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성이 요서에 위치)
1) 구당서 인용
"고구려국의 도읍지는 평양성(平壤城)이며, 평양성은 漢나라의 옛 땅인 낙랑군(樂浪郡. 요서에 위치한)이다..거리는 경사(京師:서안, 후한의 수도 낙양이 아님)로부터 5천리이다"고 기록하고 있는데,이때 한나라는 전한이 아니라 신나라를 무너뜨린 광무제의 후한을 의미한다. 서안으로부터 5천리(낙양이 아님....낙양에서 거리를 측정하면 대동강변의 평양이 됨) 라고 했으니 요서의 요양까지 5천리이다. 즉, 장수왕 14년에 천도한 평양성은 현재의 북한평양이 아니라, 요양(평양)이다. 장수왕은 광개토대왕 때 백제로부터 빼앗은 요서지방(관미성, 遼西地方)을 지키기 위하여 요양으로 천도하기 2년 전인 A.D 425년에 북위(北魏)와 동맹을 맺었고, 북위와 전쟁 가능성이 없어지자 수도를 요양으로 옮겼다.
이 평양성은 문자명왕, 안원왕, 양원왕, 평원왕 때까지 사용되었다.
2)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기 15년조: 고구려는 장수왕 15년(A.D 427년)에 수도를 평양 동황성(북한 평양의 동쪽지역)에서 요양 방면의 평양성으로 옮겼다. 기록내용은「장수왕(長壽王) 15년(A.D 427년) 수도를 평양(平壤)으로 옮겼다. 十五年移都平壤」三國史記 高句麗本紀 ..북위 태무제(A.D 423-452년)의 사자가 (고구려왕이) 기거하는 평양성에 왔는데, 이곳은 요의 동경(요양)이다. 당 고종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이곳에 안동도호부를 두었다. 元魏太武遣使至其所居平壤城遼東京本此 唐高宗平高麗 於此置安東都護府」遼史地理志 卷三十八 志第八 地理志二 東京道... 고구려 평양성은 장안성이라고도 한다...진나라 의희(A.D 405~418년) 후 장수왕은 (요양의) 평양성에 기거하였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평양성을 점령하였다. 고구려는 (수도를) 동쪽으로 옮겼는데, 압록수 동남 1000여리에 있는 평양성(북한 평양성)은 전에 (장수왕이 기거하던 요양의) 평양성이 아니다. 本高句驪平壤城 亦曰長安城 漢滅朝鮮 置樂浪玄菟郡 此樂浪地也晉 義熙 後 其王高璉始居平壤城 唐征高麗 拔平壤 其國東徙 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 非平壤之舊」 元史地里志 東寧路]
장수왕 14년에 천도한 평양성은 현재의 북한평양이 아니라, 요양(평양)이다. 장수왕은 광개토대왕 때 백제로부터 빼앗은 요서지방(관미성, 遼西地方)을 지키기 위하여 요양으로 천도하기 2년 전인 A.D 425년에 북위(北魏)와 동맹을 맺었고, 북위와 전쟁 가능성이 없어지자 수도를 요양으로 옮겼다.
이 평양성은 문자명왕, 안원왕, 양원왕, 평원왕 때까지 사용되었다.
수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평원왕이 장안성(현 평양)으로 천도)
1)삼국사기-고구려본기 평원왕기 28년조:
"평원왕(平原王) 28년(A.D 586년) 도읍을 장안성으로 옮겼다. 二十八年 移都長安城」"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고구려는 평원왕 28년(A.D 586년)에 수도를 평양성(요양 방면)에서 장안성(長安城:평양성)으로 옮겼다. 이는 수나라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평양성은 고구려·고려·조선 시대에 걸쳐 여러 차례 개·수축되었으며 성내 여러 곳에서 고구려시대 기와와 주춧돌이 출토되었고 만수대(萬壽臺) 부근에서 고구려시대로 추정되는 건축유지(遺址)가 발견되었다. 고구려 후기 수도는 북한 평양이다.물론 요서지역까지 고구려 영향권에 두었고
생각한다.
즉 고구려수도는 1)혼하 위 골본성(졸본) -> 2)국내성(조양일대, 발해의 서경압록부) -> 3)평양성(요양일대, 요서) -> 4)장안성(현재의 평양, 수/당과의 전쟁을 위해 옮김/ 임시전시수도)
ps)기존의 강단사학의 국내성은(지린성(吉林省) 지안현(輯安縣)에 있는 성터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또한 광개토대왕릉비에 나오는 통구성(通溝城)이 국내성이라고 보고 있다. 국내성 성벽의 전체 길이는 2,686m이며 동서가 남북에 비해 약간 길다. 지안현 서북쪽 2.5km 지점에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 : 위나암성)이 있는데, 평지에 있는 국내성이 공격 받을 경우에 이곳으로 피란하여 대적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3∼427년 국내성을 수도로 삼았다가 427년(장수왕 15) 평양으로 천도를 행하였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분명 유적과 왕릉이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