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에 진(秦)나라와 진(晉)나라가 강국이었다. 진(晉)나라 문공은 융적을 하서의 은수와 낙수 사이에 거주하도록 내쫓고 그들을 적적과 백적으로 불렀다. 진(秦)나라 목공은 서융의 사신이었던 유여를 신하로 받아들여 서융의 여덟 나라를 복속시켰으며, 그 나라들은 농 지방의 서쪽에 있는 면저, 곤융, 적, 원 등의 융족과 기산, 양산과 경수, 칠수의 북쪽에 있는 의거, 대려, 오지, 구연 등의 융족이었다. 그리고 진(晉)나라 북쪽에는 임호, 누번 등의 융족이 있었고, 연나라 북쪽에는 동호, 산융이 있었다. 이들은 각자 산의 골짜기에 거주하면서 자신들의 군장이 있었다. 종종 1백여 개의 융족의 부락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경우는 있었지만 서로 통일하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1백여 년 뒤에 진(晉)나라 도공이 위강을 융적에 사신으로 보내 화친을 맺음으로써 융적들은 진(晉)나라에 조회하게 되었다. 또 그로부터 1백여 년 뒤에 조양자가 구주산을 넘어 대를 쳐부수고 그 땅을 병합하고 호와 맥에까지 이르렀다.
그 후 조양자는 진나라의 한강자, 위환자와 함께 지백을 멸하고 진(晉)나라 영토를 나누어 가졌는데, 즉 조나라는 대와 구주산 북쪽을 차지하고, 위나라는 하서와 상군을 차지해 융족과 경계를 접하게 되었다. 그 후에 의거의 융족들은 성곽을 쌓고 스스로 지키고 있었으나 진(秦)나라가 점차 잠식해 들어가 진(秦)나라 혜왕(惠王) 때에 이르러 마침내 의거의 25개 성을 빼앗았다.
또 혜왕은 위나라를 공격하여 위나라의 서하와 상군을 전부 진나라에 속하게 하였다. 진(秦)나라 소왕(昭王) 때 의거의 융왕이 소왕의 어머니 선태후와 사통해 두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선태후는 의거의 융왕을 속여 감천궁으로 유인하여 그를 죽이고, 이어 군사를 일으켜 의거를 공격해 멸망시켰다.
그래서 진나라는 농서, 북지, 상군을 차지하고 거기에 장성을 쌓아 융적의 침입을 막았다. 한편 조나라의 무령왕은 조나라의 풍속을 개혁해 군사들에게 호복을 입고 말 타고 활 쏘는 것을 연습시켜 북쪽의 임호와 누번을 무찔렀다. 장성을 쌓고 대에서부터 음산산맥 기슭을 따라 고궐에 이르는 지역을 요새로 만들었다. 조나라는 그 땅에 운중, 안문, 대 등 군을 설치했다.
그 후에 연나라의 명장 진개가 흉노에 인질로 가 있으면서 그들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연나라로 돌아온 후 군대를 이끌고 동호를 습격해 패주시켰으며, 이때 동호는 1천여 리나 물러갔다. 형가 함께 진왕 영정을 암살하려던 진무양은 진개의 손자다.
연나라 역시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에 이르는 지역에 장성을 쌓았다.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 등에 군을 설치하여 북방 융적을 방어했다.
당시에는 문명과 예의와 풍속이 발달한 전국칠웅(戰國七雄)이 있었는데 그 중 세 나라가 흉노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그 후 조나라 장군 이목이 있는 동안은 흉노가 감히 조나라 국경을 침범하지 못했다. 그 뒤에 진(秦)나라가 6국을 멸망시키고,
시황제(始皇帝)는 몽염(蒙恬)에게 10만 명의 군사를 주어 북쪽의 흉노를 공격하여 황하 이남의 땅을 모두 진나라의 영토로 수복하였다. 또 황하를 이용해 요새를 만드는 한편, 황하의 강변을 따라 44곳에 현성을 축조하고, 죄를 짓고 변방을 지키는 병사를 옮겨와 현성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직도를 만들어 구원에서 운양에 이르게 하였으며, 또한 산의 주변을 이용하여 험준한 구릉과 계곡에 치수(治水)하여 성의 해자를 만들고 임조를 기점으로 요동에 이르기까지 만여 리에 달하는 장성을 쌓았다. 또 황하를 건너가 양산과 북가(北假) 일대를 점거했다.
- 사마천 사기, 흉노열전
自是之後百有餘年,晉悼公使魏絳和戎翟, 戎翟朝晉. 後百有餘年, 趙襄子踰句注而破并代以臨胡貉. 其後既與韓魏共滅智伯, 分晉地而有之, 則趙有代、句注之北, 魏有河西、上郡, 以與戎界邊.
