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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0-06 23:45
[한국사] 고려의 명장 최영의 무시무시한 기록들
 글쓴이 : 고이왕
조회 : 5,198  

최영장군의 업적 지도.jpg

일본해적 대 한국군.png


최영이 용장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준 전투는 1348년 해남 왜구 격파때.  

당시 왜구 8000여명이 경상도 일대를 유린하며 지리산을 거쳐 전남으로 넘어왔을때 전라도병마사 휘하 부장으로서 수세에 몰린 상관을 구하고 앞장서 기병100여기로 적진을 휘저으며 왜구를 남해로 몰아 이후 초토화 시킴. 해남 앞바다가 도망가다 죽은 왜구 시체로 뒤덮인건 덤. 7500명 척살.

『최영이 친병 100여 적기를 거느리고 앞장 서 칼을 휘두르니, 왜구가 무리를 거느리고 도망하여 해남현으로 들어갔으나, 다 잡아서 이를 목베었다.』-<고려사>-



이후 1350년 경상도 순문사로 재직시 왜구 6000여명이 부산으로 침입. 신속히 군사 1000여명을 이끌고 경주~울산방지로 왜구를 유인하여 상류협곡에서 매복기습작전으로 전원 몰살시켜버림. 이일로 임금의 호위 업무를 담당하는 우달치가 되었다가 1352년 조일신이 난을 일으키자 조일신을 죽이고 난을 제압한 공로로 호군에 제수, 1354년에는 대호군(중앙군 2군6위중 1위의 수장)에 임명됨.



그러던중 1354년, 원나라가 홍건적의 난으로 고려에 파병을 요청하자 지휘관으로 약 2000여명의 중앙군 정예병들을 이끌고 원나라로 파병. 그곳에 있는 고려인 도 지휘하며 홍건적 격파에 성과를 올렸어. 가자마자 치뤄진 고우전투에서 적극적인 회전을 벌여 온갖 화공을 퍼부으며 홍건적 3만여명을 도륙내고 이어진 건주전투에서 1만여명을, 서천전투에서 6만여명을 패퇴시켜 중국에도 명성을 알리게돼. 이 과정에서 수 차례 창에 찔렸다고..

이때 원 승상(국무총리) 탈탈이 최영을 보고 "아니 저게 사람인가 귀신인가?!"라고 말하며 감탄하여 최영에게 보검을 선물했고 같이 합세하여 강남 요충지 형산성을 함락시키는 전공을 올림.    

『적의 무리가 무너지므로 고려 장수 최영이 이 기세를 이용하여 칼을 빼어들며 고함소리로 호령하니 이때 해가 한낮이므로 칼빛이 번개처럼 번득였고 고함소리는 천지를 진동하였다. 이윽고 앞장서 관군과 칼창을 휘두르니 넘어진 시체가 들판을 덮고 내를 막아, 한사람도 빠져 도망한 자가 없었다.』 -<신원사>-



1355년에는 회안로방면에서 1만여명의 홍건적의 맹렬한 공격을 막아내 수비에 성공, 이후 홍건적 명장 남옥이 지키고 있는 간쑤성을 함락시키고 홍건적 2만여명을 도륙냈으며 이어 기병으로 하여금 산과 협곡을 넘게하여 배후를 공격하니 왕춘성, 장저성도 함락시켜 홍건적의 입지에 엄청난 타격을 입혀버렸어. 앞장서 용전분투하며 용맹을 떨치고 명성을 중국에 알린 최영은 원순제한테 금장을 하사받고 귀국함. 

『이 싸움에 고려군이 이긴 기세를 이용하여 수적들의 목을 함부러 베니 뼈와 살이 들판을 뒤덮고 피가 냇물을 이루어 비린내가 진동했다.』 -<신원사>-

귀국한 이듬해 1356년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동참하여 기철, 권겸, 노책등의 부원배 세력을 척살하고 부원배 사병의 난동을 진압. 이후 바로 서북면병마부사로 임명되어 장수 인당과 함께 파사부를 수복하고 압록강 서북쪽 8참원정을 떠나 원 군벌세력을 격파했어.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더 깊숙히 들어가 원나라 군사 5000명을 베고 요하 하류 유주성을 함락, 고려유민 4천여명을 데려왔음. 



