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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월 29일 (금)

[한국사] 고려 서북계 위치 추적 (9) ㅡ 고려의 압록강 진출과 그 확보

감방친구 조회 :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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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에서 10 세기 후반에 여진(女直)이라 지칭된 세력은 지금의 요동 동부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요의 동경 주변을 끊임없이 침입하여 주민과 우마를 약탈합니다.

요는 이들 세력에 화전양면으로 대처하면서 대규모 정벌을 준비하여 986년에는 포로 10여 만 명에 말 20여 만 마리를 노획하는 전과를 거둡니다 (討女直所獲生口十餘萬、馬二十餘萬及諸物。)

[요 경종 보녕 5년, 973년

景宗 保寧 五年 五月癸亥,於越屋質薨,輟朝三日。辛未,女直侵邊,殺都監達里迭、拽刺斡里魯,驅掠邊民牛馬。

요 경종 보녕 7년, 975년

景宗 保寧 七年 八月 。是月,女直侵貴德州東境。

성종 통화 2년, 984년

聖宗 統和二年 二月癸巳,國舅帳彰德軍節度使蕭闥覽來朝。甲午,賜將軍耶律敵不春衣、束帶。丙申,東路行軍、宣微使耶律蒲寧奏討女直捷,遣使執手獎諭。

夏四月丁亥,宣徽使、同平章事耶律普寧、都監蕭勤德獻征女直捷,授普寧兼政事令,勤德神武衛大將軍,各賜金器諸物。

八月辛卯,東京留守兼侍中耶律末只奏,女直術不直、賽裡等八族乞舉眾內附,詔納之。

성종 통화 3년, 985년

聖宗 統和三年 八月癸酉朔,以遼澤沮洳,罷征高麗。命樞密使耶律斜軫為都統,駙馬都尉蕭懇德為監軍,以兵討女直。丁丑,次稿城。

冬十一月丙申,東征女直,都統蕭闥覽、菩薩奴以行軍所經地里、物產來上。

성종 통화 4년, 986년

聖宗 統和四年 春正月甲戌,觀漁土河。林牙耶律謀魯姑、彰德軍節度使蕭闥覽上東征俘獲,賜詔獎諭。丙子,樞使耶律斜軫、林雅勤德等上討女直所獲生口十餘萬、馬二十餘萬及諸物。

<요사>]

학계 통설에서는 요가 정벌한 이 여진 세력을 아래와 같이 압록강 일대의 정안국으로 보고 있습니다

[“983년 10월 요나라는 압록강 일대를 공격해 다음 해 4월까지 작전을 감행하였다. 이 원정은 고려의 북쪽 국경지대에까지 미쳐 고려에도 충격을 주었다. 이 작전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듯하지만, 압록강 중류지역에 위치한 정안국의 안전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어 985년요나라가 재차 대규모 원정을 감행하여, 이듬 해 봄까지 포로 10여만 명과 말 20여만 필을 노획하고 정안국을 멸망시킨 뒤, 그 땅에 4개 주(州)를 설치하여 직접 지배하였다. 이 후에도 압록강 유역 발해 유민의 움직임은 두 차례 더 보이나, 실제적으로 정안국은 986년 소멸되고 이 지역 발해 유민의 부흥운동도 이와 함께 종결되었다.”

<한민족문화대백과 정안국>]

저는 처음에 요사의 이 시기에서 정안국/정안/발해 등을 탐색하였으나 찾지 못 했고 학계의 정안국 정벌과 멸망이 요사의 여진 정벌에 해당한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985년요나라가 재차 대규모 원정을 감행하여, 이듬 해 봄까지 포로 10여만 명과 말 20여만 필을 노획하고 정안국을 멸망시킨 뒤, 그 땅에 4개 주(州)를 설치하여 직접 지배하였다. / 討女直所獲生口十餘萬、馬二十餘萬及諸物。).

