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닙니다. 환경적인 영향보다는 조선 사대부들의 정치적 무능입니다.
당시 박지원이 말하기를 조선은 산에 있던 사람은 평생을 물고기 먹기가 어려우며 바다에 있는 어부는 산나물 구경을 하기 매우 어렵다고 기록한 걸 보면 지게와 수로만으로 물자이동을 해결하진 못했음을 볼수 있으며 수레를 이용한 물자 이동이 필요 했음에도 조선은 이를 행할 형편이 못됐다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지형은 산이 많지만 무슨 고딕건축양식처럼과 같은 산들이 아니기에 피해서 갈수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기 때문에 지게를 택한것이고, 바다가 있기때문에 수로를 이용하기때문에 수레의 발전이 더뎠다 라고 반문하시면 이는 반만 보고 계신겁니다.
수레의 바퀴에 대한 박지원의 설명을 보면 조선은 청국과 달리 바퀴 규격이 통일이 되어있지 않으며, 한번 수레가 간길을 다른 수레가 가면 바퀴크기가 서로 제각각이고 맞지 않아 도로 길을 닦기가 힘들었다고 합니다. 어떤 수레는 길을 깊게 패이고 어떤수레는 길을 적게 패이게 하고 식으로요. 그러니 이런 수래로는 수래길 만들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게다가 수래 바퀴또한 원모양이 아니라 울퉁불퉁했다고 하니 박지원이 엄청 답답했을겁니다.
즉 길이 닦이지 않은건 수래를 만들고 체계화 하는 시스템에 문제입니다. 게다가 수레를 끄는 말에도 문제가 많았지요. 박지원은 이에 말의 종자를 개량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주장도 합니다.
물론 님말씀처럼 만약 우리나라가 내륙지방이라면 수로를 이용할수 없었을테니 수레의 발전을 이루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그건 모르는 겁니다. 위대가리 들이 QT 이면 어쩌면 무식하게 백성들 다 동원해서 지게로 옮길지도 모르는 겁니다. 그냥 말위에 언지던가 식으로 옮길수도 잇는 겁니다. 그보다는 당시 조선사대부들이 수레의 바퀴를 체계화 하고 발전시키려는 의지가 없었다는 것에 중점을 둬야 할겁니다.
수레가 발전하지 못했던건 산이 많아서 오히려 지게가 운송수단에 적합했다로 보여지네요. 지게가 엄청나거든요. 그래서 상대적으로 가축을 필요로하는 수레보단 지게로 인해 상대적으로 수레의 발전이 불필요하지 않았나...라고 어디서 봤는데.... 기억이 가물가물
(지게는 지어본 사람만 압니다. 왜 엄청난 물건인지 어께로 매는게 아니라 등전체 엉덩이까지 하중을 고루 분산해서 왠만한 성인도 100kg은 거뜬히 집니다.)
:3c 바퀴가 있다면 수레도 있기 마련인지라, 수레가 없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네요. 여튼, 근본적인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수레'의 유무나 활용도보다도 '길'이 더 관건이라 여겨질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지형적 여건도 그렇지만, 언제부터부터인가 '길을 닦아놓으면, 외적들이 침입할 때 용이해진다.'라는 관념에 형성되어 길을 잘 형성하지도 관리하지도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위의 mymiky 님이 적어주신 것을 참고하여 추측해본다면, 사람과 짐승이 물건을 지고 싣는 데 지쳐 운반하다 죽는 폐단이 발생하였다고 할 정도라면. 사실상 길 자체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반듯하고 정형화된 길이 아니라, 사람이 많이 다니다보니 생긴 그런 정도로 밖에 여겨지지 않을 만큼 체계가 갖추어지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고려 때의 일이라 조선시대에는 조금 더 개선되어졌을 것이라는 여지는 갖고 있지만 말입니다.(다만 의외인 것은, 고려에서는 주요 지점마다 중국과 같은 역관 등을 운영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게 형식적이었는 지 궁금하네요.)
