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戰國을 통일한 진(秦 : BCE 221 전국통일 ~ BCE 207 멸망)나라가 15년 만에 망하고 난 후, 한 고조 유방(劉邦)과 초패왕 항우(項羽)가 6년 동안 아주 피가 터지도록 싸운다. 결국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고 한(漢 : 전한 BCE 206~CE 8)제국을 열게 되는데, 그 7대 임금이 무제(武帝 : BCE 141~ BCE 87)다.
오늘의 사가들은 북쪽의 흉노를 굴복시킨 한 무제가 자신감을 얻어 동북방의 고조선을 쳐들어왔다, 그리하여 준왕(準王)을 몰아내고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그 자리에 식민지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한다. 마치 준왕이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무엇인가?
준왕은 고조선의 서쪽 날개였던 번조선(番朝鮮)의 부단군이었을 뿐이다.
또한 진조선(辰朝鮮)의 마지막 제왕인 고열가(古列加) 단군이 장수들의 거듭된 화란 속에 퇴위하여 고조선 본조시대가 마감(BCE 238년)된 것은, 찬적 위만(衛滿)이 번조선을 점거하여 스스로 왕위에 오르기(BCE 194년) 44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특히 고열가 단군 시절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춘추시대 BCE 722~ BCE 403, 전국시대 BCE 403~ BCE 221)의 혼란기에 처해 있었다. 사실이 그러할진대 당시 한족이 고조선을 위협한다거나 고조선을 찬탈할 여력이 어디 있었겠는가!
그러면 식민주의 사관에 물든 역사학계에서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라고 주장하고 있는 위만조선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위만(재위 BCE 194~BCE 180?)은 본래 중국 한족 출신으로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죽마고우였던 노관의 부하이다. 중원을 평정한 한 고조는 여태후와 더불어 개국공신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이 때 연나라 왕 노관은 흉노로 달아나고, 위만은 조선인으로 변장한 뒤 부하 1천 명과 함께 왕검성에 와서 번조선의 준왕에게 거짓 투항을 했다. 이에 준왕은 덕으로써 그를 받아주고 서쪽 변경을 지키는 수비대 책임자로 임명까지 했다.
그러나 그 곳에서 한족 망명 집단을 이끌고 몰래 세력을 기른 위만은 이듬해 준왕을 배반하고 왕검성을 쳤다. 그리고 나라 이름은 그대로 둔 채 스스로 왕이 되었다(BCE 194). 『삼국유사』에서 말한 위만조선은 바로 우리 민족의 서쪽 영토였던 번조선의 한 모퉁이를 잠깐 강탈하여 지배했던 위만정권에 불과하다.
그런데 현 역사학계에서는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준왕을 잡아먹은 위만 같은 배은망덕한 자가 고조선의 정통을 계승하였다는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도 분명히 위만을 연나라 사람[燕人]이라고 기록했을 뿐 아니라, 안정복의 『동사강목』에서는 ‘위만은 나라를 찬탈한 도적’이라 했고,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용은 ‘위만은 한 명의 강도에 불과하다[乃一强盜]’고 하였다. 이처럼 위만은 중국 한족의 인물로서, 한마디로 은혜를 원수로 갚은 배은망덕한 떠돌이 도적인 것이다.
위만정권은 손자 우거왕 때에 이르러 밖으로는 한 무제의 침입과 안으로는 지도층의 분열로 인해 결국 망하게 된다(BCE 194~BCE 108).
한 무제는 그 여세를 몰아 고조선의 뒤를 이은 북부여로 쳐들어온다. 그런데 당시 북부여의 4대 고우루(高于婁) 단군은 워낙 심성이 유약하여 제대로 맞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중에 병사하고 만다. 그리하여 우리 조선 민족이 다 넘어가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하는데, 이를 지켜보고 있던 고조선 47대 고열가 단군의 후손 고두막한(高豆莫汗)이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한 무제의 군대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다.
고두막한은 기원전 108년, 졸본(卒本)에서 나라 이름을 ‘북부여’에서 동방의 대광명이라는 뜻의 ‘동명(東明 : 동명부여, 또는 졸본부여)’이라 바꾸고 동명왕으로 즉위한다. 그리고 기원전 87년에는 북부여를 계승하여 조선 역사 부활의 푯대를 다시 세우니, 이분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이다. 지금은 식민사학자들이 우리역사를 왜곡시켜 주몽이 동명성왕이라고 잘못 가르치고 있다.
