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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2-11 09:55
[한국사] 위치 비정의 중요성과 그 어려움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3,028  

근 나흘 밤낮을
한서 지리지
후한서 군국지
진서 지리지
위서 지형지
수서 지리지
구당서 지리지
신당서 지리지
신당서 가탐도리기
통전
요사 지리지
금사 지리지
원사 지리지
한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
등을 놓고 수 없이 읽고 비교하였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잠정 결론에 도달하였다

1. 유성은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2. 유성은 룡성이 됐다가 룡성과 유성이 됐다가 다시 합쳐졌다
3. 또 유성은 현이 됐다가 군이 됐다가 다시 현이 되었다
4. 유성은 모용선비의 룡성(화룡성) 자리이며 당나라의 영주가 있던 자리이다
5. 유성의 치소는 갈석의 서쪽(이는 당나라 시대에 갈석이 옮겨갔음을 뜻한다)이며 유성의 땅은 거란 중경(내몽골 영성, 적봉 일대) 및 남경(현 북경)과 겹치는 자리이다
6. 유성의 영역은 당나라 시기에 동쪽으로 늘어나 동북으로는 의무려산 근처까지 뻗었다 또 고구려 598 의 요서 유성, 즉 수나라 유성은 지금의 조양이 될 수 없다

7. 요수는 춘추전국시대 이후로 ?ㅡ영정하ㅡ난하ㅡ대릉하ㅡ요하로 그 지칭 대상이 변천하였다

8. 고구려를 침공하던 수ㆍ당 시대까지 요수(요하)는 대릉하였을 가능성이 엿보인다

9. 요나라 동경요양부는 본래 남경이었다가 동단국을 폐지하면서 동경으로 삼은 곳으로 남경은 현 북경으로 옮겨갔는데 동경요양부의 자리는 현 요양시가 아닐 수도 있다

10. 가탐도리기에서
"영주(營州) 서북쪽 100리는 송형령(松陘嶺)이라고 하고 그 서쪽은 해(奚)이며 그 동쪽은 거란(契丹)이 떨어져 있다. 영주(營州)에서 북쪽으로 400리를 가면 황수(湟水)에 이르고 영주(營州)에서 동쪽으로 180리를 가면 연군성(燕郡城)에 이른다. 또한 (연군성으로부터 동쪽으로) 여라수착(汝羅守捉)을 지나서 요수(遼水)를 건너면 옛날 한국(漢)의 양평성(襄平城)이었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에 이르기까지 500리이다."라고 하였는데

(결국 거란이 당나라 영주 북동쪽에 있었다는 말이다. 거란의 근거지는 지금의 내몽골 적봉을 아래로 한 그 일대이다)

영주에서 동쪽으로 680리에 안동도호부,
안동도호부 동남쪽 800 리에 평양성,
안동도호부 남쪽 700 리에 박작성,
안동도호부 서쪽 300 리에 건안성(중곽현/평곽현)
이라 하였으나

중요한 것은 가탐도리기의 지리 정보가 취합된 시기이다.
가탐(賈耽)은 730 년에 태어나 805 년에 죽은 사람이다.

가탐이 출사하여 활동하던 시기에는 안동도호부가 평주(平州 , 714년—743년)로 옮겨졌다가 요서고성(遼西故城, 743년—758년)을 마지막으로 폐지된 시기이다.

즉 지금의 요양을 안동도호부가 있던 자리로 보더라도 가탐이 활동한 시기는 서쪽(평주)으로 쭈욱 빠졌다가 다시 동쪽(요서고성, 즉 본래 안동도호부가 있던 자리보다 서쪽)으로 조금 이동했다가 폐지된 시기이다.

따라서 가탐도리기(당 1리 = 약 320m)의 평양 800 리, 박작성 700 리라는 거리정보를 이용하려면 지금의 요양이 아니라 요서고성의 위치를 찾는 게 우선이다(현 요양에서 잡더라도 평양과 박작성의 위치는 새로 비정돼야 한다 더구나 지금의 압록강에서 경주까지 육로로 700리 230여 km인가? 559m로 잡아도 390여 km로 이 거리는 서울~부산 간 거리이다 )