또한 상기 한민족문화대백과의 “이 원정은 고려의 북쪽 국경지대에까지 미쳐 고려에도 충격을 주었다.”의 언술의 진위를 파악하고자 요사와 고려사 등을 탐색 추적하였으나 “고려에도 충격을 주었다”고 서술이 될 만한 기록을 찾지 못 했습니다

다만 송나라는 고려에게 합동으로 거란을 공격하자고 제의하나 고려는 관망하고 있었고 여진이 984 년에 송에 조공을 하며 고려가 거란과 합세해 자신들을 핍박하고, 거란에게 길을 빌려주어 거란으로 하여금 자신들을 공격케 한다고 무고를 하여 급기야 송은 고려에 한국화(韓國華)를 파견해 고려에 진위를 따지며 거란을 공격할 것을 종용하며 이 일이 외교적 문제로 비화됩니다. 고려는 여진이 거짓주장을 한 것임을 한국화(韓國華)에게 납득시킵니다. 이러한 상황적 내용이 고려사 세가 성종 4년 (985년)에 기록돼 있습니다. 고려는 송의 거란 요구를 회피하며 수용하지 않고 사태(거란과 송의 전쟁)를 관망합니다.

그러나 동단국이 수도를 동경(요양)으로 옮긴 뒤(928년)에 완전히 요에 의해 괴뢰화 되면서 만주의 대부분 지역에 대한 실지배력을 상실하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발해에 부속돼 있던 부족들이 독립하고 또 다수가 남하해 발해유민과 결속돼 반요 세력으로 성장하고 이 소용돌이가 고려사에 발해유민의 대규모 투항으로 나타납니다.

태조 17년에 수만 명이 투항해 왔고, 요사에는 여진, 학계 통설에서는 정안국이라 한 요의 여진 정벌의 여파가 경종 4년의 발해유민 수만 명 내투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 984년~ 의 여진ㆍ송ㆍ고려의 외교 분쟁이 발생한 사실이 요를 약탈하고, 또 요가 정벌한 여진 세력이 발해유민과 연관된 집단임을 암시하고 있다 볼 수 있습니다

[태조 17년, 934년

秋七月 渤海國世子大光顯率衆數萬來投, 賜姓名王繼, 附之宗籍. 特授元甫, 守白州, 以奉其祀. 賜僚佐爵, 軍士田宅, 有差.

가을 7월. 발해국 세자인 대광현(大光顯)5)이 수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투항해오자 왕계(王繼)라는 이름을 내려주고, 종실의 족보에 올렸다. 또 특별히 원보(元甫)6) 벼슬을 주어 백주(白州 : 지금의 황해남도 배천군)를 지키면서 집안 제사를 지내게 했다. 따라온 막료들에게는 벼슬을 주고, 군사들에게는 토지와 집을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冬十二月 渤海陳林等一百六十人來附. 是歲, 西京旱蝗.

겨울 12월. 발해 사람인 진림(陳林) 등 160명이 귀부해왔다. 이 해에 서경(西京)에 가뭄과 누리의 피해가 있었다.

경종 4년, 979년

是歲, 渤海人數萬來投.

이 해 발해 사람 수만 명이 투항해왔다.

<고려사 세가>]

요동에서의 여진의 세력화, 정안국을 위시한 발해부흥운동, 발해유민의 대규모 고려 내투 등을 야기한 동단국의 요양 천도와 유명무실로 인한 (요동ㆍ)만주에서의 10 세기의 힘의 공백은 고려의 북방개척에 기회로 작용했다고 판단됩니다. 고려사 서희 열전에 기록된 고려 광종(재위 949~975) 시기의 “요 동경(요양)부터 안북부까지 수백 리” 개척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가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自契丹東京, 至我安北府, 數百里之地, 皆爲生女眞所據, 光宗取之, 築嘉州·松城等城. 今契丹之來, 其志不過取此 二城, 其聲言取高勾麗舊地者, 實恐我也.

