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주 남해군 소속 요주(耀州) 암연현(巖淵縣)의 문제
巖淵縣。東界新羅,故平壤城在縣西南。東北至海州一百二十里。
요사 지리지 동경도에서 신주(信州)의 “聖宗 以地隣髙麗、開泰 初 置州 以所俘漢民實之。” 문제와 함께 요와 고려의 경계를 암시하는 중요한 단서가 바로 해주의 암연현을 기술한 이 문장입니다.
저는 앞 서서 신주의 위치가 현 중국 길림성 장춘의 서북쪽임을 고찰하였습니다 이는 다음의 기록에 직접 근거하였습니다
三萬衛司北三百三十里。南至鐵嶺衛九十里,西至廢懿州三百七十里,東北至三衛境廢信州三百十里。
<독사방여기요 산동8>
명의 삼만위는 요나라 용주(황룡부) 지역으로 본래 발해 상경 용천부 지역이자 부여, 숙신, 흑수말갈 등이 있던 곳입니다 이 용주의 영역은 현 철령시 북쪽 동요하 지역에서 현 장춘시, 현 목단강시에 이르기까지 넓게 분포하며 요ㆍ금ㆍ원 시기를 거치며 크게 움직인 것으로 파악이 됩니다
명나라 시기에 요 용주 황료부를 바탕한 삼만위가 요양 북쪽 330리, 현 철령시 북쪽 90 리 지점에 위치를 했고, 폐지된 요 신주 지역이 여기에서 다시 동북쪽 300리에 위치했다고 독서방여기요는 고찰, 증언하고 있습니다
保寧七年 軍將 燕頗 叛, 府廢. 開泰九年 遷 城 于 東北, 以 宗州 檀州 漢户 一千復置.
<요사 지리지 동경도 용주 황룡부>
보녕 7년(975) 장군 연파(燕頗)가 반란을 일으켜 부가 폐지되었다가 개태 9년(1020) 성을 동북쪽으로 옮겨 갔고 금ㆍ원을 거치며 명에 이르러서는 삼만위 위치에 자리를 잡은 것으로 파악이 됩니다
용주 황룡부, 개원로 등의 움직임을 고찰하는 어려움은 일단 제하고 신주가 현 철령시 북쪽 90리 지점인 명 삼만위 자리에서 다시 동북쪽 300리에 위치했다는 사실에서 요와 고려의 경계 및 고려의 (서)북계가 최소한 현 중국 길림성 장춘 일대에 비정될 사료적 근거가 확보되는 것이죠
또한 삼만위 자리가 현 동요하(遼水司西百六十里,又西距廣寧衛二百里。自塞外流入三萬衛西北境,南流經鐵嶺、沈陽而至此。<독사 산동8>) 일대인 것 역시 국경 및 강역 비정에 참고가 된다고 된 봅니다
따라서 고려 전기(10세기 말~12세기 극초)의 서북계의 북 종단점을 현 중국 길림성 장춘으로 비정하고 그 국경선을 서남으로 그어 현 중국 철령시와 범하, 혼하, 태자하, 현 요하만의 잉커우(영구)시까지 연결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앞 서서 집요하게 고찰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적 추정도 한두 개의 변수로 허물어질 수 있는 바 당시 고려 서북계의 서남단 지역을 다른 각도에서 재검토하여 검증해야 한다는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구려 비사성이 있던 요 해주와 명 해주위 지역의 고찰입니다
명 해주위는 요 해주 자리이며 고구려 비사성이 있던 지역입니다 저는 이 지역을 현 요동 판진시와 안산시, 잉커우 지역으로 보고 있으며 해주위의 치소인 비사성 자리를 판진시와 안산시 사이에서 판진시 쪽에 치우친 자리로 비정하고 있습니다(요양에서 서남쪽 120리 : 海州衛司西南百二十里。<독사 산8>).
요나라 해주에 소속된 요주(隸州)가 해주(비사성) 남쪽 200리(東北至海州二百里。<요사 지리지 해주 남해군>)에 위치하고 그 요주에 소속된 문제의 암연현이 해주 남쪽 120리(東北至海州一百二十里。<요사 지리지 해주 남해군>)에 위치하는데
이 암연현이 동쪽으로 신라와 경계하고 있다(東界新羅)고 요사 지리지는 적고 있습니다 이 위치는 제가 그 동안 사료 원문 비교 분석을 통하여 요와 고려의 국경선의 남종단 지점으로 비정한 위치에 근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東界高麗가 아니라 東界新羅라 적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고려 서북계 고찰이 꼬여 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신라는 935 년에 왕건의 고려에 자진 항복한 이후로 명목상 992 년까지 존속합니다 그러나 이는 고려가 그 북쪽에 건국(918)되어 세 잡고, 또 발해가 아직 존재(~926)한 사실, 고려의 광종(949~975)이 요 동경(요양)부터 안북부까지 영토를 개척하여 성을 쌓았다는 기록에 배치가 됩니다
과연 東界新羅의 신라가 고려가 아닌 신라로 볼 근거가 있는 것일까?