이 때 본래 북부여 4대 단군의 승계자인 해부루(解夫婁)가 동쪽으로 가서 가섭원(迦葉原) 땅에다 나라를 세우는데, 동쪽에 있는 부여라는 뜻으로 동부여(東夫餘)라 했다. 해부루는 북부여 4대 단군의 동생이다. 그리하여 고두막한이 북부여의 5대 고두막 단군이 되는데, 그때부터 북부여의 후기시대[後北夫餘]라고 한다. 북부여는 시조 해모수(解慕漱) 단군으로부터 6대 만인 고무서(高無胥) 단군 때에 막을 내린다.
6대 고무서 단군은 딸만 셋이었다. 그 둘째딸이 소서노(召西弩)인데, 고주몽과 혼인을 시켜 사위로 삼아 주몽으로 하여금 북부여를 계승토록 한다. 그리하여 고주몽이 북부여의 7대 단군이 되었으며, 그 후 기원전 37년에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로 변경하여 고구려 700년 역사의 창업 시조가 된 것이다. 이것이 고조선이 멸망한 후 열국시대로 들어서는 과정이다.
북부여가 고조선(단군조선)을 계승하였다. 이것이 한민족 고대사의 국통맥을 바로잡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 역사에서는 북부여 역사라는 게 완전 말살됐다. 그 역사의 원형이 『환단고기』 「삼성기」상, 하 두 편과 「단군세기」에 나온다. 「단군세기」에는 47대 단군 역사가 나오고 「북부여기」상, 하에는 북부여의 역사가 나온다.
「북부여기」상에 해모수 단군서부터 역대 단군들이 나오는데, 5대 단군 고두막한이 바로 동명성왕이다. 고두막한은 중국 한족의 침략을 받아 완전히 멸망할 위기에 놓인 우리 동방 조선의 역사를 부활시킨 인물이다. 그런데 중국 한 무제가 고두막한을 죽이려고 덤벼들었다가 참패를 당했다. 한 무제가 패퇴한 대사건, 이것은 중국 역사상 최대의 수치였다.
중국 5천년 역사에서 당태종이 안시성에 와서 양만춘 장군한테 화살을 맞아 눈 빠진 것보다 더 부끄러운 사건이다. 그래서 중국의 역사가들과 국내 사대주의자들, 그리고 지금의 식민사학자들이 북부여 180년 역사를 완전히 뿌리 뽑아 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민족 역사의 맥, 사통의 허리가 잘려버렸다. 그래서 북부여사는 온데간데 없고, 한고조漢高祖의 숙청으로 인해 도망나온 중국 연燕나라 사람 위만 같은 자가 고조선을 계승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의 식민지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과 같다.
여기에 북부여 시조 해모수는 고주몽의 고조부인데, 고주몽의 아버지로 만들어 버렸다. 즉 ‘해모수와 유화부인 사이에 고주몽이 태어나 고구려를 열었다’고 해모수와 주몽을 부자지간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왜곡은 180여 년에 걸친 북부여 6대 단군의 역사를 완전히 증발시켜 버린 것이다. 저런 터무니없는 왜곡과 날조의 역사를 배우고 있는 것이다.
우리역사를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이렇게 꿰매면 이런 작품이 나오고, 저렇게 꿰매면 저런 작품이 나오고, 전부 애꾸눈이처럼 찌그러져 버렸다. 그 결과가 바로 전에 방영하였던 드라마 주몽이야기다. 이 드라마에서는 고주몽이 해모수의 아들로 나온다. 해모수와 주몽은 무려 120여년 이상 차이가 난다. 해모수는 북부여의 초대 단군이고 주몽은 6대 마지막 단군 고무서의 사위인데, 어떻게 주몽이 해모수의 아들이란 말인가!
북부여는 고조선(단군조선)과 고구려를 이어주는 잃어버린 열국시대의 역사의 맥을 이어주는 고리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부여사를 잘 알아야 한다. 우리 한민족을 제대로 알려면, 한민족 정신의 뿌리를 알려면 부여사를 알아야 한다.
