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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11-25 06:57
[한국사] 조선시대 토지 면적에 대해서...
 글쓴이 : 타샤
조회 : 3,426  

아마도 현재 우리가 쓰는 평 단위 같은건 일제가 확립한게 아닐까 싶어요.


우선 1마지기... 란 1말의 씨앗을 뿌리는 면적입니다. 키우는 양곡의 종류에 따라서 면적이 달라집니다.

논과 밭은 결 단위를 잘 아는데..
결 역시 수확량 단위라서 절대 면적은 다 다릅니다. 지역간에도 다르고, 곡물 간에도 다르고...

http://blog.naver.com/himnh/130008205425

저는 기본 단위인 파(把) 만 외우고 있는데 위의 블로그는 그 세부 단위가 다 나오네요.

블로그 들어가면 윗쪽에 나오지만 핵심 부분만 가져오면...

"논에서 벤 벼 한줌을 1把(파)라 하고, 10파를 1束(단), 10속을 1負(짐), 100부를 1(결)結이라 하였다."

그래서 1천 파 를 수확하는 땅이 1결입니다.
당연히 흉년이냐 풍년이냐 에 따라서도 갈리고, 뇌물을 주었느냐 안줬느냐에 따라서도 갈리고..
세관의 손 크기에도 갈리고...
땅의 질에 대해서도 갈립니다.

뇌물을 주어 1결의 면적을 크게 만들면 세금을 줄일 수 있죠.
힘없는 농민 땅에 다다러서는 태풍 피해를 입지 않은 곳에서 한줌을 세어...가면 세금을 더 뜯을 수 있구요.


블로그에도 나오지만 1등급 땅은 3200평 정도.. 가장 나쁜 6등급 땅은 12000평 정도가 1결 이라고 하네요.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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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wave 16-11-25 14:23
   
조선 시대가 원시 시대도 아닌데, 그렇게 주먹구구식으로 계량했을 것으로 생각합니까 ?

1 뼘의 길이를 1 척이라는 식으로 말한다 해서, 건물 공사하는데 손으로 한 뼘 두 뼘 재는 식으로 했겠습니까 ? 그런 설명은 그런 척도의 유래를 말한다는 식으로 이해해야 옳습니다.

위 글에서 말한 정도는 이미 링크하신 것보다 더 자세한 것들을 종합 정리해서 [  조선시대의 쌀, 논 면적 계량 단위, 한 끼 식사량 (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38061 ) ] 에 반영해두었습니다.

그리고 1 결이 3200 평이라는 것은 어떻게 해서 시작된 얘기인지 모르겠지만, 조선 후기에도 1 등급 1 결의 면적은 3000 평이 맞습니다.
     
eo987 16-11-25 17:29
   
두 분 모두 인터넷 검색으로 얻은 단편적인 지식으로 자꾸만 이야기들을 하시니 시대적 흐름에 따른변화를  잡지 못하시고 혹은 거의 망상에 가까운 짐작을 통해서 말들을 하시니 그냥 지켜보고 있긴한데 참...에이고..

일단 1결 3200평은 조선 세종대 정해진 6등법에의해 면적을 측정하던 방식 토지의 등급이 다르면 그 길이를 측정하던 자의 길이도 달리하던 수등이척법에서 이후 임진왜란을 거치고 영정법과함께 토지의 등급과 상관없이 모든 토지를 동일한 자로 척하는 그러니까 길이를 재는 양척동일법으로 바뀌면서 조금씩 오차를 단일화 하여 발생하여 차이가 발생한 현상이고요 현재 아키님께서 말슴하시는 1결=3000평은 말 그대로 세종시대 공법에 의해 정해진 규칙으로 물론 이 방법이 조선말기까지 표준으로 이용 되었지만 그렇다고 조선후기에 사용된 양척동일제가 틀린것도 아니에용 즉 수척이등법은 경국대전에 규정이 정해져있고 동일척제는 속대전에 그 규정이 명시되 있고용
          
archwave 16-11-25 18:17
   
숫자를 보고 계산하는 것인데, 무슨 망상에 가까운 짐작 ?

