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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7-22 13:41
[기타] 1) 우리는 그들에게 70여 년을 속았다.
 글쓴이 : 스리랑
조회 : 4,951  

식민사학은 어떻게 역사학계의 주류로 자리 잡았는가?
서울대, 연세대 교수를 지내신, 역사학계의 존경받는 원로이신 김용섭 선생님께서 최근에 발간하신 회고록에서 해방 이후 어떻게 잘못된 과정으로 식민 사학이 역사학계의 소위 주류로 자리 잡으면서 아직까지 강단 권력을 휘어잡으면서 우리 역사와 민족을 좀먹게 되었는지 그 상황을 잘 증언해주신 부분이 있어서 발췌, 소개해 드립니다.
 
6.25전쟁 이래로 남에서 제기되는 통사의 편찬 문제는, 아직은 깊은 연구에 기초한 식민주의 역사학의 청산 없이, 우선은 기성의 일제하 세대 역사학자들에게 일임되는 수밖에 없었다. 그 기성학자들은 일제하 일본인 학자들에게 역사학을 배우고, 그들과 더불어 학문 활동을 같이해온, 이른바 실증주의 역사학 계열의 학자들이 중심이었다.(김용섭,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p35)
 
해방이 되었을 때, 서울에는 전통적 역사학에 기초하여 우리 역사의 고대사를 연구하는 신채호 계열의 정인보, 안재홍등 민족주의 역사학 또는 신민족주의 역사학의 학자가 건재하고 있었다...중략... 그렇지만 6.25전쟁 이후에는 이들 모두가 북상을 하였고, 따라서 그 학문적 전통이 대대적으로 계승 발전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실증주의 역사학자들은 역사학계의 원로로서 주요 대학의 교수직을 독점하였으며, 그 저술은 역사학계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가는 자산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중심이 되었던 것은 이병도의 『조선사대관』과 그가 이끄는 진단학회의『 한국사』(전 7권)이었다.(김용섭,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p35~36)
 
 
우리나라 역사학계에 식민사관이 건재하게 뿌리내린 이유는 무엇인가?
일제는 조선의 얼인 조선어와 조선사를 치밀하게 통제하고 조작했다. 일제는 조선사의 시간과 공간을 축소하고, 조선은 예로부터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논리를 조선사편수회와 경성제국대학을 통해 창조했다. 조선사편수회 출신 이병도가 국사학계 태두로 서울대에 있으면서 식민사관을 정설로 굳혔다. 그가 주장하는 실증사학의 미명을 거둬내면 황국사관이다. 그들이 학문권력을 장악하고 민족사관이 단절되면서 식민사관은 견고하게 한국사를 틀어쥐었다.(『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 저자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주한)
 
김용섭 교수 회고록(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지식산업사, 2011)을 보면‘6·25전쟁 이래로 남에서 제기되는 통사의 편찬 문제는, 아직은 깊은 연구에 기초한 식민주의 역사학의 청산 없이, 우선은 기성의 일제하 세대 역사학자들에게 일임되는 수밖에 없었다. 그 기성학자들은 일제하 일본인 학자들에게서 역사학을 배우고, 그들과 더불어 학문 활동을 같이해 온, 이른바 실증주의 역사학 계열의 학자들이 중심이었다’는 증언이 있다.
 
“우리나라 한국고고학을 이끌었다고 불리는 김ㅇ룡(원문에서는 이름이 자세히 나옴)이라는 분이 있다. 전 서울대 교수신데 쓰에마쓰(末松保和) 라고 불리는 도쿄 극우파 국사학과 교수를 공항까지 마중 가서 서울대로 모시고 다녔다고 한다. 이 분이 한 짓이 원삼국론이다. 중국이 지금 북한을 유사시 먹기 위해 내는 이야기로 우리나라 나오는 철기문화를 부정하면서 철저하게 우리나라를 남한에 가두게 하는 이론이다.(김용섭,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역사학의 거두로 불리는 이병도 교수 이야기를 해보겠다. 이 분은 더 심하다. 일본에 천리교라는 종교가 있다. 몽유도원도 및 우리나라 유물을 훔쳐간 교단인데 이병도 교수님이 예배를 들이고 계셨다고 한다. 이 분은 일본 정부에 돈 받아서 우리나라 역사왜곡에 힘을 쓰셨다. 그 덕에 지금 우리가 그 왜곡된 내용을 배우고 있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우리나라 역사교육을 장악하고 있고 그들과 조금 다른 학자들에게는 이단아, 원색 비난으로 대응하고 있다.”
 
김용섭(80) 전 연세대 사학과 교수의 회고록에 따르면 학과 동료 교수이기도 한 고故 한ㅇ근과 김ㅇ준 교수(원문에서는 이름이 자세히 나옴)에게 각각 두 번씩 호된 질책을 받기도 했다.“김ㅇ준 교수가 한 번은 나를 보고 웃으시며,‘김 선생, 김 선생 민족주의는 내 민족주의와 다른 것 같애’,‘예, 그런 것 같습니다. …’, 그 다음은 노발대발하시며, ‘이○○ 선생에 대해서 무슨 글을 그렇게 써!’하시며 질책하셨다. 마치 부하 직원이나 제자를 대하듯 나무라셨다. 전자는 경고성 발언이고 후자는 절교성 발언이라 생각되었다.”(770쪽)
 
 
한ㅇ근은 여러 사람이 동석한 가운데 김 교수에게 “김 선생, 우리 이제 민족사학 그만하자.”고 했다고 회고했다. “(한 번은) 너덧 명의 중년ㆍ노년 교수가 내방하였다. 노크를 하기에 문을 열었더니, 김ㅇ룡 교수께서 말씀하시기를‘일제 때 경성제대에서 내가 배운 스에마쓰(末松保和) 선생님인데, 김 선생 강의를 참관코자 하시기에 모시고 왔어요. 김 선생 되겠지?’ 하는 것이었다.”(768쪽)
 
스에마쓰는 조선총독부 관리이자 경성제국대학 교수로서 임나일본부설을 체계화하는 등 식민주의 역사학을 제창하고 수립한 중심인물로 꼽히며, 당시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교수인 김ㅇ룡은 경성제국대학 시절 그의 제자였다. 이런 식으로 학교 안팎에서 압력이 거세지자 “그리하여 나의 문화 학술운동은 사실상 끝이 났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서울대학교의 관악산 이전을 계기로 나도 이 학교를 떠났다”고 회고록에 적었다.
 
