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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4-02-24 15:43
[한국사] 글림킴이 올린 고구려 지도 재조명 되고 있다? 요즘 핫한 고구려 최대강역 ( 원제 : 사서로 고증한 고구려 최대 강역 )
 글쓴이 : 아비바스
조회 : 642  






에 대해, 일찍이 이런 지도가 있다. 

https://image.fmkorea.com/files/attach/new3/20240222/486263/6543375950/6749303661/e9a608deb985ea6847b0d5611571ad22.png



과장이 아닌가 싶을 수도 있고,

실제로 한강 유역은 7세기에 확실히 고구려 땅은 아니었지만,

북부의 경우에는 저게 근거가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https://image.fmkorea.com/files/attach/new3/20240222/486263/6543375950/6749303661/4c45827e1f07b5a4fc4ccfdd3639503f.png

(정원주, 「7세기 고구려의 서계(西界) 변화 : 고구려의 요서(遼西) 진출과 당의 대응」, 『영토해양연구』 8, 2014, 154쪽.)




위의 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위서』·『북사』·『주서』·『수서』 등 5세기 이후를 다룬 중국의 사서에는

고구려의 영토가 동서 2,000리·남북 1,000리로 기록되어 있으나,

『구당서』·『구오대사』·『오대회요』 등 당나라 이후의 사서에서는

갑자기 동서 3,100리·남북 2,000리로 크게 증대되어 나타난다.






https://pbs.twimg.com/media/EXX5DcdUwAA-sBd.jpg





또한 고구려의 서쪽 경계 역시

『위서』·『북사』·『주서』 등에서는 요동으로 인식되었으나,

『구당서』·『신당서』·『구오대사』·『오대회요』 등에서는

요하를 건너 영주(榮州)에 이른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에 근거했을 때 고구려의 세력권은






https://image.fmkorea.com/files/attach/new3/20240222/486263/6543375950/6749303661/0aeeb5fdd187333cfa95324d0b97ed69.png

(당나라의 1리는 약 560m이므로, 3,100리는 1,736km이고 2,000리는 1,120km이다.)




이 정도로 추정해 볼 수 있게 된다.

이때 남쪽 경계를 하슬라(강릉)로 잡은 것은



3월에, 왕이 하슬라(何瑟羅) 땅이 말갈(靺鞨)에 맞닿아 있으니
사람들이 편안치 못하다고 여겨,
경(京)을 폐지하여 주(州)로 삼고 도독(都督)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三月, 王以何瑟羅地連靺鞨, 人不能安, 罷京爲州, 置都督以鎭之.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5년 -




이 기록에 근거하며

실위를 일부나마 고구려 세력권에 넣은 것은

이다조(李多祚)의 선조는 말갈 추장으로
황두도독(黃頭都督)이라고 불렸는데,
후에 중국에 들어오니 세계(世系)가 요원해졌다.
李多祚, 其先靺鞨酋長, 號黃頭都督, 後入中國, 世系湮遠.
『신당서』 권109 이다조열전 -



이 기록의 황두도독이 곧 황두실위 도독이기 때문이다.

(저 도독위를 수여한 주체를 고구려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그리고 거란은



남생은 도주하여 국내성을 지키며
그 무리와 거란병·말갈병을 이끌고 내부하여,
아들 헌성을 보내 (당나라) 조정에 호소하였다.

男生走保國內城, 率其衆與契丹·靺鞨兵內附, 遣子獻誠訴諸朝.
『신당서』 권110 천남생열전 -



이 기록에서 고구려 멸망 직전까지 고구려군에 동원되었음이 확인된다.

반대로 당나라에 동원되는 기록은 660년부터 사라지며

저 연남생의 투항 이후에야 다시 나타난다.





https://getfile.fmkorea.com/getfile.php?code=6ec7af71781e21b679515dd736209a3b&file=https%3A%2F%2Fitcm.co.kr%2Ffiles%2Fattach%2Fimages%2F813%2F984%2F617%2F004%2F5b961b0d0c29e5ea3488379bdc4afea7.png



결론적으로 멸망 직전 고구려의 영역은

통념과 달리 이전보다 넓었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까지 '7세기 후반 고구려 영향권'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상 끝.



