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10-03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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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9월 21일 자 조선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와 부고가 실려 있습니다.
독립투사 김학규옹이 20일 오후 4시 서울 마포구 망원동 57의 188 자택에서 신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68세. 광복회는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를 예정인데 유족으로는 미망인 오광심 여사와 장남 일진 군(14)이 있다.
白波 金學奎 將軍 社會葬 公告
役員 고문 : 이효상, 조진만, 김종필, 정일권, 이갑성, 유진오 지도위원 : 강기천, 고재욱, 김일환, 김팔봉, 김계원, 김신, 길재호, 길진경, 박순천, 박종화, 백낙준, 서민호, 이응준, 이희승, 아해랑, 임영신. 장기영, 장형순, 장지량, 전진한, 최덕신 회장 : 곽상훈 부회장 : 이석제, 김성곤, 유진산 집행위원, 총무위원, 재무위원, 의전위원, 섭외위원, 경호위원, 치산위원 590명
故 白波 金學奎 將軍 社會葬 葬禮委員會 會長 郭尙勳
열린우리당 김희선 의원이 친할아버지라고 이용해 먹다 거짓임이 들통나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던, 백파 김학규 장군은 과연 누구인가?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예우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지만 박정희 정부는 왜 과도하다는 말을 들어가며 김학규 장군을 사회장으로 모시고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 (50번)에 안장케 했던 것일까? 바로 여기에 1945년 8월 21일 북경에 도착하여 1946년 4월 29일 북경을 떠나기까지 8개월의 박정희의 광복군에 대한 비밀이 숨겨있습니다.
“白波 김학규(金學奎) 장군, 1900년 11월 24일 평남 평원군(平原郡) 서해면(西海面) 사산리(蛇山里)에서 의사인 부친 김기섭(金基燮)의 4남 2녀 중 4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 조선혁명군 참모장으로 만주에서 무장항전을 전개하고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위해 진력했다. 광복군 제3지대장으로 미 OSS와 합작 국내 정진작전을 추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됐다.” 그의 간단한 약력입니다. 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평진대대) 제2중대장이었다는 박정희의 8개월간의 북경에서의 행적은 바로 광복군과 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의 관계를 규명하면서 시작됩니다.
광복군은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 9월 17일 새벽 6시에 중화민국의 임시수도 충칭(重慶)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창설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식군대입니다. 1937년에 이미 광복군 창설계획을 세웠으나, 중일전쟁의 발발로 지연되다가 1940년에야 비로소 광복군 총사령부의 창설을 보게 됩니다. 총사령관 이청천(李靑天, 일명 池靑天), 참모장 이범석(李範奭), 총무처장 최용덕(崔用德), 참모처장 채형세(蔡衡世), 부관처장 황학수(黃學秀), 경리처장 겸 정훈처장 안훈(安勳, 본명 趙擎韓), 훈련처장 송호(宋虎, 본명 宋虎聲), 군무처장 유진동(劉振東) 등입니다. 거창한 출발과는 달리 겨우 12명의 장교가 4개지대를 편성하고, 제1지대장 이준식(李俊植), 제2지대장 김학규(金學奎), 제3지대장 공진원(公震遠), 제5지대장 나월환(羅月煥)을 임명한 명목상의 군대였습니다. 게다가 나월환이 서안(西安)에서 자신의 대원에게 암살당하는 불상사가 일어나 제5지대가 없어지는 등 제대로 된 군대라고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군대구성이 어려워 지자 초모공작(招募工作)이라고 명명된 지원자 모집에 나섰는데 주로 제3지대가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강남의 안후이성 푸양(安徽省 阜陽)에 파견된 지대장 김학규는 초기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김문호 등도 장시성(江西省)에서 6개월 동안에 23명(6명은 여자와 아이)만을 모집하는 등 공작은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고 창설 1년 만에야 겨우 3백명 가량의 병력을 확보하였습니다. 그러자 광복군은 항일전쟁과정에서 중국군에게 포로가 된 조선인 병사들도 받아 들이게 됩니다. 임시정부가 군대유지에 그야말로 광적으로 매달릴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은 광복군이 바로 해외동포의 독립지원금 등으로 유지되는 임시정부의 존재이유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해외동포의 지원금만으로는 임시정부와 광복군 유지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에 애걸하여 1941년 11월 19일 ‘원조한구광복군판법’이라는 것을 체결하고 지원금을 받게 되는데 여기에는 악명높은 ‘한국광복군 행동준승 9개항’이라는 노예계약 조항이 들어있었습니다. 행동준승(行動準繩)은 그야말로 올가미와 다름없어서 광복군 총사령부 소속 장교 56명 가운데 43명이 중국 국민당군이었고, 군복도 중국군복에 최고통수권자마저 임시정부의 김구주석이 아닌 중국군 참모총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도 지원금에 얽매어 가면서도 광복군 유지에 힘썼지만 1945년 8월 15일 일본패망 시점까지도 중국군이 정한 2개지대 544명의 정원도 채우지 못한 314명(印度공작대와 훈련생까지 계산하면 총 564명)만을 유지한 채 해방을 맞게 됩니다.
바로 이것,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위해 광복군이라는 허술하기 짝이 없던 조직유지에 광적으로 매달릴 수 밖에 없었던 사실에 박정희가 광복군이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비밀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임시정부는 1942년 5월, 한국광복군 건군 및 작전계획 ‘한인포로의 재훈련과 편성’(조소앙 비망록, 1944. 6. 10) 등에 의해 중일전쟁 중에 포로가 된 조선인들을 광복군에게 편입시키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이는 1944년 4월 4일 행동준승이라는 노예계약을 파기하고 체결한 새로운 군사협정 ‘관어한국광복군 중한양방 상정판법(關於韓國光復軍中韓兩方商定辦法)’의 제7항 ‘중국 각 부로수용소에 한국부로가 있을 때 중한 양방의 사검(査檢)을 거친 후 한국 광복군에 인도한다’ 등에서도 확인됩니다.
