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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11-20 10:48
[한국사] 왜 조선시대 인구가 이모양밖에 안되었을까요?
 글쓴이 : eo987
조회 : 6,066  

근대적인 방법으로 조사한 것이니 정확성은 분명하다면용.~
일본보다 경지면적부터 생산성 그리고 이걸로 인해서 생산량도 더욱 많은데 
어째서 인구가 절반이나 60~70%밖에 안되었을까요??
블로그님은 앞으로 한국의 역사인구학? 이라는 학문이 시작되서 많이 발전된 다음에야 
이유가 밝혀질수 있다고 하는데 너무 궁금하네요 궁금해...합리적인 이유가 뭘까요?



1.jpg


*서문과 통계를 연관하여 이해를 돕기위해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다.1764y 를 보면 상:양반가족 / 하:하인가족 의 식사량을 보여준다. 이것이 당시 남녀노소의 구성의 일반적인 식사량 이라고 가정할수 있다면 이들 14인이 연간 소비한 식사량은 총 350.7(두)x4.9(kg)=1718(kg)/150(kg)=>11.45(석)이다. 즉 14=11.45(석) 그리고 이를 위의 곡물작물+보조식량을 합산하여 42,682,117(석)임으로 /11.45=3,727,695x14=52,187,741(명)이된다.하지만 대한제국 초입경의 조선의 인구는 불과 1,500~1,600만(명)에 불과했고 표의 메이지11y의 일본 인구는 36,464,000만(명)이다.물론 투박한 대입이지만 그럼에도 생산량과 인구차이의 극심이 여실하다

1.jpg

[출처] 조선시대 인구 - 총 생산량 사이의 괴리|작성자 zajo0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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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 16-11-20 12:28
   
임진왜란때 전체 인구의 몇%가 커팅되었는지 보고오세요
     
eo987 16-11-20 12:36
   
그건 그런데 학문적 연구가 아니잖아요 그냥 추정이지 말 그대로 대충 대충 감으로 시도한
촐라롱콘 16-11-20 12:31
   
통계조사 대상이 된 시기가 대략 18~19세기인 것으로 나오는데,
어떻게 곡물을 포함한 조선의 총 식량생산량이 일본과 별 차이가 안나오게
나타난 것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네요...!!!

18~19세기 당시 쌀로 환산한 총 식량생산량이 조선은 대략 3,000만석미만이었고
동 시기 일본은 대략 6,000만석이라는 통계 자료를 접한 기억이 나는데......

당연히 인구도 18~19세기 당시의 조선인구는 1,500만 정도(다소의 + - 차이는 나겠지만...)
동 시기 일본은 3,000만명을 찍고 있었습니다. 

두 나라 모두 농업국가에다가, 대다수 일반백성들의 식생활도 곡물섭취위주인 데다가
반대로 단백질 섭취가 상당히 부족했던 비슷한 측면을 보였다는 점들을 감안하면.....
총식량생산량에서의 2배 차이가 인구에서도 그대로 적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eo987 16-11-20 12:34
   
일단 무슨 기본 사실관계도 틀린 말씀을 하시는 것인가요?
무슨 18~19세기에요? 에이그,...
그리고 어디서 본 기억이라니요? 제가 님 기억을 믿어야 되요 근거도 없이 참...
이런 태도로 ㅉㅉㅉ 정말~ 아무것도 모른체 용감하다는 생각도 들고

또 어디서 그런 통계를 접하셨어요?
전 여기인데 http://blog.naver.com/zajo0/220837088565 에유~
          
촐라롱콘 16-11-20 14:12
   
바로 님이 위에 올려놓으신 자료에서 첫번째 곡물,보조식량,구황작물,무-배추 등으로
품목별로 세분화시킨 생산량자료를 올려 놓으셨고.....

오늘날의 학자들이 통계를 잡을 수 있는 근거자료로 삼을 수 있는 시기가 조선후기와
일본에도시기 이후부터이며 그것도 품목별로 세분화된 자료수집을 할 수 있는 시기는
적어도 19세기에는 이르러야 오늘날 입장에서 다소 정확한 연구가 가능한 사실인데......

