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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10-12 00:50
[통일] 고구려는 북위에 정말 갖다바쳤나?
 글쓴이 : 굿잡스
조회 : 6,306  

 
 
 
 
<고구려 중장기병 개마무사>
 
 
 
고구려는 이미 기원후 55년 요서 10성을 쌓으면서
 
태조대왕시기에 대국의 위치에 오르지만
 
5세기 광개토태왕에 의해 만주일대를 석권하면서
 
진정한 동방문명권의 패자로 군림.
 
뒤를 이은 장수태왕이 반석을 굳건히 다지면서 
 
전성기를 구가하며 오랜시간 지속적인 강대국의 면모를 보입니다. 그런데
 
이 당시 서토 사서등을 상당 부분 가져와 편찬한
 
삼국사기의 기록등을 보면 북위에게 조공 조공 어쩌고 이야기들이 쉴새 없이
 
나오는데(특히나 장수태왕시기 43회)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죠. 
 
과연 북위는 고구려를 어찌할 정도의 상국이였을까??
 
 
무엇보다 전쟁이 빈번했던 삼국시대 전후로 내륙에 쳐박혀 있던
 
서토애들에게서 조공은 도리어 지들 평화를 구걸하기 위한

뇌물인 경우가 더 맞습니다.(한나라 유방이 흉노 묵특 대선우에 생포되어
 
60여년을 실질적 속국으로 해마다 증가된 조공을 갖다바쳤고
 
후한 시기 역시 58년 이후 정기적으로 선비족에게 한해 2억 7천만냥을
 
남흉노에게는 그의 3분의 1을 갖다바쳤음. 앞서 서토 최초의 상나라 역시 동
 
북방 이민 동이족이 내려와서 화한족을 정벌하고 세운 정복왕조사.
 
수나라가 고구려에 대패하면서 망하자 돌궐이 서토 내지로 휩쓸고 들어가
 
면서 당나라 이연부터 이세민 조차도 위수지맹이라고 돌궐의 신하로
 
칭하면서 갖다 바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리고 그걸 서토식 뉘앙스와 체면식 묘사로 이후 선비족이 남하하여

세운 정복사인 북조사등에서도 조공(교류) 어쩌고 쳐했고.

<고구려는 초기부터 옛고토를 회복하기 위한 다물정신을 국가 이념으로

한나라와 투쟁하면서 커온 나라였습니다.>

굵직한 사건들을 보면

49년 모본태왕시절 후한의 깊숙한 내지인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 공격

55년 태조대왕이 요서에 10성 쌓고

121년 선비(鮮卑)와 함께 요대현(遼隊縣)을 공격해 요동태수 채풍을 신창에
 
서 살해.

172년 한나라 대군을 몰살시킨 좌원대첩

311년 요동 서안평( 西安平) 점령

402년 후연의 숙군성 요서 공격

404년 후연의 연군 요서 공격

407년 고구려의 대대적 후연 공세로 멸망하고 고구려계
 
고운의 북연이 들어섬.

436년 장수태왕이 북연의 수도 조양에 대군을 보내어 북연의 물자와
 
사람을 내지로 접수할 당시 북위가 고구려의 군세에 눌려 지켜 보고만 있었
 
다는 기록이 있죠. (북위는 조양에서의 수모를 갚기 위해 고구려에 이오를 사
 
신으로 파견. 위(조씨)나라때의 3배에 이르는 인구를 가진 강국으로 뒷날을 도
 
모하자고 말함)

439년 남조 송나라가 고구려 보고 북위를 같이 공략하자고 하자 말 800필과
 
함께 북방의 유연과 3각 동맹을 맺도록 중재.

이쯤되면 북위는 그냥 고립 무원이죠.

중세시절 고려-요-송의 삼각 견제때보다 더 심각해질수 있었던 게
 
북위 상황임.

이미 우리 고구려는 만주와 남북한 일대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동방문명권
 
의 패자인 태왕으로 유연과 연합해서 북방에서 다이렉트로
 
북위를 양쪽에서 공격할 수 있는 위치에
 
남조도 배후에서 친다면 사방공격으로 떡이 될 수도 있던 상황.

이런 동북아 국제 정세를 조율했던게 고구려였고 이렇게 되자

북위에서 타개책으로 나온게 고구려와의 정략적 결혼카드로

선대부터 지속되다 북위 효문제(재위 471~499)에

이르러 고구려 공주를 원했지만 재차 거절 당하면서 결국

고구려 귀족가문인 후대 북위에 고구려계 황제로 등극하는 세종의 어머니

문소태후와의 결혼동맹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462년에 재차 고구려와 북위의 사신 왕래가 빈번하게 이루어 지는데

장수태왕시절에 이렇게 해서 43회에 이릅니다.
 
그리고 이걸 서토식 뉘앙스로 북위의 교류를 마치

고구려보다 우위 어쩌고 식의 조공 어쩌고 식으로 쳐한 거죠.

위서 봉궤전을 보면 고구려 문자명태왕은 효문제 기간에

북위변방을 거란을 이용해서 두드리는 사건도 나오지만

북위가 이런 국제 정세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고구려와

적극적 화친을 맺는 노력을 함으로써 장수태왕에서 안장태왕 초기까지 이를
 
통해 고구려와 북위의 동맹이 어느 정도 평탄하게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508년 북위의 세종이 산둥일대에 고구려의 시조를 제사지내는 고려묘 설치.
 
(고구려계 세종 등극 이후 고조가 붕당을 결성하여 북위 조정을 장악해 버림.
 
이를 위해 고려국대중정(高麗國大中正)이라는 벼슬을
 
두었는데 뭔소리인가 하면 고구려인만 추천해서 벼슬에 앉히는 직책입니다.
 