11. 안동도호부는 현 요양이 아니라 현 조양을 중심으로 위치를 찾아가는 게 좋을 것으로 보인다

12. 한나라 시대 부터, 특히 후한 시대부터 선비족 및 한족계 왕조의 동북 영역이 나고 듦이 심하였던 데다 당송요금원명청에 이르는 시기에 지리가 동쪽으로 이동된 것이 의심된다

13. 요사 지리지에서는 동경의 북동쪽 근방에 읍루국이 있었다 하고 구ㆍ신당서 지리지에서는 말갈이 영역이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서쪽에 있었던 정황을 내비친다

14. 유성의 위치만 잡아도 위치 비정의 윤곽이 나타날 텐데 지리지 전체의 모든 주군현, 강하수, 산을 다 맞춰 봐야 한다

15. 또 이것을 학계 논문에서 요구하는 수준으로 논증해야 한다

16. 생업이 있는 사람으로서 하루이틀, 몇 달 붙잡고 있는다 하여 될 일이 아니다

17. 보통 일이 아니다

18. 입력 데이타를 입체적으로 구현해 보일 컴퓨터 프로그램이 있다면 보다 수월하고 정확할 텐데 사비를 들여서라도 제작을 의뢰하고 싶은 심정이다

19. 필요한 것들
ㅡ 가능한 모든 1차 사료
ㅡ 가능한 모든 시대별 고지도
ㅡ 가능한 모든 시대별 여행기, 시문 등
ㅡ 정밀한 위성 지도(구글)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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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배시러 17-12-11 11:46
   
3. 또 유성은 현이 됐다가 군이 됐다가 다시 현이 되었다  =>
그냥 현이고요. 치소가 들어오면서 범위가 확장되는거죠. 유성군의 범위, 소속된 유성현의 범위에 차이가 나죠.
     
감방친구 17-12-11 11:56
   
확인해 보니 도배시러님 말씀이 맞네요
한의 요서군 자리를 수나라 때 유성군으로 이름을 고치고 당나라 때까지 이어졌는데  거기에 유성현이 있고 또 영주의 치소가 있었네요 유성현의 북쪽에는 거란이 있고 서북쪽에는 해가 있고

머리 속이 뒤죽박죽입니다 ㅎㅎ
     
감방친구 17-12-11 11:59
   
그런데 신당서에서는 확실히 유성현의 범위가 의무려산 근처까지 늘어났네요
          
도배시러 17-12-11 12:02
   
댓글 복붙...

신당서 지리지3 營州柳城郡,上都督府。本遼西郡
又有汝羅、懷遠、巫閭、襄平四守捉城。
柳城。中。西北接奚,北接契丹。有東 北鎮 醫巫閭山祠,又東有碣石山。===>갈석산
유성현의 동쪽에 북진 의무려산,  갈석산이 있다고 하네요.

신당서는 갈석산 개념이 엉망으로 변하는데... 유성군 서쪽의 평주 북평군에도 갈석산이 있다하지요.
平州北平郡,下。初治臨渝,武德元年徙治盧龍。土貢:熊郭、蔓荊實、人。戶三千一百一十三,口二萬五千八十六。縣三:有府一,
曰盧龍。有盧龍軍,天寶二載置;又有柳城軍,永泰元年置;有溫溝、白望、西狹石、東狹石、綠疇、米磚、長楊、黃花、紫蒙、白狼、昌黎、遼西等十二戍,愛川、周夔二鎮城;東北有明垤關、鶻湖城、牛毛城。盧龍,中。本肥如,武德二年更名,又置撫寧縣,七年省。
石城,中。本臨渝,武德七年省,貞觀十五年復置,萬歲通天二年更名。
有臨渝關,一名臨閭關;有大海關。有碣石山;有溫昌鎮。===========>갈석산
馬城。中。古海陽城也,開元二十八年置,以通水運。東北有千金冶;城東有茂鄉鎮城。

같은 갈석산이라면 서쪽에 유성군 동쪽에 북평군 갈석산인데... 통전은 서 북평, 동 유성이라 하니 혼란스럽네요.

신당서 유성군의 갈석산 언급은 오류로 보입니다.
아니면 유성군을 고죽성 서쪽으로 옮겨야 한다능...

북평의 갈석산, 유성군의 갈석산... 같은 명칭이라면 동서가 바껴야 한다능....
               