그리고 님이 올려놓으신 두번째 표가 18~19세기의 자료를 담고 있지 않습니까....???

님이 올려놓으신 통계자료의 시기에 맞추어서 나름대로 개인적인 답변을 올렸는데
무슨 18~19세기라니....??? 이 무슨 뚱딴지 같은 말씀입니까....???

그리고 님이 링크올린 주소에 의한 자료에서 경지면적만으로도 동시대의 일본이
조선보다는 다소 우위인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렇다면 단위면적당 곡물생산량이 당연히 일본이 조선보다는 우위에 있었으니....

부연설명하여 왜 단위면적당 곡물생산량이 조선보다 일본이 우위에 있었는가 하면....

일본은 조선과 비교하여 경지면적에서 논이 차지하는 비중이 조선의 1.5배에 달했으며
(당연히 논에서는 주로 쌀을 재배하며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가장 높은 작물이 쌀이며
벼농사는 밭농사에 비해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1.5배 이상인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기본사실이니까 패스......)

추가설명하자면 큐슈 등을 비롯한 일본남부지방은 대체로 조선보다 위도가 낮아 
벼농사로만 1년에 2모작을 할 정도로 조선보다는 기온이 온난하고 토지가 비옥하고
강수량이 풍부하여 자연환경만으로도 조선보다 우위에 있으며.....
 
그리고 에도시기에는 천수답이 아닌 수리시설에 의한 농업체계가 완연히 자리를 잡았으며
태평양연안에서 어획되는 수많은 정어리 등의 어류를 비료로 활용한 농법이 보편화되었고
품종 또한 조선보다는 상대적으로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뛰어난 다수확품종이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이 일본에 문호를 개방하고나서 불과 20~30년 정도 흐른 19세기가
저물어갈 무렵에는 조선남부지역의 상당수 품종들이 일본품종으로 교체되었을 정도로
일본의 다수확종자가 조선품종보다는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우위에 있었습니다.
               
eo987 16-11-20 14:22
   
님 통계의 의미를 모릅니까? 아래 2번째 표가 통계에요? 첫번째 표가 통계지! 별 ...
그리고 첫번째 표의 통계는 블로그 들어가 보시면 아시겠지만 일본은 메이지11년 이고 조선은 1918년 그러니까 토지조사사업이 끝난 년도의 근대적 통계법에 의해 집계된 수치에요 지식이 없으면 이상한 말씀을 안하시고 계신다면 중간이라도 가죠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파악도 못하고 그러시는지요..

그리고 뭘 근거로 단위면적당 곡물생산이 일본이 조선보다 우위에 있어요? 대체 무슨 망상같은 소리를 중얼중얼 제가 님의 망상과 이야기 할려고 힘들게 펌질 한게 아닙니다

뭘 근거는 없이 역갤같은데서 귀동냥 하신말을 주절주절

"벼농사로만 1년에 2모작을 할 정도로 조선보다는 기온이 온난하고 토지가 비옥하고
강수량이 풍부하여 자연환경만으로도 조선보다 우위에 있으며....."

이걸 지금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에요? -_-
그리고 끝에 말은 어디 나와있는 내용이에요? 그야말로 망상이네...망상
진짜 같은 인간으로서 회의가 느껴지네요

"경지면적만으로도 동시대의 일본이
조선보다는 다소 우위인 것으로 나타나는데..... "

이건 어그로인가요? 지금 어그로 시전중이세요 혹시?

충고하면서그냥 뭘 모르시면 가만히 계세요 기본적으로 글을 줘도 제대로 파악도 못하시면서 이상한 말씀 삼가해주시고요 남이 힘들게 펌질해오면 기본 태도가 그 글이 뭐고 내용이 뭔지 정도는 파악하는게 예의지 님 정신만족 할려고만 하면 안되요 정말

그리고 정어리비료를 금비라고 하는데 님 뭐가 보편화에요? 대체
그건 특정 면화등에 상품작물에만 사용되던 값비싼 비료인데? 님 지식의 근거가 대체?
님 뇌속? 에이그 진짜...
                    
