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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2-21 14:29
[기타] 임진왜란 직후 조선의 여진족 토벌!!!
 글쓴이 : shrekandy
조회 : 8,542  

계속 글 올렸다 삭제해서 죄송합니다...이게 제대로 된 버젼이고 읽기도 더 쉽네요.

그럼 즐감...
http://cluster1.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1LiwT&fldid=UF7C&datanum=2&openArticle=true&docid=1LiwTUF7C220100912210800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선정부는 두가지 군사작전에 대한 검토를 실시합니다.

하나는 대마도정벌에 대한 논의 였고 다른 하나는 여진족 토벌전에 관한 논의입니다.

 

대마도 정벌은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인 1598년 전라관찰사 황신이 임진왜란에 대한 보복으로

대마도를 정벌하자는 계획이었습니다.

황신은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오는 기간 직접 대마도에 머물며 지리를 익히는 등

대마도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알고 있었고 그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 있었습니다만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오늘의 이야기는 여진족 토벌전..]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국경방어가 허술해졌습니다.

더군다나 여진의 세력은 매우 강해졌죠. 몇년후 그들은 스스로 청이라 칭하며 명과 전쟁을 벌일정도로..

조선 정부로썬 강대해지는 여진족이 매우 부담스러울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곧 약해진 조선과 강해진 여진족 사이에 문제가 벌어졌습니다.

그 원인은 여진족 추장 노토

1592년 가토군이 조선국경을 넘어 만주로 진출했을때 그들과 교전해서 그들을 격퇴시킨 일로 유명한 이들입니다.

 

북병사 이일이 치계하였다.

회령 부사 박종남이 치보하기를

수상 도추장(水上都酋長) 노토(老土)가 그의 휘하인 개락지(介落之)를 시켜 진고(進告)하기를

「올아적이 노토를 들어오도록 초치하였다. 그러자 노토가 답하기를

『우리는 조상 이래 대대로 조선을 받들어 오면서 2백여 년 동안 무사히 살아왔다. 그런데 올아적이 무슨 일로 나를 부른단 말인가.』 하였다.

그리고는 곧 성을 쌓아 험한 곳에 웅거하면서

적이 쳐들어 올 경우 죽음을 무릅쓰고 들어가 지킬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무마하는 일을 배가하여

반복하는 무리로 하여금 감은케 하라고 이미 이문하여 신칙했습니다.

대개 지난 계미년에는 강원도 환방군과 하삼도에서 뽑은 정예 군사로도

보잘것없는 반호를 제어하지 못하였는데,

지금 이 올호는 계미년의 반호와는 비교할 바가 아니니, 아무리 생각해도 계책이 서지 않습니다.

조정에서 각별히 진념하여 음우의 변에 대비하게 하소서

 

1598년 8월 1일 북병사 이일이 여진족의 강대해진 세력을 경고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의 국경수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 그 휘하 여진족들이 수시로 북쪽 국경을 침범하고 약탈하였습니다.

 

왜변이 생긴 이래로 국가에서 계책을 마련하여 북방을 돌아볼 겨를이 없자

병사와 백성들은 흩어져 열진이 텅 비었고 모든 것이 탕갈되어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게 되었다.

사나운 오랑캐는 기회를 노리고 변방의 되놈들은 반기를 들었으니 오늘날의 형편은 참으로 위태롭다

 

1599년 3월 28일엔 북병사 이일 휘하 강억필 및 30여명이 국경을 침범한 여진족을 유인하다 습격을 받고 전멸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조선정부는 여진족에 강한 경고를 보낼 필요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4월 21일 좌의정 이덕형이 선조를 인견하는 자리에서..]

 

강억필·강억수는 이름 있는 토병으로, 전부터 호인들이 순종하지 않으면 으레 이들을 보내 유인했었습니다.

그래서 이일은 노토의 오랑캐들이 사단을 일으키자 그들로 하여금 개유하라고 들여보냈는데

저들이 먼저 의심을 내어 시살을 감행하였으니 이는 바로 견양의 무리가 늘 하는 행태입니다.

만약 믿는 바가 있다면 단지 노략질만 할 뿐 아니라 반드시 무리를 일으켜 쳐들어 올 것이니

이런 일이 계속된다면 변장은 죄를 받지 않을 수 없으며 변방의 백성들은 안심하고 정착하여 끝내 편히 살 날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기회를 보아서 한두 부락을 전멸시켜 그들로 하여금 겁을 먹게 하여 복종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곧 여진족에 대한 토벌계획은 함경 감사 윤승훈에 의해 구체화 됩니다.