이정도면 당시 어떠했는지 알만 하죠 ㅋ이후 이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고조는 세종의 사후 계략에 빠지면 고양왕에게 제거되지만 고조의 아들 고
 
식이 제주자사로 있는 등 여전히 고구려인들의 영향력을 철저히 제거하지
 
못한 이면에는 강대한 고구려가 뒷배경으로 북위를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임.)
 
이후 요서일대에서 발견된 한기묘지명을 통해서 보면
 
525년에서 528년사이에 안장태왕시기에 가면 다시금 충돌이 본격화되는데

고구려는 거란을 시켜 요서 대릉하일대 조양을 공격하여 평주사마자의참군
 
한상을 잡아 오는 등 요하 건너 서쪽 2천리를 점령하는 북사등의 기록이 확
 
인되는.
 
이후 

560년대 평원태왕 돌궐 격파 578년 북주와 싸우고

598년 영양태왕시기 수의 대대적인 공략준비가 본격화되자 영주 선제 공격

644년 당이 요서 영주로 집결하자 공격.


<이런 천년사직 우리 고구려의

일련의 맞짱이나 혹은 수시로 변방 교란, 내지 깊숙히까지 공격을

강행하고 심지어 서토 통일왕조와도 전쟁이 불가피 했을 경우에는 도리어

선제 공격을 과감히 실행하는 등의 역사적 사건들을 보면

당시의 서토와의 조공 어쩌고는

말 그대로 그냥 서토식 자뻑 사관에 의한 교류 기록을 그런식으로 쳐한 것에

불과하며 고구려 최전성기를 구가한 장수태왕시절 43회에 달하던 사
 
신 왕래 기간의 조공 어쩌고 기록 역시도 도리어 북위가 이런 동북아의 힘을
 
조율하던 고구려의 3각 동맹에 북위가 어려움을 떨쳐내기 위한 고육지책으
 
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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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잡스 14-10-12 01:46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주몽의 나이 22세였으며, 한 나라 효원제 건소 2년, 신라 시조 혁거세 21년 갑신년이었다.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와서 이곳에 살고자 하는 자가 많았다. 그곳이 말갈부락과 인접하여 있었으므로, 그들이 침범할까 염려하여 물리쳐 버리니, 말갈이 두려워 하여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왕은 비류수에 채소가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따라 왕은 사냥을 하며 그곳을 찾아 올라가 비류국에 이르렀다. 그 나라 임금 송양이 나와 왕을 보고 말했다. "과인이 바닷가 한 구석에 외따로 살아와서 군자를 만난 적이 없는데, 오늘 우연히 만나게 되었으니 또한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대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모르겠다." 주몽은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모처에 와서 도읍을 정하였다"라고 대답하였다. 송양이 말했다. "우리 집안은 누대에 걸쳐 왕 노릇을 하였고, 또한 땅이 비좁아 두 임금을 세울 수 없는데, 그대는 도읍을 정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의 속국이 되는 것이 어떤가?" 왕이 그의 말에 분노하여 그와 논쟁을 벌이다가 다시 활 쏘기로 재주를 비교하게 되었는데, 송양은 대항할 수 없었다.
 
2년 여름 6월, 송양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했다. 그곳을 다물도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군주로 봉했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다물이라 하기 때문에 그곳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
     
대은하제국 14-10-12 01:52
   
굿잡스님은 환단고기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연구를 더 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환단고기책은

삼성기 북부여기 태백일사 단군세기 이렇게 4권으로 합쳐진게 환단고기죠

이미 단군세기 태백일사는 고려 조선시대에 기록된 책이기 때문에 위서가 아닐수도 있지 않을까요?
대은하제국 14-10-12 01:47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고구려가 멸망할때 고구려에 관한 기록은 모두 불태워져 사라졌잖아요

삼국시대의 유일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밖에없는걸로 압니다

그러니 자세한 고구려의 기록은 알수가 없죠
seharu77777 14-10-12 10:32
   
우리나라의 위대한 진실의 역사군요~좋은글 감사합니다~
gagengi 14-10-12 12:13
   
참고로 북위는 선비족의 나라로 중국이 아닙니다.
선비족은 부여족과 가까운 민족으로 동이족입니다.
북위가 수나라 당나라로 이어졌습니다.
굿잡스 14-10-12 19:28
   
겨울 12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그때 그의 나이는 98세였다. 임금의 호를 장수왕(長壽王)이라 하였다. 위나라의 효문(孝文)이 이 소식을 듣고, 흰색의 위모관(委貌冠)과 베로 만든 심의(深衣)를 지어 입고 동쪽 교외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하였다.

七十九年 夏五月 遣使入魏朝貢 秋九月 遣使入魏朝貢 冬十二月 王薨 年九十八歲 號長壽王 魏孝文聞之 制素委貌布深衣 擧哀於東郊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장수왕 79년(서기 491)


28년(서기 519), 임금이 돌아가셨다. 호를 문자명왕(文咨明王)이라 하였다. 위나라의 영태후(靈太后)가 동당(東堂)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했다.

二十八年 王薨 號爲文咨明王 魏靈太后擧哀於東堂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문자명왕 28년(서기 519)

참고로 영태후는 효명제의 생모로 어린 효명제를 대신해서 섭정하던 북위 실권자였음.

글구 위서 정준열전을 보면 장수태왕이 도리어 북위군주를 사위국으로 삼고자

했던 기록도 보이는데 하여튼 조공, 책봉 어쩌고 하는 서토식 자뻑 뉘앙스의 단어만 빼면

실제 동북아 정세를 주도하며 북위를 압박하고 마음에 안들면 북위 사신을 피박하거나

변경을 두드리는 내용들을 보면 북위가 도리어 고구려에 실제 갖다바쳤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볼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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