1358년에는 고려백성을 지속적으로 납치해갔던 여진족 추장 난독고로를 쫓아 요동에서 격파하고(난독고로 척살) 여진족 포로6천과 고려민2천명을 데리고 돌아오는 한편 동시에 고려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왜구를 작살내고 다니느라 몸이 백개라도 모자랐음. 그야말로 전국 출장 서비스 甲...



1358년, 오예포(황해도 장연군)로 왜구가 침탈해 왔는데 병선 400여척, 병력 1만8천의 대규모(기록에 의하면 "황해바다를 빽빽히 뒤덮는 수준")로 수도 개경이 위기에 직면함. 양광도,전라도 왜구 체복사로 재직중이던 최영은 즉시 기병 2천기를 이끌고 지금의 재령평야로 몰아 단 사흘만에 회전으로 몰살시켜버렸어. 이때 살아 돌아간 왜구가 고작 1천여명 남짓. 황해도를 뒤흔들던 왜구를 이 한번의 전투로 몇년간 잠재웠지. 

이듬해 1359년 12월, 모거경이 이끄는 홍건적 5만명이 압록강을 넘어 서경까지 함락시키자 서북면병마사 최영은 상장군 이방실, 안우등과 생양, 철화, 서경등지에서 이들을 격퇴. 특히 최영은 홍건적 선봉대장 한임아와 일기토를 벌여 죽이고 홍건적의 사기를 저하시켜 성문을 돌파한후 서경을 탈환했지. 이후 이북으로 도망간 홍건적들을 뒤쫒아 함종에서 이들을 다시 격파하니 전투한번에 홍건적 3만명이 죽었고 핵심장수 인심자, 황지선을 사로잡았어. 결국 홍건적은 압록강을 건너 후퇴. 홍건적 5만명중 살아돌아간 수는 3백명.



1360년, 원나라 군벌 살타이가 지속적으로 고려민을 납치해가고 심지어는 여자, 아이들을 잡아먹는일까지 발생하자 서북면순문사로서 군사 5000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 요동, 요서까지 추격해 의무려산성, 무려성, 치루산성등을 점령하고 원나라 군사 1만3천을 전멸시킨후 잡혀간 고려민 3000명을 데려왔음.


 

이듬해 1359년 12월, 모거경이 이끄는 홍건적 5만명이 압록강을 넘어 서경까지 함락시키자 서북면병마사 최영은 상장군 이방실, 안우등과 생양, 철화, 서경등지에서 이들을 격퇴. 특히 최영은 홍건적 선봉대장 한임아와 일기토를 벌여 죽이고 홍건적의 사기를 저하시켜 성문을 돌파한후 서경을 탈환했지. 이후 이북으로 도망간 홍건적들을 뒤쫒아 함종에서 이들을 다시 격파하니 전투한번에 홍건적 3만명이 죽었고 핵심장수 인심자, 황지선을 사로잡았어. 결국 홍건적은 압록강을 건너 후퇴. 홍건적 5만명중 살아돌아간 수는 3백명.



1360년, 원나라 군벌 살타이가 지속적으로 고려민을 납치해가고 심지어는 여자, 아이들을 잡아먹는일까지 발생하자 서북면순문사로서 군사 5000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 요동, 요서까지 추격해 의무려산성, 무려성, 치루산성등을 점령하고 원나라 군사 1만3천을 전멸시킨후 잡혀간 고려민 3000명을 데려왔음.


1361년 반성, 사유, 관선생, 주원수등이 이끄는 홍건적 20만이 재침입해 수도 개경까지 함락당하자 복주(안동)로 피난간 공민왕의 명을 받들어 최영은 이듬해 정세운, 이방실, 안우, 이성계와 함께 군사 10만명으로 홍건적을 격퇴하고 개경을 수복했어. 최영은 기병을 이끌고 후퇴하는 홍건적을 쫓아 서경, 압록강에서 홍건적 5만명을 추가 도륙후 수괴 주원수를 죽이고 돌아옴.



1361년, 압록강 이북에서 깔짝대는 원나라 군벌 조무를 지금의 러시아 영토까지 쫒아 들어가 거점지 독로성을 박살내고 약1만5천여명을 베고 돌아왔으며 1362년에는 요동으로 출전해서 아합출의 여진족 5만명을 박살내고 백아산성까지 점령후 돌아옴. 1363년에는 원나라 군벌 나하추의 5만군사를 압록강 이북에서 처참히 도륙해버림.



