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브레튼우즈 체제에서 금본위제를 통해 미국은 달러의 가치를 금과 연동시켰음. 그리고 그때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금을 많이 가진
나라가 미국이었고, 미국과 달러의 힘은 금보유량에서 나왔음. 이를 통해 미국은 파운드화를 대신해서 달러화를 새로운 세계 기축통화의
위치로 올릴 수 있었음. 그런데 월남전으로 전비 충당을 위해 미국이 막대한 달러를 찍어 내면서 달러의 가치는 흔들리게
되었고(달러 가치 하락으로 인한 금 유출 심화), 결국 미국은 1971년 금본위제를 포기하게 되었음.
그래서 미국이
선택한 대안(달러화 가치 유지의 도구)이 바로 사우디와 검은 황금, 즉 석유였음. 월남전 이후 미국은 사우디 왕가에 경제적 지원과
군사적 보호를 해 주는 대신, OPEC 의장국인 사우디가 오로지 달러로만 석유를 결재하게 만들도록 비밀 협약을 맺었고, 이렇게
석유와 달러 가치를 연동시키는 ‘페트로달러’를 통해 미국은 달러의 흔들리던 기축통화 위치를 다시금 유지할 수 있었음.
그런데 그 ‘페트로달러’ 체제가 최근 들어 흔들리고 있음.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함.
우선
석유 패권이 중동과 사우디에서 다른 지역, 특히 미국으로 많이 이동했음. 과거 석유가 미국의 핵심 전략 자원이었을 때는 미국이
중동 석유 수송로에 2척의 항공모함을 상시 배치했을 뿐 아니라 사유디 유전에도 미군을 파견해 지켜주었음. 그러다 채굴기술 발전과
고유가로 미국에 ‘셰일가스 붐’이 일어났음. 이로 인해 미국은 2018년부터 사우디를 제치고 세계 최대 산유국이 되었고, 이로
인해 중동 산유국의 가치가 미국에 낮아지기 시작했음.
두 번째로 사우디와 미국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음. 그동안
이슬람 수니파인 사우디는 미국과 손잡고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을 견제해왔었는데, 2015년 이후 미국이 이란과 핵 협정을 타결한 데
이어 경제 제재까지 해제하면서 양국 관계가 결정적으로 틀어졌음. 이후 이란은 사우디 왕실에 큰 위협이 되었음. 실제로 이란은
이슬람 혁명 수출로 이라크의 시아파와 민병대, 시리아의 아사드 정부, 레바논의 헤즈볼라, 예멘의 후티반군을 지원하는 등 사우디의
최대 안보 위협 세력으로 떠올랐음.
세 번째로 미중 패권전쟁과 러우전쟁으로 미국에 적대적인 산유국이 증가하고 있음.
2번 원인으로 미국에 불만을 가진 사우디가 중국과 밀착하기 시작하고, 또 러우전쟁으로 서방과 완전히 돌아선 세계 2위의 산유국인
러시아가 중국-사우디와 손잡고 미국에 대항하면서 미국은 페트로달러의 지위를 지키기가 구조적으로 매우 힘들어졌음.
마지막으로 미국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너무 많은 달러를 풀어 대면서 예전보다 중요성이 하락한 석유로는 넘쳐나는 달러화의 가치를 유지하기가 더더욱 힘들어졌음.
이와 같은 요인들로 인해 나는 미국이 선택한 Post-Post 브레튼우즈 체제, 즉 Next 페트로달러가 바로 ‘실리콘달러’라고 생각함.
미국에 있어 이 ‘실리콘달러’ 체제가 가진 강점은 여러 가지가 있음.
첫
번째로 앞으로 생산성 발전과 기업 혁신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 바로 AI이고, 그 AI를 가능하게 하는 게 바로 반도체임.
반도체를 잡고 있으면 미국은 언제까지나 세계의 경제 발전과 혁신을 주도하는 나라로 남을 수 있음.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반도체를
독점함으로서 적대국 중국의 발전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음. 반도체가 없으면 중국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쇠퇴할 수밖에 없거든.
