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구려 고국(故國)/고구려의 옛 땅(故國), 고려의 옛 나라(故國)이며 발해는 서경압록부(西京鴨淥府)라고 불렀다.
2) 신주(神州), 환주(桓州), 풍주(豐州), 정주(正州) 등 4주의 일을 관할하였다.
4) 대연림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나머지 잔당들을 상경으로 옮겨 역속현(易俗縣)을 두어 거주시켰다.
# 호구수 2,000
5) 환주(桓州)는 고구려 중도성(中都城)으로 옛 현은 환도(桓都), 신향(神鄕), 패수(浿水) 등 셋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고구려 왕은 여기에 궁궐을 처음 세웠는데 나라 사람들이 신국(新國)이라고 불렀다.
6) 5대손 쇠(고국원왕)는 진(晉)나라 강제(康帝) 건원(建元) 초년에 모용황(慕容皝)에게 패하고 궁실이 불타버렸다.
7) 녹주에 예속되었는데, 녹주에서 서남쪽으로 200리 떨어져 있다.
# 호구수 700
8) 풍주(豐州)는 발해 반안군(盤安郡)으로 옛 현은 안풍(安豐), 발각(渤恪), 습양(隰壤), 협석(硤石) 등 넷인데 모두 폐지됨
9) 녹주에 예속되었고 동북쪽으로 210리 떨어져 있다.
# 호구수 300
10) 정주(正州) 본래 비류왕(沸流王)의 옛 지역으로 공손강(公孫康)에게 병합되었다. 발해가 비류군(沸流郡)을 설치하였다. 비류수(沸流水)가 있다.
11) 녹주에 예속되었고 서북쪽으로 380리 떨어져 있다.
# 호구수 500
12) 동나현(東那縣), 정주 속현. 본래 후한의 동이(東暆) 부이현(不而縣)땅으로 정주에서 서쪽으로 70리 떨어져 있다.
13) 모주(慕州)는 본래 발해의 안원부(安遠府)로 옛 현은 모화(慕化), 숭평(崇平) 이 있는데 오래전에 폐지되었다.
14) 녹주에 예속되었고 서북쪽으로 200리 떨어져 있다.
# 호구수 200
일단은 녹주의 크기를 가늠해 보겠습니다
녹주의 치소가 제시가 돼 있지 않고
동경요양부에서 녹주까지 거리가 제시돼 있지 않습니다
하여
ㅡ 환주(호구수 700) : 녹주 서남쪽 200리
ㅡ 풍주(호구수 300) : 녹주 동북쪽 210리
ㅡ 정주(호구수 500) : 녹주 서북쪽 380리
ㅡ 정주 동나현 : 녹주에서 서북쪽 약 450리
ㅡ 모주(호구수 200) : 녹주 서북쪽 200리
양극을 이루는 환주와 풍주의 거리가 410리입니다
현 요녕성 환인 지방으로 비정되는 환주가 녹주 서남쪽 200리에 있다 했으니 녹주는 환주에서 동북쪽 200리, 현재 수치로 대략 70~80 km 내외의 거리에 있는 지점을 특정하면 되겠군요
녹주의 위치는 길림성 통화현 근방으로,
정주의 위치는 푸순, 번시 근방으로 비정해 볼 수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지역입니다 과연 요나라가 이 지역을 언제까지 실제로 지배 했느냐 하는 것이죠
동단국의 수도가 928 년에 요양으로 옮겨가고 동단국 황제 야율배가 요 황위 다툼에서 숙청되고 후당에 망명하는 등의 내홍이 있었으며 동단국이 요동으로 옮겨간 것을 기화로 여진족의 활개를 치며 남하해 왔고 발해 부흥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됐습니다 대표적으로 정안국은 평정 당하는 986 년까지 녹주 압록군 자리인 발해 서경압록부를 차지하고 있었고 요사 지리지가 적고 있듯이 대연림이 1029에 요동을 장악하여 흥료국을 세웠다가 실패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이상한 것은 요사 지리지 녹주 압록군의 기록 자체입니다 정안국을 거론하면 하였지 요양ㆍ심양을 장악하고 반란을 일으킨 대연림을 거명하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다음의 의심을 할 수 있습니다
1) 발해의 서경압록부가 현 압록강을 중심한 지역이 맞는가?
2) 요의 녹주 압록군은 현 압록강을 중심한 지역이 맞는가?