1364년, 기황후덕흥군을 앞세워 1만군사로 침입해오자 이성계와 함께 압록강 근처에서 썰어버렸는데 살아돌아간 자가 17명뿐. 이들은 고려 본토에 발도 못들인채 거의 전부 전멸


이외에도 수많은 눈부신 전과를 올리며 승승장구 하던 최영이지만 1364년, 이 무렵 신돈에게 밉보여 처형위기까지 가고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유배로 경력 중단.



이후 56세가 되는 1371년에야 문하찬성사(정2품)로 중앙정계에 다시 복귀하게 돼.



개인으로서도 지휘관으로서도 정점인 시기를 성공적으로 보냈고 이 정도만 해도 전쟁영웅이자 공로 있는 대신으로 커리어가 짱짱했지만 목호의 난을 계기로 거의 환갑인 1374년, 정벌군 총지휘관으로 야전에 복귀해. 그럴만도 한 것이 목호의 난 진압에 동원한 고려군의 규모는 2만5천명으로 웬만한 지휘관에게 맡기기 힘든 수준이였음.

정벌군 총사령관직인 양광,전라,경상도 도통사로서 2만5천여명의 고려군을 이끌고 탐라(제주도)로 건너간 최영은 고산평야에서 화공으로 목호 기보병 3만여명을 모조리 전멸시키고 목호의 수괴들과 가족들을 허리잘라 죽였어. 정벌은 1주만에 끝났고 이로써 제주도는 고려에 완벽 귀속됨.


1376년 7월, 대규모의 왜구가 충남 서해안으로 들어와 연산 개태사에서 상원수(사령관) 박인계를 죽이고 공주에서는 목사 김시혁을 죽이는등 그야말로 충청도가 완전 무법천지 수준으로 됨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61세의 판삼사사(종1품) 최영은 왜구가 홍산(부여)에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우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곧장 군사를 휘몰아쳐 내려가보니 왜구가 3면이 절벽이고 오직 좁은 한길만이 통로인 지리적 요새에 진을 치고 있었음. 

지형이 워낙 험해서 토벌하러 온 고려군은 어찌할줄 몰랐는데 최영이 토벌군 선봉에 서서 좁고 험한 통로를 앞장서 헤집고 다니며 그야말로 무쌍을 찍으니 군사들도 용기를 내 우루루 따라 들어가서 왜구를 썰었지. 결국 고려군은 대규모의 왜구를 한방에 한명도 남김없이 전멸을 시켰고 대승을 거두게 됨.(홍산대첩)

최영 자체의 지휘 성향은 그야말로 과감, 저돌, 투지와 용맹을 바탕으로 싸우는 용병술이였고, 엄하고 살벌한 군율로 부하들을 꽉 잡고 주춤거리는 병사들은 베어버리고 도망 못 가게 하며 자신이 선봉으로 앞장서 싸우는 방식이였는데 홍산 대첩에서도 이 방식으로 싸워서 입술에 화살을 맞았는데도 이 화살을 다시 뽑아 적장을 쏴죽여버렸음.

홍산 대첩 후 왜구들은 "우리가 두려워 하는 자는 오직 백발의 최만호뿐이다."라며 최영을 백수(白首) 최만호로 불렀다고 함.

1378년, 황해도에 상륙한 3만명의 대규모 왜구는 아예 고려 수도 개경에 타격을 가하려는 군사적 움직임을 보였음. 실현되었다면 홍건적에 이어 또 한번 왕이 수도를 버리고 달아나는 사태이자 해적떼에 수도가 털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판이였음. 근데 이게 진짜 실현 직전까지 갔음. 왜구는 상륙하자마자 개경으로 물밀듯이 진격함. 

1377년에도 왜구가 직접적으로 개경을 노리겠다고 선언한 사례가 한번 있었음. 이당시 왜구들은 "최만호만 피하면 경성을 손에 넣을수 있다."라며 개경의 최영을 속여 양광도로 끌어내고 그사이에 개경을 노리겠다는 거대한 계략을 꾸몄으나 사전에 들통나 실패했음.