 
 
윤내현 교수는“학계에서 만주지역을 언급한 분은 신채호, 정인보, 장도빈 등 소위 민족주의 사학자들인데, 해방 후 우리 사학계는 그분들의 연구를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냥 독립운동 하던 분들이 애국심, 애족심에서 만들어낸 이야기쯤으로 취급했죠. 물론 그분들의 연구에는 각주가 없기 때문에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을 했는지는 알 턱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정인보 선생의‘조선사연구’에는‘고조선의 국경은 고려하다’라고 되어 있는데 문헌에는 도대체‘고려하’란 지명이 나오질 않아요.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도‘고조선의 서쪽 끝이 헌우락’이라고 하는데 헌우락이 어딘지 알 길이 없으니 아예 무시한 겁니다. 그런데 중국 문헌을 찾다 보니『요사(遼史)』에 헌우락이 나오더군요. 또 옌칭에서 중국 고지도를 뒤지다가‘고려하’라는 강명을 발견했습니다.
 
대능하에서 북경으로 조금 가면‘고려하’가 있고 상류에 고려성터가 있었다고 합니다. 일제시대 만주에 살던 분들께 물어보니 고려성터가 있고 일본이 세운 팻말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신채호, 정인보 선생은 현지답사도 하고 문헌도 보았던 겁니다.”(『홀로서기, 그러나 외롭지 않다』
 
단국대 윤내현 교수는 1980년대 초부터 우리 고대사에 잘못된 점이 많음을 지적해 왔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연구한 결과였다.. 잘못된 역사를 그대로 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들을 지적했던 것이다. 필자는 그러한 발표를 하면서 학계에서 박수는 받지 못하더라도 함께 연구해 보자는 정도의 관심은 끌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너무 순진한 것이었다.
 
어느 학술 발표장의 청중들 앞에서 필자는 한 대선배 학자의 모진 질타를 받았다.“땅만 넓으면 좋은 줄 알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날 중국 문헌을 검토한 결과 고조선의 영역이 종래의 우리 학계에서 생각한 것보다 훨씬 넓었다는 견해를 발표했던 것이다. 지금은 고조선의 영역을 한반도와 만주를 포괄한 지역으로 보는 것이 우리 학계의 통설처럼 되어있지만 당시 우리 학계에서는 고조선을 대동강 유역에 있었던 아주 작고 미약한 세력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필자에 대한 압력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필자가 재직하고 있던 학교의 총장 앞으로 투서가 들어왔다.
 
필자를 학교에서 쫓아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대 선배 학자의 학설을 따르지 않는 것은 선배에 대한 예의를 지킬 줄 모르는 행동인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교육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 뒤 어느 정보기관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가 확인하고자 했던 것은 필자가 주장하고 있는 우리 고대사의 내용이었다. 필자가 북한 학설을 유표하면서 학계를 혼란하게 하고 있으니, 조사해 달라는 학계의 요청이 있어서 국장에게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당시 고조선에 대한 연구는 북한이 남한보다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었고 고조선의 영역을 더 넓게 보고 있었다. 그런데 필자가 고조선의 영역을 만주까지 넓게 잡자 이것을 북한 학설을 유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모함했던 것이다.
 
왜곡된 역사학의 청산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던 학자들은 대부분 북상하고, 서울이나 기타의 대학에 남아서 학생을 교수하고 지도하게 된 학자들은 이러한 문제를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인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역사학을 단지 과학적·합리적 근대 학문으로서 연구하면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역사 인식의 자세가 안이하였으며 그러한 한에서는 일제하의 역사학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하여 남의 역사학계에서는 이 청산 문제가 사실상 실종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중략...친일 민족반역자 처벌(반민특위법)이 무산되었던 사정과도 관련하여, 역사학에서 식민주의 역사학의 청산 문제를 거론하기 어렵게 하였다. (김용섭,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p469)
 
 
저자소개
이희진 DK7117@PARAN.COM
이희진은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자연과학을 전공하려 들어갔던 대학(고려대학교)에서 인문학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제 발로 역사학을 전공하는 가시밭길로 뛰어들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과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하면서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하필 역사학 중에서도 가장 험악한 고대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그 와중에 못 볼 꼴을 많이 보게 될 고대 한일관계사 분야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연구성과도 박사학위 논문을 기반으로 한 『가야 정치사연구』부터 『가야와 임나』, 『거짓과 오만의 역사』등 그 분야에 집중되었다.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고대사연구자들이 얼마나 일본의 연구에 의지하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뭘 모르던 시절, 함부로 입을 놀려서는 안 되는 미천한 신분을 깨닫지 못하고 알고 있는 내용을 여기저기 발설한 죄로 지금까지 왕따를 당하고 있다. 이 책을 쓰게 될 계기도 이러한 인생역정과 관계가 깊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책소개
식민사학은 어떻게 아직까지도 강단을 장악하고 있는가. 그들은 무엇 때문에 식민사학에 그토록 집착하는가. 식민사학은 역사를 어떻게 조작했는가. 일제 식민지사학이 한국 고대사에 미친 영향을 담은『식민사학과 한국고대사』. 한국고대사에 청산되지 못한 일제식민사의 잔재를 찾아보고 그것을 통해 대한민국 사회의 병리현상을 살펴본다.
 