1599년 7월 5일 [윤승훈이 노토를 정벌할 계책을 가지고 글을 올려 조목별로 진술하였다.]

 

이에 1599년 7월 7일 비변사에서 곧 윤승훈의 여진족 토벌 계획을 찬성하고 나섭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북도 순찰사 윤승훈이 나라의 중임을 받고 몸소 친히 경험하고서 이 15조항을 아뢰었으니

이는 모두 하나씩 시행할 만한 것입니다.

노호의 흉역행위가 있은 이후부터 변방의 방비가 더욱 긴급한 상황이니 지금의 사세로 보아

일대 거사를 하지 않으면 징계할 수가 없는데 변방의 백성들이 쉴 날이 없게 될 것입니다.

승훈이 제장과 더불어 이와 같은 약속을 하였으니

이른바 중협·좌협·우협의 분군 및 진병하는 길을 한결같이 장계대로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사신은 이렇게 평가합니다.

 

아군의 병력을 헤아리지 않고 망령되이 남의 나라를 도모하였을 경우, 예부터 성공한 자가 적었다.

승훈이 사세를 그릇 판단하고 잔약한 군사로 멀리 강대한 오랑캐를 토벌하려 하니,

삼척동자(三尺童子)라도 반드시 패할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그대로 따라 저지하는 자가 없었으니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곧 사헌부에서도 북벌을 중지할것을 청합니다.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스스로를 다스리고 지켜 남몰래 힘을 기르면서 그 도발을 막아내는 동시에

요충지를 파수하며, 한편으론 기회를 엿보고 적을 헤아려 훗날을 기다리는 수 밖에 더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가능할 때 전진하라고 옛 성인이 경계하셨으며,

자제하지 않으면 화를 자초하게 된다고 《춘추전(春秋傳)》에 또한 나와 있습니다.

한때 분하다고 하여 충분히 승리할 방책을 생각하지 않고 이처럼 경솔하게 거사할 경우,

어찌 후회막급할 일이 없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북도(北道)에 대한 거사는 우선 정지하소서

 

스스로가 약하니 참고 후일을 도모하자..

참고로 성종이 2만 병력으로 여진족 토벌을 강행했을때도 세종대왕이 1만5천의 병력으로 북벌을 했을때도

똑같은 반대가 나왔다는건 정말 신기할 따름입니다.

찬성과 반대 의견은 수백년간 그 의견이 비슷합니다.

 

찬성은 여진족에게 강한 경고를 보내야 한다는 의견이었고

반대는 우리의 힘은 약하고 여진족은 강하니 적을 막아내는데 치중하고  후일을 도모하자는 의견입니다.

 

이에 대해 이일이 선조에게 말합니다.

 

논자들은 또 거사해서는 안된다고 하는데 그 말이 근사하기는 하나 실은 그렇지 않다.

지금 만약 토벌하지 않는다면 적은 더욱 능모하는 마음이 생겨 ‘조선은 우리를 해치지 못한다.’

 하면서 군대를 나눠 번갈아 침입해 도처에서 노략질을 자행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변장은 조정의 명령을 따르기에 바빠 지쳐버리고 백성은 농사도 짓지 못할 것이니

이것은 제풀에 지쳐 망하는 길을 택한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이후에도 사헌부가 여러차례 반대 의견을 피력하였고 조정 대신들 중에서도 반대 의견이 속출했지만...

선조는 그 의견들을 묵살합니다.

[지금와 생각하면 임진왜란만 없었으면 그도 꽤 괜찮은 국왕이었을것 같습니다. 시대를 잘못 만났어..]

 

이일로 부터 육진 도형과 윤승훈으로 부터 지도가 정부에 도착하고 부터 본격적인 북벌 계획이 실행됩니다.

북벌은 비밀리에 준비되어졌는데 각도에서 군량과 화약.화포.궁전 등이 도착하였고 병력들이 속속 집결하기 시작했습니다.

 

imlan.PNG


 

1600년 4월 14일.

함경병사 이수일의 지휘하에 조선군은 여진족 토벌전에 나섭니다.

이수일은 1595-1596 곤양군수로 충무공 이순신 제독님 밑에서 수군장수로 재직했던 분입니다.

난중일기에도 나오시죠.

 

이때 동원된 조선군은 약 5천 여명.

여진족들의 매복과 야습등 반격에 대비해 각지에 대기중인 병력까지 7천-8천여명이 동원됩니다.

 

조선군은 좌위. 중위. 우위 세 부대로 나위어 노토의 여진족을 포위 섬멸할 계획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좌위는 어유간에서 중위는 함경북도 무산에서 우위는 풍산에서 각각 출발하였습니다.