첫째, 초대 단군 할아버지의 막내아들이 부여(夫餘)다. 첫째인 태자가 부루(夫婁 : 2세 단군, 재위 BCE 2,240~BCE 2,182), 둘째가 부소(夫蘇 : 구려(원시 고구려, 고리국)에 봉해짐), 셋째가 부우(夫虞 : 진번국(요동의 제후국)에 봉해짐), 막내인 넷째가 부여(夫餘)이다.
단군성조는 막내왕자 부여를 도읍인 아사달의 서쪽인 녹산(鹿山 : 백악산 아사달, 지금의 길림성 장춘)의 제후로 봉한다. 이것이 원시부여, 부여라는 나라 이름의 기원이다.
둘째, 그런데 그 부여의 문화, 부여의 정신, 부여의 역사가 얼마나 큰 영향을 주고 감동을 줬는지, 44대 구물 단군 때 우화충의 반역사건(BCE 426)을 진압하고 나서 국력이 급속도로 쇠약해지자 나라이름을 바꾸게 된다. 나라를 운영하다가 도저히 안 되면 극적으로 모든 걸 일신하기 위해서 나라이름을 바꾸는 경우가 있다. 조선의 고종임금이 그랬고, 그 때 고조선도 그랬다. 그래서 조선을 대부여(大夫餘)로 바꾼다.
셋째, 해모수(解慕漱)가 그 대부여의 중심지인 만주 땅에 세운 나라가 북부여(北夫餘)다. 즉 삼조선(三朝鮮)의 중앙 북쪽만 차지하여 국통을 계승을 했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대부여에서 대(大)자를 빼고 북부여라고 한 것이다.
넷째, 고주몽이 어릴 때 자라던 나라, 동부여(가섭원부여)가 있다. 사실 북부여와 동부여의 역사는 4대 단군의 차이가 난다. 앞에서 말했듯이 북부여 4대 단군의 계승자였던 해부루가 피난을 가서 세운 나라가 동부여다. 그 역사만 해도 벌써 한 5, 60년 두세대 이상 차이가 난다.
이 밖에도 고두막한이 졸본 땅에 세운 동명부여(졸본부여)가 있고, 또 동부여 멸망 후 마지막 3대 대소왕의 동생이 압록곡 부근에 건국한 갈사(曷思)부여, 대소왕의 종제(從弟)가 고구려에 투항한 후 왕으로 봉해진 연나부(椽那部)부여가 있다. 또 백제 26대 성왕(CE 253~554)이 538년에 도읍을 웅진(곰나루)에서 사비성으로 천도한 후 ‘남부여(南夫餘)’로 국호를 변경하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역사 인식이 전혀 안 되고 있다.
다시 국통맥을 보면, 고조선은 나라를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배달국을 연 거발환 환웅이 백두산 신시에 나라를 처음 건설할 때 환국으로부터 받아내린 가르침이 바로 홍익인간(弘益人間), 제세이화(濟世理化), 광명이세(光明以世)다. 백성들을 다스려 진정한 하늘 백성으로 만드는 통치 이념을 배달국 환웅천황께서 처음으로 열어주신 것이다.
배달국의 시조는 지금으로부터 5,900년 전, 동방 땅에 처음 나라를 세운 거발환 환웅천황이다. 환국 말기에 천부인과 제세핵랑군 3,000명을 이끌고 와 백두산 아래 천평(天坪)에 신시(神市)를 열었다. 총 18세의 환웅천황이 다스리시며 1,565년 동안 번창한 배달 문명은 삼신 상제의 가르침을 한민족의 삶의 이념으로 뿌리내려 주었다.
그 배달국을 계승한 것이 삼한이며, 그 나라를 전체 조선(朝鮮)이라고 하고, 구체적으로는 단군조선이라고 한다. 초대 단군성조가 배달국의 법통을 계승하여 아사달을 수도로 나라를 세워, 총 47대 단군이 2,096년간 통치하였다.
