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단(哈丹)의 침입 경로를 살펴보면 고려의 동북 영토가 드러난다. 합단(哈丹)은 원나라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고려로 방향을 틀어 남하했다. 처음에는 해양(海陽) 지역으로 들어왔다. 이어서 남경(南京)으로 들어왔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해양(海陽)이 남경(南京)의 북쪽에 있었다는 것이다. 위 기록이 중요한 점은 주류 학계와 외국학계도 받아드릴 수 있다는 점이다. 남경(南京)의 행정구역이 함경남도까지 내려온다는 주장과는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남경(南京)의 최북단을 기준으로 한다.
남경(南京)은 원나라에서 설치한 행정구역이다. 요양행성(遼陽行省) 개원로(開元路)에 속한다. 위치는 현재의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圖們市)의 북쪽 부근에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등에 자세한 위치가 나와있다.
[태조실록 1권, 총서 2번째기사]
알동(斡東)은 남경(南京) 동남쪽 90여 리(里)에 있으니, 지금의 경흥부(慶興府) 동쪽 30리에 떨어져 있다. 알동의 서북쪽 1백 20여 리에 두문성(豆門城)이 있다. (斡東在南京東南九十餘里, 距今慶興府東三十里。 斡東西北百二十餘里, 有豆門城, 又其西百二十餘里)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0권 함경도 종성도호부]
남경(南京): 동관보(潼關堡)에서 두만강을 건너 보청포(甫靑浦)를 경유하여 사춘천(舍春川)을 건너면 옛 성이 있는데, 명칭을 남경(南京)이라 한다. (南京。自潼關堡渡豆滿江,徑甫靑浦,渡舍春川,有古城,號南京)
[연산군일기 17권, 연산 2년 8월 7일 신사 1번째기사]
남경은 종성(鍾城)과 거리가 2식(息) 반 길이다.(南京距鍾城, 二息半程)
그런데 서적에 따라 합단(哈丹)의 침입 기록이 조금 다르다. 조선 초기에 고려의 역사를 편찬했는데 시기가 차이가 난다. 서적마다 기록이 다른 경우도 있다. 치평요람 (1445년 세종27년), 고려사 (1451년 문종 1), 고려사절요 (1452년 문종 2)
1. 합단(哈丹)이 처음 침입한 곳은 해양(海陽)이다.(1290년 5월) 2. 원과 고려에서는 함평부에서 병력을 이동시켜 남경(南京)과 해양(海陽)으로 가려고 했다.(1290년 6월) 3. 합단(哈丹)이 남경(南京)으로 침입했다.(1290년 10월)
합단(哈丹)이 해양(海陽) 지역으로 침략해 들어온 것은 동일하다.
[고려사 권30 세가 권제30 충렬왕(忠烈王) 16년] 1290년 5월 6일(음)
[고려사절요 권21 충렬왕3(忠烈王三) 충렬왕(忠烈王) 16년] 1290년 5월 미상(음)
[치평요람 제143권 원(元) [세조(世祖)]
합단(哈丹)이 해양(海陽) 지역으로 침략해 들어왔다.(哈丹入海陽界)
이에 따라 원의 황제가 합단(哈丹)의 병사를 막을 목적으로 군사를 파견한다. 함평부(咸平府)에서 남경(南京)과 해양(海陽)으로 나아간 뒤 길을 차단하라 하였다. 모두 동일하게 기록했다.
[고려사 권30 세가 권제30 충렬왕(忠烈王) 16년] 1290년 6월 7일(음)
[고려사절요 권21 충렬왕3(忠烈王三) 충렬왕(忠烈王) 16년] 1290년 6월 미상(음)
[치평요람 제143권 원(元) [세조(世祖)]
원(元) 황제가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토벌군(討伐軍)이 고려까지 가려면 도로가 돌아가야 되고 머니, 마땅히 함평부(咸平府)에서 남경(南京)·해양(海陽)으로 나와서 적의 길을 차단하라.”고 하였다. (帝詔曰 “討賊軍, 至高麗則, 道路回遠, 宜自咸平府, 出南京·海陽 截斷賊道.”)
이 이후의 병력 이동 기록은 조금 다르다. 고려사에서는 합단(哈丹)이 해양(海陽)과 남경(南京)에 침입했다고 하였다. 고려사절요는 기록이 없다. 치평요람은 합단(哈丹)이 남경(南京)에 침입했다고 하였다. 고려사의 기록은 뭉뚱그려 표현하고 있으나, 치평요람은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기록들을 종합하면 해양(海陽)이 북쪽에 있고, 남경(南京)이 남쪽에 있으며, 서로 근처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려사 권30 세가 권제30 충렬왕(忠烈王) 16년] 1290년 10월 26일
적군의 기병이 남경(南京)과 해양(海陽)의 경계까지 이르렀다. (賊騎至南京海陽界)
[치평요람 제143권 원(元) [세조(世祖)]
적군의 기병(騎兵)이 남경(南京)으로 들이닥쳤다. (賊騎至南京)
해양(海陽)은 고려의 영토였는데, 길주(吉州)의 이칭이다. 동북 9성 가운데 한 곳이다. 지도에서 보면 남경(南京)의 북쪽에 해통(海通), 홀한해(忽汗海) 처럼 바다가 들어간 지명이 있다. 고려 후기의 해양(海陽)의 위치가 저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 함길도 길주목 경원도호부에는 공험진의 북쪽에 견주(堅州)가 있다고 하였다. 견주(堅州)의 위치를 지도에 표시했다. 공험진은 지도상에 홀한해라고 표시한 곳 부근에 있었다. 조선시대의 기록에는 공험진 근처의 지명 이름이 모호한 게 많다. 명칭을 표기하지 않거나 전혀 알 수 없게 표기한 명칭도 많다. 견주(堅州)도 이에 하나인데, 다른 기록에서 연혁을 찾아 볼 수 없다. 아마도 동북 9성 가운데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추정컨대 길주(吉州)로 보인다. (기록에 따르면 소하강의 위치는 시간의 흘러감에 따라 이동된다. 현재의 목단강 부근에서 현재의 수분하로 이동되었다. 여기서는 목단강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고려사 권135 열전 권제48 우왕(禑王) 9년 8월]
우리 오읍초(吾邑草)·갑주(甲州)·해양(海陽)의 백성들을 꾀어서 유인하고 있습니다. (我吾邑草·甲州·海陽之民, 以誘致之)
[태종실록 7권, 태종 4년 5월 19일 기미 4번째기사]
길주(吉州)를 ‘해양(海陽)’이라 칭한다.(吉州稱海陽)
알동사오리는 알동의 관내에 있는 지역이다. 알동은 남경(南京)에 속해있다. 알동사오리까지는 남경(南京)의 최북단에 속한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아치랑이, 무을계, 보청은 함주(咸州)에 속했던 지명들이다. 사서와 지리지에 의거해서 지도상에 위치를 표시했다. (위에서 언급된 함평부(咸平府)도 이 곳에 있었던 함주(咸州)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확히 확인해보지 않아서 확인이 필요하다.)
쌍성의 위치를 지도상에 표시했다. 알동과 경흥이 있었던 곳 부근이다. 여기서는 논하지 않으나, 쌍성(雙城)이 있었던 곳으로 보고 있다. 또한 경흥, 알동, 쌍성이 있는 곳에 화주(和州)가 위치해 있었다고 사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