어유간에서 가는 길이 가장멀었기에 좌위병은 집결지에 이틀전에 출발하였고 풍산에서의 길이 가까웠기 때문에

우위병은 하루전에 출발하였지만 무산은 이 둘 보다 더욱 가까웠기 때문에 중위는 14일 초저녁에 출발합니다.

 

1600년 4월 15일.

이들은 사전에 계획한 대로 좌.우위병은 부락 뒷 산에 매복하여 도주로를 차단하고

병사 이수일이 지위하는 중위병이 정면에서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벌어졌습니다.

조선군은 비밀리에 포위망을 완성한뒤 여진족을 모두 토벌할 예정이었는데..

조선이 자신들을 공격할까 두려워하던 여진족들은 척후병을 놓아두고 있었고

이들은 조선군을 발견하였고 즉시 달아나 각 부락에 조선군이 다가왔다는 걸 알렸습니다.

즉시 여진족 들은 모두 포위망이 완성 되기 직전 산으로 달아나버렸습니다.

 

어찌되었든 조선군은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들의 부락을 초토화 시켜버립니다.

1592년 조선군을 파죽지세로 무너뜨리고 진격하던 가토군을 패퇴 시켰던 노토 예하 6개 부락은

조선군에게 제대로된 대응조차 하지 못한체 산에 숨어 울부짖었을 뿐입니다.

 

군관 이희길의 증언을 토대로 윤승훈의 보고를 보자면..

 

이 복병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군사 행동이 누설되어 각 부락의 적들은 일시에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들은 세간살이와 가축 및 잡물 등은 미처 갖고 가지 못했습니다.

당초에 신이 각 진영에 영(令)을 전하여 군중에서 노획한 잡물 등은 노획한 자에게 각각 나누어 주고

장관(將官)이 갖지 말도록 하였으므로 모든 장관들은 하나같이 약속대로 하였습니다.

 

그 밖의 잡곡이나 각종 기구들은 불을 놓아 태우도록 하였는데 호적들의 집은 흙을 발라 매우 견고하여

지붕에 이는 개초(蓋草)는 다 타도 사방 벽은 불에 타지 않았으므로

영을 내려 군졸 가운데 도끼를 가진 자가 때려 부수고 다시 태워 한 칸도 남기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장주 부락(張主部落)에서 마을외 부락(亇乙外部落)까지 무려 1천여 집을 한꺼번에 태워버리니

연기는 하늘에 치솟고 사기는 배가되었습니다.

적들은 감히 가까이 오지는 못하고 남녀 노소가 모두 흩어져 산 위로 올라가 바라보고 울부짖을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움 속에 묻은 곡물까지 다 파내어 불태웠으며 이미 밭에 심은 곡식은 모조리 짓밟아버렸고

마을외 부락의 성채(城寨)도 다 불태웠습니다.

이 호적(胡賊)은 강성(强盛)하여 장주 부락으로부터 마을외 부락까지 40여 리에

좌우로 높은 산과 절벽이 있고 그 안은 아주 넓습니다.

토지는 비옥하고 그 가운데로 큰 냇물이 흐르며 모든 부락들은 그 물을 끼고 살고 있습니다.

집들이 즐비하고 살림의 넉넉함은 물 아래 있는 다른 호적들과 비교가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잠깐 사이에 다 쓸어버리고 빈터를 만들고 나니 보기에 장쾌했습니다

 

초토화 작전을 끝내고 조선군은 밤이 되어서야 풍산으로 철수하기 시작합니다.

여진족 기병들이 쫓아왔고 조선군은 조총병으로 그들과 교전하면서 차분히 철수를 단행합니다.

이 전투후 조정의 상소문엔 이 토벌전 최고의 공로자는 조총병이라고 말합니다.

 

16일 유시(酉時)에야 비로소 풍산보(豊山堡)에 도착하였는데

그때까지도 적병은 돌아가지 않았으며 이날도 두세 차례 접전(接戰)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적병은 애당초 추격하기 위해 모아진 군사가 아니고 우리가 소탕할 때 산속에 숨어 있던 여러 종족들이

우리들이 회군하는 것을 보고 여기저기서 나와 우리의 뒤를 쫓는 자들로 그 수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아군이 포를 쏘고 싸우려고 하면 물러나고 우리가 군대를 거두어서 행군하면 즉시 뒤쫓아 올 뿐

별로 큰 교전이 없었기에 사상자가 많이 나지 않았는데 출신(出身) 3인과 포수 4명이 전사했습니다 

 

조선군은 14일 부터 16일 까지 왕복 3백리의 작전을 마치는 동안 7명의 전사자를 내었습니다.