또 행정지역의 명칭(기표)과 행정지역(기의)을 분리해서 생각한다면
발해의 서경압록부를 Aㅡa’
요의 녹주 압록군을 Bㅡb’
고구려 환도성을 Cㅡc’라 하고
c’를 현 요녕성 환인이라 할 때에
a’=b’=c’가 학계의 통설이고, 또 요사 지리지가 나타내고자 하는 바로 보이는데
1) a’=b’이나 c’는 아니거나
2) b’=c’이나 a’는 아닌 경우를 상정할 수 없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즉 요 녹주 압록군은
1) 처음에는 그 명칭이 녹주 압록군이 아니었으며
2) 처음에는 환인 지역을 지휘했으나
3) 발해의 서경압록부 지역으로 교치가 되면서 그 명칭이 녹주 압록군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는 가정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요사 지리지 녹주 압록군 항이 담고 있는 사실 정보는
요나라가 해당 지역을 실질 지배하기까지의 정보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요사 지리지 기록에는 해당 지역의 여진, 발해유민 등에 의해 침식되었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요동과 그밖의 만주지역은 부침이 심했고 요는 요동 이외의 만주 지역에서 지배력을 격심하게 상실하였습니다
가장 훌륭한 속임수는 통계를 제시하며 속이는 것이라는 말의 역설처럼 저들에게 불리한 것은 빼고 감추어 오리무중으로 만든, 제한적 사실 정보의 역설을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단서가 요사 지리지 녹주 압록군에서 대연림을 거론한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대연림은 요양ㆍ심양을 장악하고 흥요국을 세운 인물이며 당시 상황을 보면 요나라가 이 지역을 제어할 행정력이 부실했던 사실이 나타나고 이러한 행정력 결핍이 대연림 반란의 기화제 역할을 합니다. 당시 요동에는 928 년 동단국의 수도가 요양으로 옮겨지고 이에 따라 동단국의 거란인들이 양수 즉 현 태자하와 혼하 일대로 사민되면서 발해인들 역시 이 지역으로 사민돼 몰려 있어서 어수선하였으며 황위를 두고 정쟁, 동단국 황제 야율배의 정치적 숙청과 망명, 그리고 죽음, 야울배 아들의 요 황제 등극, 송과의 전쟁 등으로 요동지역이 변방화되어 간 상황이었습니다
발해의 멸망과 요의 이러한 정세에 따라 고려는 고려사 서희 열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광종(925~975)의 “요 동경에서 안북까지” 북방영토를 개척하는 활동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요동의 잉커우(영구)에서 동서로 선을 그으면 현 압록강 중상류와 닿습니다
즉 대연림은 요ㆍ심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대연림이 반란을 일으킨 지역이 바로 녹주 압록군 지역이며 당대의 압록강이 바로 요ㆍ심 지역 근방이었던 것입니다
반란 중심지가 요ㆍ심이요 관련지가 보주, 해주(비사성, 본인의 비사성 위치 고찰을 참고하세요)인데 왜 녹주 압록군에서 대연림을 거론하고 있겠는가?