감방친구 17-12-11 12:08
   
갈석산이 여러 개인 것으로 들었어요
중원계 영역이 동북으로 확장하면서 갈석, 요수 등이 동쪽으로 이동하네요
심백강 선생님은 진ㆍ한 시대의 갈석을 지금이 갈석이 아나 훨씬 남서쪽에서 찾고 계셨던 게 기억이 납니다
                    
도배시러 17-12-11 12:10
   
오늘날의 지리인식에 맞추면 유성군의 갈석산은 의무려산에 붙어 있었다 정도가 되겠죠.
역사적으로 유명한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 개념의 동네 뒷산 명칭...

그리고 그런 오류가 시작되는 시점은 남북조의 수경주를 보시면 지명비정이 동서가 꼬인다는것을 느끼실듯
                         
감방친구 17-12-11 12:15
   
그런데 일단 유성현의 서북쪽에 해, 북쪽에 거란이 있었다는 기록은 전 시대 지리지와 일치하고

의무려산의 경우 진(鎮)이 있다고 했으니 유성현 중심지에서 동북쪽으로 멀리 있는 군사기지로 볼 수 있겠네요

갑툭튀한 갈석이 웃긴 일이죠
                         
감방친구 17-12-11 12:17
   
수경주는 진짜 의도적으로 동쪽으로 마구잡이 옮기던데요?
                         
도배시러 17-12-11 12:22
   
동북 의무려산이 아니고 동쪽의 북진 의무려산입니다.
4진 중에 북진이 있는데, 북진 의무려산 입니다.
통전에 보면 수나라의 4진(국가의 제사장소)을 설명 했지요.
隋制,祀四镇:东镇 沂山,西镇 吴山,南镇 会稽山,北镇 医无闾山
                         
감방친구 17-12-11 12:25
   
아 그런 게 있었군요
이러면 더 꼬이는데 ㅎㅎ
                         
감방친구 17-12-11 12:34
   
도배시러 17-12-11 12:17
   
신당서 평주 북평군의 석성이 문제가 됩니다.
石城,中。本臨渝,武德七年省,貞觀十五年復置,萬歲通天二年更名。
有臨渝關,一名臨閭關;有大海關。有碣石山;有溫昌鎮
석성은 전한 요서군의 서쪽인 우북평의 속현이었죠. 전한 우북평 려성현 서남에 대갈석산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석성현에 전한 요서군의 임유臨渝가 나옵니다.
수경주에는 전한 요서군 임유臨渝에 갈석산이 있다고 했지요.
     
감방친구 17-12-11 12:21
   
역도원은 후한말에서 진ㆍ북위 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동북방 주군현이 요서군 안쪽으로 교치돼 간 역사를 수경주를 통해 정신승리하려 한 것으로 보이네요
감방친구 17-12-11 12:50
   
의무려산에 북진을 두어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순임금 때부터 그러했다는데 이는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고
수나라 때부터 보는 게 타당해 보입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영양왕 23년 612 년의

唯於遼水西 拔我武厲邏 置遼東郡及通定鎭而已
오직 요수 서쪽의 무려라를 빼앗아 요동군과 통정진을 두었을 뿐이다

라는 기사를 참고할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곳이 의무려산 근처로 비정되고 있고
광개토대왕이 타격한 숙군성도 이 근처로 비정되므로
     
