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선동열은 광주일고에 재학 중이었다. 고교 졸업반이라, 이해가 그에겐 무척 중요했다. 그는 학교와 집만을 오갔다. 머릿속엔 오로지 야구밖에 없었다. 그러던 5월 어느 날. 선동열은 심상찮은 기운을 느꼈다.
“군인들이 총을 들고 왔다갔다하는 게 보였어요. 무슨 일이 났나 싶었죠. 야구부 감독님이 ‘야, 너희 밤에 어디 나갈 생각 말고, 훈련 끝나면 숙소에서 꼼짝 말고 있어’ 하시더라고요.”
선동열이 목격한 군인은 계엄군이었다. 그가 말한 ‘무슨 일’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었다. 고교생 선동열은 감독의 말을 따랐다. 오전엔 학교 운동장에서 훈련했다. 밤엔 숙소에만 있었다. 친구들은 “내일이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상황은 더 악화했다. 거리의 계엄군은 더 많아졌다. 게다가 밤엔 총소리까지 났다. 선동열은 전쟁이 난 줄 알았다. 겁이 났다. 밤이면 숙소 이불을 뒤집어쓰고 공포에 떨었다.
“갈수록 숙소 생활하기가 어려웠어요. 어쩌겠습니까. 탈출해야지. 그때 아버지(선판규)께서 그 위험을 뚫고 절 데리러 오셨어요. 당시 집이었던 송정리까지 부리나케 갔습니다. 친구 2, 3명도 절 따라 우리 집까지 왔어요. 그래도 송정리는 안전할 거로 생각했던 거죠.”
그때까지 선동열은 무슨 일이 난지 몰랐다. 알만한 나이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절대 집 밖으로 나가선 안 된다”고 단단히 일렀다. 선동열도 알았노라 대답했다. 하지만, 집도 안전하지 못했다.
집 마당에서 훈련을 마치고 등목을 할 즈음. 계엄군이 들이닥쳤다. 계엄군은 대검이 꽂힌 총구를 들이댔다. “도망간 놈들 어디에 있느냐”고 윽박질렀다. 선동열은 벌벌 떨었다.
“집 밖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다짜고짜 대문을 열고 들어와서 ‘도망간 놈들 어디에다 숨겼느냐’고 소리쳤어요. 대검 꽂힌 총구가 제 가슴을 향하는 순간 ‘아, 이러다 죽겠구나’ 싶더군요. 아마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공포심을 모를 겁니다.”
2년 전 선동열은 5·18 체험담을 들려주다가 이 대목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이야기를 이었다. 그의 눈빛에서 30년 전의 공포를 어렴풋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때 무슨 용기가 났는지 제가 그랬는지, 친구가 그랬는지 ‘우린 고등학생이고, 아무것도 모릅니다’라고 했어요. 계엄군들이 서슬 퍼런 눈으로 쳐다보는데 한 군인이 ‘됐다. 애들은 아닌가 보다’하면서 나가자고 했어요. 진짜 멍했죠. 군인들이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멍하고 있었던 게 기억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