 한국고대사를 전공한 학자인 저자는 식민사학의 문제점을 찾아내고 한국 고대사 학계에 만연해있는 식민사학의 논리를 내부 고발자의 심정을 담아 진술한다. 해방 이후 한국고대사학계를 장악한 인물들 대부분이 일제 시대에 고대사를 익힌 학자들이며 그들의 기득권 수호 투쟁이 갖고온 것이 지금의 식민사학에 물든 한국고대사임을 주장한다. 결국 식민사관이란 실체가 있는 역사관이 아니라 권력에 복종하고 현실에 야합하려는 반역사적 태도를 학문으로 포장한 것이며 건국 70년이 되도록 청산하지 못한 식민사관의 모습임을 보여준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식민사학 자체는 근대에 들어와 일본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고 만든 역사학이다. 하지만 그 뿌리를 캐고 들어가다 보면 고대사에 직접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가 만든 식민사학의 구조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살펴보아야 하는 분야이다. --- p.14 여기서 의아해질 사람이 있을 것이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아직까지 일제의 식민사학을 추종하는 자들이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인지? 또 그런자들은 무엇 때문에 식민사학에 집착하는지? 어떻게 그런 자들의 세력이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점을 보여주는 게 바로 이 책을 쓰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하나는 식민사학자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역사를 만들기 위해 어떠한 속임수를 쓰고 있는지 밝혀 보자는 것이다. pp.15~16 [예스24 제공]
 
출판사 서평
독도나 정신대 문제를 비롯한 일본의 역사왜곡이 불거질 때마다 온나라가 뒤끓는 대한민국에서 일제 식민사학이 틀을 세운 한국 고대사를 후손들에게 교과서에서 가르치고 있다니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이 책은 한국 고대사 학계에서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것이 이러한 비극의 출발점이었다고 진단한다.
 
이병도를 비롯한 해방후 한국 고대사학계를 장악한 인물들은 자신들의 역사학을 실증사학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반대편의 역사학은 반실증적인 것 즉 반과학적인 것으로 몰아가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의 역사학이 실증적인가? 그들이 말하는 실증성을 대변한 인물이 쓰다 소키치이고, 쓰다의 학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 초창기 한국 고대사학계였다. 하지만 그들이 배운 쓰다 소키치의 한일 고대사 체계는 실증사학의 탈을 쓴 황국사관에 불과하다고 저자는 단언한다. 사실 체계라고 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일본서기』의 일부를 비판하는 척 하면서, 삼국지 위지동이전과 한전의 기록을 활용해 한반도 초기 국가의 식민성을 강조하는 그림 만들기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림 맞추기를 위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철저히 무시되었고, 그 결과 한반도 고대 국가의 건립 연대는 수 백년이나 늦추어졌다는 것이다. 이제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토대로 한국고대사를 복원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을 것을 저자는 제안하고 있다.

누가 식민사학을 옹호하는가?
청산해야 할 역사를 청산하지 못했을 때, 역사가 어떻게 뒤틀린 길을 가는가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분야가 고대사 학계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이병도가 키운 제자들이 대한민국 학계를 장악하고 역사학을, 기득권을 수호하는 ‘그들만의 리그’로 키운 결과가 바로 현재의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기득권 수호 투쟁이 어떻게 학계의 신진대사를 방해하고, 학자들을 패거리 집단으로 전락시키며, 저잣거리의 시정잡배만도 못한 짓을 하면서도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안 느끼는 파렴치한이 되고 있는지를 저자는 처참한 내부 고발자의 심정에서 진술하고 있다.
 
이들에게 연구 기금과 학회지 발간 및 활동비를 지원하는 관료들이 결국 이들과 야합하게 되는 과정을 이 책에서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국민의 혈세가 무사안일과 출세주위에 물든 관료들의 손을 통해 학계 기득권 세력에게 선심 쓰듯 뿌려지는 모습은 독자들에게 충격적인 모습으로 다가갈 것이다. 또 이러한 학계 기득권 세력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 언론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대한민국의 공영방송이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을 극복하자면서 만든 프로에 어떻게 식민사관에 입각한 논리를 담고 있는지를 지적하고 있다. 또 이를 비판하자 진상을 외면하는 것은 물론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을 문제 있는 것으로 몰고 가고 또 그런 내용을 책으로 만들어 전국민에게 배포함으로써 결국 식민사관을 국민에게 주입시키는 결과를 자아냈던 경험담을 수록하고 있다.
 
결국 식민사관이란 태생부터 어떤 실체가 있는 역사관이 아니라, 철저히 권력에 복종하고 현실과 야합하는 반역사적 태도를 학문의 이름으로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고 저자는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식민사관이 건국 70년이 되도록 청산되지 못하고 오히려 뿌리를 더 깊이 박고 가지를 쳐서 학계에서 큰소리를 치는 주류로 성장한 것은 대한민국 사회의 병리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이것이 신진 학자에 불과한 저자가 미래의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고 스스로 몸을 던져 불속에 뛰어드는 이유일 것이다. [예스24 제공]
 
 
송호수교수는 한국 사료가 멸실된 이유를‘정치적 외세에 의해 사료에 가해진 타격’과‘종교적 외세에 의한 핍박’이라 강조하면서 사료 멸실의 대표적 사례로 열 가지를 꼽는다. 그 가운데 전란이 무려 일곱 차례에 달한다.
제1차, 고구려 동천왕 18년(244) 위나라 장수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 수도 환도성을 공함攻陷(공격하고 함락함)하여 많은 사서를 소각함.
제2차, 백제 의자왕 20년(660) 나당연합군에게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사고史庫가 소진됨.
제3차, 고구려 보장왕 27년(668)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이 평양성을 공격하여 전적典籍을 모두 탈취함.
제4차, 신라 경순왕 원년(927) 후백제의 견훤이 경애왕을 치고 신라 서적을 전주로 옮겼다가 왕건에게 토멸당할 때 서적이 방화 소각됨.
제5차, 고려 인종 4년(1129) 금나라에 서표誓表(맹세하는 표문)를 바친 후 고려 서적을 금나라가 수거해 감.
제6차, 고려 고종 20년(1233) 몽고의 난으로 고려 서적이 쿠빌라이忽必烈에 의해 소진됨.
제7차, 조선 태종 11년(1411)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송제宋制에 의거하여 설치하면서 비非유교 서적 일체를 소각함.
제8차, 임진왜란(1592~1598)으로 무수한 전적典籍이 방화로 소실됨.
제9차, 병자호란(1636~1637)으로 수많은 사서가 소실됨.
 
제10차, 한일강제병합(1910) 이후 일본이 20여 만 권의 서적을 탈취 혹은 소각함. 송호수, 『한민족의 뿌리사상』, 10~11쪽. 초대 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1910년 11월부터 전국의 각 도ㆍ군ㆍ경찰서를 동원하여 1911년 12월 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계속된 제1차 전국 서적 색출에서‘단군조선’관계 고사서 등 51종 20여 만 권을 수거하여 불태웠다고, 광복 후 출간된 『제헌국회사』와 문정창의 저서인 『군국일본조선강점36년사』는 밝히고 있다. 이렇게 외세의 침략 혹은 우리 스스로 저지른 과오 때문에 한국사의 참모습을 확인시켜 줄 사서들이 거의 사라져 버린 지금, 천우신조로 『환단고기』와 『단기고사檀奇古史』, 『규원사화揆園史話』,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 등 몇 종의 사서가 보존되어 전할 뿐이다.
 