촐라롱콘 16-11-20 14:35
   
["벼농사로만 1년에 2모작을 할 정도로 조선보다는 기온이 온난하고 토지가 비옥하고
강수량이 풍부하여 자연환경만으로도 조선보다 우위에 있으며....."]

누가 보면 일본 전 지역이 조선보다 우위에 있다고 적은 줄 알겠습니다....^^
분명히 바로 위 제 답글에서 한정했습니다. [큐슈 등의 일본 남부지역에 한정해서는...]
이라고....

그리고 제가 님에게 욕을 한 것 도 아니고 그런 정도 문투가지고 인간으로서 회의가
느껴지신다니....^^ 아직 세상을 별로 살아보지 못하신 10대라면 이해라도 하겠지만..

20대 이상이라면 그 정도 가지고 회의가 느껴지시면 이 험악한 세상 어찌 살아가시려고
~~ ^^
                         
eo987 16-11-20 14:36
   
님 그러니까 위도가 낮으면 농업생산성이 높다고 생각하는거에요? 혹시?
어이가 없네 정말....제 지난게시물 찾아서 보시길 바라고요 우선은
그리고 일본이 같은 작물을 두번심는 이기작을 했다고요? -_- 점점 새로운 학설 창조네..

남 걱정 하시기 전에 우선 머리에 지식을 쌓으시는게?
말 그대로 그 나이 먹으셔서 지식의 수준이 그래서야....음

온통 오류투성이에 근거없는 막연함에 약간의 망상적인 추정에...ㅉㅉㅉ
                    
촐라롱콘 16-11-20 14:41
   
내가 무슨 역사로 밥벌어먹고 사는 사람도 아니고.... ^^

지식수준이 낮다고 님에게 비난받아야 할 이유가 있나요....^^

자신보다 지식수준이 낮은 이들은 무시하고 보는 사고방식을 지니신 분이시군요...^^
                         
eo987 16-11-20 14:44
   
아니요 단순히 지식이 낮은 걸 탓하는게 아닙니다 그 말도 문제가 있으세요 어차피
저 게시물도 제가 작성한 것도 아니고 작성할 능력도 없어용~
그런데 저는 적어도 남이 정성스럽게 뭔가를 했으면 오해나 억측을 하지 않기위해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그 말이 맞는지 찾아도 보고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몇번이고 보기는 해요 그게 인간으로서 기보 태도니까요 그런데 님은 지금 뭐 하시죠?
님 제가 펌한글 원문 들어가서 한번이라도 제대로 안 읽으셨죠 그러니까 연대도 전혀 파악 못하고 심지어 통계가 아닌 걸 억지로 통계라고 하고요? 심지어 경지면적이 일본이 높다니요 .....그러면서 남의 인격을 뭐라할 자격이 있으신가용? 정말 의문이네요 저는요
                         
촐라롱콘 16-11-20 14:47
   
그냥 한가할 때 들어와서 그냥 기억나는대로 두서없이 쓴 글 가지고

뭘 그리 작정하고 덤비십니까....^^ 어짜피 하루이틀 지나면 내가 썼는지도

모를 정도로 기억속에서 사라지는 글 가지고......
                         
eo987 16-11-20 14:47
   
그런 태도이군요
근데 저는 그런 짓은 못해서요 죄송하지만 (__)
                         
4번째정지 16-11-20 16:17
   
태국의 한 대학 님아...  그동안 님의 댓글을 계속 봐온 저로서는 님께서 지금까지 계속 같은 주장의 댓글들을 달아왔음을 보아왔습니다.
때로는 반론을 말하는 이에게 987님보다 더한 면박성 멘트를 날리면서요.
그냥 왜뽕이거나 역갤러겠거니 했습니다만 지금의 댓글은 마치 자신이 지나가다 잠깐 댓글놀이 하신것같이 말하는군요.
태국의 한 대학님께서는 지금까지 동아시아 게시판이나 기타 여러 게시판에 조선과 왜섬에 대해 일관적으로 위의 댓글들과 비슷하거나 같은 의미의 글들을 반복해서 쓰시며 왜곡해오셨습니다.
                         
