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은 독립문 건립을 통해 정치적 주체를 중화라는 절대자인 청에서 조선으로 대체하고자 했다. 정신의 중심을 공간적으로 이동시키려는 상징적 정치행위는 바로 영은문을 독립문으로 교체하는 중대한 역사적 사건으로 표출되며, 양반계급의 독점적인 언어인 한문에 대항하여 한글로 신문을 내겠다는 서재필의 입장 역시 절대자를 교체하겠다는 상징적 의도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서재필이 참여하고 있는 독립협회가 언제, 어떠한 경위와 목적으로 탄생되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아관파천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독립문과 독립공원 건립논의는 1896년 6월 20일경부터 시작되었다. 독립신문은 독립의 의미를 조선이 청의 세력권에서 벗어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동아시아의 중화질서란 내정간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은 오랫동안 청의 종주권을 인정해왔지만 사실상은 자주국가와 다름 없었다. 그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 1876년에 열린 모리 아리노리(森有礼)와 천꿰이펀(沈桂芳) 사이의 회담이다. 당시 두 사람의 대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진 문제는 “조선은 독립국 / 자주국인가” 여부였다. 일본은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기 전에 조선이 독립국 / 자주국임을 분명히 하고자 했는데, 그럴 때에 가장 걸리는 부분이 청과 조선의 관계였다. 그러나 독립국 / 자주국이란 개념은 근대 서구 국민국가의 개념으로, 중화질서 내의 국가형태를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었고, 개념이 없었던 만큼 독립국 / 자주국이란 의미도 조선이나 청의 경우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천꿰이펀은 당시 회담에서 독립국과 자주국의 의미를 모리에게 묻고서, 조선은 청의 속국이지만 내정과 외교업무는 자주적으로 처리한다고 분명히 하였다.
모리 : 귀국은 오랫동은 조선을 속국으로 삼는다고 하는데, 속국으로 관리하는 관계에는 마땅히 그런 관계에 합당한 처리 방식이 있을 것입니다.
천 : 속국이란…시기에 맞추어 공물을 진상하고 우리의 책봉 · 연호를 받드는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가 우리 영토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나라의 내정에 간여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임오군란 이후 외세의 압박 속에서 청은 조선을 중화질서 속에서의 속국이 아닌 식민지화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고, 그러한 청의 강박은 임오군란 이후 청 · 일전쟁까지 관례를 깨고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강하게 개입하는 과정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에게 청은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만큼이나 폭력적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청일전쟁 이후 조선 안에서 청의 세력이 미약해지면서 일본과 러시아는 본격적으로 세력확장을 시작했다. 이것이 1890년대 중후반의 조선의 정치적 상황이었다.
조선이 지난날 청국 속국이라고 하였으나 말만 그러하였지 청국이 조선 내정에 상관을 하지 않았고 조선정부에서 무슨 일이든지 조선 일을 임의로 몇백년을 하여왔는데 근년에 청국이 원세개를 보내 조선 정부 일을 속으로 아는 체 한 것은 조선정부에서 자청한 일이요 일본과 청국이 싸운 후에는 조선이 독립이 되었다고 말로는 하였으나 실상인 즉 일본 속국이 됨 같은지라.
(『독립신문』 1896.5.16.)
조선은 청일전쟁의 결과 청으로부터 독립했지만, 실질적으로 일본의 내정간섭을 받아서 일본의 속국처럼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압제로부터 벗어났으니 진정한 독립국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 이 글의 요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