두
번째로 전 세계 수많은 산유국이 있는 석유와 달리 반도체는 사실상 미국과 미국의 우방국들이 그 생태계를 독점한 산업임. 첨단
반도체 생산에 있어 그 밸류 체인에 속한 나라는 몇 개(유럽, 한국, 미국, 일본, 대만) 되지 않고, 전부 다 미국과 가까운
우방국들임. 또 진입 장벽이 너무나도 높다 보니 다른 새로운 국가가 이 밸류 체인을 새로이 구축하기란 이제 거의 불가능해지고
있음. 그것은 심지어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인 중국도 마찬가지임.
마지막으로 2008년 금융위기 이래 미국이 엄청난
달러를 찍어 내면서도 달러 가치를 그나마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이제 페트로달러라기 보다는 미국이라는 국가가 갖고 있는 신용도였다고
생각함. 미국이 언제까지나 영원히 세계 경제, 정치, 기술을 주도하리라는 믿음이 바로 그것임. 그렇게 보면 미래기술의 핵심인
반도체를 쥐고 있어야만, 다른 그 어떤 국가도 미국의 위치를 대신할 수 없어야만 달러화의 가치가 유지될 수 있음. 한 마디로 그
전까지 달러화의 가치는 일종의 담보대출이었음. 금과 석유라는 실물 자산이 바로 그 담보였음. 하지만 이제 달러화의 가치는 일종의
신용대출로 바뀌었음. 어떤 사람이 앞으로 돈을 갚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신용이라는 무형 자산에 기반한 것임. 그리고 그 무형 자산은
바로 반도체에 기반함.
그렇게 보면 최근에 IRA 등으로 미국이 2차전지 역시 중시하는 건 맞는데, 그 중시하는
정도는 반도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다고 생각함. 예를 들어 지금 포드와 테슬라가 중국 2차전지 업체들과 협력하려고 하잖아.
애플이 YMTC 낸드를 아이폰에 탑재하려다가 미국 정부의 규제로 그것을 포기한 것과는 상황이 많이 다름. 그것을 보고 일반
사람들은 “전기차, 2차 전지는 미국도 중국과 협력하면서 왜 반도체는 한국이 중국과 뭐 하려는 것을 이렇게 견제하냐? 미국
개.새끼.” 이러는데, 그것은 상황을 아주 단편적으로 해석하는 것임. 2차 전지와 전기차는 반도체만큼 중요하지 않고, 또 중국을
완전히 규제해서 밟아 죽여 버리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기 때문임.
첨부 1과 2가 2차 전지와
반도체(낸드)의 영업원가 구성임. 2차 전지는 원가의 60%가 원재료비인 반면, 반도체는 거의 50%가 감가상각비임. 이 말은
뭐냐면 생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2차 전지는 원재료이지만 반도체는 제조 장비라는 뜻임. 현재 반도체는 미국, 유럽, 일본
업체들이 생산 장비 밸류 체인을 꽉 잡고 있고, 이 국가들이 장비를 팔지 않으면 그 누구도 첨단 반도체를 제조할 수 없음. 중국도
반도체 장비를 어떻게든 국산화하려고 하지만 애초부터 국가별 분업 체계가 구성될 만큼 진입 장벽이 매우 높은 게 반도체라서 중국의
반도체 국산화는 정말로 다른 산업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어려운 게 현실임.
반면 2차 전지는 이미 중국이
원재료를 꽉 잡고 있음. 또 중국 내수에서 생산하지 않더라도, 콩고나 인도네시아 같은 친중 국가들에서 충분히 원료를 수급 가능함.
예컨대 지금 한국이 대중 무역 적자가 커지는 것도 2차 전지 원료 수입이 중국에서 급증한 게 매우 큰 원인임. 만약 2차 전지도
반도체만큼 중국을 규제해서 밟아 버리려면 장비가 아니라 원재료를 미국이 전부 통제해야만 함. 그런데 상황이 그렇지 못함.
그래서
미국은 반도체만큼 2차 전지와 전기차에서 중국을 규제할 수 없고, 또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저렴한 가격에 중국산 2차 전지를
수입해서 수입 물가를 낮추는 게 미국 입장에서도 이득임. 그리고 결정적으로 앞으로 전기차의 핵심은 자율주행이 될 것이고, 그
자율주행 기술력은 반도체가 가를 것이기 때문에 중국 반도체 굴기만 틀어 막으면 결국에는 2차 전지와 전기차도 같이 틀어 막히게
됨. 자율주행 기술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평생 중국은 부가가치 낮은 자동차 껍데기만 만들게 될 뿐임.