윗문단 내용에 마지막 문장, 외적의 친입을 어렵게 하기위하여 길을 닦지 않았다는 것은 동의를 하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외적의 군수물자 이동을 어렵게 하기위해 수레길을 만들지 않았다면 모를까요.
임진왜란(조선 초기와 중기사이)때 20일만에 부산포에서 한양까지 처들어온게 왜구 입니다. 오늘날도 그냥 걸어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면 한 20일은 걸릴겁니다.(걷는 속도 2km/h 서울에서 부산까지 거리 약 400km 하루 열시간씩 걸으면 20일 걸림) 근데 왜구들은 여러 싸움을 이기고 성을 깨면서 한양에 도착한겁니다. 즉 수레 길이 닦여 있던 말던 외적이 쳐들어오는데는 크게 방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다니는 길은 있으니까요. 수레길이 없다보니 왜구들이 운수물자를 바다를 통해 평양에 보내려고 한것이고, 그 길목에 이순신이 가로 막고 있던겁니다. 즉, 님말대로 외적을 조금 방해 시키려고 조선후기때까지도 수레 길을 닦지 않았다기 보다는 조선이 수레를 기술발전 및 체계화, 양산화 작업이 형편 없었다고 봐야 옳습니다.
우리나라 수레는 고구려벽화에도 잘 나타납니다. 조선에 수레가 없다는건 말이 되지 않죠. 위에 어느분이 말씀했듯이 마을안에서 돌아다니는 소달구지들은 많았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마을과 마을 잇는 길을 닦지 않았죠. 그 길을 따라 외적이 들어온다고 해서. 당연 원거리용 크고 튼튼한 수레는 만들필요가 없었던거죠.
제가 알기로는 조금 다르네요. 수레 발전이 없는것은 길을 제대로 만들어놓지 않았기 때문이고 왜 이렇게 길을만들지 않았냐. 외적과 호란 이 처들어오는걸 방비 하기위함 이라고 생각했던듯합니다.
그러니 길이 개판이니 사람이 지고나르는 식이었어서 당시 서민들의 삶은 궁핍할수밖에 없었고
반대로 외적 방어에는 전혀 쓸모가 없었죠. 몇일반에 호란인들은 수도 한양을 함락했고 왕은 남한 산성으로 피난을 갔고 또 외적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한양에 당도하죠. 고로 그때당시 정치인들이고 무장들이고 무능해서 벌어진일이라고 알고있습니다.
조선에서 수레를 사용하지 않은건 길이 제대로 닦여 있지 않아서 입니다. 당장 전조인 고려만 해도 상업이 발달하여 수레를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그럼 조선은 왜 길을 닦지 않았을까요? 이미 답이나와있군요. 상업의 발달을 저해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상업이 발달하면 국가의 부가 커지는데 왜 막았을까요 조선의 군주와 신하들이 전부 머저리라서 였을까요? 이는 조선이 고려의 폐혜 즉 상업이 발달해 부가 한곳으로 집중되어 백성들이 가난하게 되는것을 경계한 것입니다. 실제로 동시대의 다른 국가들의 백성들보다 조선의 백성들은 월등히 잘 살았습니다. 당장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만 보더라도 수시로 농민반란이 일어났고 먹을게 없어서 사람까지 잡아먹는 식인풍습이 존재하죠.
조선의 상업이 발달하지 않아서 전체적인 국가의 부의 증가가 다른 국가들보다 늦은것은 사실이지만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백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다른 국가보다는 조선이 좀더 선진적이고 살기 좋은 곳이었던것입니다. 외국 관광지에서 지금 남아있는 멋진 유적 유물들 볼때 그것이 전부 그 시대의 백성들의 피땀과 목숨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조금은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전 좀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상업의 발달은 없는데 조선의 백성들이 다른국가들의 백성보다 잘살았다는 논리는 어떻게 가능한겁니까? (몰라서 질문 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당시 조선후기에 사람이 다닐만한 길은 있습니다. 사람이 다니는 길과 물자이동에 필요한 수레가 다니는 길은 구분해서 생각해보시면 좋을것 같습니다.
