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진평왕은 익산까지 쳐들어가서 무왕이 새로 지운 왕궁을 모조리 초토화를 시켰는데요? 이 당시에는 익산이 아니라, 지모밀지라고 일본에 있는 관세음 응험기에 그 지명이 전하고 있죠. 그 이전 신라 진평왕 5년에는 일본의 서변까지 침략해 들어가서 토벌을 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도 전하고 있고요. 644년 가혜성 가잠성을 탈환하고 648년에는 대야성까지 다시 찾아오는데 이 대야성 탈환 전투에서 백제 병사 2만이 모조리 몰살당하고 장수 8명이 생포가 되어 고타소의 유골과 교환이 되죠. 백제가 단독으로 치룬 전투에서 백제만의 군사인 2만이 몰살당한건 초유의 사건입니다. 백제로서는 백제의 전군을 대야성에 몰아넣은건데 그 한번의 전투에서 백제의 주력이 모조리 상실당한거죠. 장수를 8명이나 배치했다는 데서 백제가 대야성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가 있죠. 이는 신라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제에게 빼앗기기 이전에 대야성을 지키던 장수가 신라의 이찬인 김품석이거든요. 이찬은 신라의 최고위 관등으로서 성골과 진골만 가질 수 있는 관등이었습니다. 신라의 이찬이 지킬 정도의 대성이자 주성이었으니 백제에서도 대군이 나가 지키는게 당연한데 그 전투에서 엄청난 병력이 사라진거죠. 백제는 단 4년동안 신라에게 6만의 군사가 몰살당했고, 이때 당은 신라에 병사 한명 지원을 안했습니다. 오직 신라 혼자서만 고구려와 백제를 맞아 동시에 싸우면서 빼앗긴 성들을 모조리 되찾아오고 있었던거죠.그리고 의자왕이 대야성을 함락시켜준건 신라 입장에서는 땡큐였죠. 왜냐하면 신라가 불교가 강성해서 전쟁을 원하지 않는 여론이 강했는데 대야성의 함락덕에 주전론자들이 득세할 수 있었거든요. 비담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비담이 강한 주전론자였는데 왕이었던 선덕여왕이 전쟁을 극히 싫어했었죠. 그래서 선덕여왕이 사망한 이후부터 신라가 굉장히 공격적으로 바뀌는겁니다. 반전론자들이 죽어 나가고, 주전론자들이 득세했기 때문이죠. 그 여론을 주도한게 김춘추 매금과 김유신 태대각간이고요 이게 문슨말인가요 고수님도 처음 보는 사료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