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요. 일제시대에 다 삭제되었을리가 있습니까?
그 많은 고대의 역사사서가 온전히 남아있다가 고작 100년전에 다 사라졌을리가 있나요.
역사서라는건 승자의 기록이죠. 그러다보니 한반도에 새로운 나라가 생길때 고려에서 조선으로를 제외하고는 모두 전쟁의 역사인겁니다. 당연히도 사라지는게 정상입니다.
: 조선 시대 역대 군주의 업적 가운데 선정(善政)만을 모아 편찬한 편년체(編年體) 사서(史書)로, 폐왕(廢王)되어 끝까지 추존되지 못한 연산군과 광해군을 제외한 군주들의 재위 순서에 따라 편차가 구성되어 있다. 세종(世宗)이 태조(太祖)ㆍ태종(太宗)의 원대한 계획과 정책을 발췌하여 두 왕대의 《보감(寶鑑)》을 편집하도록 한 데에서 시작되었는데 완성하지는 못하였고, 그 후 세조대에 처음 편찬되어 여러 왕대에 걸쳐 수차례 증보ㆍ수정 과정을 거치면서 완성되었다. 《실록》이 크고 작은 사실을 모두 기록해 두었다가 후세에 전하려는 것이라면, 《보감》은 훈모(訓謨)와 공열(功烈) 중에서 큰 것을 취하여 기록해서 후세 사왕(嗣王)이 법으로 삼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국조(國朝)의 고사나 제도에 대하여 상고하는 사료로서 가치가 높다.
"양성지가 상소하여 여러 조항의 정책을 진달하였다. 그 내용은, 1. 천지신명에게 제사지내는 일, 2. 한성을 상경(上京)으로, 개성(開城)을 중경(中京)으로, 경주(慶州)를 동경(東京)으로, 전주(全州)를 남경(南京)으로,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으로, 함흥(咸興)을 북경(北京)으로 정하는 일, 3. 삼각산(三角山)을 중악(中嶽)으로, 금강산(金剛山)을 동악(東嶽)으로, 구월산(九月山)을 서악(西嶽)으로, 지리산(智異山)을 남악(南嶽)으로, 장백산(長白山)을 북악(北嶽)으로 삼고 그 밖의 악진(岳鎭), 해독(海瀆), 명산(名山), 대천(大川)의 사전(祀典)을 고쳐 정하는 일, 4. 본조의 음악 이외에 일본과 여진의 음악을 다시 설치하여 태평 성대를 빛내는 일, 5. 관례(冠禮)를 행하여 선왕의 제도를 회복하는 일, 6. 상하의 복색을 정하여 국가의 풍속을 이룩하는 일, 7. 여자 복색의 장의(長衣)를 금지하여 남녀의 의복 제도를 구별하는 일, 8. 우리 동방의 전대(前代) 군신(君臣)을 동교(東郊)에서 합제(合祭)하는 일, 9. 전대의 능묘(陵墓)에 수호군을 적절히 두고 이들의 요역을 면제해주어 나무꾼을 금지시키게 하는 일, 10. 쌍기(雙冀), 최충(崔冲), 이제현(李齊賢), 정몽주(鄭夢周), 권근(權近) 등을 성묘(聖廟)에 배향하는일, 11. 당(唐) 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사당을 세우는 일, 12. 고려의 문익점(文益漸)은 처음으로 목화씨를 얻어오고 최무선(崔茂宣)은 처음으로 화포술(火砲術)을 배워왔으니 그들의 고향에다 사당을 세우고 그 후손을 녹용하는 일, 13. 문과(文科)에 경서 이외에 《좌전》,《통감》,《송원절요》,《삼국사》,《고려사》 등 사서(史書)를 강하는 일, 14. 자제(子弟)를 중국에 보내어 입학시키는 일, 15. 기인(其人)이 나누어 번(番)드는 법을 혁파하고 제사(諸)司)의 외방 노비로 대신케 하는 일, 16. 외방의 분대법(分臺法)을 혁파하고 고핵(考劾)을 관찰사에게 전적으로 위임하는 일, 17. 각 진영에 현위(縣尉)를 두어 병무(兵務)에만 뜻을 두게 하는 일, 18. 고려 때의 좌보(左輔), 우보(右輔), 전보(前輔), 후보(後輔)의 예를 따라 양주(楊州)를 후보로, 수원(水原)을 전보로, 광주(廣州)를 좌보로, 원평(原平)을 우보로 삼아 서울을 더욱 굳건하게 하는 일, 19. 여러 도의 고을에 설치한 익진(翼鎭) 중에서 요해처가 아닌 곳은 없애거나 남겨두기를 상황에 맞추어 하는 일 등이었다. 상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국조보감(國朝寶鑑) 권 10권 세조조
