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조선은 왜 망했는가 부터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을 찾기 힘들죠.
고종의 무능
을사오적의 매국
일본의 제국주의
여러 이유를 말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조선 내부로 부터의 붕괴입니다.
즉, 스스로 자멸했다는 얘기죠.
고종은 결과적으로 유능했다고 하기는 힘들지만,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던 과정을 보면 훌륭한 왕이라고 할수있습니다.
세금이 아닌 사유재산을 내서 전보, 우편등의 근대적인 인프라를 구축하려했고,
이런 기반사업 건설과 동시에 군사력 증강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때 비록 구형이지만 러시아제 소총을 국내에서 생산할수 있는 설비를 갖추고
일제에 병합된후 몇몇 야포는 당시 일본이 보유하던 야포보다 신형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개혁당시 훈련된 신식군대가 후에 무장독립운동의 주축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대한제국의 근대화와 개혁이 실패할수 밖에 없었는가
그것은 당시 고종의 강력하고 껄끄러운 정적 때문이었습니다.
수차례 쿠데타를 일으켜 실패하고도 처벌할수 없었던 인물이 있었죠.
바로 흥선 대원군 입니다.
왕도 아니고 선왕도 아니고 아무 공식적인 권한이 없는 상태였지만
왕족들과 정부를 좌지우지하던 사상초유의 인물이었습니다.
살아있는 상태로 대원군인 직함을 가진 경우가 최초였다고 하죠.
고종의 개혁정책은 대원군이 만들어놓은 척화사상을 가진 관료들 안에서 시도되었다고 볼수있죠.
어쩌면 이게 국가의 근대화개혁에 세금을 사용하지 못하고 고종의 사유재산을 써야했던 이유일수도 있습니다.
이런 정치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상황타계를 위해 고종이 꺼내든 카드가 외척세력입니다.
왕실 종친들과 정부관료들에 영향력을 갖고있던 대원군을 상대하려면 종친보다도 오로지 고종에게만 충성하는 세력이 필요했던것이고 이에 부합하는게 외척이었던거죠.
후에 일어날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싸움은
정확하게는 고종과 대원군의 싸움입니다.
명성황후가 일본낭인들에게 시해되고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도주한후
궁궐을 차지한게 대원군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명성황후 시해의 흑막으로 대원군을 지목했다고 하지요.
대원군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 쿠데타 시도로는
임오군란과 2차 동학혁명이 있습니다.
나라에 아주 중요한 시기에 권력욕에 미쳐 아주 개삽질을 한거죠.
이런 삽질의 결과로 조선에 청나라군이 들어오고
그 청나라군 견제 명분으로 일본군까지 들어왔습니다.
결국 대한제국 멸망의 기반이 이때 대원군에 의해 만들어진 겁니다.
후에는 왕을 쫓아내고 다른 아들을 왕으로 삼자고 일본에 제안하기도 하는등
아주 객관적으로 봤을때도 역적이라고 할수있습니다.
전통적 가치관으로 봤을때도
고종은 군주이고 대원군은 신하입니다.
부자관계와 군신관계가 충돌하지만
다른 상왕들과 다르게 대원군은 왕이었던적이 없습니다.
역적, 역신인데 부자관계 때문에 처벌하지 못하고 지속적인 반란을 방조한게 결국 망국으로 이어졌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