꼬꼬동아리 16-11-21 20:01
   
니 지식수준이 문제가 아니라 뭐 이것도 문제되나?  니가 지식도 역사적인 팩트도 지식도 모자르면서 한까에 일뽕짓거리하는게  문제인거다 알겠냐 히키코모리
               
꼬마러브 16-11-20 14:26
   
제가 알기로 당시 일본의 논과 밭 비율은 학자들마나 연구결과가 편차가 커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논과 밭의 비율이 6대 4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700년의 농지 면적은 282만 헥타아르 60%가 논이라고 하고 반면 논의 면적은 169.2만ha 인구는 28,287,200명, 인구 1인당 경지면적은 0.598反, 에도시대 단위 면적당 쌀생산량 190kg/反을 고려하면 0.758石/反
여기에 쌀생산의 50퍼센트 이상을 세금으로 착취했던 것까지 감안하며
당시 일본의 1인당 쌀생산량은 1년기준 0.228석 입니다
당시 조선은 1인당 1년기준 1석이에요

조선과 에도시대의 세금 관련


조선왕조가 1결의 토지에서 수취한 稅가 1결의 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들 수 있다. 태조는 생산량의 1/10을 기준으로 1결의 논에 현미 30두를, 1결의 밭에 콩 또는 잡곡 30두를 부과했다. 1430년경 세종은 생산량의 1/20을 기준으로 1결의 논에 현미 20두를, 1결의 밭에 콩 또는 잡곡 20두를 부과했다

당시 생산량의 50퍼센트 이상을 세금으로 수탈했던 일본가 대조되지 않나요?
               
꼬꼬동아리 16-11-21 16:31
   
ㅋㅋㅋ 대단한 일뽕 원숭이 ㅋㅋㅋ 여기서도 관심끌고 있냐 매일 니생각말고 팩트를 들고 오란말야 무뇌충아
     
꼬마러브 16-11-20 13:39
   
제가 그 부분에 대해서 공부를 해보았습니다.
18~19세기면 한반도는 조선후기이고 일본은 에도막부시대인데
당시 조선의 쌀생산량을 측정하기 앞서 탈세전(혹은 은결)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전세의 부과대상에서 부정,불법으로 누락시킨 토지를 말하는 데 중요한 것은 이 탈세전이 조선후기에 가면 성행하게 되어 정확한 쌀생산량을 알기 어렵다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 기록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세종대왕시기의 쌀생산량을 회복하였거나 혹은 기술의 발달로 더 생산하였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당시 일본의 석단위와 조선의 석단위가 다릅니다. 그러나 대충 계산해본 결과 일본식 석 기준으로
세종대왕 시기 때 대략 2000만석~2500만석을 생산했던 것으로 계산되고
당시 일본은 학자들마다 농지와 인구에 관해 편차가 커 정확히 말할수는 없으나 1700년 기준으로 대략 3000만석 약간 안되게 생산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의 역사학자 北島正元의 논문을 보면
して日本の水田と畑の割合は 6:4 位を維持しています. 1874年以前の日本の農地と人口に対しては研究機関と学者たちごとに偏差が大きくて論難が多いですが 1700年を基準でよく見ましょう.
1700年の農地面積は 282万ha 60%が田だと言ったら水田の面積は 169.2万ha 人口は 28,287,200人, 人口 1人当り農地面積は 0.598反, 江戸時代単位面積当たり米生産量 190kg/反を考慮すれば 0.758石/反
1700年 0.758石/反の米上がり高以後日本でどんな仕事が発生しましょうか? 次のグラフを見ましょう.
 