그 가운데서도 삼성조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근세조선을 제외한 한국사의 국통 맥 전모를 밝힌 『환단고기』는 한민족 고유 사서의 완결본이라 하겠다. 『단기고사』는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대진국을 세운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大野勃이 발해 문자로 쓴(729년) 책으로 고조선과 그 이후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전수 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1949년 국한문으로 번역되었지만, 6.25 남북전쟁 때 소실되었다.
 
근대 역사의 과정에서 보면 유대인이 20세기에 약 6백 만 명이 가스실에 끌려가서 죽었다고 하는데, 그러나 우리 한민족은 아마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일본 제국주의자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8백 만 명이 학살이 되었다. 김삼웅 선생이 쓴 “일본 우리를 얼마나 망쳐놨나”. 언더우드 선교사가 증언한 게 있는데 여성을 옷 베껴 놓고 유방을 도려내고 눈알을 파내고 그렇게 참혹하게 죽어간 이 민족이, 남경학살의 역사 박물관에 가면 참혹한 모습을 보는데 우리 한민족은 사실 그 이상 당했다.
 
일본 제국주의 명치의 특명을 받은 특공대들이 히로시마에서 인천항으로 들어와서 장흥 서남방으로 해서 갑오동학 농민혁명군 30만 명을 죽였다. 사실은 60만 명 거반 다 죽은 것이다. 20세기 초엽 한일합방 이후 우리 한민족의 역사 탄압이라는 것은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너의 조센징은 성을 갖지 말아라. 너희들은 이름도 조선말로 써서는 안된다. 성과 이름을 빼앗았고, 조선 강토의 정기를 끊으려고 쇠말뚝을 박고. 그러고서 나중에는 역사의 혼을 뿌리 뽑았다. 그런데『환단고기』를 전해준 양반들이 대부분 절식(絶食)으로, 또 일본 제국주의 침략주의자들에게 잡혀서 사지가 잘리고 그렇게 무참하게 죽었다. 이『환단고기』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병도선생 이후 지금 강단 사학은 식민사학의 큰 틀은 전혀 극복이 안돼 있다.
 
동경대에서 나와 있는 1904년도 삼국유사본을 보면 거기에는 석유환국(昔有桓國)이라고 아주 뚜렷하게 나와 있다. 이마니시 류가 그걸 석유환인(昔有桓因)이라고 조작을 했는데, 우리나라에 여러 학자들이 쓴 책을 보면 야, 그것은 國 자나, 因 자나 그때 같이 그런 서체로 썼다. 조작한 게 아니다. 그걸 가만히 보면 심성이 잘못돼 있다.
 
『환단고기』를 읽어가면서 그 극적 클라이막스가 고려 공민왕 때 문하시중(門下侍中), 지금으로 말하면 국무총리까지 역임한 행촌 이암(杏村 李灸,1297~1364) 선생이 쓴 단군세기(檀君世紀) 서문이다. 단군세기 서문에 대해서도 위서론자들이 이런 저런 얘기를 한다. 대한민국의 정통 강단사학의 태두들이 자리 잡은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가 단군세기 서문을 보면 너무 근대사의 술어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세계만방이라는 말이 옛날에 쓰던 말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국유형(國猶形) 사유혼(史猶魂)”하니, 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혼과 같으니, 이게 박은식 선생의 한국 통사(韓國痛史)에 있는 얘기를 끌어다 썼다고 한다.
 
그런데 박은식 선생의 책 원본, 한자로 된 책을 보면 내가 옛사람의 글을 인용해서 이런 얘기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박은식 선생이 단군세기(檀君世紀)를 베낀 것이다. 그런데 그 앞에 한 구절을 빼고서 거꾸로 뒤집어가지고서 한국통사에 있는 그런 한 구절을 단군세기에다 끌어다 썼다고,이유립이가 조작을 했다고, 그런 것을 보면 위서론자들의 심성이 좋은 사람들이 아니다. 또 예를 들어서 누구도 현혹되는 얘기가 있다. 복애거사의 거사居士란 말은 근대에 쓴 것이지 이게 옛날 말이 아니다‘라고, 그러니까 『환단고기』는 조작된 책이라는 것이다. 거기서 말하는 거사居士, 평등平等, 자유自由, 그 다음에 헌법憲法이라는 것도 전부 다 2천 년 전에 쓴 술어다.
 
세계만방(世界萬邦)이라고 하는 언어는 훨씬 오래전에 쓴 그런 용례가 있다.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행촌 이암이 국록을 먹은 사람이 몽고니, 고려니 이런 말을 직설적으로 쓸 수가 있느냐’라고 묻는다. 행촌 이암은 고려말 사람으로 여섯 명의 왕을 모신 사람이다. 지구촌의 3분의 1을 통일한 원나라 대제국이 고려를 쳐들어 왔을 때, 원나라의 시녀로 전락한 고려의 오잠吳潛, 유청신柳淸臣 같은 역적이 나와 가지고 고려란 나라 간판을 떼고서 전부 보따리 싸들고 원나라 조정으로 귀속해버리는 이런 역적들이 날뛸 때다. 그런 절망적 상황에서 행촌 이암이 어린 시절 자기 아버지 명으로 열 살 때 강화도 마리산 참성단 위에서 사서삼경을 암송하면서, 우리의 시원역사의 경전을 암송하면서, 하늘에 맹세를 했다. 그 시詩에 제가 동방의 빛을 꼭 회복하겠나이다. 그런 젊은 날의 순정이 단군세기 서문에 보면 너무도 명쾌한 논리로 정리가 돼 있다.
 
행촌 이암(杏村 李灸,1297~1364)선생의 후손 가운데서 현손인 고려 중종( 中宗) 15년(1520년) 이맥李陌(1455~1528)선생이 찬수관(撰修官)이 되면서 자기 윗대 할아버지로부터 전수내려온 단군세기(檀君世紀)라든지, 조선 왕조에서 살아남았었던 우리의 역사서를 집대성 해서 여덟권의 『태백일사太白逸史』書를 냈는데, 그 첫 번째 책이 바로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다.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를 읽어봐야 이 동북아 역사의, 역사 정의가 바로 잡힐 수 있는 것이다.
 