님께서 하시는 말이나 제가 하는 말이나 뭐가 그리 다른가요 ?

오히려 저는 숫자를 계산하니 더 정확하죠.

세종때 정해진 방법은 등급마다 줄자 자체를 다른 것 쓴 것이고,
그 이후 단일화한 것은 줄자는 같은 것을 쓰고 등급에 따라 가중치를 곱하는 식입니다.

1 등급은 단일화 이전이나 이후나 차이가 없어요. 둘 다 3000 평.

양척동일제가 틀렸다는 얘기를 하는게 아닌데, 왜 자꾸 남의 말을 이상하게 왜곡해서 엉뚱한 태클인가요 ?

양척동일제 이후로는 1 등급 1 결이 3200 평이라고 써놓은 곳이 많아서 한 얘기입니다. 그 이후에도 3000 평이라고 말하는 것임.
               
eo987 16-11-25 18:22
   
에이그 무슨말인지...
                    
archwave 16-11-25 18:25
   
가만 보면.. 님은 토씨 하나까지 님과 똑 같이 말하지 않으면 다 틀렸다는 식인거 같은데..

그런 식으로 고루하면 뭘 하겠습니까 ?

논문/책 많이 보신다 하시는데, 그런 경향이면 딱 하나의 논문만 맞고 다른 논문들은 같은 내용을 실어도 [토씨까지 같지 않다는 이유] 로 틀렸다고 하실 분이네요.
archwave 16-11-25 14:43
   
세종대왕 이전에는 평석으로 1 석짜리 용기 (91.7 리터) 에 20 번 채울 수 있는 양이 1 결이고,
그 이후는 전석으로  1 석짜리 용기 (122.3 리터) 에 20 번 채울 수 있는 양이 1 결인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황당한 글을 올리시는지 모르겠네요. 조선 시대가 그 정도로 주먹구구식으로 돌아가던 원시적 국가였다는 얘기를 하고 싶으신건가요 ?

곡물의 양을 재는 용기로는 홉, 되, 말, 평석, 전석등이 있었는데 왠 한 줌 두 줌 손으로 쥐어가면서 했을거란 황당한 소설을 쓰시는지 모르겠네요.
     
eo987 16-11-25 18:05
   
님 그리고 평석과 전석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으신데요 평석은 세종대왕 이전에 사용되었던 게 아니고요 그런 시대구분으로 되는게 아니라 평석은 조정에서 공식 사용되던 부피이고 전석은 시장에서 주로 사용하던 용량 구분법으로 이해 하시는게 맞아요 실제로 현재 우리가 알고있딘 조선석1=일본석2라는 것도 평석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 것이고요 삼국시대나 고려 중기까지만 해도 1석은 현재 기준으로 약 30kg~50kg 가량이거든요 그러니까 이것은 구분을 잘 해주셔야 해요
          
archwave 16-11-25 18:23
   
아직도 이해를 못 하고 엉뚱한 얘기를 하시는데.. 평석이 조정에서 쓰던 공식 부피이고 전석은 시장에서 사용했다 ?

1 결이 300 말이던 세종대왕이던 시대에서는 20 석 (평석) 이 1 결이 되는데,
1 결이 400 말이던 세종대왕이후는 26.66666 석 (평석) 이 1 결이 됩니다.

즉 중간 단위가 허공에 떠버리는거죠.

전석이 시장에서 쓰이던 것이든 아니든..

1 결에 400 말인 시대에서는 20 석 ( 전석 ) 으로 1 결을 계량할 수밖에 없음.
아니면 말 단위로 400 번 줄창 하든가..

즉 세종대왕 이후로는 공식이 아니라 시장에서나 쓰던 전석도 사용해야만 할 이유가 생겨버린거죠.