"군명】 조선(朝鮮) 동쪽 해 뜨는 땅에 있기 때문에 조선이라 이름하였다. ○《사기(史記)》 주(注) 색은(索隱)에 이르기를, “조(朝)는 음이 조(潮)요, 선(鮮)은 음이 선(仙)이니 선수(汕水)가 있으므로 이름하였다.” 하였다. 왕검성(王儉城) 옛 기록에, 단군(檀君)은 이름이 왕검(王儉)이라고 하였다. 기성(箕城)ㆍ낙랑(樂浪)ㆍ장안(長安) 《당서(唐書)》에, “평양을 또한 장안이라 이른다.” 했다. 서경(西京)ㆍ서도(西都)ㆍ호경(鎬京)ㆍ유경(柳京) 최자(崔滋)의 〈삼도부(三都賦)〉에 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1권 평안도(平安道) 평양부(平壤府)
국조보감에서 조선의 행정구역을 한성을 상경(上京)으로, 개성(開城)을 중경(中京)으로, 경주(慶州)를 동경(東京)으로, 전주(全州)를 남경(南京)으로,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으로, 함흥(咸興)을 북경(北京)으로 정하는 일을 세조조에 상의 하였다는 내용과 서경이 지금의 시안(서안/장안)이라는 신증동국여시승람의 내용을 올렸습니다.
위에서 출처를 삼은 문헌은 나름 신뢰성이 있다는 문헌입니다. 그럼 국조보감에서 말하는 5경과 지금의 북경 / 남경과 동경(토쿄)은 정말로 아무런 상관이 없을 까요? 정말로? 그리고 평양은 지금의 서안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왜 엉뚱하게 평안남도의 평양만이 평양이라고 주장 할 까요?
다시 말해서 기록이 일제에 의해 부정되거나 파손 된 것도 있고 환단고기 같이 아예 인용 못하게 하는 것도 있는 반면에 신뢰성이 보장된 기록 조차도 왜곡하고 은폐하기 때문에 한국의 역사에 접근하기가 어려운 것 이란 말이죠.
단군조선이라고 하는데 단군은 이름이 아니라 직책을 말하는 것이란 것도 기록에 이미 있고 이름은 왕검이라고 하죠. 여기서 고려의 왕씨가 바로 단군왕검의 직계후예란 것을 알 수 있는데 뜬금없이 단군은 신화다라고 주장하고 왕검에 대해선 언급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왕건의 가계는 당나라 이씨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이 것을 설화의 형식을 빌려 왔다고 부정하죠. 이것을 긍정하면 이성계와 고려 왕씨의 연계가 드러나지 때문 입니다. 왕씨가 이씨고 고구려의 고씨 입니다. 단지 표현만 달리 했을 뿐...
그래서 화산 이씨를 고려조가 귀족의 신분으로 받아 들인 것이고 고려조에서 조선조로 변화 하면서 고려조의 중심 가문이 단 한 가문의 탈락없이 그대로 조선조로 이어졌고 단지 초기에 조선의 건국을 반대한 일부 가문이 탄압을 받았으니 곧바로 다시 중심으로 들었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여기 동아게에 올라와 있는 글 몇가지가 있는데
자세한 것은 직접 찾아보시고, 기억을 더듬어 종합적으로 대충 정리하면
1. 백제 사비성와 고구려 평양성에 당나라군이 들어와 성에 불을 질러 고구려, 백제 왕실 사서가 불타 없어졌다.
2. 후백제 견훤이 신라에 있던 사서와 민간에 있던 고구려, 백제 사서를 한 곳에 모아 두었는데, 견훤인가 견훤 아들인가에 왕건과의 전쟁에 지면서 성에 불이 나 타버렸다.
3. 조선시대 왕실에서 3번인가 4번에 걸쳐 민간에 존재하던 사서를 수거하였는데 일부는 태우고, 일부는 서고에 보관을 했다.
5. 일제에 의해 사서들이 수거되어 일부는 불 태우고, 일부는 일본으로 가져갔고, 일부는 내용을 수정하거나 삭제 했다.
수정 예로는 삼국유사에 환국을 환인으로 고친게 드러남을 예로 듬.