감방친구 17-12-11 12:53
   
그런데 이는 또 대릉하를 이 시기 요수로 보는 가설에 배치가 되는군요
          
도배시러 17-12-11 12:57
   
대릉하의 흐름이나 대요수의 흐름이나 비슷합니다.
서=>동=>남
대릉하가 전한의 요수라면 고구려의 지리중심 요산은 의무려산 북쪽 부근이 되는거죠
               
감방친구 17-12-11 13:08
   
역도원은 대릉하를 백랑수로 지금의 요하를 요수로 몰아가는 것으로 보이더군요 수경주에서

그리고 사실 지금의 요하도 물줄기가 너무 많아서
또 고대 이래로 그 물줄기가 바뀌었을 것을 염두해야겠죠

제 얘기는 의무려산으로 인해 수당 침공 시기의 요수를 대릉하로 비정하는 재야의 한 가설이 배치된다는 거예요
                    
도배시러 17-12-11 14:32
   
역도원은 백랑수의 위치를 우북평으로 서쪽으로 이동시킨게 아닌가요 ?
*** 수경주 대요수 설명 ***
료수(遼水)는 오른쪽으로 백랑수(白狼水)와 모인다.
백랑수(水)는 우북평군(右北平郡) 백랑현(白狼縣)에서 나와서, 동남쪽으로 흘러 [우북평군 광성현(廣城縣)을 지나고], 북쪽으로 흐르다가 서북쪽으로 굽어 흘러 우북평군 광성현(廣成縣) 옛 성의 남쪽을 지난다. 왕망의 평로현(平虜縣)인데 세간에서는 광도성(廣都城)이라고 한다.
(백랑수는) 또한 서북쪽으로 흐르다가 석성천수(石城川水)가 백랑수(之)로 들어간다. 석성천수(水)는 서남쪽 석성산(石城山)에서 나오는데 동쪽으로 흘러 우북평군 석성현(石城縣) 옛 성의 남쪽을 지난다.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우북평군에는 석성현이 있다고 했다. (석성천수는) 북쪽으로 돌아서 백록산(白鹿山) 서쪽을 지나는데 즉 백랑산(白狼山)이다.
***
우북평 석성현을 동쪽으로 ? 백랑수를 서쪽으로 ?
                         
감방친구 17-12-11 14:45
   
여기에도 종종 소개되는 단군님(왕검성)의 견해를 한 번 보세요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일 수도 있으니 알려주세요

https://m.blog.naver.com/joymug/220255250187
                         
도배시러 17-12-11 14:53
   
이 내용으로는 부족해요.
나중에 유성 관련 하천과 산악의 명칭을 시대별로 비교해 봐야겠네요.

기본 전제는 서=>동 : 우북평-고죽성-유성 입니다.
수경주에 따르면 유성은 고죽성의 서쪽으로 이동해야 하는거죠.
                         
감방친구 17-12-11 15:01
   
그게 아니라
애초의 유성현 자리를 정확히 비정하는 게 좋겠습니다
갈석의 동쪽에 있는 유성현 말이죠

그리고 신당서의 갈석은
당나라 시기에 그 이전의 갈석 말고 새로 갈석을 지정하거나 의도적으로 갈석을 동쪽으로 민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서 지리지와 구당서 지리지 유성현에는 정작 의무려산이 나오지도 않아요
     
도배시러 17-12-11 12:55
   
의무려산은 여러 제왕들에게 매력적인 산이었나 봅니다.
수나라가 선비족 계열이었으니 의무려산에 대한 관심은 정상이라 보입니다.

요사지리지를 보아도 의무려산 좋아라죽던 임금이 있었죠.
          
감방친구 17-12-11 12:56
   
예, 그 이가 동단국 왕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ㅎㅎ
감방친구 17-12-11 13:00
   
안동도호부의 이동

평양 ㅡ> 요동고성 ㅡ> 신성 ㅡ> 평주 ㅡ> 요서고성

점차 유명무실해지다가
안록산의 난을 계기로
758 년 경 최종 폐지됨
감방친구 17-12-11 13:56
   
수서 지리지

요서군(遼西郡). 옛날에 영주(營州)를 설치하였는데 개황(開皇) 초(581 ~ )에 총관부(總管府)를 두었고, 대업(大業) 초(605년 ~ )에 폐하였다. 다스리는 현(유성현)은 1개이고 가구수는 751이다.

遼西郡. 舊置營州, 開皇初置總管府, 大業初府廢. 統縣一戸七百五十一


가구수가 751,
인구수로 환산시 3,755 명 ~ 5,257 명


현은 유성현 하나,
학계 통설의 비정은 현 조양시
     
감방친구 17-12-11 17:12
   
요서군의 각 시대별 호구수

요서군(遼西郡)

한ㅡ 현 14개. 가구수는 72,654 인구수는 352,325명

후한ㅡ 성은 5개이고, 가구수는 14,150이며, 인구수는 81,714명이다.