자, 다음의 사실 기록을 교차하여 보십시오
1) “서로는 학주지성(학야성, 요양 서남쪽) 강 건너부터 동으로는 별교지수(동명성왕의 개사수)까지 993년 이래 고려의 땅으로 할양 받았습니다” <고려사, 1088, 요에 보낸 표문>
2) “신주는 고려와 그 땅이 인접했다 하여 개태 년간(1012~1020)설치한 주이다” <요사 지리지>
3) “신주는 삼만위(요양 북쪽 330리, 현 철령 북쪽 90리) 동북쪽 300리(혹은 400리)에 있다” <독사방여기요 산동8>
4) “開泰 7년(A.D.1018; 高麗 顯宗 9) 12월에 蕭排押이 (高麗와) 茶河ㆍ陀河 사이에서 싸웠는데, 遼나라 군사가 불리하여 天雲ㆍ右皮室 2軍에서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많았으며, 天雲軍 詳穩 海里ㆍ遙輦 帳詳穩 阿果達ㆍ客省使 酌古ㆍ渤海詳穩 高淸明 등은 싸움터에서 모두 전사하였다.” <요사 이국외기 고려>
5) “타하(陀河)와 대보산(大寶山)이 있다.” <요사 지리지 귀덕주>
6) “요하•양장하(羊腸河)•추자하(錐子河)•사산(蛇山)•낭산(狼山)•흑산(黑山)•건자산(巾子山) 등이 있다.” <요사 지리지 요주>
7) “요하(遼河)는 동북쪽 산어귀로 나아가 범하(范河)가 되고, 서남쪽으로 흘러 대구(大口)가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동량하(東梁河)는 동쪽산에서 서쪽으로 흘러 혼하(渾河)와 합하여 소구(小口)가 되어 요하와 만나 바다로 들어가니, 태자하(太子河)라고 하며 또한 대량수(大梁水)라고도 한다. 혼하는 동량하와 범하 사이에 있다. 사하(沙河)는 동남산에서 서북쪽으로 흘러 개주(蓋州)를 경유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또 포하(蒲河), 청하(淸河), 패수(浿水)가 있다. 패수는 니하(泥河) 또는 한우력(蓒芋濼)이라고도 하는데, 강에 한우초가 많기 때문이다.” <요사 지리지 동경요양부>
8) “『讀史方輿紀要』에 의하면 ‘蛇水在平壤西境 唐龍朔初 龐孝恭等擊高麗 以嶺南兵壁於蛇水 爲蓋蘇文所攻一軍沒 或謂之陀水 宋天禧二年 契丹伐高麗 戰於茶·陀二水 敗而還 志云二水俱在平壤西北’라 하였다. 陀水가 곧 蛇水라면 蓋蘇文의 戰勝이 薩水大捷인데 곧 蛇水가 薩水요, 薩水가 곧 淸川江이 된다. 그러면 主戰地를 龜州라고 할 때 淸川江 以北 鴨綠江 以南 즉, 江東六州之地가 된다. 그렇다면 地形上으로 보아 茶水가 혹 鴨綠江支流인 삼교천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二河之間은 곧 淸川江 以北 삼교천 이남인 龜州地方이 될 것이다.” <金渭顯,『遼金史硏究』1985>
ㅡ 이 주장은 학계의 통설을 형성하는 주장으로 독사방여기요를 인용하여 논거하되 독사방여기요에서 요동ㆍ만주의 지명을 당시(17세기 후반) 조선, 즉 한반도에 몰아넣어 지리 비정을 한 산동9, 즉 외국부고의 조선편의 내용만을 편취하여 논거하고 있는데 이는 요사 지리지, 동 지리서 산동8의 지리정보에 의해 정면에서 완전히 논파된다. 이것이 소위 학계 통설의 현실이다 이 8)의 김위현이 청천강을 타하, 타하를 살수로, 그리하여 살수를 청천강으로 비정한 논리를 해당 독사방여기요 산동9의 기록과 함께 상기 4), 5), 6), 7)의 기록에 대입해 보라 본인은 이미 지난 11월 8일에 이곳에 타하 재 요동론을 게시한 바 있다
9) “대연림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나머지 잔당들을 상경으로 옮겨 역속현(易俗縣)을 두어 거주시켰다.” <요사 지리지 녹주 압록군>
10) “태평 9년(1029)에 대연림이 동경(요양)에서 반란을 일으켰다(太平九年,大延琳據東京叛,蒲奴為都監,將右翼軍,遇戰蒲水。中軍少卻。)” <요사 열전 17>
11) “거란(契丹)의 동경(東京)으로부터 우리 안북부(安北府)까지의 수백 리 땅은 모두 생여진(生女眞)이 살던 곳인데, 광종이 그것을 빼앗아 가주(嘉州)·송성(松城) 등의 성을 쌓은 것입니다. 지금 거란이 내침한 뜻은 이 두 성을 차지하려는 것에 불과한데 그들이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겠다고 떠벌리는 것은 실제로는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고려사 열전 서희>