그래서 요사에서 新羅가 언급된 기사를 모두 수색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라가 조공을 했다는 기록(요사 본기 태조), 동단국인들이 신라, 여진 등으로 도망쳤다는 기록(요사 본기 태종), 귀주의 거주민들이 본래 신라에서 옮겨온 이들인데 문자(아마도 거란문자)를 배우지 않아 모른다는 기록(요사 본기 성종), 신라사신을 맞는 숙소에 대한 기록(요사 지리지 중경도 : 大同驛以待宋使,朝天館待新羅使,來賓館待夏使。), 요 중경 지역에 고려에서 포로로 잡아온 사람들로 삼한현을 만들었다는 기록(요사 지리지 중경도 :
三韓縣。辰韓為扶餘,弁韓為新羅,馬韓為高麗。開泰中,聖宗伐高麗,俘三國之遺人置縣。戶五千。) 등의 외에는 국경과 관련된 그 어떤 기록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 후대인 금나라의 기록에는 東界新羅와 관련된 기록이 있을까 하여 금사를 수색하였습니다 그리하여 至臨潢府東南新羅寨(금사 열전)라는 기록을 찾아냈습니다
“임황부 동남쪽 신라새(신라채)”
임황부는 현 중국 내몽골 파림좌기에 있었으므로 위치 상 요사 지리지의 암연현과는 1천리 넘게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행여 관련이 있을까 하여 다른 기록을 더 찾아봤습니다
“신라채가 임황성 동남에 있다(新羅寨在臨潢城東南。<독사 북진9>)”
역시 같은 정보를 기술하고 있는데요 임황부 동남쪽에 신라채(혹은 신라새)가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리고 그 위치가 동남쪽이니 방위 상 해주 암연현의 방위적 위치와 맞아떨어지므로 이 신라채의 정확한 거리 정보가 필요합니다
“임황부 동남쪽 30리, 신라채라고 한다(府東三十里,曰新羅寨。<독사 북직8>)”
임황부 주변의 지리 정보를 기술하는 대목에서 신라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거리가 30리라고 하는군요 참고로 적봉보는 임황부 서쪽 10리에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又西十里,曰赤峰堡。)
따라서 新羅寨는 암연현의 東界新羅와 관련이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寨(채)는 塞(새)와 같이 쓰이는 말로 목책이나 작은 울타리, 보에 가까운 작은 성을 뜻하는 말입니다 즉 新羅寨는 요나라 상경임황부에서 신라로 가는 방향(동남쪽)에 있는 길목이나 관문으로서 이름 지어진 것으로 봄이 지금으로서는 타당해 보이며 더욱이 암연현과는 무관하다 판답됩니다
그러나 고증의 엄밀성을 위해 인터넷에서 新羅寨와 新羅塞, 신라채와 신라새를 검색하여 보았습니다
하였더니 명나라 지리서인 주해도편의 요동 상세 지도에 신라새가 표기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다수의 역사 블로거들이 이 지도와 상기 제가 제시한 금사의 기록만을 토대로 그곳까지 신라의 영토였다고 주장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신라새는 주해도편의 지도에서만 확인이 될 뿐 주해도편의 원문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은, 말하자면 아주 작은 보에 해당한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주해도편 지도에 표시된 신라새는 명나라 금주위와 복주위의 경계에 위치하여 요나라 진주(辰州)와 소주(蘇州) 사이에 있던 복주(復州) 지역에 해당합니다
명나라 해주위는 비사성(요 해주)으로 요양 서남쪽 120리, 개주위는 개모성(요 진주)으로 해주위 남쪽 120리, 복주위(요 복주)는 개주위 남쪽 180리, 금주위(요 소주)는 요양 남쪽 600리, 복주위 남쪽 180리ㅡ이상 <독사 산8> 근거ㅡ에 위치합니다
요사와 독사의 개주위와 복주위의 위치의 거리 오차가 발생하는 이유는 요나라 시기 주 교치 사실을 암시한다고 보여집니다
요사 지리지 근거 요 해주 암연현이 해주 남쪽 120리에 위치(현 잉커우 근방)하는 반면 주해도편의 신라새는, 현재 지명으로도 남아 있는 개주에서 다시 남쪽에 위치하여 해주(비사성) 남쪽 300~400리 지점에 위치하므로 동일 위치라 볼 수 없습니다
주해도편 지도의 신라새1)와 임황부(復州衛司南四百二十里。西北至廣寧衛五百四十里。廣寧衛司西四百二十里 豪州城,在衛東北二百二十里。《遼志》:漢遼東西安平地也,遼置州,西北至臨潢七百二十里。<독사 산8>) 동남쪽 신라새2)는 거리가 1,300 리 가량 떨어져 있어서 동일한 곳이라 볼 근거가 전혀 없으며
신라새1)은 요사 지리지 해주 남해군 암연현의 東界新羅3)와 200여 리 떨어져 있고 신라새1)의 위치는 암연현의 동쪽이 아니라 남쪽이므로 이 역시 동일한 곳이라 보기에 무리가 심히 따릅니다.
