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4권을 인용합니다.
중요 내용만 부분 인용합니다.
19세기 말 조선의 국제적 지위에 대한 문제는 당시 일본의 조선정책을 규정짓는 근간을 이루었으며 청일전쟁의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근대사는 물론 전근대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핵심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서는 당대에도 치열한 논쟁의 대상이었는데 그 이유는 당시 조선이 처해 있던 복잡한
국제관계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전통적 개념과 근대적 개념의 착종으로
말미암아 생긴 혼란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동안 일본과 중국의 학자들은 조선시대 한중관계의 형식과 사료의 용어 표현에만 의도적으로 집착하여 조선의 실제적인 자주성을 묵살하고 중국에 대한 종속성만
강조하여 왔다.
일본 학자들은 청일전쟁으로 인해 비로소 조선이 중국으로부터 독립적인 지위를 얻은 것으로 주장하면서, 일제의 조선 침략을 미화하는 방편으로 삼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의 전형적인 외교형식이 되었던 조공-책봉의 관례나 황제에 대한 칭신의 표현만을 강조하여 현대적 의미의 식민지적인 성격으로 규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조선은 1637년 전쟁에서 항복하여 淸(청)에 복속하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에, 조선초기의 對明(대명) 관계와는 조금 다른 특성이 있었다.
이것이 중국 측 자료에서 조선을 ‘屬國(속국)’으로 표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屬國(속국)’이라는 표현은 조선전기의 明代(명대)에도 자주
사용되었던 것이므로 이 용어가 조선후기 한중관계의 기본적인 성격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한중관계의 실제적인 내용이며,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서 가졌던 조선의 地位(지위)에 대한 인식이다.
(중략)
국제관계에서 ‘주권’(sovereignty)개념은 유럽에서 군주의 세속권력에 대한 교회의 도덕적 권위가 종식되면서 진전된 일련의 관념과 이론에 의해 형성되었다.
웨스트팔리아 조약(1648)을 기점으로 국제관계는 국가가 중심적인 행위자이며, 모든 국가는 법적으로
평등하고 각자의 주권은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국제체제’를 형성하였다.
분권화된
국제체제는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세력균형 원칙, 국제법, 국제회의, 외교적 관행의 발전 등을 이루었고, 이러한 제도들의 등장과 함께 국가 간 체계는 공통의 규범,
규칙, 그리고 의무를 인정하는 ‘국제사회’(international society)로 전환하게 된다.
동아시아의 전통적 국제질서체제는 1842년 난징조약의 체결을 시작으로 하여 동아시아 제국이 서구와 대외수호조약을 체결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서구 제국과의 조약체결은 단지 국교통상의 대상국이 서구제국까지 확대된다는 국가 간 관계의 양적변화 뿐만 아니라 국가 간의 관계양상, 곧 국제질서관의 본질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전통적인 중국적 세계질서 또는 조공체제 대신 서구적 국제질서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조선에서 주권 개념을 수용한다는 것은 곧 전통적 사대관계를 부정하고, 서구 주도의
근대국제질서에 편입함을 의미한다.
주권 개념이 수용되기 이전까지 조선의 대외관계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사대질서에 속해있었으며, 그 특징은 종주국과 조공국간의 불평등한 질서였다.
문호개방은 이러한 불평등한 국제질서를 ‘평등한’ 관계로 대체할 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그 혼란은 예정되어 있었다.
(중략)
조일수호조규는 조선과 중국의 전통적 관계가 파괴되고 근대 국제법질서로 편입됨을
선언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일본은 조약문 첫 조항에 ‘조선은 自主之邦(자주지방)으로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고 명시하였다.
조선 측은 전통관계의 연장선상으로 인식하였지만, 일본 측의 입장은 조선이나 청국을 침략하고자 하는 기초를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조일수호조규를 맺기 전후하여 조선의 자주독립 문제가 거론되었는데, 일본은
조선과 조약을 체결하기 전 1873, 1875년에 청국에 관리를 파견하여 조선과 청국의 속방관계와 현황, 조선과의 조약에 관한 청국의 대응 등을 타진하기도 하였다.
1876년 1월 10일 森有禮(모리 아리노리)와 沈桂芳(천꿰이펀)의 회담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청국은 조선이
속방이지만 모든 내치와 외교는 자주에 맡긴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청국의 태도는
이미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당시에도 제기된 것이었다.
이때 일본은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며, 청국과 조선과의 사이에 존재하는 ‘애매한 종속적인 관계’를 분명히 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조일수호조규는 조선 최초의 근대적인 조약으로서 앞으로 전통적인 청국과의
종속관계를 어떻게 주권평등의 만국공법(근대 국제법)관계로 전환할 것인가 하는 새로운 과제를 조선에 제기하였다.
당시 일본은 자주지방을 통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했다는 해석을 내렸고 조선과 청은 이를 통해 조선이 독립된 주권국이 아니라 속방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설정하였다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판단의 차이는 계속해서 양국은 물론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를 애매하게 만들었고 동아시아 국제분쟁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즉 ‘조공과 책봉’, ‘사대와 교린’의 관계로 이어지던 중화질서와, ‘주권’과 ‘조약’ 관계,
‘국가 평등 관념’과 ‘무정부적인 세계’로 이어지는 근대국제질서라는 두 개의 패러다임이 갈등하며 교차하는 상황에서, ‘자주국’이라는 개념은 애매모호한 해석의 소지를 처음부터 안고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조선은 자주국을 사대교린 질서 안에서 통용되던 원리, 즉 “外蕃(외번)은 그 내정과 외국 교제를 자주적으로 행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이를 교린 질서의 연장으로 해석한 반면, 일본은 자주란 곧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양국은
만국공법에서 말하는 주권 국가임을 인정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중략)
그런데 조선 후기의 외교 형식은 조선전기의 대명관계와 같은 것으로서 조공과 책봉을
근간으로 하는 사대외교였지만, 조선의 영토나 정치적 자주권은 완전히 보장되었다.
외교의 형식면으로 본다면 청의 황제와 조선의 국왕 사이에는 천자와 제후의 관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었지만, 실제의 내용에 있어서 조선은 거의 완전한 독립국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한중관계는 이러한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중략)
1895년에 맺어진 시모노세키 조약은 조선을 배제한 채 청과 일본 사이에서 체결된 것이었다.
사실상 조선에게 있어서 청을 제외한 모든 국가와의 관계에서 이미 조선은 독립국으로서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일본이 청과 싸워서 조선의 독립을 얻어 주었다는 서술은 잘못이다.
더욱이 조선의 독립 인정은 곧 이은 조선에 대한 보호국화 정책의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청의 속방보다 훨씬 강력한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일본 측에서 조선이 받았던 청의 속방시기를 강력했던 것으로 설명한다 하더라도
일본이 자행했던 보호국화 정책과 식민지 지배에 비교하면 대단히 미약한 것이었다.
(중략)
결국 일본이 청으로부터 조선을 구원하여 독립국으로 만들어 근대국가로 출발하게 했다는 논리는 당시 일본 정부의 침략의지를 호도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의 왕실과 정부가
청으로부터의 외압으로부터 벗어나 자주권 회복을 시도함은 물론 독립국으로서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했던 흔적을 무시하는 것이다.
1905년 보호국으로 전락하여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빼앗기고 마침내 식민지로 전락했던 것은 바로 일본이 그동안 줄기차게
주장해왔던 조선독립론의 의도와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