그런데 이번에 상륙한 대규모의 왜구가 호언장담하며 위협적으로 개경으로 달려오자 중앙과 지방이 크게 동요했음. 이에 최영은 급박한 상황에서 소집할 수 있는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해풍으로 나아갔음. 해풍에 진을친 최영은 본대는 부장인 찬성사 양백연 에게 본대를 맡기고 자신은 기병 5백여기를 따로 빼내 해풍으로 진격하고 있는 왜구 뒤쪽으로 달려갔음. 이후 해풍에 도착한 왜군은 최영이 참전하지 않았고 고려군 수가 적다라는 판단하에 즉시 본대로 달려들었고 양백연은 맞서 싸우다가 후퇴했음. 왜구들은 무서운 기세로 쫒아갔고 강 상류 좁은 길목 안까지 들어갔지. 최영은 후방에서 왜구가 좁은길목입구 안으로 모두 들어갔을때를 노려 기병으로 급습했어. 난데없는 기습을 받고 후방을 무방비로 내준 왜구는 합세한 양백연의 본대와 최영의 기병 말발굽에 짓밟혀 전열이 완전히 붕괴되고 처절히 패퇴해버림. 왜구는 거의 전멸했고 극소수만 밤에 전장을 빠져나갔음.(해풍전투)

당시 우왕과 조정대신들은 최영이 패배했다는 소문을 듣고 즉시 피난준비를 했지만 이후 승전보가 전해지고 나서야 개경의 계엄을 풀고 피난예정도 없었던 것이 되었음. 이후 조정대신들 모두 우왕한테 승전을 하례하고 조정은 전공을 기려 최영에게 안사공신의 칭호를 내려주었음. 만일 전투에서 패배했다면 수도 함락은 확정정이였던 만큼 이 승리는 매우 중요했음.



1380년, 최영은 육해도 도통사로서 수군은 전투경험이 없으니 출전 불가하다는 도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최무선, 나세가 수군을 이끌고 출전하게 밀어주었고 화포사용도 허용했음. 이로써 최무선과 나세가 진포에서 정박중인 왜선 500여척을 모조리 격파시켜버리는 대승을 거두는데 기여함.(진포대첩) 또한 그해 경상도를 유린하고 있던 대규모의 왜구를 토벌할 토벌군 최고 지휘관으로 이성계를 적극 추천해 도당의 견제로 많은 공적에도 불구하고 중책을 역임하지 못하고 있던 이성계가 문하찬성사(정2품) 겸 양광전라경상도 도순찰사를 제수받고 황산에서 왜구를 박멸하는데도 기여함.(황산대첩) 



이외에도 셀수없이 크고작은 수많은 전투를 치뤄온 최영은 60대 후반까지 전국을 상대로 작전본부를 꾸리며 왜구와의 사투에 나서는 고려군 최고 정점으로 움직였는데 70세부터는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주로 개경 근처의 수비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였고 먼 거리로 원정 나가 왜구를 때려 눕히는 역할은 이성계, 변안열, 배극렴 등의 후배 무장들이 주로 담당하게 되었음. 


이후 1388년, 무진피화를 일으켜 이인임일파를 비롯한 부패권문세족 1000명 이상을 처형한 최영은 문하시중(국무총리)이 되어 요동완전복속이란 대의를 내걸고 요동정벌을 추진. 73세의 나이에 요동정벌군 최고 사령관인 팔도도통사로서 직접 출정하려 했지만 사위였던 우왕이 "장인께서는 제발 제곁에 남아주세요!" 하는 바람에 좌군도통사 조민수, 우군 도통사 이성계한테 지휘를 맡겼고, 결국 자신이 아끼던 후배 무장들이 위화도 회군이란 쿠데타를 일으키자 이들과 개경에서 총 네번의 결전중 세번의 승리를 거뒀으나 막판에 쭉 밀려 끝내 패배하고 혹독한 국문을 받은후 귀양갔다가 참수되는 안타까운 말로를 맞이함. 최영 전투경험중 유일무이한 패배가 바로 이 개경전투였음.

전투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최영이 참수된 후 개경에 사는 백성들은 통곡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하며 1주일동안 시장을 파하고 도축하지 않고 고기 역시 먹지 않았다고 함. 기일에는 백성들이 공동으로 제사를 지냈고 이후 수호신으로 섬겨졌는데 이런점을 보면 최영에 대한 당시의 민심이 어땠는지를 엿볼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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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토랑스 17-10-06 23:59
   
저런 장군을 죽인 이성계 당신은 도대체...
     