이와 같이 다양한 인력자원획득 방법이 동원되는 가운데 때로는 적 후방에 광복군의 소식을 널리 전파하여 탈출학병들이 광복군 진영으로 넘어오도록 하는 방법도 썼기 때문에 유명한 박정희와 독립군 비밀첩보원 김정균과의 비밀접촉설도 생겨나게 됩니다. 또한 45년 6월 임시정부 경위대의 윤경빈(尹慶彬)과 선우진(鮮于鎭)이 유가만(柳家灣) 수용소와 보계(寶溪)수용소에 있던 한인병사를 인수합니다. 그 해 5월 1일 중국정부는 포로 수용소의 한인병사에 대한 광복군 인계조치를 시달하여 집단인원의 인수인계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중국 관내지방(關內地方)에서 전개된 한국독립운동(韓國獨立運動), 신용하, 독립운동사연구 제7집, 독립기념관, 1993년) 이밖에도 만주군에 있던 한인병사가 광복군에 편성되었다는 증언과 증거는 얼마든지 발견됩니다.
해방 후 박정희, 신현준, 이주일 등 세 사람이 제8단을 떠나 흥륭, 밀운을 거쳐 북경에 도착한 것이 1945년 8월 21일이었습니다. 엄청난 귀국인파로 인해 천진(天津)에서 부산과 인천으로 이어지는 귀국선을 타는 데 실패한 세 사람이 북경과 같은 큰 도시에서 무작정 무위도식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 무렵 북경에는 만주군이나 일본군에 복무하다 중국 각지에서 몰려든 장병들이 광복군에 편입하고 있었고, 이 조직이 그대로 신생 조국의 국군이 된다는 소문에 너도나도 편입을 희망하던 실정이었습니다. 새 광복군의 총사령은 광복군 주 북평판사처장(駐北平辦事處長)인 중국군 소장 출신 최용덕(崔用德, 전 공군참모총장)장군, 연락책임자는 중국군 장교출신 이성가(李成佳, 예비역 육군소장)중위였습니다. 세 사람은 논의를 거듭한 끝에 동포가 경영하는 중국음식점 덕경루(德慶樓)의 안내로 광복군에 정식편입하기에 이릅니다.
광복군 제3지대(지대장 백파 김학규장군) 주 평진대대는 대대장 신현준(만군 상위), 제1중대장 이주일(만군 중위), 제2중대장 박정희(만군 중위) 제3중대장 윤영구(尹暎九, 학병출신, 일군소위), 정훈관 정필선(鄭弼善.광복군 공작원)이었습니다. 박정희 등이 편입된 새 광복군은 10만명의 대군을 7개의 지대로 잠정 편성해 있다가 만주에서 국내로 진입할 중공군내 동북정진군(東北挺進軍)과 함께 해방된 조국으로 보무당당하게 개선하겠다는 임시정부의 계획에 따라 최용덕 장군, 김학규 장군 등이 주도하고 지휘하는 잠편부대였습니다. 그러나 중경시대에서도 보여지는 임시정부의 행정무능력과 무모함이 목표뿐인 계획으로 끝나게 되는데 여기에는 실제적 지휘자인 김학규 장군이 열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1948년 4월 16일에야 겨우 영국 상선편으로 귀국하는 신병에 가장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병석에 드러누운 지휘관 김학규장군의 지시를 기다리며 잠편 광복군들은 8개월의 허송세월을 보냈던 것입니다.
게다가 김일성의 북조선을 배후조종하던 소련은 광복군의 국내진공계획을 미국의 음모라고 생각하고 방해했습니다. 1945년 12월 10일 오전 11시 경, 광복군 평진대대는 야외훈련중 무장한 중국군부대의 습격을 받고 전원 체포되고 북신교(北新橋)의 막사까지 연행되어, 부대원들은 모두 해산되고 간부들은 영창에 감금당합니다. 몇 시간 뒤 모두 풀려났지만 부대내에 침투한 연안파(延安派 중국 공산당계)의 모함의 결과였음이 판명됩니다. 동족간의 이념투쟁은 구걸의 삶을 이어가던 남의 나라 땅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보기였습니다. 얼마 뒤 박정희를 중대장동무라고 부르며 시비를 걸어오는 연안계 부대원들의 도전을 받는 일도 있게 됩니다. 박정희가 좌익사상에 대해서 냉소적인 자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결론입니다. 변변한 전투 한번 해보지 않고 해방을 맞은 만주군 중위 박정희는 소속부대인 제8단을 떠나 8월 21일 북경에 도착해 1946년 4월 29일 귀국하기까지 잠정편성부대인 광복군 제3지대 제2중대장이 되지만, 확실한 광복군도 아닌 어쩡쩡한 신분으로 8개월을 보냅니다. 그야말로 그의 전역사(轉役辭)의 한 구절처럼 ‘불행한 군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다음 번에는 박정희가 다까기 마사오(高木正雄) 이외에도 오까모도 미노루(崗本實)이라는 창씨개명을 가졌다며 군관학교 동기생 오까미 쇼껜(崗見尙彦)을 오까모도 미노루(崗本實)로 바꾸어 버리는 한홍구(성공회대 교수, 김일성 숭배를 하는사람), 최상천(알몸 박정희를 쓴 놈)의 웃지 못할 코미디에 대해 써 보겠습니다.
박정희가 만주국 소위인지 일본군장교인지 단어하나만에 집착하는 좌빨들은 좀 읽어봤으면 합니다. 개인사설로 팩트가 되는 현실을 나도 한번 봤으면 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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