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케네디 미국 상원 의원은 71년 당시 신민당 대선후보로 미국을 방문한 김대중에 대해 “당신은 한국의
존 F. 케네디”라며 지지를 표명했다. 그는 1980년 김대중이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자 구명운동에 앞장섰고 미국 망명 생활과 귀국 때도 큰 도움을 줬다. 케네디 의원은
1984년 4월 26일 김대중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과 나는 민주와 평화를 지지하는 입장을 공유하고 있다. 한국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지지한다”고 썼다. 85년 2·12 총선 전에 귀국을 결심한 김대중은 1984년 6월 “84년 말까지 귀국하기로 결정했다”는 뜻을 서신에 담아 전했다. 케네디 의원은 86년 5월 한국에서 민주화를 위한 김대중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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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와인버거 미 국방부 장관과 그레그 전 대사를 한국에 급파했고, 이들은
전두환 신군부를 상대로 김대중 구명운동에 나셨다. 이들의 노력 때문이었는지 김대중은 신군부에 의해 가까스로 사면을 받아 미국 망명길에 오를 수 있었다. 김대중 구하기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 그레그 CIA 지부장이 1989년에 주한 대사로 부임하게 되자 김대중은 감사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 서한에서 김대중은 “나는 개인적으로 귀하가 대사로 오게 돼 기쁘다. 왜냐하면 귀하는 1973년, 1980년 두 차례에 걸쳐 나의 목숨을 살려줘 내가 깊이 신세를 졌기 때문이다”라며 은인에 대한 깊은 감사의 뜻을 나타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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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사민당의 1980년 9월 17일자 보도자료에 따르면
빌리 브란트 당시 사민당 총재는 “김대중씨에 대한 사형 선고는 우리 모두에게 큰 도전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며 “조국의 사회적 발전과 인권수호를 위해 헌신한 애국자의 노력이 이런 판결로 귀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또 “이번 판결이 집행된다면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막대한 손상을 입으므로 대통령이 판결이 수정되도록 조치할 것을 긴급히 요청한다”며 “김대중씨 구명에 모든 힘을 발휘해 줄 것을 미국 정부에도 긴급히 요청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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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부터 1994년까지 10년간 독일 대통령을 지낸
폰 바이츠제커는 1969년 세계교회협의회(WCC) 대표단의 일원으로 서울을 방문해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과 처음 인연을 맺은 후 지난 40년 동안 깊은 우정을 나눴다. 그는 특히 독일 연방하원 부의장으로 있던 1980년 김대중이 신군부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자 하원에서 ‘김대중 구명 결의안’이 채택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등 국제적 구명운동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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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불과 1년 6개월 전인 1983년 8월, 필리핀의 야당 인사
베니그노 아키노가 미국 망명길에서 돌아오다가 마닐라 공항에서 암살되는 사건이 있었기에 당시 김대중의 귀국 결정에 대해 주변 인물들은 물론이고 미국 정부까지도 만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조국의 상황을 외면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귀국을 강행하였다. 당시 전두환 정부는 김대중이 귀국할 경우 남아있는 형을 집행하기 위해 교도소에 재수감하겠다고 경고하였고, 이에 미국 정부는 전두환 정부가 김대중의 무사 귀국을 보장하지 않으면 당시 논의중이던 전두환의 방미를 백지화시키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케네디 의원과 당시 테네시주 상원의원이던
앨 고어 전 부통령 등은 김대중의 안전한 귀국을 보장하라며 전두환 대통령에게 편지 등을 보냈다.
이에 전두환 정부는 한발 물러서서 김대중에 대해 가택연금 외에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으며,
그래도 전두환 정부의 김대중 암살을 우려한 미국 하원 의원 토머스 폴리에타와 에드워드 페이언을 비롯한 여러 저명인사들이 김대중을 에워싸고 김포공항 입국장까지 동행한 덕분에 별다른 불상사는 없었다.
하지만 김대중은 김포공항 입국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기부 요원들과 경찰들에게 강제 연행되어 동교동 자택에 연금되었다.
[71] 1985년에는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에 취임했다. 이듬해
1986년에는 신민당 상임고문으로 추대됐으나 당국에 의해서 취임이 저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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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앨런 미 전 안보보좌관은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김대중 구명운동에 관한 비화를 공개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며 또한 레이건은 전두환이 아닌 김대중을 지지했으며 한국에서 이와 관련해 잘못 알려진 사실과 전두환 신군부의 역사왜곡은 놀라울 정도이다. 당시 김대중의 생명을 구함으로써 한미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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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이 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79년
12·12 사태와 80년
5·18을 전후해 발생한 신군부의 헌정파괴범행을 저지하거나 반대함으로써 헌법의 존립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행한 정당한 행위이므로 형법 제20조의 정당행위에 해당, 범죄가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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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위키백과사전에서 퍼왔고, 다시 말해 봐야 입아프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세계적인 지도자란다. 세계인들에 의해 존경받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