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대로 가면 천리장성은 지금의 만리장성의 산해관 입니다. 원래 고려는 산동성을 자신의 고유영토로 상당히 오랜기간 점유 했어요.
산동성 사람들을 쿨리라 하는데 이는 고려인 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지금 본문에서 주장하는 것은 조선후기의 조선영토를 말하는 것 이에요. 그것도 북간도나 연해주는 쏙 빼 놓았단 말입니다. 고려의 영토는 조선 때 보다 훨씬 남동쪽 까지 영향권을 행사 했다고 봐야 한단 말이죠.
심지에 산동지방에 신라방이 있었단 말입니다. 신라방을 마치 무슨 무역기지 처럼 말하는데 방은 행정구역이나 영토에 붙이는 이름 입니다. 전국토를 방방곡곡이라 부르는 것과 같은 말이에요.
최소 신라시기에도 신라역시 산동성에 자신의 전초기지적인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저 지도는 엄청나게 축소된 지도 인데다 고려의 지도도 아니고 조선후기의 강역을 그것도 굉장히 축소 시켜서 고조선을 연구한다는 집단이 저런 발표를 한다는 것은 에휴...
원래 고려의 강역에 대해서 현 강단사학에 아무런 증좌없이 무조건 한반도로 축소시키는 바람에 서로 많은 대립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아무런 증거없이 주장하기에 힘이 붙이니 또 다른 왜곡을 하는 것이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조금 말을 돌려서 고조선을 살펴보면 고조선은 환웅이라는 정복자 또는 이주민 또는 개척민이 웅(녀)족과 합심해서 세운 나라입니다. 당연히 성격이 지금의 미국과 같아요. 그리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역시 똑 같은 패턴으로 나라를 세웁니다. 다시 말해서 한국인은 프론티어의 자손이란 말입니다. 토착이나 정주민이 아니라 Settler의 후손이란 말이에요.
아랫 글에 하나라에 관한 글중에 유적이 나오는 장소가 하남성인데 그 곳이 중원이고 중국이고 바로 조선지역 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라가 조선이에요. 그리고 조선은 환웅이 개척한 곳이고 환웅의 원 고향이 어디냔 말이죠. 바로 환인의 나라 즉 환국이 어디냔 말이죠.
환국에 대해서 언급하면 바로 알레르기 일으키는 분들 많으시고 바로 고조선에 대한 유적을 말하시는 분들이 많으신데 고조선은 환국의 분국이라 고조선의 유물로 환국은 언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환국이 바로 동국이고 이 동국이 신神국이란 말입니다. 환인은 신이라 이 환인이 있는 나라가 바로 신국이란 말입니다. 그럼 환국의 위치가 어디인지 알 수 있죠. 바로 홍산문명이라는 것 이에요. 홍산문명은 환국의 문명이지 절대로 고조선의 문명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조선에서 분래되었다고 하는 고구려 / 신라 와 백제의 위치를 대략 알 수 있죠.
고구려는 태원지방에서 있다가 전연과 백제의 공격으로 만주로 이동 함을 알 수 있단 말입니다. 전연의 공격으로 조선지방이자 중원지방인 하남성을 뻬앗기고 다시 백제의 공격으로 산동성지역을 빼앗겼다고 봐야 한단 말이죠.
그리고 장수왕은 평양으로 천도하는데 장군총은 장수왕릉으로 지금 집안현에 있단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의 집안현이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이란 말입니다. 바로 얼마전에 왕릉이 도굴 되어서 낭패당한 고구려가 왕릉을 수도에서 멀리 만들 이유가 없단 말이고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어떻게 수도에서 멀리 만듭니까? 장수왕은 전연과 백제와의 전쟁으로 수도의 방위를 강화할 필요성 때문에 협소 하지만 방어를 위해 천도 했다고 봐야 하는 것이죠.
유주자사 진의 무덤에서 나온 벽화에 따르면 고구려 최대 고국영왕에서 광개토대왕 시기까지 하북성을 점유하고 있었단 말이죠. 광개토 대왕시기에 전연과의 싸움에서 하남성을 수복하고 장수왕 시기에 전연을 멸망시키고 문자명왕 시기에 백제 동성황 시기 잔존세력을 공격하려다 실패 했다고 봐야 하는 것 입니다.
그럼 피라미드의 의문점이 어느 정도 풀리죠. 서안지방의 피라미드는 고구려 장수왕 이전 시기의 고구려 왕릉이거나 부여의 왕릉이라는 것 입니다.
이렇듯 많은 의문점이 해결 되지만 그 반대로 또 다른 의문점이 생긴단 말이죠. 고구려는 위만조선이 한 무제에 붕괴된 후 다시 복원했고 그 후로도 계속해서 점유 했었다고 봐야 하는데 그럼 한반도의 한사군은 뭐고 한나라의 영토는 어떻게 설정해야 하고 백제의 영토는 어떻게 봐야 하는지 등등...
우리가 알고 있던 모든 것이 뒤 바뀌진단 말이죠. 이 모든 것이 쪽발이 새끼들이 하도 분탕질을 쳐서 생긴 것이란 말이에요. 한번 왜곡 하는 것은 쉽지만 이것을 다시 제대로 되돌리기에는 힘이 든단 말이죠.
인하대 고조선 연구소는 고려사와 요사를 근거로 비교연구 발표하는 것 같은데.
링크 연결된 북한지역정보넷에 실린 천리장성 사진이 천리장성이라는 자세한 기록을 알수 있을까요?
사진설명에 [영원군지]라고 있는데 그 책 내용에 천리장성이라는 기록을 볼 수 있는 링크 좀 알려 주세요.
영원군지는 1931년에 저술되었고, 고려사는 1141년 부터 1451년, 요사는 1344년에 저술 되었어요.
어느 기록이 더 정확할까요?
먼저 저술된 기록 일수록 과장되었다 할 지라도 당시 상황에 더 가깝게 기록되어 있겠죠?
고고학에서 기록을 근거로 유물을 찾는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상충되는 기록이 있다면 저술된 년대를 보고 먼저 저술된 기록이 더 사실에 가깝다고 하더군요.
후대로 올수록 확인할 수 없다, 의심스럽다 등의 이유로 역사 기록은 깍아진다고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다산 정약용의 사관이라고 합니다.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북쪽 경계에 관방(關防)을 새로 설치하도록 하였으니, 서해(西海) 연안 옛 국내성(國內城) 인근에 압록강(鴨綠江)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위원진(威遠鎭)·흥화진(興化鎭)·정주(靜州)·영해진(寧海鎭)·영덕진(寧德鎭)·영삭진(寧朔鎭)·운주(雲州)·안수진(安水鎭)·청새진(淸塞鎭)·평로진(平虜鎭)·영원진(寧遠鎭)·정융진(定戎鎭)·맹주(孟州)·삭주(朔州) 등 13개의 성을 거쳐 요덕진(耀德鎭)·정변진(靜邊鎭)·화주(和州) 등 3개의 성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에 닿았다. 사방으로 뻗은 길이[延袤]가 천여 리나 되고, 돌로 성을 쌓았는데 높이와 두께는 각각 25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