12) “통화(統和) 29년(1011) 정월에 군대를 철수시키자 항복하였던 여러 성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귀주(貴州) 남쪽 산골짜기에 이르렀는데 여러 날 동안 큰 비가 내려서 날이 갠 다음에 겨우 건널 수 있었다. 말과 낙타가 모두 피로해지자 갑옷과 병장기도 많이 버리게 되었다. 압록강(鴨淥江)에 주둔하고 사로잡은 사람들을 여러 능묘(陵廟)에 나누어 배치하고, 나머지는 내척(內戚)·대신(大臣)에게 하사하였다. (‘貴州’는 본래 ‘貴德州’로 기록되어 있다. ‘南嶺谷’은 『遼史』 卷15 本紀15 聖宗6 統和 29年 春正月 乙亥朔에는 ‘南峻嶺谷’으로 기재되어 있다.)” <요사 이국외기 고려>
끝으로 요사에서 鴨淥과 鴨綠을 키워드로 모든 기록을 찾아봤습니다
요사에서는 이 鴨淥과 鴨綠이 혼용돼 쓰인다는 사실을 예전부터 여러 차례 말씀 드린 바 있는데요 鴨綠은 주로 보주 근방에 부교를 설치하는 내용, 고려가 보주, 정주 등을 돌려달라는 내용이 다수였으며 특별히 유의미한 기록은 鴨淥을 통하여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해당 내용은 예전에 복기대 교수와 윤한택 교수의 강의 영상에서 들은 적이 있었지만 사서 원문을 직접 접한 것은 근간의 ‘고려 서북계 추적’ 연구를 진행하며 처음입니다
우선 여진 및 고려와의 국경선에 수병위를 설치한 기록을 보겠습니다
邊境戍兵又得《高麗大遼事跡》,載東境戍兵,以備高麗、女直等國,見其守國規模,布置簡要,舉一可知三邊矣。
변경수병에 관한 일에 대한 기록을 <고려대요사적>에서 얻었는데
동쪽 경계에 수병을 세워서 고려와 여진 등의 변경 군사의 규모를 살펴 대비하게 함으로써 간료(간편)하게 두어서 한 번에 세 방면(변경)을 알 수 있다
東京至鴨淥西北峰為界:黃龍府正兵五千。
동경에서 압록강 서북봉에 이르는 경계는 황룡부 정병 5천
咸州正兵一千。
함주 정병 1천
東京沿女直界至鴨淥江:軍堡凡七十,各守軍二十人,計正兵一千四百。
동경에서 여진의 경계를 따라 압록강에 이르는 곳은 군보 70에 각 수군 20인, 합계 정병 1천 4백
來運城宣義軍營八
내운성선의군에 령이 8개로
太子營正兵三百。
태자영 정병 3백
大營正兵六百。
대영 정병 6백
蒲州營正兵二百。
보주영 정병 2백
新營正兵五百。
신영 정병 5백
加陀營正兵三百。
가타영 정병 3백
王海城正兵三百。
왕해성 정병 3백
柳白營正兵四百。
류백영 정병 4백
沃野營正兵一千。
옥야영 정병 1천
神虎軍城正兵一萬。
신호군성 정병 1만
大康十年置。
대강 10 년(1084년)에 설치했으니
右一府、一州、二城、七十堡、八營,計正兵二萬二千。
1부, 1주, 2성, 70보, 8영으로
총계 정병 2만 2천을 두었다.
<요사 병위지 하>
요 흥종 10년(1084년)에 압록강변을 포함하여 여진, 고려와의 경계를 지키는 파수병의 규모와 그 위치를 기록한 것인데
우선 “동경에서 압록강 서북봉에 이르는 경계는 황룡부ㅡ”를 살펴보면
서북봉이라는 것은 압록강을 기준으로 하여 방위상 서북, 즉 요나라 쪽에 해당하는 지점을 이르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여기에서 눈여겨 볼 것은 그 서북봉을 지키는 수병을 황룡부에서 맡고 있는 점입니다
황룡부는 요나라가 발해 부여부 자리에 둔 것으로 현 길림성 장춘 일대로 여겨지는데 1020 년에는 이 위치를 조금 더 동북쪽으로 옮긴 사실이 요사 지리지에 기록돼 있습니다
이 말은 압록강 서북봉이 황룡부 관할지와 인접했다는 말입니다
군사와 관련된 일을 황룡부에 예속한 주는 속주인
益州, 淸州, 安遠州, 威州, 雍州, 祥州 등이 있으며 독립 주에는 賓州와 信州가 있습니다
빈주는 압자수와 혼동강이 있는 지역으로 역시 길림성 중북부 지역으로 볼 수 있으며
신주는 앞의 소고에서 독사방여기요와 명일통지 등의 교차 분석을 통해 현 요녕성 철령시에서 북쪽으로 90리에 있던 명나라 삼만위 위치에서 동북쪽 300리, 또는 400리에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상기 압록강 서북봉은 적어도 현 철령시 근방으로 비정할 수 있겠는데