식민사학자들은 『환단고기』에 대한 태도부터가 잘못되었다. 일단 부정하고 보자는 생각으로 꼬투리를 잡다보니‘잠청배(潛淸輩)’를“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 땅에서 청나라를 몰아낸 일본이‘청과 몰래 내통한 무리’를 가리켜 한 말”이라고 잘못 해석하는 웃지 못 할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잠청배(潛淸輩)"는 원래 이암이『단군세기』서문에서 처음으로 쓴 말인데 원나라 간섭기 때 고려 인물로 정치적 문제를 일으켰던 오잠과 류청신의 이름을 빗대어‘오잠(吳潛)과 류청신(柳淸臣) 같은 무리’라는 뜻으로 한 말이다. 위서론자들은 이렇게 잠청배를 잘못 해석하여 『단군세기』 서문은 이암이 아닌 구한말 이후의 사람이 쓴 것이라는 억지 주장을 한 것이다. 이것은 역사학자가 역사 지식의 부족을 스스로 드러낸 주장이다. 정말 통탄할 노릇이다.”
 
또 그들은『환단고기』에 나오는 지명과 인명의 실제 사용연대가 저술 연대보다 훨씬 후대이므로 그 내용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고탑이라는 지명과 잠청배라는 용어를 들어 단군세기나 북부여기가 청나라 이후에나 저술될 수밖에 없는 책이므로 고려시대에 저술된 책이 아니라 청나라 이후에 조작된 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위서론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무지하고 억지스러운지를 반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고탑은 그들의 주장처럼 청나라 이후에 생긴 것이 아니라 이미 명대明代의 기록에 영고탑이라는 명칭이 나오고 있으므로 위서론자들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 그들은『환단고기』를 구성하는 각 역사서의 저자를 문제 삼는 것이다.‘ 안함로와 원동중의『삼성기』’라는 『세조실록』의 기록은 보지 않고 그보다 70여 년 후에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안함安咸·원로元老·동중董仲’세 사람이 황해도 해주 수양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삼성기』의 저자를 안함로, 원동중 두 사람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 주장한다. 얼핏 일리 있는 말로 들리지만 이 주장에는 커다란 모순이 있다. 일반적으로 책을 인용할 때 앞서 나온 책을 인용하는 것이 상식인데 이 경우는 『세조실록』을 기록하는 사람이 70여 년 후에 쓰인『신증동국여지승람』을 인용하였다는 상식 밖의 주장을 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몇 가지만 지적하더라도 위서론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비양심적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중국과 일제가 저지른 역사 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사서이다. 그런데도 일제 식민사학 추종자들이 그들의 영달과 직결된 자신들의 아성을 방어하기 위해 뿌려 놓은 <환단고기> 위서 바이러스에 많은 국민들이 감염이 되어 있다. 위서론자들의 본질적인 이유는 식민사학이 붕괴되어 자신들의 기득권이 상실 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학계에 뿌리내린 위서론자들의 연구실적과 그들이 그동안 참여했던 모든 세미나, 학계에 제출한 논문과 또 그에 대응하는 소위 진서론 쪽에 계신 분들의 글을 모아서 하나도 빠짐없이 깊이 있게 다시 한 번 제 3의 입장에서 들여다보고 과연 무엇이 잘못된 것이냐? 문화 현장의 중심에서『환단고기』가 과연 무엇을 얘기하는 책이냐? 그동안 환단고기 원전을 한 세권 정도가 걸레가 될 정도로 많이 보고, 또 지금까지 나와 있는 진위 논쟁에 대한 모든 글들을 묶어서 정독하였다. 『환단고기』는 우주론과 신관, 인성론을 근본으로 해서 우리의 원형 역사가 융합이 돼 있기 때문에, 이런 융합적인 세계관의 인식이 안되면『환단고기』자체를 읽을 수가 없다.

위서론 자들이 글 쓴 것을 판단할 때 결론은 뭐냐?! 첫째는『환단고기』를 제대로 읽은 사람이 없다. 부분적으로 읽은 것이지, 가장 중대한『환단고기』역사관의 배경에 깔려있는 구절들은 대부분 그냥 스쳐지나갔다. 또 위서론자들은 삼신일체(三神一體) 이건 기독교 삼위일체론을 끌고 왔다는 것이다. 서양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삼위일체(三位一體) 신관이고,『환단고기』에서는 삼신일체(三神一體)다. 서양은 천지는 야훼에 의해서 창조된 피조물이다. 그 속에서 또 피조 된 인간, 이런 이원론이 아니라, 동방에는 만물을 낳아서 기르는 직접적인 조물주는 누구인가? 하늘땅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도 예로부터 동방, 배달 동이족은 천지부모(天地父母) 사상을 가지고 있다.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모셨다는 것이다.
 
 
『환단고기』를 조작했다고 하는 위서론을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를 하는데 첫째는 초간본이 없어졌다는 얘기를 하고 있지만, 일본이 환국을 뿌리 뽑아서 우리민족의 환국과 배달과 단군조선의 역사를 말살시켜버린 것을 보면『환단고기』의 초간본을 그들이 분명히 본 것이다. 사실 우리 한민족의 모든 가치라는 것은 국조단군의 고조선을 먼저 따질게 아니고, 환웅의 신시개천부터 우리 역사의 기강, 우리의 인간 사상, 한민족의 문화 원류를 찾아야 한다. 지난 달 한국 천문 연구원장을 했던 박석재 교수가 하는 말이 소프트 프로그램을 넣고 컴퓨터에서 실행하면 대한민국 사람 누구도 오성취루(五星聚婁) 사건이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해 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환단고기』의 기록을 검토해 볼 때 그 내용이 유물로 입증된 사례도 있다.
 
 
환단고기』에는 장수왕의 연호와 관련된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 내용이 1915년에 발견된 불상에 새겨진 기록에 의해서 입증된 것이다.『환단고기』『태백일사』에는 장수왕이 즉위하자,‘건흥建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기록이 있는데 건흥 연호가 1915년 충북 충주 노온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광배명光背名에서 나타난 것이다. 역사기록의 진실여부는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입증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사례를 과학적 용어로 검증이라고 한다. 시기적으로 볼 때 기록이 먼저 있고 그 기록의 사실여부를 밝혀주는 유물이 발견되면 그 기록의 진실성이 검증된다.
 