진ㅡ 현은 3개이고 가구수는 2,800 인구수 환산시 14,000 명 ~ 19,600 명

북위ㅡ 현은 3개이고 가구수는 537이며 인구수는 1,905명이다

수 ㅡ 현은 1 개, 가구수가 751, 인구수로 환산시 3,755 명 ~ 5,257 명

한나라 대비 수나라 시대 호구수가 무려 1/100로 줄어든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58758&page=15
감방친구 17-12-11 15:06
   
수경ㆍ주 포함해서 9 개의 지리지를 이리저리 맞춰보면 머리 속에서는 윤곽이 잡히는데 말로 풀어낼 엄두가 않나는군요

그리고 선행자들이 저처럼 다들 유성현이 지금의 조양이 아니었다고 보는 것도 아니더군요

많은 분들이 아예 유성을 지금의 조양으로 못을 박거나
진/연ㆍ북위 이후의 유성과 한ㆍ후한 시대의 유성의 위치가 다르다고 추정하면서 그 위에서 고구려와 고려 강역을 서쪽까지 끌어오는 주장을 펼치더군요
     
도배시러 17-12-11 15:26
   
그게 그 시대 사람들이 인식하는 유성이 있고... 전한부터 이어져 오는 유성이 존재하는거죠.
우선 순위는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던 유성.
고대나 후대의 유성과는 어떤 관계인가 ? 동일한가, 다른가 ?

그리고 당시 행정명칭을 보면 유성현 ***里 이런식이죠.
지리지에 없던 里가 어느날 갑자기 縣으로 승격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감방친구 17-12-11 15:33
   
그렇군요
신성이 중국에도 있고 고구려에도 두 개나 있고 하는 식이겠군요

하지만 빌어먹을 지리지들이 모두 한나라부터 줄을 대서 연혁을 말하고 있으니 문제죠
감방친구 17-12-11 15:31
   
후한서 군국지에 유성현이 증발하는데
왜 그러한가 찾아보니
오환이 장악하고 있었군요

조조가 207 년에 유성에서 오환을 섬멸합니다

선행자들 사이에서도 이미 유성의 위치를 놓고 격론을 벌여온 모양으로 단군님 (왕검성) 은 이 시기의 유성이 조양일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치시는군요

이 분은 진/연ㆍ북위 시대의 유성이 조양이라는 주장을 펼치신 것을 본 기억이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사실 선행자들의 노고어린 연구가 저로서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짜피 그 분들 것을 이해하려 해도 제 나름의 완숙한 공부, 그리고 연구가 뒷받침 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경십서
http://m.terms.naver.com/entry.nhn?docId=2175346&cid=51057&categoryId=51057

단군님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oymug&logNo=220162258403&proxyReferer=https%3A%2F%2Fm.search.naver.com%2Fsearch.naver%3Fquery%3D%25ED%259B%2584%25ED%2595%259C%25EC%2584%259C%2B%25EC%259C%25A0%25EC%2584%25B1%25ED%2598%2584%26where%3Dm%26sm%3Dmob_hty.idx%26acq%3D%26acr%3D%26qdt%3D1
     
도배시러 17-12-11 15:37
   
후한때에 국경방어를 위해 장성 밖의 오환을 끌어들여
유주의 장성 안에 거주하게 하면서 변경수비를 담당하는 용병으로 두었습니다.
후한말에 반란의 주역이죠.
감방친구 17-12-11 15:40
   
의무려도 고대의 의무려가 지금의 의무려산이 맞느냐도 문제입니다 뭔 고양씨가 나오고 기주가 나오고 상나라가 나오고 주나라 유주가 나오는 것인지 대체 어쩌자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상나라는 거기까지 나오질 못 했고 전국시대 연이 소위 진재 2,000리 하여 조선의 땅을 빼앗고 거길 진출하는데 말이죠

ㅡㅡㅡㅡㅡㅡㅡㅡ

요사 지리지
남경석진부

원래 옛날 기주(冀州)의 땅이다. 고양(髙陽)씨는 유릉(幽陵)이라고 하였고 도당(陶唐)씨는 유도(幽都)라고 하였으며 우순(虞舜)씨는 이를 쪼개어 유주(幽州)라고 하였다. 상국(商)에서는 유주를 기주에 병합하였고 주국(周)에서는 병주(并)을 나누어 유주로 하였다. 직방(職方)에서 말하기를 동북쪽은 유주인데 진산(鎭山)은 의무려(醫巫閭)이고, 덤불진 늪[澤藪]으로는 혜양(豯養)이 있으며, 큰하천[川]으로는 하수(河)와 제수(泲)가 있고, 저수지[浸]로는 치(菑)와 시(時)가 있다. 그곳에서는 생선과 소금으로 이익을 얻으며 그곳에서 기르는 가축으로는 말과 소와 돼지가 있고 그곳에서 자라는 곡식으로는 기장과 쌀이 있다. 무왕(武王)은 태보(太保)소공석(奭)을 연(燕)에 봉하였다. 진(秦)은 그 땅을 어양 상곡 우북평 요서 요동 등의 5개 군으로 삼았다.
감방친구 17-12-11 16:30
   
