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게시글에 잇대어서 씁니다
이 관련 글은 올초인가 지난 해 말에 몇 차례 쓴 바가 있는데 호응과 관심이 적었습니다
연나라 당시의 조선의 위치, 위만조선의 위치 등은
학계 통설만이 장벽이 아니라
현재까지 축적된 고고물질문화 연구현황에서도 장벽에 부딪힙니다
분명히
고조선계 물질문화가 요서에서 요동으로 후퇴를 하고
그에 따라 연계, 혹은 중원계 물질 문화가 거기까지 잠식을 합니다
ㅡ 그런데 이 고고물질문화로 볼 적에도 위만조선 재서북한설은 설득력을 얻을 수 없죠
ㅡ 즉 고고물질문화로 볼 적에 위만조선 재요서설 뿐만 아니라 서북한설 역시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이에 강단주류사학계 일각에서는
ㅡ 연의 침입으로 요서 2천리를 잃고 요동으로 서부 국경이 후퇴한 고조선이 서북한으로 중심지를 옮겼고
ㅡ 후에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다
ㅡ 그래서 서북한이 위만의 중심지가 맞다
는 주장을 펼칩니다
그런데 이 역시 말이 안 되는 게
ㅡ 고조선을 침입해 서쪽 2천리를 빼앗은 연나라는 나라가 얼마 안 가서 망했고
ㅡ 또 고조선이 점차 그 땅을 되찾았고
ㅡ 진나라가 들어선 다음에도 조선은 조회하지 않을 정도로 세력을 지니고 있었거든요
또 당시 항해는 연안 항해였으며 위만조선이 중개무역으로 번성하였는데 요동을 버리고 서북한으로 움츠린다는 게 말이 안 되고
서북한 지역에 한나라 대군을 맞아 1년 넘게 수성할 규모의 치소를 찾을 수 없다는 것 등이
이들 강단주류 일부 학자들의 주장과 맞서는 것입니다
또한 사료적으로도 서북한설은 근거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 확연한 연계 고고물질문화의 흔적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ㅡ 저는 그 흔적이 전국시대와 진한교체기에 고조선으로 계속하여 망명해 온 중원계 유이민이 남긴 것이라고 봅니다
ㅡ 위만도 처음에는 서쪽 변경을 지키는 역할을 맡았죠
ㅡ 망명한 유이민이 하루 아침에 그 전의 생활방식(토기, 주거, 무덤, 청동기, 무기 등)을 고조선식으로 바꾸었을리 만무한 것 아닙니까
그리고 하가점상층문화의 주인공은 저는 개인적으로 부여의 전신으로 봅니다
이 지역이 흉노에 의해 와해 되면서 만주로 진출한 것으로 보는 것이죠
이에 부여와 선비는 그 뿌리가 같다는 것이 제 견해입니다
부여 문화에서 흉노적 색채가 섞여있고 중원과의 관계가 좋았던 것이 그 근거가 되리라 봅니다
고고물질문화 추이 현황으로 보자면
위만이 망명 시에 건넌 패수는 난하가 분명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또한 패수라 불리는 강은 여러곳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동북아역사재단 상고사토론회
이후석 박사 발표 영상
ㅡ 고고물질문화
https://youtu.be/mQyi1vjQyr4
박성용 연구원 발표 영상
ㅡ 군사작전으로 본 왕검성의 위치
https://youtu.be/KCJAt4s5E_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