 
발해 3대 문왕 대흠무의 연호가 환단고기에‘대흥大興’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서기 1949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용두산에서 출토된 정효공주 묘지 비문에서 문왕 대흠무가 자기 존호를‘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歷孝感金輪聖法大王’이라 하고 불법의 수호자로 자처한 데서 드러나, 환단고기가 사료로서 가치 있음이 실증되었다.
 
 
정효공주는 발해 제3대 문왕(文王)의 넷째 딸로서 757년(문왕(文王) 22)에 태어나 792년(문왕 56) 6월에 3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무덤은 중국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용수향(龍水鄕) 용해촌(龍海村)의 서쪽에 있는 용두산(龍頭山)에 있다. 무덤은 1980년 10월에서 12월 사이와 1981년 5월에서 6월 사이 두 차례 발굴되었다. 현재 묘지석은 연변자치족자치주박물관(延邊朝鮮族自治州博物館)에서 보관하고 있다.
 
 
글자는 모두 판독이 가능하며, 그 내용은 정효공주의 출신, 공주의 지혜로움과 아름다움을 칭송한 것, 출가남편과 딸을 일찍 잃고 수절한 사실, 장례, 애도문의 순으로 구성되었다. 묘지석은 정혜공주묘지와 더불어 발해인이 남긴 귀한 자료이다. 특히 발해의 국가 기틀이 확립되던 문왕대의 정치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예를 들어 문왕의 존호(尊號)가‘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이었으며, 그가 대흥(大興)이란 연호를 사용하다가 도중에 보력으로 바꾸었고, 다시 말년에 대흥으로 복귀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아울러 존호의 내용을 통하여 문왕이 불교에서 이상적 제왕을 일컫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을 자처하였음을 살필 수 있다. 그리고 당시에 문왕을‘황상(皇上)’이라고 불러 발해에서 그가 황제적인 지위를 누렸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밖에도 무덤의 벽화는 발해인의 모습과 생활상을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어 주목을 받았다.
 
 
또『환단고기』에 나오는 낭야성(번한 왕 낭야가 쌓은 성)이 지금도 중국 지명에 남아 있다. - 감우소監虞所를 낭야성에 설치하여 구려분정에서 논의된 일을 결정하였다 [삼한관경본기] 989쪽. - (註: 초대 번한왕 치우천황의 후손) 치두남이 세상을 뜨자 아들 낭야가 즉위하였다. 이해 경인(단기83,BCE 2251)년 3월에 가한성을 개축하여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가한성은 일명 낭야성(琅邪城)인데 번한왕 낭야가 쌓았으므로 낭야성琅邪城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991쪽. 낭야성(琅邪城): 지금의 산동성 제성현 동남에 있다. 원명은 가한성. 번한의 2세 낭야왕이 개축하였다. 일명 낭야성이라 하였는데 일찍이 오늘의 산동, 안휘, 강소, 절강성 일대에 진출하여 살던 동이 조선족을 나누어 다스린 단군조선 분조의 수도였다.(최동 [조선상고사]참조) 989쪽
 
 
"천남생묘지(泉男生墓誌) 비문(碑文)"도 그러한 예가 될 것이다. 천남생(泉男生)은 고구려의 재상이자 영웅인 연개소문의 큰 아들이다. 그의 묘비명이 1923년에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남생의 아버지 개금(蓋金), 할아버지 태조, 증조부 "자유(子遊)"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는 『태백일사太白逸史』가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여 밝힌 기록과 일치한다. 이 책은 여기에 남생의 고조부, 즉 연개소문의 증조부 이름을 "광(廣)"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은 다른 곳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다.
 
또 광개토태왕 비문에는‘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환지 17세손’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는‘광개토태왕은 추모鄒牟왕의 13세손’이라는『삼국사기』의 기록과 다르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가? 『환단고기』를 보면 그 이유가 밝혀지게 된다.
 
환단고기』에는 고구려 제왕의 계보가 제1세 해모수(BCE 194년에 단군조선을 계승하여 북부여 건국)로부터 →제2세 고리국의 단군조선을 계승하여 북부여 건국)로부터 →제2세 고리국의 제후 고진(해모수의 둘째 아들)→제3세 고진의 아들→제4세 옥저후 불리지(고진의 손자)→제5세 고추모(고주몽, 고진의 증손자) … 제17세 광개토태왕(주몽의 13세손)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주몽의 선조는 해모수이며 그로부터 치면 광개토대왕은 17세가 되는 것이다.
 
『삼국사기』도 광개토대왕비도 모두 정확한 사실을 담고 있었던 것인데 그것을 『환단고기』가 해명해준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환단고기』가 후대의 창작이 아닌 진서임을 명확히 알 수 있다.
 
 
하북성 중산묘에서 BC10세기 것으로 보이는 청동 도기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천자건방중산후(天子建防重山后)’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단군조선의 핵심 강역인 서요하 지역에서 출토된 BC 22세기의 도자기 부호와 양식이 완전히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BC 22세기부터 BC 10세기까지 북경과 하북성 일대를 다스린 것은 단군조선의 천자였음을 기록한 『환단고기』의 기록을 그대로 뒷받침 하는 것이다. 지나인들이 최초로 천자(황제)를 참칭한 것은 BC 221년의 진시황이었다. 진시황(BC 3세기경)이 최초의 황제, 즉 천자를 참칭했다는 것은 그 이전에 중국역사에는 천자가 없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그 이전 BC 10세기 유물로서 천자라 새겨진 청동 도기가 발견되었고, 그것은 서요하 지역 BC 22세기의 도자기 부호와 양식이 완전히 같은 것이었다. 즉, 단군조선 강역에 천자라 새겨진 명문이 발견된 것이다. 이것은 『환단고기』가 아니면 해설을 못하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그 시대에 자기 민족을 다스리는 왕을 천자라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서삼경에 나오는 천자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서경』에 주나라 무왕을 천자로 삼았다는 내용들 외에 대부분 상징적 의미로서 천자가 언급이 되고 있다. 그런데 서경은 이미 청나라때 염약거의 『상서고문소증』을 통해서 위서임이 밝혀진 책이다. 게다가 사서삼경의 기록은 지나인들만의 기록이 아니다. 공자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고 해서 그 이전의 학문을 정리한 것이라 했다.
 