요나라 5경(京)
ㅡ 상경 임황부(臨潢府) : 내몽고 파림좌기 남
ㅡ 동경 요양부(遼陽府) : 요령 요양
ㅡ 중경 대정부(大定府) : 내몽고 영성
ㅡ 남경 석진부(析津府) : 북경
ㅡ 서경 대동부(大同府) : 산서 대동

안동도호부의 이동 학계 통설

현 북한 평양 ㅡ> 요령 부신(신성) ㅡ> 요령 요양(요동고성) ㅡ> 유주 ㅡ> 평주 ㅡ> 요서고성

가탐은 730 년에 태어나 805 년에 죽은 사람
가탐이 활동한 시기의 안동도호부는 요서고성으로 봄이 타당
요서고성을 마지막으로 안동도호부는 758 년 경에 최종 폐지됨

요나라 동경요양부는 현 요양시에 비정되는데 요사 지리지는 거기가 고구려 평양이었다고 하고 있음
요사 지리지에 의거하면 요동고성을 요양에 비정하는 데에 배치가 됨

또한 요동고성을 요양에 비정하더라도 요서고성은 요양보다 서쪽에 있어야 함

이 요서고성은 수나라가 만들고 당 무덕 원년(618)에 총관부가 설치된 연주(燕州) 요서현일 가능성이 있음
연주 요서현은 실제 다스리는 땅은 없고 623 년 영주 남쪽 유주로 옮겼다가 737 년에 치소를 유주의 북쪽 도곡산(桃谷山)으로 옮겼다

연주 요서현은 실제 다스리는 땅이 없이 속말말갈을 관리했는데
안동도호부가 마지막으로 존치한 요서고성, 즉 요서의 옛성은 유주 북쪽 도곡산이 아니라 최초의 위치인 영주 동쪽의 원래 자리를 가리킨다 볼 수 있음

물론 이 시기의 영주는 지금의 조양으로 볼 수가 없음
이미 이 시기에 이르면 거란과 발해의 활동으로 지금의 요서와 요동의 지배력 상실했는데 거기에 뭔 영주를 둘 수 있나
감방친구 17-12-11 18:11
   
안동도호부를 지금의 요녕성 요양시에 못 박아 두고서
정작 가탐도리기가 안동도호부 서쪽 300 리, 즉 영주와 안동도호부의 중간 위치에 있다고 한 고구려 건안성은
요양시 서남쪽 인근의 영구 개주시로 비정하고 있다

가탐이 활동한 시기의 안동도호부는 더 서쪽일 뿐만 아니라 그 자리를 요양으로 비정하더라도 요양과 개주의 거리는 300리(96km 혹은 168km)일지 의문이며 방향도 서쪽이 아니라 서남쪽이다

https://ko.m.wikipedia.org/wiki/%EC%9E%89%EC%BB%A4%EC%9A%B0_%EC%8B%9C

거리는 얼추 나오겠군요
     
감방친구 17-12-11 18:42
   
안동도호부를 요양에 두면 거리와 위치 상 조양이 영주가 되는데
안동도호부가 요양이 아니라 더 서쪽에 있었다면 남쪽 700리 박작성이 걸리는군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가탐 활동기의 안동도호부는 요서의 옛성에 있다가 폐지가 됐습니다

수나라의 유성이 조양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당나라의 영주는 거란의 반란 때 어양으로 옮겨졌다가 후에 유성으로 재배치된 사실이 있고 그 유성이 당나라 시기에 영역이 넓어졌진 정황이 보이므로 거란, 특히 발해를 침공하여 전쟁을 벌이면서 조양에 배치되었을 가능성을 열어둘 필요가 있어보입니다
도배시러 17-12-11 19:09
   