참고문헌:
김재효, 강연석, 고호경, 「전통적인 길이 척도 환산에 대한 역사ㆍ문화적 재고」, 『한국의사학회지』 23(2), 2010, 15-22.
이민수, 「高句麗 遺民 李他仁의 族源과 柵城 褥薩 授與 배경에 대한 고찰」, 『대구사학』 128, 2017, 143-178.
이민수, 「661~662년 고구려-당 전쟁 직후 양국의 동향」, 『고구려발해연구』 73, 2022, 141-167.
이재성, 「麗唐戰爭과 契丹·奚」, 『중국고중세사연구』 26, 2011, 157-218.
정원주, 「7세기 고구려의 서계(西界) 변화 : 고구려의 요서(遼西) 진출과 당의 대응」, 『영토해양연구』 8, 2014, 154-183.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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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바스 24-02-24 15:48
   
해당글 주소는 https://www.fmkorea.com/best/6749303661 인데 흥미로워서 긁어옴.
신기한건 저 지도 만든 사람이 글림킴이라는 역사 유튜버인데, 게시글이 2019년 06월 자료임 ㄷㄷ
2023년 - 2024년에 와서야 여러 역사 커뮤니티에서 재조명 되는게 신기함 ㄷㄷ
     
하이시윤 24-02-25 09:02
   
1.자신의 글의 근거를 학술논문으로 받치고 있어 굉장히 고퀄임(그렇다고 다 맞다는건 아님) 따라서 이의제기에 대해 방어가 쉬움.
2.출처들 따라가보면 쓸모없는 땅이라 하는 의견들 많은데 지리와 어로경제, 수렵경제,유목경제에 대한 무식이 원임임.  저지역은 끝없는 평원지대와 울창한 산림, 상당히 비옥한 농사토지임.  요동평원, 삼강평원 등 엄청난 농사지역이었고 스탭기후여서 대규모 유목지역이었슴.  또 흥안령산맥등 거대하고 울창한 산림이 있어 대규모 수렵도 행해졌슴. 결론적으로 상당한 인구를 부양할 지리적 토대였슴. 고구려가 강성했던 것도 저지역을 국초부터 차지했고 넓히려고 노력했기 때문임. 더군다나 저 지역은 백두산폭발전까진 전지구적으로 따뜻했기에 생각보다 따뜻했슴
          
아비바스 24-02-25 10:41
   
그 부분도 놀라운게 글림킴 작성된 글림킴 글 보면
만주가 풍요롭다고 옛날에 작성이 되었더군요
https://blog.naver.com/gleamkim/223235274114
https://blog.naver.com/gleamkim/223235312314
https://blog.naver.com/gleamkim/222887898228
     
위구르 24-02-29 17:37
   
주소로 가보니까 영토 말고 영향권이라 부르자고 어깃장을 놓는 놈이나 같은 논리(거란과 말갈이 고구려의 속국이라는 논리)라면 조선도 명나라와 같은 나라로 그려야 한다는 놈들이 득실대니 에펨이란 공간은 역시 식민사관에 찌든 정신병자 수용소에 다름이 없어보입니다
하이시윤 24-02-25 09:09
   
삼강평원ㅡhttps://missionpartners.kr/main/gmb_board_view.php?page=6&no=775&search=&page_no=78&category_no=&admin_page=&site_Number=1&GM_mobile=&sm_no=&search_option=&cls=

 
끝이 보이지 않았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횡단할 때 느끼던 광활한 자연 앞에 인간으로서의 경외감 같은 것을 또 한 번 맛보는 순간이었다. 사막에는 모래 언덕이라도 펼쳐진 자연의 조화물이 있었다면 이곳은 오직 수평선 끝자락 평원뿐이었다. 시야가 허락되는 눈동자의 초점이 최대한 닿는 그 어디에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 너른 초원 위에 가을걷이가 풍요롭게 진행되고 있는 중국의 보물 곳간인 북대창(北大倉) 삼강평원(三江平原)이었다. 서부 황폐한 사막지역 나누 한 그루 자라지 않는 버려진 땅 반대편 북동쪽 알토란같은 곡창지역에 중국 인구 다 먹여 살릴만한 곡식이 황금빛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합이빈동(哈尒浜東-하얼빈동) 역에서 K591次 10:09 분 기차를 타고 가목사(佳木斯)에 도착한 것은 17:50 여분이 지나는 시간이었다. 500여Km를 약 여덟 시간 동안 달려온 셈이다. 가을 햇살이 물러가는 역 광장에는 어스름한 어둠이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하나 둘 밝혀 오는 네온 너머 문득 고향의 골목길이 생각났다. 생소한 이국타향 어디 맘 둘 곳 없는 낯선 거리에서 허허롭게 느끼는 나그네의 떨칠 수 없는 빈 마음이었다. 가목사는 송화강(松花江) 변의 황량한 어촌이었는데 1937년 12월 시(市)로 승격되었다. 인구 80여만으로 흑룡강성(黑龍江省) 동부에 위치해 있어 동북의 연안(延安)으로 불릴 만큼 중국 혁명사의 후방기지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기차역 전면의 너른 광장은 도착부터 역시 광활한 평원지대에 와 있다는 것을 실감나게 했다. 기차역 왼쪽으로 버스터미널이 있어 주요 성시(省市)를 운행하고 있었다. 광장에서 곧장 화평가(和平街) 끝까지 가면 송화강에 이른다. 그 왼쪽으로 공원이 있는데 대형 기념탑이 우뚝 서 있고 신성도(晨星島)를 오가는 부두가 있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갈 수 있다. 역 광장 좌측 대각선 방향 순화가(順和街)를 따라 가면 시정부(市政府)와 중심광장(中心廣場)에 이르고 그 맞은편이 장안로(長安路)인데 가목사의 중심지이다. 지하상장(地下商場)이 있고 번화가답게 백화점, 은행, 대형건물, 호텔, 신화서점 등이 즐비하다.