거란(契丹)의 동경(東京)으로부터 우리 안북부(安北府)까지의 수백 리 땅은 모두 생여진(生女眞)이 살던 곳인데, 광종이 그것을 빼앗아 가주(嘉州)·송성(松城) 등의 성을 쌓은 것입니다. 지금 거란이 내침한 뜻은 이 두 성을 차지하려는 것에 불과한데 그들이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겠다고 떠벌리는 것은 실제로는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고려사 열전 서희>]

즉 이 시기에 고려 전기 요와 고려의 경계로서의 압록강까지 고려가 북진 개척한 것으로 저는 보는 것입니다.

학계 통설에서는 고려가 압록강에 진출한 시기를 993 년 거란 1차 침입에서 서희의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획득한 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그 전까지는 고려의 북계가 겨우 현 북한 평남지역에 불과했으며 현 북한 평양의 북쪽지역에 안북부를 두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학계 통설에 따르면 고려는 강동 6주를 획득한 후에도 겨우 현 압록강 하구의 일부에서만 압록강과 접했습니다. 그 밖의 펑안북도와 함경도는 여진족의 판도였다고 보는 것이 역시 학계의 통설입니다.

저는 이 시기의 압록강을 요동의 태자하, 혹은 혼하와 범하 등으로 이미 고찰하여 소고를 수 개 이곳에 게시한 바 있습니다. 학계 통설에서의 압록강은 물론 삼국시대부터 현재까지 현재의 압록강으로 고정돼 있습니다.

고려사를 세밀히 수차례 읽으며 고려사에 있어서 압록강의 출현 시기를 추적하였습니다. 압록강/압록수/압수/압강 등은 태조 왕건부터 고려 전기에 전혀 나오지 않다가 성종 3년, 984 년에 처음 나타납니다.

[성종 3년(984) 갑신년

命刑官御事李謙宜, 城鴨綠江岸, 以爲關城, 女眞以兵遏之, 虜謙宜而去, 軍潰不克城, 還者三之一.

형관어사 이겸의에게 명하여 압록강 기슭에 성을 쌓아 보루로 삼게 했는데 여진(女眞)이 군사를 동원해 저지한 후 이겸의를 사로잡아가니 군대가 궤멸되어 성을 쌓지 못했으며 귀환한 군사는 3분의 1에 불과했다.

성종 10년(991)

冬十月 戊辰 逐鴨綠江外女眞於白頭山外, 居之.

압록강 바깥에 거주하는 여진족을 백두산 너머로 쫓아내어 그 곳에서 거주하게 했다.

<고려사 세가>]

강동 6주 획득으로 994년에 처음 압록강(그것도 현 압록강 하구)에 진출했다는 학계 통설과 달리 고려사 세가에서는 고려가 이미 984 년에 압록강에 군사시설을 축조하고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고려는 상기 고려사 기록을 보면 984년에 압록강에 군사시설을 축조하다가 여진의 공격을 받습니다. 이 여진은 요사에서 말한 여진, 즉 학계 통설에서의 정안국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여진을 몰아내고 991년, 그러니까 거란이 1차 침입을 감행한 993년 이전에 압록강 안쪽은 물론이거니와 압록강 바깥의 여진족까지 백두산 너머로 쫓아냅니다. 즉 이 때에 이미 고려는 압록강 안팎을 장악한 것입니다.

백두산과 장백산은 독사방여기요에서는 혼용돼 나타나는데 여진의 본거지인 회령 남쪽 60리에 있다고 했습니다. 회령의 위치는 현 중국 길림성 장춘ㆍ길림 지역입니다.

학계 통설에 따라 여진족이 쫓겨 간 백두산을 현 백두산으로 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요나라 시기에 여진족의 독립세력이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를 따져 보면 됩니다


[女真在遼東都司東北千七百餘里。自其國混同江至京師三千五百里,至江南江寧府四千六百里。其地東瀕海,南鄰朝鮮,西接兀良哈,北至北海。

여진국은 요양에서 동북 1700여 리에 있다
그 나라는 혼동강(에 있는데)에서 경사까지 3500리, 강남 강녕부까지 4600리이다
그 땅 동쪽은 바다이며(瀕海), 남쪽은 조선에 인접하며, 서쪽은 올량합과 접하며, 북쪽은 북해에 이른다