당시 일본의 1인당 쌀생산량에 세금을 공제하면
에도시대 일본의 백성들은 1년에 1인당 0.228석으로 삶을 연명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조신은 1년에 1인당 1석..(조선인들이 중국과일본인에 비해 밥을 세배정도 더 먹은 것도 고려 해야할 듯
당시 조선은 일본과 쌀생산량은 얼추 비슷한데 일본보다 인구가 2분의 1가량 적고 다이묘들간의 전쟁이나 수탈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 비추어 보았을 때
에도시대 일반 백성들의 삶은 조선에 비하여 형편없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님도 에도시대 역사를 공부했다면 알겠지만 1720년부터 1840년까지 일본에서는 비참한 기근이 연속적으로 발생합니다. 이것도 고려해야 돼요

 日本歴史にいて惨めな飢饉が 1720年から発生し始めます.
日本学者たちは気象條件が良くなかった. と日本愚民の心をなぐさめるが
「郷村の百姓どもをば死なぬ様に生きぬ様に合点いたして収納」(東照宮上意)の結果,単位面積当たり米生産量が 0.758石/反(税金を控除すれば 0.38石/反 ) 以下に減ると 1840年まで飢饉が連続的に発生するようになる.
1880年 480万トン 明治13 1880年 人口 36,649,000 人 131 kg/1人 0.873石/1人
또한 얼마전 도쿄에서 에도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인골이 1만여구 발견되었는데 이들의 평균 키는 남성이 150센치대 반으로 여성은 그것보다 10cm가량 작은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는 고대 일본의 조몬인들보다도 키가 작은 것입니다.
또한 발굴된 1만여구의 인골이 전부 만성적 영양실조로 확인되었습니다. 특히 상당수가 일본도에 의해서 살해당하거나 매독으로 사망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인신매매도 성행했습니다
에도시대의 장녀 이외의 여성은 가족의 빈궁한 삶에 의해서 살해되거나 인신매매로 전국 각지의 유곽에 매춘부로 팔려 나갔습니다.
江戸時代の女性は家族の貧しい生によって殺害されるとか人身売買で全国各地の遊郭に売春婦に売れて行きました.
 
즉 결론은 에도시대는 일본 역사상 최악의 시대라는 겁니다 백성들의 삶은 정말로 참혹했습니다.

Ps 잡설로 당시 -이불-같은 것들도 일본에서는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시야 등장함. 대부분의 백성들은 이불없이 멍석이나 돗자리에서 잠들음
그 집이라는 것도 비좁은 공간에서 여러명이 생활하는 연립주택이 대부분
          
햄돌 16-11-20 20:29
   
에도인들이 고대 조몬인들보다 키가 작으면 정말 못 먹었다는 얘기가 되는데..
          
아스카라스 16-11-20 22:31
   
나무껍데기 뜯어먹던 빈곤의 상징 보릿고개가 일본보다 훨씬 나았네요..
두부국 16-11-20 15:07
   
인터넷에 있는거라고 전부 정확하지는 않죠

인터넷에는 왜곡된 자료가 넘치기 때문에요
     
eo987 16-11-20 15:11
   
인터넷 자료라는게 모두 학자분들의 책에서 나오는 내용들이죠 결국
그래서 명확한 근거와 출처가 있어야 되고 말씀하신 것처럼 왜곡부터 그냥 생각 등
자료라고 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한 것들이 넘치니까용 ^^
특히나 저는 정말로 위아부분들이 인터넷에 득실거리는게 느껴져요 가생이 시작하면서...
          
킹캡틴 16-11-20 16:53
   
어느정도 지적수준이 있으신분 같은데 인터넷 예절은 실망스럽군요.
               
eo987 16-11-20 20:04
   
제가 좀 흥분했나보네용...불편하셨다면 죄송요.
정욱 16-11-20 18:45
   
불로그 은 primary 소스가 아닙니다.
20cFox 16-11-20 20:17
   
왜구의 침략,홍건적의 난,몽골의 침략,임진왜란,병자호란,일제감정기.. 수 많은 외침 때마다 많게는 인구의 몇십퍼센트가 줄 정도로 학살을 했죠. 우리나라 역사는 다른한편으론 외침에의해 학살당해 온 역사라고 할 수 있음..
     
햄돌 16-11-20 20:32
   
그 외침 몇번 가지고

학살당해 온 역사라니...

한국이 학살당한 역사면

옆나라 중국, 일본은 그냥 수천년간 노예만도 못 한

역사겠구만...
          