삼강평원은 삼강저지(三江低地)라고도 하는데 삼강(三江)은 흑룡강, 송화강, 우수리강(烏蘇里江) 이다. 흑룡강은 중국 내 세 번째 큰 강으로 러시아와 북쪽으로 경계를 이루는 역할을 하고, 송화강은 멀리 백두산 천지에서 흐르는 물이 북쪽의 한 지류로 흘러들어 내륙에서 만나 흐르고, 우수리강은 러시아와 경계를 이루는 북동쪽 끝에서부터 흐르는데 이 세 개의 강이 하나의 평원을 이루어 광활한 곡창지대를 형성 그 면적이 여의도 130배인 12만 평방킬로미터이다. 중생대 이후 구조가 침강한 일종의 퇴적평원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북쪽의 대(大) 곡식창고로 불리고 있는데 만주 콩의 원산지로 옥수수, 밀 수확도 대량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일제 강점기 고국을 떠난 선조들의 얼과 혼이 깃든 곳으로 한중(韓中) 수교 후인 1994년부터 중국과 협력 개발로 이루어 졌다. 북방 위도(緯度) 최고 한랭한 지역에서 벼농사를 성공시킨 유래를 쌓은 곳이기도 하다. 만주벌판 황량한 황무지를 옥토로 일구어 낸 땀방울이 너른 벌판에 차곡차곡 알알이 맺어가는 모습들을 보노라니 한 해의 풍작을 경축하는 농악대의 꽹과리 소리가 풍요롭고 경쾌하게 들려오는 듯싶었다. 이 땅에서 생산되는 곡식들이 중국 인민들의 일용할 양식은 물론 세계 곳곳에서 기아와 빈곤으로 죽어가는 가난하고 소외받는 민족과 이웃들에게 생명의 양식으로도 쓰여 졌으면 좋겠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 나눔 없는 탐욕과 소유는 천리(天理)를 역행하는 것임이다.


역사ㅡ과거 부여, 실위, 숙신 등이 발흥한 곳이다. 부여, 고구려, 발해, 금나라 등을 거쳐오다가 몽골의 침략을 받고 오지로 전락하였다.

그 뒤 청나라는 1644년 중원 정복 이후, 중원 지역에 대해서는 '행성제(行省制)'를 적용했지만 만주 지역에 대해서는 장군부(將軍府)를 두어 통치하게 하는 '군부제(軍府制)'를 채택했다. 이에 1653년(순치 10) 지금의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닝안시(寧安市)에 '영고탑앙방장경(寧古塔昻邦章京)'이라는 벼슬을 두었다가, 1662년(강희 1) 이를 '진수영고탑등처장군(鎭守寧古塔等處將軍, 약칭 영고탑장군)'으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1671년(강희 10) 흑룡강변에 성을 쌓고 '헤이룽장성(黑龍江城)'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 뒤 이 영고탑장군은 1676년(강희 15) 지금의 지린성 지린시로 주둔지가 옮겨졌고, 1683년(강희 22) 지금의 헤이룽장성 치치하얼시에 흑룡강장군(黑龍江將軍)이 별도로 설치되었다. 이는 현재의 헤이룽장성의 전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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