단군조선이 건국한 지 1,048년이 지나, 정치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22대 색불루 단군에 이르러 도읍지를 백악산 아사달(현재의 길림성 장춘)로 천도를 한다. 그리고 그동안 병권이 주어지지 않았던 번한과 마한에 병권을 일부 나누어 줌으로써 삼한 체제의 동요가 서서히 일기 시작하였다. 이에 삼한관경의 체제는 무너지고 대신 두 분조의 독립된 병권이 인정되는 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의 삼조선 체제(分權管境)로 개편되었다.
그 후 43대 물리 단군의 재위 말기인 기원전 426년에 커다란 변화를 겪는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화충이 반란을 일으켜 아사달이 점령되고 물리 단군이 피난길에 붕어하고 만다. 이 때 구물 장군이 군사를 일으켜 반란군을 토벌하고 44대 단군으로 즉위한다. 그리고 국정을 쇄신하기 위해 국호를 조선에서 대부여로 개칭하고 백악산에서 장당경(요령성 개원)으로 천도하였다.
나라를 근본적으로 혁신해서 다시 살려보려고 몸부림쳤으나 이미 진조선(진한)의 중앙정부 권력은 크게 약화되고 번조선(번한)과 마조선(마한)의 목소리가 높아져 있었다.
중앙정부인 진조선의 권한이 축소되고, ‘좌우의 두 조선’이 형식적으로 진조선을 받드는 형국이 되자 장군들의 반역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고조선은 점점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리하여 기원전 238년, 47세 고열가 단군에 이르러 마침내 고조선은 2,096년의 장구한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북부여는 고조선과 고구려를 이어주는 잃어버린 열국시대의 역사의 맥을 이어주는 고리 역할을 한다.
북부여가 단군조선을 계승하였다. 이것이 한민족 고대사의 국통맥을 바로잡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 역사에서는 북부여 역사라는 게 완전 말살됐다. 그 역사의 원형이 「삼성기三聖記」상, 하 두 편과 「단군세기檀君世紀」에 나온다. 「단군세기」에는 47대 단군 역사가 나오고 「북부여기北夫餘紀」상, 하에는 북부여의 역사가 나온다.
「북부여기」상에 해모수 단군서부터 역대 단군들이 나오는데, 5대 단군 고두막한(재위 BCE 108~ BCE 60)이 바로 동명성왕이다. 고두막한은 중국 한족의 침략을 받아 완전히 멸망할 위기에 놓인 우리 동방 조선의 역사를 부활시킨 인물이다.
고두막한은 기원전 108년, 졸본(卒本)에서 나라 이름을 ‘북부여’에서 동방의 대광명이라는 뜻의 ‘동명(東明 : 동명부여, 또는 졸본부여)’이라 바꾸고 동명왕으로 즉위한다. 그리고 기원전 87년에는 북부여를 계승하여 조선 역사 부활의 푯대를 다시 세우니, 이분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이다. 그런데 지금 배우고 있는 교과서에서는 고주몽을 동명성왕으로 왜곡해 가르치고 있다.
북부여 4대 단군의 승계자인 해부루(解夫婁)가 동쪽으로 가서 가섭원(迦葉原) 땅에다 나라를 세우는데, 동쪽에 있는 부여라는 뜻으로 동부여(東夫餘)라 했다. 해부루는 북부여 4대 단군의 동생이다. 그리하여 고두막한이 북부여의 5대 고두막 단군이 되는데, 그때부터 북부여의 후기시대[後北夫餘]라고 한다.
북부여는 시조 해모수(解慕漱) 단군으로부터 6대 만인 고무서(高無胥) 단군 때에 막을 내린다. 6대 고무서 단군은 딸만 셋이었다. 그 둘째딸이 소서노(召西弩, BCE 66~ BCE 6)인데, 고주몽과 혼인을 시켜 사위로 삼아 주몽으로 하여금 북부여를 계승토록 한다. 그리하여 고주몽이 북부여의 7대 단군이 되었으며, 그 후 기원전 37년에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로 변경하여 고구려 700년 역사의 창업 시조가 된 것이다.
이것이 고조선(단군조선)이 멸망한 후 열국시대로 들어서는 과정이다.
한편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망명길에 오른 준왕은, 황해를 건너 지금의 금강 하구지역으로 피신을 왔다. 이후 준왕은 오늘의 청주 한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로써 대륙을 호령하던 북삼한의 시대가 끝나고, 한반도의 한강 이남 지역의 남삼한 시대가 시작되었다.