그리고 자꾸 이상하게 물고 늘어지시는데, 뭘 이해를 못 해요 ?
내가 이해 못 한다면, 저 아래 내가 쓴 글처럼 단위들 계산해서 교차검증까지 해서 글 쓸 수 있나요 ?
               
eo987 16-11-25 18:24
   
근거는요? 저는 서울여대 정연식교수님의 연구결과를 근거로 하고 있는데요?
님 정말로 제정신이신가요 이쯤되면 진심으로 의심이되네요?
                    
archwave 16-11-25 18:26
   
이게 무슨 근거니 뭐니 할게 있나요 ?

평석이 정부의 공식 단위라메요 ?

그럼 1 결이 평석으로 몇인지 말해보세요.

설마 세종대왕 이후 1 결이 400 말이 된 것이 아니란 얘기신가요 ?
                         
eo987 16-11-25 18:30
   
정신이 정말...이제는 좀 무섭네요 님이
                         
archwave 16-11-25 18:35
   
여러 말할거 없고, 세종대왕이후 1 결이 평석으로 얼마인지 말해보시라니까요.
                         
eo987 16-11-25 18:39
   
아키님 제가 말하는 것은 님이 평석을 말이나 두로 환산한 것을 지적한게 아니잖아요!
님이 인식하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말이죠
세종이전에는 평석을 사용하고 이후에는 전석을 사용한게 아니라 즉 시대에 따라 나뉘는 것이 아니라요 그건 사용관처에 따라 갈리는 것이라니까요? 님이 스스로 이야기 했듯이 조선2석=일본1석이 평석 75kg 기준인지 전석 100kg인지 한번이라도 좀 생각을 해보세요 참...
                         
archwave 16-11-25 19:27
   
거 남이 말하지도 않은 것을 갖고 멋대로 추측해서 말하는 버릇 좀 고치세요.

님의 말씀은 말하자면 평석, 전석에 대해 보충설명하시는 것에 해당하는데요.
그런 경우는 평석, 전석에 대해 추가 설명하는 식으로 해야 하는겁니다.

내가 언제 평석, 전석 용도에 대해 말한 적이라도 있었나요 ? 제가 한 말이 틀렸다고 물고 늘어지시는 형태를 취하면 어쩌라는건가요 ?

그 시대적 상황 어떤지 잘 아시면 [평석, 전석은 이런 용도였다] 말하시면 그만이지. 왠 엉뚱한 태클인가요 ?

조선의 1 결은 세종이후 400 말이었다는 것만 기억하면 혼선이 올 것도 없습니다. 저는 평석, 전석 구분지어서 생각할 이유도 없는 사람이에요. 석이란게 확실히 표준화된 것은 1905 년이니까 그 이후의 통계에서는 석 단위를 즐겨(?)사용하겠지만, 그 이전 시기의 통계에서는 [결] 과 [말] 위주로 생각하는 것이 저 같은 공돌스러운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님께서는 지금 제게 대체 뭘하고 싶으신건지.. 제 입장에서 보면 남의 다리 긁는거로밖에 안 보여요.
archwave 16-11-25 14:56
   
아래쪽 글에는 [10 만 주먹이 1 결] 식으로 황당한 얘기를 하시더니, 그거 측정하는 관헌이 일일이 10 만번씩이나 손으로 쥐어가면서 재는 것이 스스로도 황당하니 이 글에선 뺀건가..

그럼에도 역시 [세관의 손 크기에도 갈리고...] 이런 황당한 얘기.

세종 이전에는 300 말이 1 결, 이후는 400 말이 1 결이었습니다. 1 말은 아래 글에도 써놨지만 6 리터쯤이고요.

400 번만 퍼서 재면 그만인 것을 손으로 10 만번이나 쥐어서 재나요 ? 말이 안 되죠.

