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0년대 전반기 즉 고려 중기인 인종때 이후
성씨 족보 문화가 우리나라에 본격화되기 시작하는데
이시기는 고려가 유교적 문벌 보수화한 시기로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김부식입니다.
김부식의 라이벌로 주체적 역사의식과 화려한 문장력으로
당대에 당할 문사가 없다고 자타가 공인하던 정지상이란 인물이 있는데
정지상은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에 연루되어
끝끝내 김부식에 의해 살해된 인물입니다.
묘청의 난이 있기전 불과 이삼십년전인 숙종말과 예종때
윤관의 여진정벌이 있었는데
동북구성을 여진족에게 돌려준 이후
고려의 조정과 지배계급은 급속히 문벌 보수화하기 시작하죠.
특히 금나라에 대한 사대로 인해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바로 이에 대한 반동적 성격이 있다고 볼 수 있고
무신의 난또한 지나친 문벌귀족 보수화가 원인이 되었는바,
주로 보수적 문벌귀족세력들이 득세하게된 고려 중기 이후부터는
자기네 족보를 나는 송나라 누구의 후손입네, 당나라 누구의 후손입네하는
웃기지도 않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유력의 한국의 성씨 중 적지 않은 족보들이
자기들의 시조를 고려 중기 이후 송나라에 귀화한 누구의 후손이니,
당나라때 신라에 귀화한 누구의 후손입네
한술 더떠 기자와 관련된 인물의 후손입네 주나라 누구의 후손입네
중국 어디 출신의 누구입네하는 족보 만들기가 사직된 겁니다.
그야말로 한반도에서 좀 힘있는 집안의 조상들은
웬간해선 중국인들이 된 것입니다.
허나 웃긴것은 정작 고려사에 실제 귀화인물로 나온 광종때의 쌍기같은 인물의
후손들은 알려진바가 적습니다.
이게 무엇을 시사하는지 곰곰히 생각해보세요.
중국에 대한 모화사상은 조선시대부터 발생한게 아닙니다.
실상은 통일?신라 육두품들의 당나라 유학 문전성시로부터
슬슬 그 싹이 나기 시작하더니
고려 중기 이후에는 유교적 문벌귀족 사회의 득세로
그 정도가 좀더 심화되더니
고려 말 원나라의 지배간섭과 권문세족의 횡포로 인한
사회적 반동이 사상적 대체물로 성리학이 수입된 이후
조선시대 들어와서는
좀 더 노골적으로 변하더니
임난 이후에는 그나마 조선전기 때 명맥이 유지되던
주체적 사관, 민족의식, 외교가
재조지은이란 미명과 서인의 쿠데타 성공 이후
성리학 독재사상으로 19세기까지 이어진 겁니다.
더구나 조선후기 성리학 독재가 조선을 지배하던 그 시기에는
예학과 보학이라 하여
족보학이 크게 번성하고
공명첩 남발과 돈많은 양인 천민들의 양반화로
양반의 수가 엄청나게 증가하면서
자연히 중국 송나라에 당나라에 명나라에 그 이전 시기의 중국왕조에서
건너온 조상님의 후손들이 천지빽가리가 된겁니다.
물론 실질적으로 중국에서 귀화한 자손들도 존재하죠.
허나 태반은 다 위에 적은 배경에서 종이로 된 중국인 조상의 후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