 

참괵한 수를 말씀드리면 창황중에 베어 형제가 분명치 않은 것을 제외하고 좌위(左衛)가 59괵(馘)이고

 중위(中衛)가 18괵과 생포가 1명이며, 우위가 33괵이고 병사(兵使) 관하(管下)가 5 괵인데,

병사가 이미 올려보냈습니다.

 

그리고 조선군은 획득한 여진족의 머리만도 110개에 달합니다.

하지만 실제 전과는 이것보다 더 많다고 추측됩니다.

 

[북새기략]과 [북관지]에는 당시 여진족의 전사자를 500여명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선조 126권 33년 6월 14일 그러니까 1600년 6월 14일 작전 두달 뒤의 기록에 따르면...

 

평안도 관찰사 서성이 치계하였다.

만포 첨사 김종득의 첩정에 ‘금년 5월 12일 이파에 사는 동평고가 와서 고하기를 「수상(水上)에 사는 호인(胡人)에게서 들으니, 지난 4월 조선의 군마(軍馬)가 북도(北道)의 노토 부락(老土部落)에 돌입하여 분탕질을 했다고 하는데 훈도(訓導)도 알고 있었는가?」 하자 훈도 방응두(方應斗)와 통사(通事) 하세국(河世國) 등이 「노토(老土)는 본시 심처호인(深處好人)이어서 우리 나라의 병위(兵威)를 모르고 몰래 우리 국경에 들어와 우리의 산보(山堡)를 침범하였으니, 이는 자초한 환란으로서 사리에 당연한 것이다. 호인들은 얼마나 죽었고 노토와 다른 추장은 몇 명이나 죽었는가?」 하니, 평고가 「노토는 이런 환란이 있을까 두려워 평소부터 깊은 산에 피할 계획을 하였으므로 그 자신은 겨우 환란을 면했으나 노토에 소속된 부락 7개처가 남김없이 분탕되어 죽은 사람의 수가 거의 1만여 명에 이른다.」 했다.’ 하였습니다

 

물론 사상자가 1만명에 이른다는 말은 조선군의 전과기록과 너무 차이가 나서 그대로 믿을순 없지만

여진족의 인명피해는 무척 컸고 그 인명 피해 만큼 그들의 충격은 더욱 컸습니다.

 

어유간에서 마을외까지와 마을외에서 풍산까지의 3 백여 리를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고 횡행(橫行)했으며 각 부락의 종족들은 넋을 잃고 멀리 도망쳤을 뿐 아니라

이웃 부락의 적들과 이미 배반했던 회령 번추(會寧藩酋)까지도 요즈음 와서 모두 항복하려고 하니,

이는 실로 도(道) 전체의 행운입니다

 

조선은 3일에 걸쳐 벌어진 토벌전을 성공리에 마칩니다.

그리고 조선의 여진족 토벌전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1년뒤 1601년 1월 27일.

또다시 이수일은 2519명의 병력을 이끌고 함경도 온성에서 출진하였습니다.

 

이튿날 동이 틀 무렵 적의 소굴인 두 부락에 들이닥쳐 일시에 포위하였는데

동 적호(賊胡)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떠들썩한 병마의 소리를 듣고서야 황급히 이리저리 뛰어다닐 때

화전(火箭)과 사포(射砲)를 종횡으로 동시에 쏘아

장적(壯賊)을 남김없이 죽이고 아호(兒胡)를 찾아내 포로로 잡았으며,

그들 가옥을 불사르고 땅에 묻어둔 곡식을 퍼내버리는 한편, 소·말·돼지·개 등 축산은 사살하거나

혹은 칼로 쳐서 죽이거나 불태워버린 것들이 부지기수로 모조리 소탕하였습니다

 

적 229명을 죽이고 7명을 포로로 잡았지만 부상자 5명뿐인 대승리를 거둡니다.

 

출처:네이버 미리터리 군사카페 이르민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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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한국 학교 국사시간엔 이런 것도 가르치나요? 한번도 정규 한국사 교육을 받아본적이 없어서...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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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아쳐 15-02-21 17:05
   
토벌하던 여진족에게 몇십년 후엔 무릎을 꿇게되다니.. 아이러니 입니다
     
뚜리뚜바 15-02-21 21:49
   
분산되어 있던 여진족이 누르하치 아래 하나가 되니 ... 기마민족 특성상 빠른기동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거죠 쩝...
두부국 15-02-22 02:37
   
진짜 아이러니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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