肇州城《金志》云:在會寧西五百里鴨子河、黑龍江之側,舊名出河店。宋政和四年,女真取寧江州,遼人使其將蕭嗣先等發兵,屯出河店,阿骨打御之,至混同江。

조주성, 금사 지리지에 따르면 회령 서쪽 500리 압자하와 흑룡강의 옆에 있는데 옛 명칭은 출하점이다
1114 년에 여진이 녕강주를 취하니 요가 소사선 등을 시켜 군병을 일으켰으나 아골타는 출하점까지 차지하고 혼동강에 이르렀다 (이후 1115 년에 금나라 건국)


松花江在會寧東南。舊《志》:在開元東北千里。本名宋瓦江。亦出長白山,東北流經會寧府之東。其北則有忽剌溫江諸水流入焉,南則有灰扒江諸水流入焉。下流合於混同江。

송화강은 회령 동남쪽에 있다
(舊《志》이게 뭘 가리키는지 모르겠음) 개원(현 철령시 소속, 철령 동북쪽 삼만위 자리) 동북쪽 1,000리에 있다
본명은 송와강인데 역시 장백산에서 발원하며 회령의 동북쪽을 경유해 동쪽으로 흐른다
그 북쪽에 측면으로 홀랄라강의 여러 물줄기가 흘러들고, 그 남측으로는 회별(/배/파)강의 여러 물줄기가 흘러든다
하류에서 혼동강에 합쳐진다

<독사방여기요 산동9>]

여진의 독립세력(요나 고려에 귀부하지 않은)의 본거지는 현 중국 만주의 송화강, 혼동강과 흑룡강 사이의 있는 지역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길림합달령의 북쪽으로, 백두산(장백산)은 길림합달령으로 봄이 타당하며 금이 건국된 지역도 이 길림합달령 북쪽의 혼동ㆍ송화강 일대입니다.

물론 여진족은 고려가 991년에 압록강 유역에서 쫓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남만주 지역에서 출몰하여 다양한 형태로 활동합니다.

고려 성종 시기의 압록강 유역의 성보 축조와 여진족 정리 작업은 거란의 침락에 대비하면서 여진족 및 발해부흥세력의 활동에서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국경지대를 명확히 하려 한 자기방호의 노력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정리를 하자면
고려는 발해의 멸망(926년)과 동단국의 유명무실화(928년), 발해부흥운동, 여진족의 발흥 등 10 세기의 정세 속에서 고려 광종 시대(재위 949~975년)에 현 요동지역인 “요 동경(요양)부터 안북부까지<고려사 열전 서희>”에 이르는 수백 리 땅을 개척하면서 요동의 압록강(태자하, 혼하~범하 추정) 남쪽까지 진출하였고 고려 성종 시기, 즉 거란의 1차 침입(993년) 이전에 이미 여진족을 몰아내고 압록강(태자하, 혼하~범하 추정) 일대를 장악하였다고 봐야 타당하며 고려 성종 시기의 압록강 일대 개척은 거란의 986년까지의 여진(학계 통설의 정안국) 토벌의 혼란에 따른 이 지역의 힘의 방심이 그 기회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고려는 거란 1차 침입(993년) 이전에 이미 요동의 태자하, 혹은 혼하 상류~범하 지역까지 영토를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도배시러 17-12-25 03:49
수고하셨습니다.
감방친구 17-12-25 03:54
쫌 있다가 또 올려요
역시 크리스마스는 역사탐구와 함께 밤 새면서 맞아야 제 맛이죠 ㅋㅋㅋ ;;
Attender 17-12-25 12:35
ㄱ.......굉장합니다 완전히 정리까지 해 주시면서 역대 왕(광종과 성종)때 어느 부분까지 점령했나 친히 알러주시면서 마지막에는 구체적으로 강의 이름들을 일일이 나열해 주시는 친절한 설명,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정말 이번강의는 아무리 저라도 이해를 잘 한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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