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약진 운동(중국어 간체: 大跃进, 정체: 大躍進, 병음: Dàyuèjìn, Great Leap Forward)은 공산 혁명 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근대적인 공산주의 사회를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1958년부터 1960년까지 마오쩌둥의 주도로 시작된 농공업의 대증산 정책이다.
마오는 《생산성 이론》에 근거해 이 정책을 실시했지만, 농촌의 현실을 무시한 무리한 집단농장화나 농촌에서의 철강생산 등을 진행시킨 결과 3,000만명에 이르는 사상 최악의 아사자를 내고 큰 실패로 끝이 난다. 이 때문에 마오의 권위는 추락하고 이 권력회복을 목적으로 문화대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편집] 배경
1957년 11월 6일 소련의 서기장 흐루쇼프는 소련이 공업 생산 및 농업 생산으로 15년 이내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마오는 이에 자극을 받아, 1958년 《제2차 5개 년계획》을 세우고, 당시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인 영국을 15년 이내에 추월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무모한 계획을 입안했다.
그러나 시장원리를 무시하며 인민에게 과도한 할당량을 부과하고, 엉성한 관리들의 주도로 무리한 증산을 지시했기 때문에 오히려 생산력 저하를 가져왔다. 대약진 정책이 시작되기 전에 마오는 1956년 《백화제방 백가정명 (百花齊放 百家爭鳴)》 운동으로 공산당을 비판한 지식인들을 1957년 《반우파 투쟁》으로 척결하고 있었는데 다시 탄압을 받을 것을 우려한 지식인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59년 7월 2일부터 8월 1일까지 강서성의 려산에서 개최된 《려산 회의》에서, 공산당의 요인 펑더화이가 대약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간하자, 마오의 노여움을 사서 펑의 지지자와 함께 실각시켰다. 이 결과 대약진에 대한 반대 의견이 없어지는 동시에 한층 무리한 할당량이 부과되게 되어, 할당량을 달성할 수 없었던 현장 지도자들은 부풀린 성과를 보고했다. 그리고 그 보고를 받아들인 마오는 보다 많은 증산을 명령하는 악순환에 빠지고 말았다.
당시 마오쩌둥은 기계보다 인력에 의존하는 노동집약적인 산업화 방안을 내세웠는데, 모든 마을에 소형 용광로를 개발하여 새로운 대형공장 건설의 필요성을 대체하려 하였다. 대약진 운동은 소련식 모델을 본뜬 산업화 정책의 실패로 일어난 반동운동으로, 1960년대 중·소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실제로 이러한 현상은 중국뿐만이 아니라 소련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소련에서도 실체를 수반하지 않는 할당량 보고가 계속되었고, 현실에서는 동서 양 진영 간 실력의 균형은 1970년 대에 붕괴되고 있었다.
결국 무리한 정책추진으로 인해 중국은 오히려 많은 인민들이 굶어죽는 사태를 겪었다. 1958년, 마오쩌둥이 참새를 가리키면서 “저 새는 해로운 새다.”라고 한마디 한 것 때문에 참새잡이 광풍이 불어 참새 개체수가 급락, 해충이 창궐하여 대흉년이 들었다. 1960년, 중국의 총농경지의 반을 차지하는 약 1억5천만 에이커의 농토가 가뭄, 태풍 및 여러가지 수해에 휩쓸렸으며 동 농토의 반 이상이 막대한 피해를 입고 농사 중이던 농산물을 전부 잃었다. [1]
[편집] 결과
결국 4,000만명이라는 엄청난 인구가 사상 최악의 굶주림과 기아로 사망하자[2], 4년째인 1962년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인정한 마오쩌뚱은 국가주석을 사임했다.
이 대약진운동은 인류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순수 공산주의 실험이었다. 불과 4년간의 "대약진운동" (1958-1962)이었지만, 그 대약진 운동이 낳은 결과는 참담했다. 정부공식발표로만 비자연적으로 사망한 수가 2158만명이고, 동서양의 다른 자료들에 의한 추가 사망자수는 약 2000만명이다. 주요사인은 아사. 학자들은 인류역사상 최악의 구황으로 기록하고 있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는 려산 회의 이후 당내의 분열을 초래해, 대약진 운동의 결과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 펑더화이는 숙청됐다.
이후 1978년 마오쩌둥의 죽음 이후 취임한 덩샤오핑은 "흑묘백묘론"을 밝혀 오늘날까지도 중국식 시장경제의 기본이념이 된다. 이후 덩샤오핑의 지휘 아래 중국 정부는 가정연산승포책임제 등의 도입으로 사유지와 농기구를 농민에게 되돌려 주었으며 각종 인민공사 조직도 폐지되었다.
한편 대약진운동은 1966년 초에 일어난 문화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대약진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체 사망자수(3000만명~5000만명)[3]에 이르는 인구를 전쟁 한번 없이 굶어 죽게 함으로써 경종을 울리며 끝이 났다.
1977년 화궈펑의 집권시 두번째 대약진운동이 있었으나 역시 큰 성과를 이루지 못하고 실패했다.[4]
4천만명 기아,아사자가 왠말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