예를 들어 시경의 15국풍은 당시 15개 나라의 풍속을 읊은 것이고, 그 열 다섯 나라가 모두 지나인들의 기록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후한때 채옹이 지은 『독단』에 보면 “천자는 동이족이 부르던 호칭이다.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하는 까닭에 천자라 부른다[天子, 夷狄之所稱, 父天母地, 故稱天子.]”는 대목이 있다. 즉, 진시황 이전의 천자의 호칭은 동이족이 부르는 호칭임이 분명해 지는 것이다
 
덕흥리 고분의 벽화 덕흥리 고분의 벽화를 통해 고구려가 옛날 유주, 지금의 북경 일대까지 장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환단고기』를 통해서만 뒷받침이 된다. 무덤의 주인공은 고구려에서 벼슬을 지낸 유주자사 진(幽州刺使 鎭)이라는 분이다.‘유주자사’라는 직책은 유주(幽州)라는 것이 지금의 북경(北京)지역을 말하는데, 여기에 위치하면서 고구려에 속한 여러 지방을 총괄하여 다스리던 지금 우리로 말하면‘도지사’정도 된다. 중국 동해안 전체를 통치한 고구려 고위관리라고 보면 될 거 같다. 이분이 중국 북경인근에서 통치를 하다가 고향인 평안도로 돌아와 고향땅에 묻혔다고 보고 있다. 유주자사‘진’은 331년 태어나 408년 죽을 때까지 고구려 4대왕을 모신 고구려의 신하였다.
 
13개 태수의 위치 무덤벽면에 있는 사신들을 보면 우측에 어디에서 온 태수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유주자사 진은 북경유역에 있으면서 하북성과 산서성 일대를 통치한 고구려 고위신하로써 고구려 땅 일부를 통치하였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78년 유주자사 진 무덤에 대한 조선일보의 보도내용이다. 이 보도는 일본신문을 인용보도 한 것인데 국내반응이 참 재미있다. 일본과 국내의 반응이 극과 극을 이루고 있다.
 
 
매금(寐錦)이란 신라왕 호칭은 국내사서로는 유일하게 『환단고기』에만 전한다.
울진봉평신라비(蔚珍鳳坪新羅碑) 1988년 발견 울진봉평신라비 전시관 울진봉평비에 실린 모즉지 매륵왕 부분 국보 제242호 울진봉평리 신라비는 1988년 4월 15일 매일신문에 특종으로 보도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비는 원래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118번지의 논에 묻혀 있었던 것이다. 이 비는 유백색의 편마상 우백질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크기는 높이 204cm 로 전체 모양은 사다리꼴에 가까운 부정형이다.
 
 
비문은 자연석에 앞면만 다듬어 글자를 새겼는데 모두 399자로 마멸되어 판독이 어려우나 524년 (신라 법흥왕 11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문의 내용은 이 비가 세워지기 얼마전에 울진지방에서 불을 지르고 성을 에워싸는 등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여 신라 중앙정부에서 대군을 동원하여 이 사태를 진압한 뒤 그에 대한 사후 처리로 모즉지매금왕(법흥왕)과 신료 13인이 육부회의를 열어 칡소(얼룩소)를 잡는 등 일정한 의식을 행한 뒤 현지 관련자들에게 장60대와 100대등의 형을 부과하고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방민에게 주지시킨다는 것으로 율령비의 성격을 띤다.
 
울진 봉평비 신라비가 담고 있는 신라사의 비밀은, 과연 무엇일까. 그 비밀을 풀기위한 첫 번째 열쇠는, 바로 이 비석의 주인공을 찾는 것이다. 우선 비문을 보면‘갑진년 정월 15일... 탁부 모즉지 매금왕...牟卽智 寐錦王‘ 이라고 적혀 있다. 모즉지 매금왕牟卽智 寐錦王 그는 대체 누구일까?
 
광개토대왕비에 기록된 신라매금 ... 비문의 첫 문단은, 이 비석이 세워진 때가 갑진년이며, 비석을 세운 사람은 모즉지 매금왕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모즉지 매금왕은 누구인가. 광개토태왕비에도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광개토대왕 대에, 신라 매금이 고구려에 직접 와서 조공했다는 내용이다. 학계에서는 이‘매금’이, 신라의 왕을 뜻한다고 해석했다. (제3면 2행) 遂分爲郡安羅人戌兵昔新羅寐錦未有身來000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00新羅寐錦00僕勾 <계연수 [비문징실1895]로 복구한 내용>
 
중원 고구려비(79년 발견 81년 국보지정)에 실린 매금 중원 고구려비에 새겨진 광개토대왕비보다 조금 후대에 세워진 중원고구려비에는‘매금’이라는 명칭이, 무려 여섯 번이나 등장한다. 이와 같이 광개토대왕비, 중원(충주) 고구려비, 울진 봉평 신라비 등 발견된 세 비석에는 신라왕을 뜻하는 매금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그러나 신라를 다룬 기존 사서에는 매금寐錦이라는 용어가 보이지 않는다.
 
『환단고기』는 국내 사서로써 유일하게 매금(寐錦)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기록에도 나온다. (장수홍제호태열제 재위 시 413~491) 신라의 매금과 백제의 어하라와 함께 남평양에서 만나서 공물 바치는 일과 국경에 주둔시킬 병사의 숫자에 대하여 약정하였다. 又與 新羅 寐錦 百濟 於瑕羅 會于 南平壤 約定 納貢 戌兵之數. 1103p 백제왕을 어하라라고 부른 것은 고주몽이 소서노를 책립하여 부른 것이 최초 기록이다. 또한 중국의 [북사][주서 백제전] 등에서도 백제는 자기들의 왕을 어라하於羅瑕라고 부른다고 기록하였다. 따라서 백제 어라하와 상대되는 신라 매금은 신라왕의 호칭으로 볼 수 있다. 이는 『환단고기』를 통해서 정확하게 알 수 있다.
 
