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의 열하일기는 당시에도 매우 인기있는 기행문이었다.
격식에 상관없이 편안히 읽을 수 있는 문체로 박지원이 청나라를 보고 느낀 그대로를 써서 부담없이 읽을 수 있었던 모양이다.
심지어 정조도 이를 읽은 뒤 문체가 너무 속되다며 박지원을 꾸짖고 반성문을 쓰게 했다는 일화도 있다. 물론 반성문은 격식을 갖춘 명문이어서 정조도 웃고 말았다고 한다.
열하일기의 열하(熱河)는 당시 하북성의 승덕을 일컫는 지명이며 바로 청나라 황제의 여름별궁인 피서산장이 있는 곳이다.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로 청나라의 북경에 갔으나 황제는 피서산장에 있는 바람에 북경에서 다시 피서산장이 있는 열하까지 강행군을 하여 황제를 접견하게 된다. 이 과정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바로 열하일기다.
어쨋든 사신단은 건륭제를 접견하였으며 이 때 불교에 관심이 많았던 건륭제는 사신단에 티벳의 판첸라마를 소개해 준 모양이다.
여기서 사신단의 의견이 분분했는데 조선의 양반이 천한 중놈을 어찌 만날 수가 있느냐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기는 했지만 그러다 황제의 노여움을 싸면 어떻게 하느냐는 현실적인 걱정에 만나느냐 만나지 않느냐로 설왕설래를 한 것.
결국 황제의 노여움을 싸면 어쩌냐는 현실적인 걱정에 형식적으로 판첸라마를 만나기로 했는데 판첸라마는 사신단에게 많은 선물을 준 모양이다.
이 선물을 받은 사신단은 천한 중놈이 준 더러운 물건이라며 역관에게 줘버리고 역관들도 어차피 조선으로 가져가봐야 천한 중놈이 준 물건을 가져왔다고 욕밖에 더 들어처먹겠냐며 이 물건들을 팔아버렸다고 한다.
실제 저 선물들을 팔았는지 아니면 버렸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조선으로 가지고 들어오기에는 분명 곤란했던 모양이다. 압록강에 버렸다는 이야기도 있고.
조선후기에 들어 실학이란 학문이 조금씩 성리학의 틈사이로 싹을 피우는 와중에도 아직 불교를 배척하는 억불사상만은 변하지 않았던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