니얼굴노잼 16-11-20 22:29
   
이십쉐키폭스 이거 일본인임 빼박 100%
               
4번째정지 16-11-20 23:50
   
지난세기 여우 입니다. ㅋㅋㅋ
     
뚜리뚜바 16-11-21 12:23
   
앗 이십 새기폭스님 아니심 ㅋㅋ 수고하심
아햏햏햏 16-11-20 23:52
   
조선인구가 침략에 의해서 많이 줄은것도 있지만 일본은 오랜내전으로 인구 병사 혹은 노동력을 보전하기위해 근친혼을 장려했음 부모+자식 결혼 가능  자식+자식 결혼도 가능했고 요바이 훈도시오야 첫경험 하는것인데 첫경험 상대가 없으면 부모가 첫경험 시켜주기도 했다고 근친혼 관련글읽을떄 봤음 그외에도 훈도시 기모노 애아빠가 누군지 모를정도록 ㅅㅅ 장려했음 그러다 내전이 끝나고 에도막부때 평화 오래 지속되니까 일본 인구수가 급격하게 불어난거 흔히 일본사람볼때 치열이 고르지 못한사람이 많이 보이는 이유가 근친혼을 많이하니까 똑같은 열성 유전자만 받다보니 생기는 현상이라고 말하기도함
rozenia 16-11-21 02:27
   
위정자들의 정책이 착취형인가 아닌가의 차이도 중요한 부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본도 쇼군예하의 각 장군들과 번들의 지역지배세력이 토지를 거느리고 병력을 운영하지만 상공업적인 면에서 우리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뭐랄까 부자아빠가 운영하던 공장의 소유주는 아들때에 이어받는것 처럼 주인과 소유에 대한 개념이 강했을뿐 세금이라든가 곡물량을 몇배로 가져온다든가 조선의 양반들보다 몇배는 노멀했습니다.

더불어, 우리나라의 인구유동이 폐쇄적이기에 장시나 보붓상이 부분적인 해소를 해주는 정도였지만 일본의 상거래와 경제, 금화유통, 물량 및 물품의 이동은 우리에 비해서는 굉장히 자유로웠습니다. 더불어 일본의 노비는 일종의 돈을 받고 일하는 직업군에 가까워 일정기간 돈을 벌면 스스로 노비라는 직분에서 벗어나기도 했습니다. 즉, 나라의 물산과 통화, 인구 등의 변화와 유통이 활발했고 더군다나 데지마의 네덜란드상관을 비롯한 제한적인 대외무역도 유지되었죠.

내부적으로 끊임없는 전쟁이었다고 하지만 토지를 초토화하고 전국을 황폐화하는 식의 전쟁보다는 해당지역의 세력간의 우열을 가리고 승패가 갈라지면 지도부만 제거되고 그대로 부대가 흡수, 지역입장에서도 지도자가 바뀐 것일 뿐 그대로 하던 일 하면서 사는 격으로 전쟁기간 동안 우리나 중국의 내정상황 보다 멀쩡하게 해당지역들이 보존됐으며 이러한 지속적인 전쟁은 문화적으로 태생적으로 다산을 장려하는 분위기를 만들었고 삼국시대 때만에도 보잘것 없던 일본이 최소한 인구에서 압도하는 상황을 만들었다고 봅니다.

우리도 전쟁이야 있었지만 어느시대를 막논하고 출산을 장려하진 않았죠. 조선을 건국한 정도전 조차 매년 평균치 인구대비 국내 식량과 소모물량을 추산했지 증가하는 인구라든가 정책적으로 증가를 할 엄두를 못냈습니다. 생산량이 일본의 반이어도 실제로 민중에도 돌아가는 식량이 그정도는 아니었으니까요.

항상 수탈되는 양이 있었고 굶주리는 편이었죠. 세종이나 몇몇 임금시절을 제외하고는 항상 굶주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더불어 알고 계시듯이 조선중기를 넘어가면서 양반이 말그대로 악덕지주화되는게 당연시되면서 상식적으로 생활이 좋아지기보다는 나빠졌죠. 당연히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게 이상한거겠죠.