위의 기록을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마치 중원지역만 문명국 처럼 포장해 놓았으나,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는 점이 발견이 되었기 때문이다.
" 趙襄子踰句注而破并代以臨胡貉 "
바로 맥족(貊)이 원문에서 발견이 되었기 때문이다. 맥(貊)이라는 단어 정말 흥미롭지 않은가?
고대 중국인들은 만주와 한반도 전역에 살던 고대 한국인을 예족(濊) 혹은 맥족(貊) 예맥(濊貊)이라고 불렀다.
본래 예맥(濊貊)이란.. 더러울 예(濊)로 생각 하는 경우가 많으나, "그물을 던지는 소리 활" 이라는 의미도 있으며, 맥(貊)이란 짐승의 의미도 있으나, 북방의 종족 즉 오랑캐라는 의미도 있다.
즉 해석을 하면 더러운 짐승이나, 활소리를 내는 북방의 국가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이러한 해석을 두고 부정적인 멸칭이기 때문에, 예맥이란 단어를 쓰면 안된다는 의견도 있으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중국이 치를 떨 정도로 두려움의 대상인 존재들에 이러한 멸칭이 사용되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단편적인 예시로 흉노(匈奴)와 몽고(蒙古)등이 있다.
흉노란 오랑캐 흉(匈)의 종노(奴)를 사용하며, 천박하고 야만적인 종놈이라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
몽고 역시 어두울 몽(蒙), 정신이 혼미할, 어리석은 몽(蒙)에 옛고(古)자를 붙혀 오래전 부터 어리석은 존재
대대손손 수천 년 전부터 멍청한 존재라는 멸칭으로 해석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지 않는 가? 흉노(匈奴)와 몽고(蒙古)는 한번씩 대륙을 점령하고 중국을 지배했던
강력한 존재들이며, 결고 그들은 어리석은 존재가 아니다라는 점이다.
고로 예맥(濊貊) 역시 기록은 많지 않으나, 충분히 중국의 상나라(은나라) 이래로 한나라 시대까지
예맥은 중국의 변경을 위협할 정도의 무시무시하고도 강력한 세력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단편적인 예시로 중원을 제패했던 진시황 역시 고조선을 침공하지 않았고
흉노를 제압하며 아시아를 평정했던 한무제 역시 총 병력을 동원하고도 고조선에게 밀려
육군과 수군이 괘멸이 되자 죄인들 까지 동원하여 1년 이상 전쟁을 펼쳤던 공포적인 존재이다.
고로 예맥(濊貊) 이라는 단어를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自是之後百有餘年,晉悼公使魏絳和戎翟, 戎翟朝晉. 後百有餘年, 趙襄子踰句注而破并代以臨胡貉. 其後既與韓魏共滅智伯, 分晉地而有之, 則趙有代、句注之北, 魏有河西、上郡, 以與戎界邊.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위의 사마천의 사기, 흉노열전의 일부분을 발췌하여 해석하기 위해선 앞전의 내용을 보아야 한다.
當是之時, 秦晉為彊國. 晉文公攘戎翟, 居于河西圁, 洛之閒, 號曰赤翟、白翟. 秦穆公得由余, 西戎八國服於秦, 故自隴以西有綿諸, 緄戎, 翟, 獂之戎, 岐, 梁山, 涇, 漆之北有義渠, 大荔, 烏氏, 朐衍之戎. 自是之後百有餘年,晉悼公使魏絳和戎翟, 戎翟朝晉. 後百有餘年, 趙襄子踰句注而破并代以臨胡貉. 其後既與韓魏共滅智伯, 分晉地而有之, 則趙有代、句注之北, 魏有河西、上郡, 以與戎界邊. 而晉北有林胡, 樓煩之戎, 燕北有東胡, 山戎. 各分散居谿谷, 自有君長, 往往而聚者百有餘戎, 然莫能相一.
위의 문장은 중국 전국시대중 하나인 진(晉)나라 문공과 진(秦)나라의 목공이 오랑캐를 토벌하는 내용이자
진(秦), 진(晉), 조(趙), 연(燕) 주위에 어떠한 이민족이 살 고 있는지 자세히 나열된 대목인데,
"趙襄子踰句注而破并代以臨胡貉"
이 대목은 조양자(趙襄子)가 중국 내륙, 황하의 끝자락에 있는 대(代)를 쳐 부수고, 따을 병합하고
호(胡)와 맥(貉)에까지 이르렀다. 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대(代)는 오늘날 황하의 서쪽, 중국 내륙 깊숙히 위치하던 국가로, 조나라의 동북쪽, 위나라와 인접했으며 오늘 날 우리가 접하는 소위 흉노 지역, 북방 스탭지역까지 맥족(貉)이 위치했었다는 말이 된다.
예맥족은 만주와 한반도를 넘어 전국장성의 북부 지역 ( 스탭지역 ) 까지 활동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