고조선이 어떻게 망하느냐, 그리고 우리 민족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어 나가느냐는 것을 예언한 사람이 있다. 9천년 역사를 이어 온 우리 한민족의 국운을 예언한 위대한 인물, 그가 바로 고조선 6대 달문 단군 때의 신지(神誌) 발리(發理)이다. 그는 대우주의 조화옹 삼신 상제을 예찬하고 한민족사의 뿌리 되는 역대 열성조의 성덕과 치적을 칭송하면서, 단군조의 앞날과 한민족의 국운에 관한 예언을 남겼다. 그것이 『신지비사(神誌秘詞)』다.
『신지비사(神誌秘詞)』는 단군조선 때의 책으로 단군조선의 건국과 산천지리로 고려 숙종 때 김위제(金謂磾)가 이 책을 인용하여 남경(南京) 천도를 주장하였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우리 민족 최초의 정사(正史)를 『신지비사(神誌秘詞)』라고 소개한다. 단군 조선 때 신지(神志)라는 사관이 쓴 비사다.
여기서 그는 ‘이 땅 동국의 역사는 아홉 번 바뀐다[구변지도(九變之道)]’고 했다. 즉, 삼신 상제의 섭리로 수도 셋을 두고 세 임금이 다스리는 삼경의 균형이 무너지면 고조선이 망한다. 그 후 나라 이름이 크게 아홉 번 바뀐 뒤에 새 세상이 온다는 것이다.
발리의 예언처럼 실제로 우리나라는 ①환국 ②배달 ③조선 ④북부여(열국시대) ⑤고구려(4국시대) ⑥대진국(발해)·신라 ⑦고려 ⑧조선 ⑨상해임시정부 ⑩대한민국으로 아홉 번 나라 이름을 바꾸었다. 그렇다면 신지 발리가 한민족 통사의 대강을 논하면서 전하고자 한 진정한 뜻은 과연 무엇일까? 아홉 번 변한다는 것은 열 번째로 나라이름이 바뀌어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역사가 열린다는 뜻이다.
단재는『신지비사(神誌秘詞)』가 단군조선의 건국과 산천 지리등을 노래한 것으로 흣날 고려 때의 『해동비록』에 일부 내용이 요약 정리돼 포함되어 있다. 『해동비록』은 1106년 예종의 명에 의하여 당시 풍수서들을 집대성한 책이다.
『신지비사(神誌秘詞)』에서 단재 신채호가 주목한 것은 삼경설(三京說)이다. 저울대 ․ 저울추 ․ 저울판 이 3개가 갖춰져야 저울이 제 기능을 다하듯, 나라도 3개의 수도(삼경)가 있어야 나라가 번성하여 주변 70개국이 조공을 바칠 거란다.
『신지비사(神誌秘詞)』는 고려왕조ㅣ까지 은밀하게 전해지다가 조선왕조에 들어와 금서가 된다. 그 가운데서도『신지비사(神誌秘詞)』는 금서의 첫 번째 대상이었다.
예컨대 조선 제3대 왕인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 1367~1422)은 1412년 8월 충주사고에 비장된 비결들을 가져오게 하였는데 『신지비사(神誌秘詞)』는 만큼은 그 누구도 보지 말고 밀봉한 채 가져오게 할 정도였다.
태종는『신지비사(神誌秘詞)』를 직접 펼쳐본 뒤 "이 책에 실린 것은 모두 괴탄하고 근거 없는 주장들"이라고 하면서 불태우게 한다.『신지비사(神誌秘詞)』가 공식적으로 역사에서 사라진 시점이다. 그러나 단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으로 보았다.
왜 조선왕조는 그토록 『신지비사(神誌秘詞)』를 없애고자 하였을까?
소중화(小中華)를 긍지로 삼았던 조선의 2대 임금 태종 이방원은 <신지비사(신비집, 서효사)>의 내용 중에 우리 조상들이 동아시아의 최강국으로 70개국의 조공을 받은 내용이 소중화를 자처하며 조공을 바친 명나라에 들어갈까 봐 <신지비사> 내용을 아무도 보지 못하게 봉한 후 불살라 버리라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