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요10조 를 왕건에게 받은 사람이
박술희고
고려 1대왕이 태조왕건이고
고려 2대왕이 혜종인대<<-- 혜종을 지지하는 사람이 당시 박술희 였고
당시 혜종 모친이 전라도 나주 호족 장화왕후 였고
나주 호족 군사력이 약해서 왕건이 박술희에게 혜종을 보호하고 왕위를 물려줄수있도록
군사적으로 도와달라고 부탁하면서 내린것이 훈요10조고
고려3대왕이 정종인대 <<-- 당시 충청권 충주 지역 호족이었던 유경달 손자였고
박술희에게 내린 훈요10조에서 금강 이남은 정종 세력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는대
결국에 박술희역시 제거되고 혜종역시 왕위를 뺐기고 정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결국 충청 호족이 왕의 외척이 되는건대
훈요10조에 금강이남으로 나오는게 전라도라니.. 금강유역 호족을 뜻하는건대.
금강 이남이 전라도라면 왕건이 2대 혜종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지도 않았을듯
역사공부 조금만해도 당시 왕건이 경기도와 충청도 세력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나오는대
박술희역시 충청과 경기호족 때문에 외출시에는 사병 수십명을 데리고다니다 결국 제거되는대
박술희
면천박씨(沔川朴氏)의 시조로 시호 엄의(嚴毅)이며 대승(大丞) 득의(得宜)의 아들이다. 18세 때 궁예(弓裔)의 호위병이 되고, 뒤에 태조를 섬기면서 대광(大匡)이 되었다. 태조가
장화왕후의 소생인 무(武: 뒤의 혜종)를 태자로 책봉하려하자 장화왕후의 집안(
나주 오씨)이 미약하다 하여 반대세력이 많았다. 태조는 군사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박술희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의 공으로 무가 태자로 책봉되었다.
936년(태조 19) 보기(步騎) 1만으로
후백제를 쳐서 큰 공을 세웠다. 943년 태조가 죽을 때 군국대사(軍國大事)를 부탁받고,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전수받았다.
혜종이 병으로 눕자 왕규(王規)가 역모를 품어 서로 사이가 나빠졌으며 신변보호를 위해 호위병 약 1백을 거느렸다. 《
고려사》 <박술희전>에 의하면 정종이 의심하여 박술희를 갑곶(甲串: 江華)에 유배 보내고, 왕규가 왕명을 사칭하여 그를 죽였다고 하였으나 정종이 그를 죽이고 비난을 피하기 위해 왕규가 죽인 것처럼 쓴 것으로 보인다
혜종
자는 승건(承乾), 휘(諱)는 무(武), 시호는 의공(義恭)이다.
태조 왕건(王建)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이며, 비(妃)는 대광(大匡) 임희(林曦)의 딸인
의화왕후(義和王后)이다. 태조는 궁예 휘하에서 나주를 정벌하고 그곳에 주둔할 때, 오씨를 만나 혼인하였다.
나주 오씨 집안의 세력은 권력이나 군사력을 갖지 못했으며 이러한 출신 배경으로 혜종은 후에 왕위쟁탈전에 휘말리게 되었다.
921년
박술희(朴述熙) 등의 도움으로 태자로 책봉된 뒤, 태조를 따라
후백제를 쳐서 공을 세웠다. 943년 태조가 죽자 즉위하였으나, 이복동생인 요(堯 : 뒤의 정종)와 소(昭 : 뒤의 광종)가 왕위를 엿보았다. 이 둘은 태조의 제3비 신명순왕후 유씨의 소생으로 충주 지역 호족이었던 유경달(劉兢達)의 외손이었으며 충주 유씨는 혼인을 통해 여러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요와 소가 왕위에 도전하고 있음을 눈치챈 왕규는 945년(혜종 2) 이 사실을 왕에게 알렸으나 혜종은 요·소를 벌하지 않았다. 혜종이 요·소에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자 불만을 품은 왕규는 왕을 제거하고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廣州院君)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였다. 이러한 왕권다툼 속에서 혜종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945년 병으로 죽었다.
이어 이복동생 요가 왕위에 올랐는데, 혜종의 유언에 따라 왕위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사료에는 스스로 군신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 것으로 나와 있어 혜종이 병으로 죽었는지, 아니면 살해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정종
자는 의천(義天), 이름은 요(堯), 시호는 문명(文明)이다. 태조(太祖)의 셋째 아들로, 923년(태조 6)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충주 호족 유긍달(劉兢達)의 딸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이며, 비(妃)는
문공왕후(文恭王后) 박씨(朴氏)와
문성왕후(文成王后) 박씨이다. 혜종이 집권하던 시기에 왕위를 엿보았으며 혜종의 측근이었던
박술희를 제거하고 혜종이 죽자 군신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
왕식렴(王式廉) 등의 도움을 받아 외척으로 세도를 부리던 왕규(王規) 등의 정적을 제거하고 호족들의 발호를 억제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개경의 호족들이 호응하지 않는 등 여전히 왕권이 확립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