삭제 예로는 고려사를 드는데 조선 승정원일기 영조 때 기록에 고려사에 단군편과 제왕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지금의 고려사는 단군편과 제왕편이 없는 걸로 보아 일제 때 삭제되었을 거라고 함.
고려사 단군편, 제왕편 관련 다른 주장은 단군/제왕편이 없는 고려사 말고 단군/제왕편이 있는 고려사가 따로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음.
* 대한제국 때 호머 헐버트 박사가 황실서고와 민간에 있던 역사서들을 정리한 조선사 기록에 보면 환웅 때 부터 시작하는 걸로 보아 조선시대 3 - 4번에 수거령에도 살아 남은 책이 많이 있었을 것이라는 봄. 그런데 이런 책들이 지금은 아예 없음.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중화사상과 거리가 있는 고조선의 신선교를 배척했던 것으로 보이고, 조선의 세조, 예종이 책사냥(?)을 한 흔적이 보입니다.
세조 3년 5월 26일에 팔도 관찰사에게 내린 조서,
'<고조선비사> <대변설> <조대기> <주남일사기> <지공기> <표훈> <삼성밀기>, 안함로·원동중의 <삼성기> <도증기> <지리성모하사량훈>, 문태산·왕거인·설업 등 3인이 지은 <수찬기소> 1백여 권, <동천록> <마슬록> <통천록> <호중록> <지화록> <도선한도참기> 등의 서적은 개인적으로 소장할 수 없는 것들이니, 만약 갖고 있는 자가 있으면 진상하도록 하라. 대신, 원하는 책을 내려줄 것이다.'
예종실록, 1년 9월 18일자에는,
'책을 바친 자는 2품계를 높여주고, 상을 받기를 원하는 자나 공노비·사노비에게는 면포 50필을 주기로 한다. 만약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이 고발할 수 있도록 하고, 고발한 자에게는 위와 같이 상을 주고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한다.'
조선시대 후기에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라는 백과사전에서 '우리나라 서적의 수난(受難)에 대한 변증설'을 길지만 인용하자면,
'책이란 고금의 큰 보배이므로 때로는 조물주의 시기를 받기 때문에 항상 재난이 있는가 보다. 우리나라에도 책의 수난이 있었는데, 대강만 헤아려도 열 가지는 된다. 당나라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침략하고는 국내의 전적(典籍)을 평양에 모아 놓은 다음 고구려의 문물이 중국에 뒤지지 않는 것을 시기하여 모두 불태운 것이 그 하나이다. 신라 말기에 견훤이 완산주(完山州)에 할거하여 삼국시대의 전해 내려오던 책을 모조리 옮겨다 두었는데, 그가 패망하자 모조리 불태운 것이 그 둘째이다. 고려시대에 여러 번 전쟁을 겪으면서 그때마다 없어진 것이 그 셋째이다. 조선 명종(明宗) 계축년에 일어난 경복궁의 화재로 사정전(思政殿) 이남이 모조리 탔는데, 그때 역대의 고전(古典)도 함께 탄 것이 그 넷째이다. 선조 임진년에 왜적이 침입할 때 난민(亂民)과 왜적이 방화하여 불태운 것이 그 다섯째이다. 인조 병자년에 청나라 군사가 침입할 때 난민들이 방화하여 대부분 불탄 것이 그 여섯째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중국의 장수와 왜적이 경향 각지의 민가에 있던 전적을 모조리 찾아내어 싣고 간 것이 그 일곱째이다. 인조 갑자년에 역적 이괄(李适)이 관서(關西) 지방의 장수로서 군사를 일으켜 궁궐을 침범하여 그나마 약간 남아 있던 것마저 불태워 없어진 것이 그 여덟째이다. 우리나라 풍속이 책을 귀중하게 여길 줄을 몰라 책을 뜯어 다시 종이를 만들거나 벽을 발라 차츰 없어진 것이 그 아홉째이다. 장서가(藏書家)들이 돈을 주고 사들여 깊숙이 감추어 놓고 자기도 읽지 않으며, 남에게 빌려주지도 않아 한번 넣어두면 내놓지 않은 채 오랜 세월이 흘러 좀이 슬고 쥐가 갉아먹으며, 종들이 몰래 팔아먹거나 하여 완질(完帙)이 없는 것이 그 열째이다. 내가 일찍이 탄식을 금치 못하면서 책의 수난 가운데서도 장서(藏書)가 가장 피해가 크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