진도 나가는김에 ... 산동반도 등주에서 고구려 가는 코스도 살펴보세요
신당서 지리지7
登州海行入高麗渤海道
  登州東北海行,過大謝島、龜歆島、末島、烏湖島三百里。北渡烏湖海,至馬石山東之都里鎮二百里。東傍海壖,過青泥浦、桃花浦、杏花浦、石人汪、橐駝灣、烏骨江八百里。乃南傍海壖,過烏牧島、貝江口、椒島,得新羅西北之長口鎮。又過秦王石橋、麻田島、古寺島、得物島,千里至鴨淥江唐恩浦口。乃東南陸行,七百里至新羅王城。自鴨淥江口舟行百餘里,乃小舫溯流東北三十里至泊汋口,得渤海之境。又溯流五百里,至丸都縣城,故高麗王都。又東北溯流二百里,至神州。又陸行四百里,至顯州,天寶中王所都。又正北如東六百里,至渤海王城。
산동 등주 ~ 요동반도 직선거리는 110km 300리 수준입니다. 박작泊汋 위치 있음

번역 http://history-backup.tistory.com/entry/%EC%8B%A0%EB%8B%B9%EC%84%9C-%EC%A7%80%EB%A6%AC%EC%A7%80-%EB%B0%9C%ED%95%B4-%EA%B4%80%EB%A0%A8?category=432521
     
감방친구 17-12-12 01:46
   
<가탐도리기 '등주에서 고구려와 발해로 가는 길' 정리>


1.
등주(登州)에서 동북쪽으로 바닷길로 대사도(大謝島)와 구흠도(龜歆島)와 어도(淤島)와 오호도(烏湖島)를 거치는 300리 바닷길

#등주 ~ 동북쪽 A지점까지 바닷길 300 리

2.
A에서 북쪽으로 오호해(烏湖海)를 건너서 마석산(馬石山)의 동쪽에 있는 도리진(都里鎮)에 이르는데까지 200리

#A~ 북쪽 오호해 ~ 마석산 동쪽 도리진까지 200리
#안동도호부 ~ 서남쪽 도리진까지 600리

3.
도리진에서 청니포(青泥浦)와 도화포(桃花浦)와 행화포(杏花浦)와 석인왕(石人汪)과 탁타만(橐駝灣)과 오골강(烏骨江) 등을 지나는 800리의 바닷길, 남쪽의 해연(海壖)

#도리진 ~ (방향은 알 수 없음) 오골강 근처 남쪽 해연 800 리

4.
오목도(烏牧島)와 패강구(貝江口)와 초도(椒島)를 지나면 신라(新羅)의 서북쪽에 있는 장구진(長口鎮)에 도달한다. 또한 진왕석교(秦王石橋)와 마전도(麻田島)와 고사도(古寺島)와 득물도(得物島)를 지나는 1000리를 항해하면 압록강(鴨淥江)의 당은포구(唐恩浦口)

#1) 오골강 남쪽 ~ 신라 서북쪽 장구진
#2) 신라 서북쪽 장구진 ~ 압록강 당은포구 1,000리
#3) 오골강 남쪽 ~ 압록강 당은포구 1,000리

5.
이내 동남쪽으로 육로를 이용하여 700리를 가면 신라(新羅)의 왕성(王城)

#압록강 당은포구 ~ 동남쪽 육로 700리 신라 왕성

6.
압록강(鴨渌江)의 어귀로부터 배를 타고 100여리를 가고, 이내 작은 배로 물길을 거슬러 동북쪽으로 30리를 가면 박작구(泊汋口)에 도달하는데 발해(渤海)의 경내

#압록강 입구 ~ 100여리 뱃길 ~ 작은 배로 동북쪽 30 리에 박작구

7.
또한 물길을 거슬러 500리를 가면 환도현(丸都縣)의 성(城)에 도달하는데 옛 고구려의 왕도(王都)

#1)압록강 입구 ~ 물길로 환도성 500 리
#2) 박작구 ~ 물길로 환도성 500 리

8.
또한 동북쪽으로 물길을 거슬러 200리를 가면 신주(神州)에 도달한다.