이는 동경, 즉 요양에서 압록강 서북봉에 이르는 수병의 책임처가 황룡부에 이어 함주가 또 1천을 맡고 있는 사실에서 확실성을 얻습니다
함주는 역시 독사방여기요와 원사, 금사, 요사 지리지, 한서 지리지 등의 교차 분석을 통해 무순 일대로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다음 수병의 위치를 보면 그 위치를 고찰하기에 어려움이 따르는 지명이 여럿이지만 그 가운데 태자영은 그 명칭이 태자하가 아닌 다른 곳을 생각할 수 없고(요동일대에서 태자가 들어간 지명은 태자하밖에 없다) 뒤의 옥야영은 옛 옥저의 땅이자 고구려 비사성이 있었고 발해 남경남해부가 있었던 해주 남해군(동경 서남쪽 120리)에 있던 것으로 봄이 타당(동경과 요동 일대에서 이곳밖에 없다)합니다
따라서 1084 년에 설치한 요나라 변경의 수병 라인은 현 중국 요녕성 철령시 범하로부터 무순, 혼하를 따라 태자하를 거쳐 요양 서남쪽으로 빠지는 라인인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수병 라인은 제가 앞에서 5 편의 소고를 통해, 또 요사, 요사 지리지, 원사, 원사 지리지, 금사, 금사 지리지, 명사 지리지, 명일통지, 독사방여기요, 청사, 한서 지리지, 신당서 지리지 등의 사서 원문 직접 비교 고찰을 통하여 과정적으로 논증한 ‘잉커우ㅡ태자하ㅡ혼하ㅡ범하ㅡ철령시ㅡ철령시 동북’에 이르는 요와 고려의 경계로서의 고려 서북계 위치 비정선과 일치함을 알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소름이 끼치고 감격스러운 기분입니다
이 1084 년 수병위 기록은 다시 한 번 분명히 녹주 압록군을 현 압록강(현재의 압록강) 중상류 지역으로 비정하는 학계 통설에 정면반박을 가하는 기록입니다
대연림은 요양에 있었습니다 그곳에 녹주 압록군이 있었고 그곳에 발해 서경압록부가 있었으며 그곳에 압록강이 있었던 것입니다
끝으로 낚시 기사를 보시겠습니다
冬十月戊申,鉤魚于鴨淥江。<요사 태조 八年(925년) 기사>
요나라 태조가 압록강에서 한가롭게 낚시를 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압록강이 지금의 압록강이라면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발해가 멸망하기도 전이고 여진족들 날뛰고 고려가 지척에 있는데 말이죠 아직 현 압록강 일대는 현 학계 통설에 따라도 요나라 땅이 아니었습니다 발해 땅이었죠 다만 당시 요양은 요나라 남경이었습니다
학계 통설에서는 요가 정벌한 이 여진 세력을 아래와 같이 압록강 일대의 정안국으로 보고 있습니다
[“983년 10월 요나라는 압록강 일대를 공격해 다음 해 4월까지 작전을 감행하였다. 이 원정은 고려의 북쪽 국경지대에까지 미쳐 고려에도 충격을 주었다. 이 작전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듯하지만, 압록강 중류지역에 위치한 정안국의 안전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어 985년요나라가 재차 대규모 원정을 감행하여, 이듬 해 봄까지 포로 10여만 명과 말 20여만 필을 노획하고 정안국을 멸망시킨 뒤, 그 땅에 4개 주(州)를 설치하여 직접 지배하였다. 이 후에도 압록강 유역 발해 유민의 움직임은 두 차례 더 보이나, 실제적으로 정안국은 986년 소멸되고 이 지역 발해 유민의 부흥운동도 이와 함께 종결되었다.”
<한민족문화대백과 정안국>]
저는 처음에 요사의 이 시기에서 정안국/정안/발해 등을 탐색하였으나 찾지 못 했고 학계의 정안국 정벌과 멸망이 요사의 여진 정벌에 해당한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985년요나라가 재차 대규모 원정을 감행하여, 이듬 해 봄까지 포로 10여만 명과 말 20여만 필을 노획하고 정안국을 멸망시킨 뒤, 그 땅에 4개 주(州)를 설치하여 직접 지배하였다. / 討女直所獲生口十餘萬、馬二十餘萬及諸物。).
