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왼쪽 분들 및 일부 오른쪽 분들과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 중 하나가 뭐냐면,,
나는 국가를 몸으로, 체제를 옷으로 생각하는 반면,, 그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체제는 국가운영의 질서일 뿐이다.
근대 이전에도 국가는 국가였고, 훗날 인류가 더 나은 체제를 등장시킨다 하더라도 지금시대의 국가도 국가인 것이다.
인간은 무리생활을 하며, 그런 인간의 본능에 따라 모인 사람들이 (문화가 아닌) 문명의 형태를 띤 것이 바로 국가다.
우린 대통령도 선거로 뽑고, 국회의원도 선거로 뽑는다.
그렇게 뽑힌 그들은 국익을 위해 민주적 체제라는 질서로 국가를 운영하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체제는 국가와 국가의 중요 요소중 하나인 국민간의, 즉 국익과 민익이 서로 조화,균형을 이루며 선순환을 가능케 한다.
그래서 국가는 자유민주체제를 채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선순환이 불가능했다면 국가는 결코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채택할 수 없었거나, 채택했더라도 다른 것으로 바꾸었거나, 북한처럼 멸망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우리 헌법을 보면, 국회의원은 국가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고 명시되어 있고, 대통령에겐 더 국가를 소중히 하는 여러 내용들이 명시되어 있다.
개인의 머리속에선 자기자신이 가장 소중할 수 있어도.. 여러 사람들이 모여 문명의 형태를 띠고 형성한 국가라는 현실세계에선 이렇듯 체제라는 것이 국가보다 우선하거나 서로 대립하는 개념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란 미명하에 국가를 흔들었던 일이 벌어진 적이 과거에 있었다.
바로 1980년 5월 광주사태다.
우리 국민들은 61년 박정희의 쿠데타 이후 79년 박정희 사망하기까지 18년간 박정희 집권기를 보냈다.
긴 세월이다.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었다. 피로를 느낄 만 하다.
박정희 집권기간 많은 성과가 있었고 국민들의 삶도 나아졌지만... 말기에 이르면 경제적 난관이 닥치기도 했다.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 도입 이후 국민들은 내내 민주주의가 과제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썼었고, 그 자신조차 유신에 대해선 말도 안되는 내용이라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박정희 집권기 대통령의 권력은 (비록 이승만 만큼은 아니었어도) 막강했기 때문에, 박정희가 사망한 그 상황은 큰 권력만큼이나 큰 권력공백,권력진공에 빠지고, 더우기 시위로 인해 시끄러운만큼,, 당연히 국가비상상태로 간주되어 헌법에 따라 계엄령이 내려지고 지속된다.
그리고 그 과도기를 최규하가 이끌게 되며 1년내 유신헌법을 대체하는 새로운 헌법으로 개헌하는 작업을 수행하게 되고, 그후 최규하,신현확 모두 물러날 것이라 밝힌다.
비록 계엄상황이긴 했지만, 일정수준 시위는 묵인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속에서 차기권력을 획득하려는 자들이 있었다.
당시 김영삼은 대통령 중심제를 요구하고 있었고, 김대중은 김영삼에 밀려 자신이 대통령이 되기 힘든 처지이다보니 다른 생각을 품게 된다.
김대중은 최규하,신현확 모두를 유신잔당이라며 민란,봉기를 통해 이들을 끌어내리고, 자신이 직접 과도정부를 구성한 뒤 자신의 입맛에 맞는 새헌법으로 개헌한 뒤 결국 그 자신이 대통령이 될 생각을 한 것이다.
그 계획이 누군가의 신고로 인해 노출되어 김대중이 체포되었다. (과도내각구성명단이 있었다.)
이후 계획이 틀어지게 되자, 애초 계획보다 서둘러 광주에서 민란,봉기가 일어나게 되고,, 당연히 김대중석방 요구도 등장한다.
유언비어로 인한 군중의 흥분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휘말려 들어간다.
전남도청을 접수한다? 총기로 무장한다? 그렇게 되면 그곳은 해방구가 되는 것이고, 그곳은 더이상 국내가 아닌 것이다.
민주화운동으로 볼 수 있을까? 진압을 반민주로 여겨야 할까?
폭력은 오직 국가만이 공권력이라는 이름하에 지녀야 하는 것이다.
민간이 무기를 들었다면 국가는 그들을 척살해야 하고, 무기를 든 민간 입장에선 반드시 국가를 이겨서 나중에 혁명소리를 들었어야 하는 것이다.
당시 국민들은 그런 무장봉기에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이후 감성적인 민주광풍하에 지난날이 각색,합리화의 과정을 밟게 되었다.
자유민주주의.. 좋은 것이다.
하지만 당시 과도정부가 내놓게 될 개헌안을 기다려보는게 우선이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내각제일지, 대통령중심제일지, 이원집정부제일지,,, 일단 내용을 보고 나서 저항을 해도 해야 했다고 본다.
또한 그 저항이 시간이나 장소 문제로 준법시위가 아닐 수는 있어도,,, 선을 넘는 위험한 행위는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역사엔 가정이 없지만,,, 광주사태가 없었다면, 수백명의 목숨을 아낄 수 있었을지 모르고, 신군부가 권력을 이어가는 일도 없었을 수 있다는 상상도 하게 된다.
원래 체제전환이라는 것은.. 아래로부터의 살육을 통한 혁명보다는 위아래의 협력과 합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일이다.
지금은 그간 우리가 해온 민주주의가 위기인 시대다.
다시 유신헌법이 나올 위험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를 다시 고민하고, 바른 더나은 민주주의를 위해 나아갈 때다.
이를 위해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라 보며, 그 일에 있어 광주사태 재조명 또한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는 생각이다.
지금 우리 정치에 실망이 커 새정치를 원하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논의를 억압하는 것보다 논의를 하는 것이 더 공익에 부합한다.
그저 단순히 민주,민주,민주,,, 거리며 광주사태를 민주화운동이라 강변하는 사람들...
물론 그런 평가가 가능할 수 있다.
당시 민주화욕구가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태로 자리매김하길 바라는 사람들의 의견에 대해서도 귀를 귀울여보길 바란다.
민주화운동으로 역사적 평가가 자리매김되지 않더라도 자유민주주의체제가 무너지지 않으며,
또한 6월항쟁의 존재는..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요구했고 사랑했음을 지탱한다.
광주사태에 자랑스러운 사람들이라면 재논의의 장이 더더욱 그 자랑스러움을 내보일 수 있는 기회가 되지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