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인구 추정방식은 상당히 낙후되고 누락된 부분이 많은게 사실입니
다. 그기에 짱국이 요동일대도 그나마 현대에 와서 장악하면서
이후 낯선 지리적 문화적 환경이 아니였지 이전까지는 제대로 알지도 못했
고 타국에 대해서는 간략 혹은 왜소화 시키는 경향이 많아서 정확도는 더욱
떨어지기에 참조자료 정도로 삼으면서 실제 고고학이나 교차 검증을 해야
지 맹신했다가는 쪽팔리는 바보가 되기 쉽상이죠.
서토 사서 3세기 삼국지의 고구려 인구를 3만호라고 합니다.
그런데 고구려 동천왕과 위나라 관구검이 모용선비와 부여까지 동원된 연합
세력과 맞싸움할때 데리고 싸우든 병력이 2만임.
3만호는 호당 5명으로 잡으면 15만 정도인데 그기에서 뽑아낸 병력
이 무려 철기병 5천포함해서 2만입니다.ㅋㅋㅋ
그기에 동천왕이 초기 양맥에서 위나라 6천을 도륙하면서 방심하다 이후 방
진에 무리하게 쳐들어가다 1만 8천이 궤멸되면서 이후 수도가 털리는 고구
려 사상 초유의 사건이 벌어짐.
<인구의 10퍼센트 이상을 데리고 와서 궤멸되었음. 만약 저 3만호가 정확
하다면 이미 이때 고구려는 지리 망하거나 다른 나라에 이내 쳐먹혔겠죠.>
그런데 그러했느냐?????? 이후 북위가 고구려와 용성에서 맞대결 직전까
지 가다 고구려 위세에 눌려 물러나고 이후 치욕을 갚기 위해 고구려를 탐색
하다 강성하면서 증가된 고구려의 인구력에 다시금 포기
이후 외교적으로 고구려 장수태왕의 공주와 정략적 결혼 어쩌고 하다 거절
당하고 겨우 얻은게 고구려 귀족가문에서 나온 문소태황후임. 이가 들어가
서 놓은 아들이 이후 북위에 고구려계 세종으로 황제로 옹립되죠. 이후 고구
려 고조가 북위 조정에 군사를 데리고 들어가서 장악해 버립니다.
이후에도 북조사는 막강한 고구려를 등에 없는 고구려인들의 활약이 두드러
지죠.
3만호 허접내용에 대한 구체적 반박은 아래 링크에서
그럼 다시 조선 특히 일제 강점기로 넘어가 봅니다.
왜 이걸 볼필요가 있느냐 하면 고대 인구에 대한 서토 사서도 매우 부정확하
고 그나마 기록에 대해 세계사적으로 발달한 조선조차 현대같은 정밀 통계
치는 나오기 힘든 시대상황임을 가만하면 그나마 가장 정확도가 높고
근세 조선과 시기적으로 가까고 직간접적으로 대략적으로나 신뢰할수
있는 근거로 알 수 있는게 일제 강점기의 통계자료죠.
<1905년, 대한 제국 내무부의 인구 조사에 의하면, 조선의 인구는
5,793,976명이었다. 그러나 대한 제국의 인구 조사는 부정확했다. 1905년에
체결된 제2차 한일 협약에 의해 그 이후부터 조선의 인구 조사는 일본이 실
행하였다. 일본 통치가 시작된 1910년의 조사에 따르면 조선의 인구는
13,128,780명이었다. 일반적으로 이것도 상당수가 누락된 숫자로 보고 있
다. 학계에서는 1910년 무렵에는 1,742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3]
일본 통치가 끝나기 전의 해(1944년)에는 25,120,174명이었다.>
아래는 36년도 조선 통계치 자료입니다.
조선 인구가 2200만을 상회합니다. 1905년에 6백만 정도 하다 1910년에 대
대적 일제의 토지 강탈을 목적으로 하는 조사와 식민 통제를 위한 인구 조사
를 5년뒤에 하자 1300만으로 부쩍올라 갑니다. 그런데
이것도 누락된게 많죠 초기 일제가 완전히 한 국가를 장악해서 정밀한 인구
를 내기는 부족한 시기이니.
<이후 36년에 가서 나온 통계치가 2200만입니다. 이게 그나마 정확한 통계
치죠.>
그럼 무슨 일제 강점기 조선 국민이 잘먹고 잘살았느냐? 아시듯 일제는 조
선의 토지를 조사하면서 교묘히 강탈을 시도했고 이후 대농장을 통해 조선
인을 착취하에 식량을 수탈하고 조선의 경제기반을 후진적 농업에만 매달
리게 하면서 소작농을 부려먹고 쌀은 대대적으로 열도에 퍼나르게 됩니다.
(말기에 가면 이런 식량 및 자원 인적 수탈은 더욱 악랄해지죠.
일제 강점기의 성장점의 키가 6.25 동란보다 더 최저점을 보임)
<결국 조선 말기의 조선의 인구는 대략으로 이미 2천만 내외 였다는 점이
설득력이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