반대로 쇼군시대의 전쟁이 이어졌지만 일본의 민생은 대대로 안정적인 편이었습니다. 수탈의 개념보다는 일본의 위정자들은 소유권에 더 집착했죠.

뭐 사견입니다.
     
eo987 16-11-22 08:11
   
말씀하시는 것에 일부 충분히 수긍가는 점도 있지만 조선시대 세금의 비율은 기본적으로 고려시대부터 십조법이라고 해서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 언제나 1/10이에요 이런 학계의 그야말로 정설인데...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작성한 조사표 보면 조선생산량의 절반이라는게 일본인데요....
조선이 아니고 이해를 거꾸로 하신게 아닌지....
     
구름위하늘 16-11-22 09:46
   
일본의 상거래가 자유로웠다에 대해서는 제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소설 '대망'에서 나오는 분위기와 형태로는 의심이 갑니다.

대망에서는 거주민의 유동이 거의 불가능한 분위기이고
소설 상의 상거래는 특정 도시의 상인으로 제한되어 나옵니다. (도시 이름은 기억나지 안네요)
대체적인 느낌은 르네상스를 주도했던 베네치아의 상인과 같이 상업도시가 따로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고려시대 개성상인 처럼 국가의 상거래를 담당하던 상인이라면 그런 수준의 자유로운 상거래가 가능하겠죠. 

정말 그런 특수도시 외의 일반 거주민 상인의 해외나 타 번과의 상거래가 자유로웠던 것이라면 알려주십시오.
          
eo987 16-11-22 12:01
   
일단 일본의 상인의 시작은 기본적으로 일본에서 율령제가 해체되는 헤이안시대 말기 즉 율령체제에서 지역단위의 장원체제로 전환되면서 영주에게 복속되어있던 하인이나 기타 예속신분인들이 영주의 명을 받아서 지역단위의 거래를 하던 것을 시초로 삼고 있어요 그래서 이들의 조합인 "좌"의 출현은 13c이지만 당연히 당시 서구의 길드와는 매우 다른 사회적 위치이고요 더군다나 당시 일본에서 역을 통한 도로의 정비도 매우 후진적이었고 에도시대까지도 이동의 자유나 직업의 자유 심지어 작물의 자유재배까지도 다이묘의 제한을 받고 있었기에  이에 따라 당연히 정인이라고 부르던 도시민이나 상인또한 막부에서 허가한 사람들로만 할수있던 직업군으로 자유가 무엇의 기준인지를 모르지만요 상거래의 자유라는 것은 지역내에서 열리던 시장에서만이 허용된 뿐이었죠 ^^
archwave 16-11-21 10:37
   
글쓰신 분이 가져온 자료의 정확성은 일단 넘어가고요. 그 자료가 정확하다 해도 고려해야 될 요소가 많습니다.

우선 당시 일본은 고기 먹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가축을 키워서 잡아먹는 것은 엄청나게 비효율적이죠.
육식을 금지함으로서 좀 더 적은 곡물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곡물만 먹고 사는게 아니죠. 일본은 어업 생산량에서 조선보다 훨씬 유리했다는 점을 명심하시고요.

무역이란 것도 있습니다. 다른 국가에서 곡물을 입수하는 것에서도 일본이 조선보다 우위 ( 왜구들의 노략질 포함 )

단순히 곡물 생산량만 갖고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님.
     
eo987 16-11-22 08:08
   
님 좀 한번이라도 저 분 블로그 들어가서 정독해주시고 말씀해주셨으면.ㅠ.ㅠ
일단 자료의 출처는 일본이랑 한국 통계청이고
조선시대 GDP추정은요 하나는 이헌창이라고 그것도 무려 식민지근대화론자인 고려대 경제학과교수님 나머지 한분은 이정수라고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님이세요 그러니까 정확성이나 신뢰성을 일단 넘어간다거나 하는 말이 대체....
          
archwave 16-11-22 10:20
   
그 블로그 글의 앞 부분의 얘기는 [식량 생산량을 봤을 때 조선말의 인구가 그것뿐이라는 것은 믿기 힘들다]

중간부터 마지막까지 얘기는 [소빙하기였기에 농사짓기 나쁜 상황이었다. 세종 이후 양란과 잦은 대기근속에 인구가 늘었다고 보기 힘들다]

글의 전개를 보면, 조선 말의 인구가 더 많았을 것이란 주장에 대한 반박인 셈입니다.