그리고 매년 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20 년주기였죠. 당연히 그 동안의 평균 수확량을 기준으로 하게 되는겁니다.
     
eo987 16-11-25 18:05
   
세종이전이 아니라 세종시대 초기에도 즉 공법논의의 결과로 전분과 연분법이 정해져 있기 전에는 고려시대의 관습을 이어받아 단순히 논과밭을 구분하지 않고 1=300말로 한것이에요  한 마디로  전제개혁당시 과전법에 의한 전조율을 그대로 수용한 것인거죵
그리고 님 약간 이해가 안가는데 경국대전을 보면 1결당 생산량을 쌀40석 콩40석으로 하거든요 ? 그런데 세종 26? 년경에 도량형이 변경 통일되어서 1석=15말이되고 평석으로
그렇다면 600말인데요? 왜냐하면 경국대전은 1470년대 완성이 되니 거의 30년 차이니까요!
          
archwave 16-11-25 18:28
   
에고 당연한 얘기 갖고 계속 물고 늘어지실래요 ?

세종이 1 결을 400 말로 바꿨죠. 그런데 세종대왕이 즉위하자 마자 즉시 1 결을 400 말로 바꿨나요 ?

당연히 세종 초기에는 1 결이 300 말이던때가 있죠.

그럼 그 시기를 구분하는데.. 그냥 세종 이전, 이후 이렇게 말하는데 무슨 무리가 있나요 ?

별걸 다 시비거는구만.
               
eo987 16-11-25 18:30
   
-_- ㅎㅎ 이런 사람을 상대하고 있었으니...저도 참.. 다른분들 이 왜 님한테 무플을 하고 제게 충고를 해주셨는지 이제 알겠네요
archwave 16-11-25 17:09
   
그 시대는 80% 가 농민이었다는 말도 있죠.
인구 이동도 극히 적고, 인구 밀집지역이라도 만명 수준 인구이고, 한 마디로 말해서 아무개 집에 숟가락 몇 개까지도 다 알고 지내는 사회였습니다. 지방 관료들 역시 실무진은 모두 그 지방 토박이였고요.

요즘처럼 기계화된 것도 아니니, 모두들 같이 모여서 하루는 누구네 집 논/밭에 가서 일해주고 다음날은 누구.. 그런식이었습니다. 누가 얼마나 수확하는지 뻔히 알던 사회란 얘기죠. 관청의 실무진들도 모두 다 그렇고요.

"철 들었다."는 말의 유래는 아시나요 ? 언제 씨뿌리고 언제 뭘 해야 할지 알게 되는걸 두고 한 얘기임. 요즘 사람들은 반농담으로 "쌀이 나무에 열리는줄 안다." 는 말이 있을 정도지만, 그 시대 사람들은 농사에 대해 모를 수가 없었음.

한 지역의 관청 실무진과 모든 사람이 다 작당한다 쳐도, 다른 지역과 비교되기 때문에 속이기도 쉽지 않았을 시절임. 그리고 조선의 세금은 10 % 수준이었다는 말이 있더군요. 뇌물 주면서까지 속여야 할 동기도 적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밭의 경우는 존재 자체를 숨기는 것이 가능했을지 몰라도, 저수지/수로를 통해 물을 끌여들여야 하는 논은 숨길 수가 없는 겁니다. 농사철되면 물 때문에 싸움질이 많았다는 얘기는 못 들어보셨나요 ? 현대에도 물 갖고 분쟁나는 일이 많습니다.
     
eo987 16-11-25 17:43
   
80%가 농민이었다는 제가 한 말 같은데요 그건 어디까지나 일본의 메이지혁명 근저의 통계고요
도시가 상대적으로 미발달하고 농업경제를 권장했던 조선의 경우는 일제초기의 통계를 보면요 그시대까지도 무려 84~86%의 직업이 농민이에요 하다못해 일제말에도 80%고요
그리고 당시 저수지 수로등도 모두 여지도서라고 해서 조선왕조에서 조사한 서적이 있어용 당시의 상황을 잘 모르시니까 그냥 또 어림짐작으로 이야기를 하시는데요 당시의 농업환경에서 저수지나 수로를 구비한 논의 비율 그러니까 천방등의 자연 시설을 이용하지 않고 인공적인 관개시설을 갖춘 논은 전체 면적으로 따지면 10%도 힘들어요 에유....공부를 하셔야 되는데 이제 정말 간섭하지 않겠지만 님의 지식은 정말로 인터넷에서만 통할 지식이네요 지식을 얻드시는 경로도 그렇고용.
          
archwave 16-11-25 18:33
   
뭘 당시의 상황 몰라요 ?