이처럼 미국은
반도체야말로 앞으로 미중 패권전쟁에서의 승리와 달러 기축통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수단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고,
이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음. 앞서 말한 애플이 YMTC와 협업하는 것을 막는 것 뿐만 아니라 장비 수출을
규제하는 것, 그리고 중국이 마이크론을 규제하려는 것에 (심지어 한국 정부를 움직일 정도로) 초강경하게 대응하는 것을 보면
반도체에 대한 미국의 진심을 아주 잘 알 수 있다고 생각함. 중국에 반도체 장비 수출을 막을려고 유럽, 일본 주요국들을 죄다
찾아가서 협박과 협조를 요청까지까지 했잖아? 이렇게 미국이 동맹국들에 발바닥에 땀 날 정도로 찾아간 것 본 적이나 있냐?
그렇게
보면 사람들이 지금 칩스 법에서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 규제에만 주목하지만, 나는 여기에서 NSTC 역시 매우 주목해야만
한다고 생각함. 원래 반도체 원천 기술은 유럽 연구기관인 IMEC에서 진행되어 왔음. IMEC은 분담금만 내면 누구든 가입할 수
있고, 또 분담금을 낸 만큼 자유롭게 반도체 원천 기술을 개발하고 공유할 수 있음. 예컨대 EUV 초창기에 IMEC에서 TSMC,
삼성전자, 인텔, ASML이 공동으로 기술을 개발하기도 했었음. 이처럼 IMEC은 반도체 생태계가 자라나는 시.발점이었음. 그런데
NSTC는 완전히 다름. NSTC는 미국이 지정한 선택된 국가들만 가입할 수 있음. 그리고 미국은 앞으로 IMEC의 지위를
NSTC가 빼앗아서 반도체 생태계의 아예 시.발점부터 미국과 미국을 따르는 우방국들이 독점하려고 하는 상황임. 이렇게 되면 반도체
모든 기술 표준을 NSTC가 주도하게 됨. 그리고 NSTC에 속하지 못하는 국가들, 예컨대 중국한테는 ㄹㅇ 국물도 없게 됨.
더불어
앞으로 반도체의 미래를 이끌 최첨단 기술들, 예컨대 차세대 EUV 기술, 양자컴퓨터, 비-실리콘 기반 반도체 등의 기술을
NSTC에 속한 국가들이 공동으로 개발해 나갈 텐데, 중국 혼자만의 힘으로 그 모든 미래 기술들을 개발하는 건 훨씬 더 어려울
수밖에 없음. 아니 아예 개발이 불가능할 수도 있음.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기술 격차가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더더욱
벌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음.
나는 그래서 칩스 법이 한국에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라고 생각함. 일단 칩스 법으로
유력한 경쟁자인 대만과 중국 반도체를 조져 줬고, 또 한국은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에 포함되어 프렌드쇼어링을 허용해 주었기 때문임.
그리고 이번 방미에서 미국으로부터 NSTC 가입 요청뿐만 아니라 NSTC 한국 지사(ASTC) 설립도 허용 받았음. 이는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선택되었다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생각함. 미국이 한국을 ‘실리콘달러’ 체제의 주요 파트너로 선택해 주었고, 말 그대로
석유 없는 나라에서 석유를 만드는 산유국의 위치까지 올려 줬다고 생각함. 검은 황금이 석유였다면 이제는 모래로 만든 황금이
반도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함.
첨부 3에서 나왔듯 미 바이든 대통령은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 칩스 법을 위해 세계에서
마음이 맞는 나라들과 협력하고 있으며, 그 나라 중 하나에 한국이 있다고 말했음. 노골적으로 말해서 미국과 몇몇 국가들끼리만
작당해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을 자기들끼리만 다 해먹자는 판에 한국을 껴준 것임. 어쩌면 한국의 백년대계가 바로 지금 결정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듬. 지금이 바로 역사의 그 순간임. 반도체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이것이 바로 'Chip
War'의 진정한 의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