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서』 이만열전 왜국조에 따르면, 왜왕 무를 비롯한 5명의 왜왕이 5세기 대에 걸쳐 송에 지속적으로 왜는 물론 백제와 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등 한반도 남부 일대의 여러 세력의 군사권을 관장하는 도독의 관작을 내려줄 것을 청하였는데, 송은 끝까지 백제에 관련된 관작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즉 당시 백제와 교류를 하던 송으로서는 백제가 왜에 군사적·정치적으로 속한다는 말이 터무니없는 사실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외에 신라나 가야 등은 중국 측과의 직접적인 교류가 드물어서 이러한 사정을 잘 몰랐던 탓에 나머지의 관작은 순순히 허락을 해주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가 송에 한반도 남부 일대에 대한 군사권을 주장하는 등 다소 무리한 관작을 청한 것은 고구려의 남진에 따른 위기의식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5세기 경에 고구려 장수왕의 맹공으로 백제가 한강 유역을 잃는 등의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광개토왕 이래의 전쟁 결과로 인하여 신라와 가야 등이 고구려의 세력권에 들게 되었다. 그에 따라 왜와는 오랜 동맹관계를 이어왔던 백제가 치명타를 입었고, 문물교류의 대상이었던 한반도 남부의 여러 세력에까지 고구려의 입김이 닿게 되자 왜는 이에 적지않은 위기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즉 고구려가 백제를 도와 고구려를 공격했던 일이 있었던 왜에 대하여 한반도 남부 간의 교류를 끊어서 국제 문물 교류의 루트에서 고립시킨다거나, 혹은 군사적 행동 등을 통해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 않을까 염려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든 이러한 상황을 그 타파해보고자 나름대로의 발악을 했고, 그러한 절박한 위기의식이 당시 중국 송에 보낸 표에 드러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한반도 남부 지역와 전라도 영산강 지역도 계속동안 왜 신라 가야 교류하면 독립적 세력을 유지했습니다. 전라도의 전방후원분와 일본 유골 23기도 아마도 왜교관이나 백제의 일본용병의 무덤 추정됩니다. 동성왕이 백제 귀국할때 일본용병 500명 호위했다고 기록이 나옵니다. 삼국지 동이전 왜가 한반도 접했다는 기록은 바다와 접했고 왜인이 살았던 지역은 대마도 혹은 큐수지역을 표시하는것 같습니다.
영산강 유역의 문화를 이룬 사람들은 결국 백제의 영향을 받았고, 왜와 신라·가야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은 토착세력이지, 왜계의 묘제와 유물에만 너무 경도되어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마한 옹관묘→왜계 석실분→백제 석실분 등으로 이어지는 무덤을 조성한 사람들은 동일집단, 즉 토착세력이라는 뜻 말하는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