그러나 왜 1) 지점에 명나라 시기에 와서 신라라는 명칭이 붙게 됐는가 하는 것은 암연현의 동계신라 고찰과는 별개로 연구가 필요하다 생각되며 그 위치와 거리상 2)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3)과 일정 연관성이 있을 가능성을 지적하는 선에서 신라새/신라채 고찰을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요동 지역은 발해의 건국지인 동모산을 어느 곳으로 비정하느냐에 따라서 발해 건국 추정지 가운데 한 곳으로 비정될 수 있습니다. 이는 다음의 기록 때문입니다
沈陽中衛司北百二十里。東牟山衛東二十里。唐高宗平高麗,勃海大氏以眾保挹婁之東牟山。
《唐史》:山東直營州二千里,武后時,大祚榮築城於此居之。其國界南至新羅,以泥河為界,東窮海西契丹。
蓋即此山矣。或云在三衛福餘境內,誤。<독사 산8>
독사방여기요의 기자는 현 심양 동쪽 20리에 동모산이 있다고 전하며 이 곳을 발해 대조영이 건국한 그 동모산이라 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명 삼만위(동요하에서 길림성 장춘 일대) 부여(福餘 : 福은 복, 부 두 개의 음으로 읽힙니다) 경내에 있는 것을 잘못 말한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합니다.
이 기록은 요사 지리지 암연현의 東界新羅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것으로 동모산 문제는 따로 발제를 할 계획입니다.
其國界南至新羅,以泥河為界
발해가 남쪽으로 니하를 경계로 신라와 국경을 맞댔다고 했는데 학계에서는 이 니하를 강원도나 함경도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퍽 오래 이 니하를 패수의 별칭으로 보고 신라가 나당 연합군으로서 고구려를 깨트리고 또 발해와 당의 전쟁에 당의 지원군으로 참전하여 패수 남쪽까지 당으로부터 영토를 공인 받은 사실에서, 또 고구려 평양이 지금의 북한 평양이 아니라는 가정에서 고구려 평양의 위치를 추적해 온 바 신라의 영토가 한 때에 요동의 패수 남쪽까지 미쳤다고 보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패수는 요사 지리지에 따르면 요동에 있었고 그 별칭이 니하였습니다(패수는 니하, 또는 한우력이라고도 하는데, 강에 한우초가 많기 때문이다有 蒲河 清河 浿水 亦曰 泥河 又曰 蓒芋濼水, 多 蓒芋之草. <요사 지리지 동경도>)
저는 이 곳이 8세기에 신라 땅이 됐다가 9세기 대인수(大仁秀)의 남정으로 다시 발해 땅으로 회복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신라채 (新羅寨) 혹은 신라새(新羅塞) 문제와 연관성이 있다 하는 심증을 강화시키며 한편으로 요사 지리지 해주 남해군 암연현의 東界新羅 대목과의 상관성을 건드립니다
그러나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암연현의 東界新羅 문제는
시기(요와 명), 거리(암연현과 주해도편의 신라채, 임황부 신라채와 주해도편 신라채)와 위치(남쪽과 동쪽) 차이와 다불어 지점(寨)이 아니라 면과 선(界)이라는 개념의 차이가 있으므로 동일한 것이라 보기 어렵고
실제 요(거란)와 경계를 맞서서 다툰 주체는 엄연히 고려 전기 200여 년이므로 요 성종 이후의 동경도 지리 정보를 중심하여 담고 있는 요사 지리지에서 신라와 경계를 이룬다고 적었다 보기 어려우며
고려를 신라로 적은 다른 사례가 같은 사서인 요사 지리지에 나타나며(聖宗 伐 新羅 還, 周覽 城 基復 加完葺.<요사 지리지 동경도 개주 진국군>)
앞 서서 고려 서북계 추적 (1)~(6)의 고찰에 비추어 요와 고려의 국경지대가 요양 인근으로서는 태자하에서 잉커우 방면으로 고증되는 바 해주 남해군 요주 암연현의 東界新羅에서 신라는 고려를 가리키고 뜻함으로 봄이 타당하다고 결론을 내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요나라 해주(판진시와 안산시 사이에서 판진시에 가까운 지점) 남해군 요주 암연현(해주 남쪽 120리, 잉커우 근방) 근처를 요나라와 고려의 국경지대로 보고자 당 소고와 앞 선 6편의 소고를 고려하더라도
해주 남쪽 개모성 일대인 요 진주 봉국군 지역, 원래 고려의 영토였다가 요에 빼앗긴 보주ㆍ정주 지역의 문제는 여전히 고려 서북계 비정에 있어서 걸림돌로 남습니다
하여 요나라가 만주(요동 포함)를 얻고 잃게 되는 200여 년의 행정지역 정보가 혼재돼 있는 요사 지리지 동경도의 주ㆍ현의 교치상과 위치상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