또한 상기 한민족문화대백과의 “이 원정은 고려의 북쪽 국경지대에까지 미쳐 고려에도 충격을 주었다.”의 언술의 진위를 파악하고자 요사와 고려사 등을 탐색 추적하였으나 “고려에도 충격을 주었다”고 서술이 될 만한 기록을 찾지 못 했습니다
다만 송나라는 고려에게 합동으로 거란을 공격하자고 제의하나 고려는 관망하고 있었고 여진이 984 년에 송에 조공을 하며 고려가 거란과 합세해 자신들을 핍박하고, 거란에게 길을 빌려주어 거란으로 하여금 자신들을 공격케 한다고 무고를 하여 급기야 송은 고려에 한국화(韓國華)를 파견해 고려에 진위를 따지며 거란을 공격할 것을 종용하며 이 일이 외교적 문제로 비화됩니다. 고려는 여진이 거짓주장을 한 것임을 한국화(韓國華)에게 납득시킵니다. 이러한 상황적 내용이 고려사 세가 성종 4년 (985년)에 기록돼 있습니다. 고려는 송의 거란 요구를 회피하며 수용하지 않고 사태(거란과 송의 전쟁)를 관망합니다.
그러나 동단국이 수도를 동경(요양)으로 옮긴 뒤(928년)에 완전히 요에 의해 괴뢰화 되면서 만주의 대부분 지역에 대한 실지배력을 상실하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발해에 부속돼 있던 부족들이 독립하고 또 다수가 남하해 발해유민과 결속돼 반요 세력으로 성장하고 이 소용돌이가 고려사에 발해유민의 대규모 투항으로 나타납니다.
태조 17년에 수만 명이 투항해 왔고, 요사에는 여진, 학계 통설에서는 정안국이라 한 요의 여진 정벌의 여파가 경종 4년의 발해유민 수만 명 내투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 984년~ 의 여진ㆍ송ㆍ고려의 외교 분쟁이 발생한 사실이 요를 약탈하고, 또 요가 정벌한 여진 세력이 발해유민과 연관된 집단임을 암시하고 있다 볼 수 있습니다
가을 7월. 발해국 세자인 대광현(大光顯)5)이 수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투항해오자 왕계(王繼)라는 이름을 내려주고, 종실의 족보에 올렸다. 또 특별히 원보(元甫)6) 벼슬을 주어 백주(白州 : 지금의 황해남도 배천군)를 지키면서 집안 제사를 지내게 했다. 따라온 막료들에게는 벼슬을 주고, 군사들에게는 토지와 집을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冬十二月 渤海陳林等一百六十人來附. 是歲, 西京旱蝗.
겨울 12월. 발해 사람인 진림(陳林) 등 160명이 귀부해왔다. 이 해에 서경(西京)에 가뭄과 누리의 피해가 있었다.
경종 4년, 979년
是歲, 渤海人數萬來投.
이 해 발해 사람 수만 명이 투항해왔다.
<고려사 세가>]
요동에서의 여진의 세력화, 정안국을 위시한 발해부흥운동, 발해유민의 대규모 고려 내투 등을 야기한 동단국의 요양 천도와 유명무실로 인한 (요동ㆍ)만주에서의 10 세기의 힘의 공백은 고려의 북방개척에 기회로 작용했다고 판단됩니다. 고려사 서희 열전에 기록된 고려 광종(재위 949~975) 시기의 “요 동경(요양)부터 안북부까지 수백 리” 개척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가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거란(契丹)의 동경(東京)으로부터 우리 안북부(安北府)까지의 수백 리 땅은 모두 생여진(生女眞)이 살던 곳인데, 광종이 그것을 빼앗아 가주(嘉州)·송성(松城) 등의 성을 쌓은 것입니다. 지금 거란이 내침한 뜻은 이 두 성을 차지하려는 것에 불과한데 그들이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겠다고 떠벌리는 것은 실제로는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고려사 열전 서희>]
즉 이 시기에 고려 전기 요와 고려의 경계로서의 압록강까지 고려가 북진 개척한 것으로 저는 보는 것입니다.
학계 통설에서는 고려가 압록강에 진출한 시기를 993 년 거란 1차 침입에서 서희의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획득한 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그 전까지는 고려의 북계가 겨우 현 북한 평남지역에 불과했으며 현 북한 평양의 북쪽지역에 안북부를 두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학계 통설에 따르면 고려는 강동 6주를 획득한 후에도 겨우 현 압록강 하구의 일부에서만 압록강과 접했습니다. 그 밖의 펑안북도와 함경도는 여진족의 판도였다고 보는 것이 역시 학계의 통설입니다.