자기자신 17-10-07 02:54
   
이성계도 최영장군못지않을만큼 대단한 명장이예요 나하추가 이끄는 원나라군대를 격파했고 홍건적 2차침입때 홍건적 100,000명이 쳐들어왔을때도 군사2,000명으로 홍건적 한무리 격파했고 적장까지 죽였다죠 또 최영장군과 같이 원나라군10,000을 격파했기도 했군요 지리산 황산에서 왜구10,000명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죠 그의외에도 왜구들을 여러번물리친 장수입니다 여진족에 칩입도 막았군요 최영장군을 왜 죽였냐면 무리한 요동정벌과 조선건국에 방해가 됐어 결국에 처형당하고 말죠
유수8 17-10-07 01:29
   
어마무시한 분이네...
용맹으로 따지면 척준경이 오히려 형님하고 부를듯...
전공으로 따지면 거의 이순신 장군급이네요... ㄷㄷㄷㄷ

이런 최영의 전공이 왜 그리도 알려지지 않은건지....
감방친구 17-10-07 02:15
   
이 분이 본인이신 거 같은데
좋은 자료 잘 봤습니다

http://m.kin.naver.com/mobile/qna/detail.nhn?d1id=1&dirId=1020301&docId=285795512
     
유수8 17-10-07 03:12
   
대단하신 분이네요... 이런 역사적 자료를 이렇게 뜻깊게 정리해서 알린다는게...
간단명료 17-10-07 09:08
   
고려말 한반도는 정말 지옥 그 자체 ㅎㄷㄷ
     
가남 17-10-07 20:59
   
나라는 휘청이고 사방에서 지옥문이 열려 마물들이 쏟아져나왔지만 모두 물리쳤죠.
국산아몬드 17-10-07 13:21
   
고려말에 왜구들이 얼마나 죽았을까요. 이성계도 많이 죽였는데 최영장군도 장난아니네요. 대마도 정벌전까지 수십만은 죽였겠네요
가남 17-10-07 21:00
   
장군님 묘소가 있는 대자동이 차로 10~15분 거리라 두 번 찾아뵙고 인사 드렸죠.
국산아몬드 17-10-08 09:18
   
명말 북로남왜의 변때 명나라 해안은 왜구들로 초토화 되었습니다만 조선해안은 잠잠했죠.  아마 고려말때 왜구들이 한반도를 침략했다가 모조리 도륙당한 기억때문인듯 합니다 .감히 조선해안은 무서워 침략을 못한듯 하네요. 고려말 물밀듯이 침략했는데 모조리 도륙당했으니까요
하린 17-10-08 11:19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묻혀버린
고구려의 명림답부 장군도 있죠.

99세때 좌원대첩 참전, 대승
고구려 기마대를 이끌고
종심돌파로 적진을 유린한 뒤
적장과 1:1 다이다이 떠서 적장 목을 날려버림.

그때 나이가 99세.

야전군 사령관 겸 고구려 국상(재상)직을 겸직하여
101세 까지는 일선에서 직접 칼들고 싸우고,
지휘관으로는 103세까지 전쟁터에 나섬.

105세에 자연사.

고구려 개마무사대의 상징적인 인물.

척준경보다도
저는 진정한 소드마스터는
명림답부라고 봅니다.
촐라롱콘 17-10-09 07:56
   
[[정벌군 총사령관직인 양광,전라,경상도 도통사로서 2만5천여명의 고려군을 이끌고 탐라(제주도)로 건너간 최영은 고산평야에서 화공으로 목호 기보병 3만여명을 모조리 전멸시키고 목호의 수괴들과 가족들을 허리잘라 죽였어. 정벌은 1주만에 끝났고 이로써 제주도는 고려에 완벽 귀속됨.]].
.
.
.
고려사 최영전에 따르더라도 이 당시 목호의 난에서 고려군에 대항한 목호 무리들의 규모를
3천 정도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원나라 간섭기 당시 제주도에 주둔했던 몽골군들의 규모는 많을 때에도 1,400명~1,700명 규모입니다.

그리고 1374년 최영장군이 제주도에 출병할 당시에, 이미 원나라는 몽골고원으로 쫓겨간 뒤이기 때문에
목호로 상징되는 당시 제주도의 몽골군-목호들을 비롯한 그들의 후손들은 원나라 본국으로부터
아무런 병력-물자 등의 지원을 받지못하는 고립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목호 기보병이 3만에 이른다는 표현(더구나 그들의 가족들은 제외하고도)은 엄청난 과장입니다.

오히려 고려~조선초 시기의 제주도 전체인구가 3만 내외 규모인데...
     
자기자신 17-10-10 02:45
   
저기요 제주도에 있는 몽골군규모가 수천여명이란 역사기록이 있나요?
바로그것 17-10-11 07:31
   
오죽하면 무당들이 신으로 모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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