내수사와 절수(淮陽 = 궁가의 사유지로 세금을 면제받았다. 현종 시기 이들의 주장으로 상한선이 제정되었다.)혁파, 공안개정주장, 국가의 화폐(은을 합쳐서) 통제 반대를 주장합니다. 이러한 노론의 주장을 결실이 맺은게 바로 중상학파지요. (조사하다 안거지만 막상 실학도 자기 당파들의 주장을 체계화한것에 지나지않는것같네요?)
애시당초 중국이나 한국이나 사(士)는 과거제에 합격한 관료층에만 해당되는 명칭이었습니다. 다만 명대에 들어서면서(한국사에서는 정계에 진출하는 성종시기부터) '토지를 기반으로 생활하면서 과거제를 준비하는 사족(士族)'을 포함하면서 '유교이념을 실현하는 지배자 관료층에 편입되려는 노력을 하는 민간인'까지 합치면서 선비의 의미가 넓어지게 된겁니다.
참고할만한 글
양반의 정의에 대해서 더 관찰하고 싶다면 미야지마 히로시의 양반 (우리가 몰랐던 양반의 실체를 찾아서)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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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너무 길어서 계속 잘리네요
다음 내용이 궁금하시면 그냥 링크 누르시고 글 보시는걸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