 
평양 강동현에 있는 대박산에서 5세 구을(BCE 2099 ~ BCE 2084) 단군릉이 1993년 발굴되었다. 여기에서는 왕과 왕후로 보이는 유골이 발견되었으며, 북한은 단군릉을 거대하게 개건하여 성역화하였다. 그리고 1926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모금운동을 하여 평양 강동현 단군릉을 보수하고 헤마다 제사를 올린 바도 있다.
 
『환단고기』원문에는“BC 2092년 7월 구을단군이 남쪽으로 순수하여 風流江을 건너 송양松壤에 이르러 병을 얻어 곧 세상을 뜨니 대박산大博山에 묻혔다.”『단기고사』엔 풍류강을 비류강이라 하였는데 송양도 강동江東이라 하여 그곳에 묻혔다고 하였다.
 
 
『신단실기』도 『강동릉변』에서 송양을 강동현이라 했으며 제1세 단군왕검의 릉이 아니라 후대 단군의 릉이라 하였다. 대박산은 우리말 “밝산, 한밝산”의 음차音借이다. 우리 민족의 성산聖山을 일컫는데 이동의 흔적에 따라 곳곳에 백산, 장백산, 태백산, 소백산, 백악산, 불함산이란 이름을 남기고 있다. 구을단군은 이 해 유난히 순행이 잦아 장당경藏唐京 고역산古曆山을 비롯해 남쪽 지경에 이르는 풍류강을 넘어 강동이라고도 하는 송양에 이른 것이다. 얼마 전에 북한에서 대대적으로 개축한 단군릉이 전엔 평남 강동군이었던 평양시 강동군 대박산이다. 지명과 기록이 세 史書가 일치한다.
 
또한 1530년에 완성된『신증동국여지승람』에“현 서쪽 3리에 둘레 410자나 되는 큰 무덤이 있는데 이를 단군묘라고 한다”는 기록을 내세우는 것과 또『조선왕조실록』숙종과 영조 대에 강동의 단군묘 수리 및 보수 기록이 적혀있고 정조 때 평안감사에게“강동사또가 봄가을로 단군묘에 제사 지내는 것을 제도화하라”는 지시사항이 나온다는 점을 볼때 좀더 명확해 진다.
 
고조선 팔조금법 3조가 아닌 8조 전체를 보여주는 환단고기 범금팔조(犯禁八條)라고도 하며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으로 8조문이있다는 것을 알았다.그리고 그중에서도 8조 중 3조의 내용만이 한서 지리지 연조(燕條)에 전하며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실려있다.
 
① 살인자는 즉시 사형 에 처한다(相殺, 以當時償殺).
② 남의 신체를 상해한 자는 곡물로써 보상한다(相傷, 以穀償).
③ 남의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소유주의 집에 잡혀들어가 노예가 됨이 원칙이나, 자속(自贖:배상)하려는 자는 50 만 전을 내놓아야 한다(相盜, 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人五十萬).
 
그런데 팔조문이 유일하게 전부 적혀있는 책은 환단고기다. 22세 색불루 단군은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8조금법을 제정하였다. 8조금법은 여덟가지 죄와 각 죄에 대한 처벌을 정한 삼성조 시대의 최초의 성문법이다. 법규의 제정은 강력한 통치 체계를 갖춘 고대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사회분위기와 경제질서가 그만큼 어수선해졌음을 나타낸다. 환단고기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에 8조문은 아래와 같다.
 
1, 사람을 죽이면 그 즉시 죽음으로 갚는다(相殺以當時償殺) :
2, 사람을 상해하면 곡식으로 갚는다(相傷以穀償)
3, 도둑질하는 자는 남자는 재산을 몰수하여 그 집의 종이되고 여자는 계집종을 삼는다(相盜者男沒爲其家奴女爲婢)
4, 소도(성역)를 훼손하는 자는 둔다(毁蘇塗者禁錮)
5, 예의를 잃은 자는 군에 복무시킨다(失禮義者服軍)
6, 게으른자는 부역에 동원시킨다(不勤勞者徵公作)
7, 음란한 자는 태형으로 다스린다(邪淫者笞刑)
 
8, 남을 속인자는 잘 타일러 방면한다(行詐欺者訓放) 자신의 잘못을 속죄한 자는 비록 죄를 면해 공민이 될 수 있지만 이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시집가고 장가들 수 없었다(欲自贖者雖免爲公民俗猶羞之嫁娶無所수) 이리하여 백성이 마침내 도둑질하지 않았고 문을 닫고 사는 일이 없으며 부인은 정숙하여 음란하지 않았다. 전야와 도읍을 개간하고 음식을 그릇에 담아 먹었으며 어질고 겸양하는 교화가 이루어졌다.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상)
 
지금의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고조선의 8조금법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환단고기에는 한서 지리지에 빠져 있는 나머지 5개 항목까지 모두 상세히 열거 되어있다. 이 8개 조항은 고대 사회의 법률 제도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상까지도 알아볼 수 있게 하는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이것만으로도 단군조선이 이미 고대국가로서 체계와 면모를 완전히 갖춘 문명 국가라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고려사에 나온 「신지비사」 일부는 『환단고기』를 통해서 전문이 확인된다.(고조선 삼한관경제 근거 자료) 6세 달문단군 때 신지 발리가 지은 이 「서효사」가 바로 저 유명한 「신지비사神誌秘詞」이다. 「서효사」는‘삼신께 제사 지낼 때 서원誓願하는 글(『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이다.
 
「신지비사」는 『삼국유사』 「보장봉로寶藏奉老 보덕이암普德移庵」 조와 『고려사』 「김위제전金謂磾傳」에서도 일부 기록을 볼 수 있다. 단재는 『조선상고사』 제2편 3장 「신지의 역사」와 「조선상고문화사」 제2편 3장 「신지의 역사와 예언」에서 「신지비사」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였다. 단재는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한전韓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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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드 15-07-22 13:53
   
사진이 엑박이네요...
깡통의전설 15-07-23 03:29
   
식민사학도 문제지만 환단고기의 폐해도 크죠. 달랑 책한권 가지고 제나라 역사를 떡주무르듯 할정도로 우리나라 역사인식이 그정도 밖에 안되나 싶고... 그리고 그렇게 자료가 없나 싶고....
아무리 식민사학이지만 나름 유물론적 입장에서 정리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식민사학이 환단고기보단 더 설득력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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