일제시대는 고사하고 광복 이후에도 천수답이란게 남아있었죠.

지금 인공관개시설 있는 논, 천수답 그거 따지는 중이었나요 ?

자연시설을 이용한 논이든 뭐든, 농촌에서 논의 존재를 숨기는게 가능했으리라 보시나요 ?

저 위에 내가 댓글로 단 것은 인공시설이든 자연시설이든 물이 필요한 논은 숨길 수 없는 존재란 말을 하는겁니다.

----

그리고 조선 후기 농민 비율이 80% 보다 많았다 ? 뭐 제 생각보다도 훨씬 발달하지 못 했단 얘기네요.
               
eo987 16-11-25 18:37
   
이건 뭐 대화를 하다 자신의 말은 위에 적혀 있지도 않은데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는 식으로 개입을 시키니 ㅎㅎ 처음이네용 정말 님같은 분은 ㅋ
                    
archwave 16-11-25 19:39
   
천방이란거 어떤건지는 알고 말하시나요 ?

http://www.koreanhistory.org/%EB%86%8D%EC%A7%80%EA%B0%9C%EA%B0%84-%EC%B2%9C%EB%B0%A9%EA%B3%BC-%ED%99%94%EC%A0%84-%E2%91%A1/

위 글 읽어보시면 [천방] 이란 것을 잘 알 수 있는데, 이 천방이란게 저수지/수로 체계와 뭐가 그리 다른가요 ?

저수지는 인위적으로 물을 모아놓는 곳을 만드는 것이고,
천방은 물이 있는 근처에 물을 모아놓는 곳을 만드는 것이죠.

[물을 모아놓는 곳] 을 만든다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천방도 자연시설이라고만 할 수 없는거에요. 손이 (투자가) 얼마나 필요한가 차이죠.

용도로 보나 뭘로 보나 천방도 저수지인겁니다. 그 천방에서 논으로 물을 이동시키려면 수로가 필요한거고요.

거창하게 토목공사급으로 해야만 인정되는건가요 ?

정말 별 희한한 걸로 다 태클 걸어오는데.. 질리네요.

앞에서 내가 저수지/수로 언급하면서 말한게 뭔가요 ? 숨길 수 없다는 점을 말한거죠.
천방은 숨길 수 있는 것이기라도 하나요 ?
eo987 16-11-25 17:55
   
또 무슨 말씀을 하실지 기대는 되니까 확인은 할께요 댓글요 ^^
eo987 16-11-25 18:47
   
정말 상대할만한 분이 아니네요 솔직히 과연 일반인과 같은 생각을 하고 사시는 건지도 의심그럽고요 저로서는 다른분들 쪽지나 충고를 모두 무시하고 좀 제대로된 지식을 이야기 하실수 있게끔 하고 싶었는데 도저히 불가능 하다라는 걸 알겟네요 이제...에이고..정말 2틀동안 이런 분을 상대로 참...
     
archwave 16-11-25 19:32
   
관심사가 다른거에요.

제가 아래 쓴 두 개의 글 읽어보세요. 저는 숫자에 관심이 있고, 실제 그 시대 생활이 어땠는지 관심이 있는거지. 무슨 역사는 어쩌고 저쩌고 그런거 관심없어요.

해석이 어떻게 붙든 숫자는 숫자. 님 같은 분들은 숫자에는 관심없거나 무시하고 [해석] 을 어찌 하는지를 놓고 날 새는거 같은데, 저 같은 사람이 보기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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