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봉(儀鳳) 2년(서기 677년),(의자왕의 앙들 융隆을) 광록대부(光祿大夫)·태상원외경(太常員外卿) 겸 웅진도독(熊津都督)·대방군왕(帶方郡王)에 배(拜)하여 영(令)을 내려 본번(本蕃)으로 귀환(歸還)케 하여 여중(餘衆)들을 모아 안녕을 돌보게 했다. 이 때 백제(百濟)의 본토(本土)는 황폐(荒廢)하여서 점차 신라(新羅)의 근거지가 되었고,융(隆)은 마침내는 감히 옛 나라로 가지 못하고 졸(卒)하였다. 그 손자(孫子) 경(敬)은 측천(則天)의 조정(朝廷)에서 대방군왕(帶方郡王)·수위위경(授衛尉卿)을 습봉(襲封)받았다. 그 땅은 그 이후로는 신라(新羅)와 발해말갈(渤海靺鞨)에게 나뉘어진 바가 되어 백제(百濟)의 종족(種族)이 드디어 끊어졌다.
같은 책에서 발해말갈이란 대조영(大祚榮)의 나라 곧 만주를 호령한 한민족의 나라 발해였다. 그런데 이 기사에 대한 의문으로 신라가 다 차지했을 영토를 어떻게 발해가 나누어 차지할 수 있었느냐에 대한 의문이 많았는데 그 답 중의 하나는 만주나 북방지역에 백제가 영토를 가졌을 거라는 설도 있었다. 하지만 <KBS역사스페셜-백제의 마지막 공주, 부여태비의 귀환(2009.10.17)>을 보니 다른게 설명하고 있었다. 또한 아래 기사도 그와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