길이 안닦여 있어서, 수레길이 닦여지지않아서 수레를 만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수레가 조선에 필요함에도 조선의 정부가 무능하여 수레바퀴의 발전과, 체계화, 정형화, 양산화에 집중하지를 못해 수레길이 닦이지 않은게 맞습니다.
당시 조선이 상업을 등한시 한것에 여러원인이 있겠으나 그중 하나는 북벌론을 주장하는 신하들의 입김이 쌧기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을 준비하고 투자하기도 바쁜데 수레에 투자하긴 어려웠으리라 봅니다.
하하 ㅋ 화가 나신다면 푸시지요. 누굴 화나게 할생각은 없습니다 ㅎㅎ. 장담까진 아니고 제 가 알고있는 걸 말한것 뿐인데, 박지원의 글을 빌려쓰다보니 장담하는 것처럼 보이셧나 봅니다. 그리고 진짜로 동의하기 어려워서 보조설명이 필요하다고 느껴져서, 제가 이해가 안가서 질문한거지 딴지 걸려고 동의 못한다고 한게 아닙니다. 글로는 사람의 억양이 드러나지 않으니 거기서 오해가 있으신듯합니다.
궁극적으로 말씀드리면 부의 축적이 어려워졌기 때문이죠. 다른 돈될일은 못하고 죽어라 쌀농사만 지으니 먹고살기는 나았던 겁니다. 부자가 되도 할것도 없으니 수탈이 적었던 점도 있죠. 다른 나라들은 세금이 기본 6할인데 조선은 2할만 넘어가면 탐관오리네 머네 난리가 났고요...사실 여러 난리 때문에 조선의 인구가 급격히 줄어든것도 관련은 있습니다만.
여러분들께서 잘못아시는게... 조선시대에 도로가 잘 발전하지 못해서였다고 하시는데... 신라 고려 조선 합쳐서 단일 국가로 1500년입니다. 모든 도로 다 있었고요... 특히 대부분의 국도는 일제시대에 포장되었지만 실제로 당시 사용하던 길이었습니다. 다만 자동차가 다니고 하다 보니 서양이 도로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빨리 발전 했었지요. 1500년씩 단일 국가였던 나라가 도로 확충이 안됐을리가 없잖습니까.
예전에 일본 학자가 한국의 길을 조사하면서 현재 한국의 국도는 원래 수백년 이상 된 길이라고 일본과는 다르다 했었죠. 일본은 봉건시대가 매우 오래 이어졌었고 전쟁 때문에 길자체가 없거나 험하고 아니면 일부러 굽어지게 만들어졌는데 반해 한국의 길은 모두 서울로 향하고 있다고 했었죠.
그게 참 애매한게 깡통님의 말씀대로 길은 있는데 이 길들이 대부분 자연발생적 도로라 쉽게 없어지고 다시 생기곤 합니다. 고려까지의 도로는 아마 조선 중기 오면서 많은 부분 없어졌을겁니다. 님의 말씀대로 도로들이 수도로 연결되는데 그게 대부분 과거길이란 말이죠. 물류가 움직이는 길이 아닌. 실제로 우리나라는 관도란게 거의 없죠. 쉬운예로 경상도에서 서울을 가려면 충청도 문경세재를 넘어야하는데 가보신분은 아시겠지만 그거 수레끌고 넘어가기 힘들었을거에요.
조선시대의 상업이라하면 무역보다는 대부분 시장에서 이뤄졌습니다. 때문에 전문 상업종사자들이 별로 없었죠... 지리적인 요인에 의해 조선의 무역대상은 중국과 일본밖에 없었으니까요.
당시 조선의 경제력과 인구로 보면 충분히 자급자족이 가능한 시대였습니다. 때문 물류의 이동은 한양에 있는 왕과 사대부를 위한 진상품용도밖에 쓰이지 않아 수레나 마차의 사용이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수레의 이용은 지금의 고속도로의 필요성과 일치한데요. 그만큼 국내외의 물류의 이동이 필요한 경우가 아닌이상 큰 이용이 없는것이죠..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수레의 이용이 필요가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