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수천개의 한나라 고분이 평양에 있다?
- 평양 방면에 수천개의 고분이 있다? 전한때 평양 방면에 낙랑군이 설치되어있다.
- 광복이후 북한에서 발굴된 낙랑고분이 2600여기에 이른다.
- '평양시 락랑구역 안에서만도 2600여기에 달하는 무덤과 수백 평방미터의 건축지가 발굴되었으며 1만5000여점에 달하는 유물들을 찾아냈다'(북한학자 안병찬. '평양일대 락랑유적의 발굴정형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1995))
- 조선후기 이후로 낙랑으로 비정되었고, 이후 수천기의 무덤과 수만점의 유물로 확인되어 통설이 되었다.
A :
▶핵심 : 한나라 고분이라는 근거 있나?
낙랑고분이 2600여기에 이르면 한사군이 평양 방면에 설치된 근거가 되는가? 낙랑고분에서 한사군을 관장한 한나라 관리들의 무덤이 단 한개라도 발굴된 것이 있는가?
▶ 북한학계는 낙랑국 유적이라고 보고 있다.
1990년대까지 북한은 평양 일대에서 2600여 기의 무덤을 추가로 발굴하였다. 북한 학자들은 이 무덤들을 마한의 유적으로 해석하다가 최근에는 고조선의 후국(侯國)이었던 낙랑국의 유적이라고 보고 있다 (오영찬 이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2016-04-28 조선일보 )
▶ 낙랑군이 설치되었다는 서기전 108년보다 훨씬 앞선 시기부터 축조되기 시작된 무덤이었다. (850여기)
북한은 남한 학계에서 한사군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목곽묘(木槨墓)를 '나무곽무덤'이라고 부르는데 850여기나 발굴했다. 북한의 리진순은 '평양일대 락랑무덤에 관한 연구'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자료에 의하더라도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기원전 1세기 말까지 존재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썼다. 낙랑군이 설치되었다는 서기전 108년보다 훨씬 앞선 시기부터 축조되기 시작해 한사군이 설치된 지 오래지 않아 사라진 목곽묘는 한사군 유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한나라 무덤과는 뚜렷한 차이점이 있다.
평양 방면의 고분을 수천개나 발굴하여 직접 연구한 북한 사학자들은 낙랑고분과 한시대 고분은 무덤의 형식 변천 뿐 아니라 무덤의 구조형식에서도 뚜렷이 차이점을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평양 낙랑구역의 고분중에서 한나라 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이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수한 한나라 양식도 아니다.
▶평양 무덤에는 한나라 고위관리의 무덤은 단 1기도 발견되지 않았다.
한나라때는 고위 관리가 죽으면 자기 고향에 돌아가 장례를 지내는 귀장제가 엄격하게 시행되었다. 그러므로 평양 낙랑 구역에 있는 무덤 수천개는 현령 이상 고위관리의 무덤이 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모두 낙랑군 아전들의 무덤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고위관리는 연고지에 임명하지 않는 회피제도 엄격하게 지켜졌다. 만약에 평양 낙랑구역에 있는 수천개 고분이 낙랑군과 관련이 있다면 논리상으로 이는 모두 낙랑군의 현령 이상의 고위 관리가 될 수 없다.
위만조선이 요녕지방에 있었다는 사서 문구는 모조리 무시하고 낙랑군 유물이 사서보다 우선하므로 평양 낙랑구역에 있는 수천개 무덤이 전한때부터 평양 방면에 있던 낙랑군 유물이라는 주장은 억지밖에 되지 않는다.
***낙랑군의 구조는 행정기구로 태수 아래에 도위,현령,현장 등 고위관리는 한나라에서 임명하고 태수를 보좌하는 아전이나 현령,현장 아래 하급관리인 읍군,읍장은 토착거수들로 임명하여 읍군,읍장들에게 제한적인 자치를 허용해주어 토착 무리를 읍단위로 갈라놓아 대군장이 풀현하지 못하게 하면서 한나라에 복속하게 하는 통치기구이기때문에 중국의 전통군현처럼 상비군이 없었다.
▶ 고분에서 나온 유물은 무역이나 교류의 근거일뿐이다.
고분에서 나온 이배,칠기 등의 유물은 무역이나 교류로 취득할 수 있는 것이므로 설사 그것이 낙랑 고분에서 나온다고 하여도 그것만으로 한사군이 한반도에 설치되었다고 입증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낙랑 목간도 이동이 가능한 것이므로 평양 방면에 낙랑목간이 발굴되었다는 것만으로는 낙랑군이 전한때부터 서북한에 설치되엇다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명문 기록상으로만 최소 2만 명이상의 포로와 노획물도 있다.
예를 들어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 고구려'조는 고구려 태조 대왕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침범하여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 태수 처자(妻子)를 사로잡았다"고 전한다. 낙랑 태수 처자뿐 아니라 다른 많은 포로와 여러 문서를 비롯한 노획물도 있었을 것이다. <삼국사기>는 미천왕이 재위 3년(302) 현도군 사람 8천여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고 전하고 있고, 재위 14년(313)에는 낙랑군 남녀 2천여명을 사로잡아 왔으며, 재위 16년(315)에도 "현도성을 쳐부수어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천왕이 잡아온 포로만 최소한 '1만명+α'이다. <삼국사기> 고국양왕 2년(385) 조는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켜 남녀 1만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고"고 기록하고 있다. 명문 기록상으로만 최소 '2만 명+α'의 포로들이 잡혀왔다
▶사서문구에 배치되는 유물 해석의 음흉한 의도
유물에 기록이 명백히 있다면 모르지만 유물에 기록이 없는데도 사서 문구와 배치되는 유물 해석을 하는 것은 해석자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고집을 부리는 것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