저는 이 시기의 압록강을 요동의 태자하, 혹은 혼하와 범하 등으로 이미 고찰하여 소고를 수 개 이곳에 게시한 바 있습니다. 학계 통설에서의 압록강은 물론 삼국시대부터 현재까지 현재의 압록강으로 고정돼 있습니다.
고려사를 세밀히 수차례 읽으며 고려사에 있어서 압록강의 출현 시기를 추적하였습니다. 압록강/압록수/압수/압강 등은 태조 왕건부터 고려 전기에 전혀 나오지 않다가 성종 3년, 984 년에 처음 나타납니다.
송화강은 회령 동남쪽에 있다
(舊《志》이게 뭘 가리키는지 모르겠음) 개원(현 철령시 소속, 철령 동북쪽 삼만위 자리) 동북쪽 1,000리에 있다
본명은 송와강인데 역시 장백산에서 발원하며 회령의 동북쪽을 경유해 동쪽으로 흐른다
그 북쪽에 측면으로 홀랄라강의 여러 물줄기가 흘러들고, 그 남측으로는 회별(/배/파)강의 여러 물줄기가 흘러든다
하류에서 혼동강에 합쳐진다
<독사방여기요 산동9>]
여진의 독립세력(요나 고려에 귀부하지 않은)의 본거지는 현 중국 만주의 송화강, 혼동강과 흑룡강 사이의 있는 지역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길림합달령의 북쪽으로, 백두산(장백산)은 길림합달령으로 봄이 타당하며 금이 건국된 지역도 이 길림합달령 북쪽의 혼동ㆍ송화강 일대입니다.
물론 여진족은 고려가 991년에 압록강 유역에서 쫓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남만주 지역에서 출몰하여 다양한 형태로 활동합니다.
고려 성종 시기의 압록강 유역의 성보 축조와 여진족 정리 작업은 거란의 침락에 대비하면서 여진족 및 발해부흥세력의 활동에서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국경지대를 명확히 하려 한 자기방호의 노력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정리를 하자면
고려는 발해의 멸망(926년)과 동단국의 유명무실화(928년), 발해부흥운동, 여진족의 발흥 등 10 세기의 정세 속에서 고려 광종 시대(재위 949~975년)에 현 요동지역인 “요 동경(요양)부터 안북부까지<고려사 열전 서희>”에 이르는 수백 리 땅을 개척하면서 요동의 압록강(태자하, 혼하~범하 추정) 남쪽까지 진출하였고 고려 성종 시기, 즉 거란의 1차 침입(993년) 이전에 이미 여진족을 몰아내고 압록강(태자하, 혼하~범하 추정) 일대를 장악하였다고 봐야 타당하며 고려 성종 시기의 압록강 일대 개척은 거란의 986년까지의 여진(학계 통설의 정안국) 토벌의 혼란에 따른 이 지역의 힘의 방심이 그 기회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고려는 거란 1차 침입(993년) 이전에 이미 요동의 태자하, 혹은 혼하 상류~범하 지역까지 영토를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고려는 발해의 멸망(926년)과 동단국의 유명무실화(928년), 발해부흥운동, 여진족의 발흥 등 10 세기의 정세 속에서 고려 광종 시대(재위 949~975년)에 현 요동지역인 “요 동경(요양)부터 안북부까지<고려사 열전 서희>”에 이르는 수백 리 땅을 개척하면서 요동의 압록강(태자하, 혼하~범하 추정) 남쪽까지 진출하였고 고려 성종 시기, 즉 거란의 1차 침입(993년) 이전에 이미 여진족을 몰아내고 압록강(태자하, 혼하~범하 추정) 일대를 장악하였다고 봐야 타당하며 고려 성종 시기의 압록강 일대 개척은 거란의 986년까지의 여진(학계 통설의 정안국) 토벌의 혼란에 따른 이 지역의 힘의 방심이 그 기회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고려는 거란 1차 침입(993년) 이전에 이미 요동의 태자하, 혹은 혼하 상류~범하 지역까지 영토를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 ---글의 대부분을 동의하는데요.... 986년에 정안국이 멸망했는지 그리고,,,, 정안은 곧 여진이라는 생각이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