#환도성 ~ 물길로 동북쪽 신주 200 리

9.
또한 육로를 이용하여 400리를 가면 현주(顯州)에 도달하는데 천보(天寳) 년간(당 현종, 742~756)에 왕도 (중경현덕부)가 있는 곳

#신주 ~ 육로 400 리에 현주

10.
또한 정북쪽에서 약간 동쪽으로 600리를 가면 발해(渤海)의 왕성(王城)에 도달

#현주 ~ 북북동 방향 육로 600 리 발해 왕성
          
감방친구 17-12-12 02:44
   
가탐도리기 이 기록의 맹점은
바로 "등주(登州)에서 동북쪽"

이 시대 등주를 현 산동반도로 비정하고 여기에서 요동반도 사이의 섬을 따라 비사성으로 비정된 요동반도 끝을 향해 동북쪽으로 300 리를 간다고 하니 그후의 지리 정보가 꼬여버린다

이 문제는 과연 저 시대(7~8세기)에 저 등주~요동반도 끝 항로가 운영됐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음

남중국에서 해류를 타고 전라도나 충청도에 닿는 뱃길이 아니라면 다 해안을 따라 이동하는 연안항해였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음

이에 대한 정보가 필요

"등주(登州)에서 동북쪽"을 "등주(登州)에서 동북쪽"으로 고치고 보면 '압록강~신라 왕성 700리'를 제하면 고구려ㆍ발해 지리 위치 분석은 비교적 수월해짐
          
감방친구 17-12-12 02:49
   
즉 동북쪽이 아니라 서북쪽으로 고쳐 놓고 보면
등주에서 해안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항해 하는 것을 가정할 수 있음

1. 등주 ~ 서북쪽 A지점까지 300 리

2. A지점~ 북쪽 오호해 ~ 마석산 동쪽 도리진까지
200리
(안동도호부 ~ 서남쪽 도리진까지 600리)

3. 도리진 ~ 오골강 근처 남쪽 해연 800 리

4. 오골강 남쪽 ~ 압록강 당은포구 1,000리


등주에서 해안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2,300 리를 항해한 지점에 압록강 당은포구가 위치하는 것

이렇게 하면 거리 감각을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따라서
ㅡ 요하
ㅡ 혼하
ㅡ 태자하
ㅡ 현 압록강
등으로 가탐도리기의 압록강을 비정할 수 있는 것
          
감방친구 17-12-12 03:16
   
          
감방친구 17-12-12 03:37
   
그러나 수ㆍ당의 고구려 침공이나 발해 등주 전격전의 사례로 볼 때에 등주~요동 직항로를 고려 안 할 수 없네요
               
도배시러 17-12-12 06:52
   
그렇죠
     
감방친구 17-12-12 02:25
   
612 년 수나라 육군의 침공 및 패퇴로 본 위치

A
수나라 육군 ㅣ압록강 ㅣ살수 ㅣ 평양성
(서) --------------------------> (동)

B
압록강-----------------살수
(서) -----450 리-----(동)


645, 648 년 당 태종 침공으로 본 위치

C
오골성 ㅣ 압록강 ㅣ 평양성

D
압록강 ㅣ 살수 ㅣ 평양성 ㅣ 패수

E
박작성 ㅣ 압록강 ㅣ 평양성
(박작성은 압록강 북쪽)
감방친구 17-12-12 02:58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도읍은 다음과 같이 변천한다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60396&sca=&sfl=mb_id%2C1&stx=cellmate

A 동명성왕
ㅡ  졸본(卒本)/흘승골성(紇升骨城)/비류수(沸流水)

B 유리왕 22년 (서기 3)
ㅡ 국내성(國內城)/위나암성(尉那巖城)

C 산상왕 13년(서기 209)
ㅡ 환도성(丸都城)

D 동천왕 21년(서기 247)
ㅡ 평양성(平壤城)

E 고국원왕 12년(서기 342)
ㅡ 환도성(丸都城)

F 고국원왕 13년(서기 343)
ㅡ 평양 동쪽 황성(平壤東黃城)

G 장수왕 15년(서기 427)
ㅡ 평양성(平壤城)

H 평원왕 28년(서기 586)
ㅡ 장안성(長安城)

그런데
삼국유사 왕력 편에서는

상기된 것 가운데에서
B(유리왕), E(고국원왕), G(장수왕)만 언급하고 있다

ㅡ B는 국내성의 다른 이름이 불이성(不而城)이라 적고 있으며
ㅡ E의 경우 이 때 천도한 환도성이 안시성(安市城)이라 적고 있다
감방친구 17-12-12 03:09
   
신당서로 본 고구려 평양과 하천
ㅡ 도배시러님의 견해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54969&sca=&sfl=mb_id%2C1&stx=likone&pag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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