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황은 환웅천황과 치우천왕, 단군왕검
오제는 고구려 시조 고주몽과 광개토왕, 발해 태조 대조영, 대금국 태조 아골타, 조선 세종
삼문은 고구려 국상 을파소, 고려의 서희·이암
5무는 고구려 을지문덕과 연개소문, 고려 윤관과 최영, 조선 이순신
단학회는 특히 단군신앙의 삼신설(三神說)에 대한 정의와 신시·개천·단군기원 등 핵심 문제에서 나철의 단군교와 다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단군교와 별도로 단학회라는 이름하에 단체를 창립하였다.
이 단학회는 태백교(太白敎)라는 이름의 종교와 이명동체(異名同體)임을 표방했는데, 무포교제(無布敎制) 자아신앙(自我信仰)을 신앙원칙으로 삼고 있는 점에서는 다른 교단과 차별성이 있었지만, 종교단체에 준한 교단조직을 영위하면서 삼신하느님(삼신일체상제)을 신앙 대상으로 하여 일정한 의례를 거행하고 삼일신고-천부경 등의 단군교계 경전을 중시하는 데서는 종교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단학회는 초대 대종사인 이기가 한일합방이 임박한 시국에 분개하여 1909년 7월 절식 자결함으로써 침체되었지만, 계연수와 최시흥·이덕수·이상룡 등 독립운동가를 지도자로 삼아 다시 활기를 찾았다.
그래서 삼일운동 후에는 최시흥을 중심으로 천마산대를 조직하여 항일 유격투쟁을 전개하였고, 이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민사(義民社)·벽파대(碧波隊)·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 등의 무장독립운동에 그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단학회의 주요 지도자들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전사하거나 옥사했는데, 계연수·최시흥·이상룡·이덕수 등이 모두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거나 옥사하였다.
그러나 단학회는 무장투쟁 과정에서도 단학회는 단학회보를 8호까지 발간하였으며, 1919년 3월 대영절에는 국내의 기미독립선언에 맞추어 「조선인십보장 朝鮮人十寶章」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이덕수의 전사와 함께 회원들이 체포되어 투옥되거나 흩어졌으며, 단학회활동은 침체되었다.
해방 후 단학회는 일제에 의해 수감되었던 이용담(李龍潭)이 출감하여 평양에서 단학회를 재건하고 제5대 회장으로 취임했으나 공산 치하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할 수는 없었다. 특히 기관지 『태극 太極』의 1946년 신년호에 「신탁통치반대론 信託統治反對論」을 게재한 것이 문제가 되어 『태극』의 주간 이유립이 구속되고, 『태극』은 폐간되었다.
그러나 6·25전쟁 때 이유립이 월남에 성공하여 1954년부터 동지를 규합하였다.
1965년에는 기관지 『커발한』을 창간하였고, 1996년에는 단단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이유립이 회장에 취임하였다.
명칭을 단단학회라고 한 것은 『신단실기』의 “사물의 견고한 것을 보고 이르기를 단단이라 한다[見物之堅固曰檀檀].”라고 한 것 등에 의거한 것이다.
단단학회는 이름을 바꾸면서 태백교라는 종교적 색채에서 분리하여 민족의 종교·철학·역사를 연구-실천하는 단체로의 전환을 천명했지만, 고유 종교라고 주장하는 태백교를 중심으로 민족적 종교통일운동을 추구하는 점에서 이전의 입장은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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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의 본부 대시전(大始殿)에는 민족사상의 위인과 학회 역대 지도자들의 영정을 삼황오제(三皇五帝)·삼문오무(三文五武)·삼종오정(三宗五正) 등으로 부르며 봉안·숭봉하고 있는데, 삼황은 환웅천황과 치우천왕, 단군왕검 등 3인이고, 오제는 고구려 시조 고주몽과 광개토왕, 발해 태조 대조영, 대금국 태조 아골타, 조선 세종 등 5인이며, 삼문은 고구려 국상 을파소, 고려의 서희·이암 등 3인이고, 5무는 고구려 을지문덕과 연개소문, 고려 윤관과 최영, 조선 이순신 등 5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