식량 생산량에 대한 통계는
일본의 통계는 소빙하기였던 1879 년
조선의 통계는 소빙하기가 끝나고 일제에 의해 농촌 정비가 이뤄졌던 1918 넌

위 두 자료만 보고 인구 차가 그리 심했을리 없다는 것이 맞는 말처럼 보이지만..

소빙하기라는 기후 변화를 고려하면 조선의 통계는 소빙하기가 끝나고 지배계층에 의한 농촌 황폐화가 끝났으며 일제에 의해 농촌 정비가 이뤄져서 식량 생산량이 증가했던 시기이고, 일본의 통계는 소빙하기여서 식량 생산량이 적었던 시기라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 그 블로그 글의 논지입니다.

결국 님께서는 님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 반대인 블로그 글을 퍼오신 것입니다.

그 블로그 글이 결론을 명확히 알기 쉽게 쓰지 않아서 헷갈릴 소지가 크긴 합니다.
               
eo987 16-11-22 11:47
   
님 일단 무슨 말이에요? 에유 점점
무슨 일본 소빙하기가 1870년대까지가요? 엄연히 위도가 다르고 실제로 일본의 인구는
1830~40년대면 다시 서서히 증가하기 시작해서 18c까지 28~900만에서 정체하다 무려 저 통계 당시에는 3600만명 가까이 되는데요? 아무런 기본 지식이 없으니까 자꾸 알수없는 소리만 하는 거잖아요 제가 님 교육 시키는 것도 아니고 적당히 하셔야지요 제가 님
망상 들을려고 힘들게 글 퍼오고 댓글 쓰는게 아니지 않나요?
그리고 대체 님 이 주장하는 그 글에 근거나 출처가 어딘거에요? 갈수록 산이시네요 점점
무슨 지배층에 대한 농촌 황폐화요? 뭔말인지 ....
결정적으로 조선말의 식량 생산량에 대해서 인구랑 연결 시킬때 명확히 농업생산성이 지속적으로 담보되지 못할 기후적 환경 이라는 게 요지인데 제대로 이해도 못하고 뭘 하자는 건지도 모르겠고 적당히 하세요 적당히 좀
더군다나 일제의 의해 어떻게 농업생산량이 증가해요? 무슨 정비가 되서?

님 그리고 저분 글을 어디보면

"소빙하기라는 기후 변화를 고려하면 조선의 통계는 소빙하기가 끝나고 지배계층에 의한 농촌 황폐화가 끝났으며 일제에 의해 농촌 정비가 이뤄져서 식량 생산량이 증가했던 시기이고, 일본의 통계는 소빙하기여서 식량 생산량이 적었던 시기라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 그 블로그 글의 논지입니다. "

이글에 해당되는 주장이 있나요? 저는 저 글 지금껏 4번 읽었는데 도저히 모르겠서서요 꼭 부탁드려요 저분이 식근대 이야기 많이 하시고 특히나 식근대 주장에 대해서 계속해서 허수열? 교수님 인용하면서 일제 첫해인 1910년부터 농업생산량의 변화가 없었다를 말씀하시는걸 본적 이 있는데 무슨 기본이 안되어있는 말을...힘드네요 게다가 식근대 주장하시는 분들 모두 의견을 수용하여도 1910-1918년 증가된 농업생산량이 전체에 10%안되여서 큰 차이는 없다라고 중간 부분에 정확히 이야기 하고 계시는데 이걸 어디서부터 이해를 시켜드려야 할지 억측에 추측에 대충에 ...딱하시네요 이쯤되면
                    
archwave 16-11-22 12:17
   
한반도와 일본이 뭐 그리 멀리 떨어져있나요 ? 위도가 다르면 얼마나 다른가요 ?
지금 한국 기준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한반도 전체를 놓고 생각해보세요.

사실상 한반도와 일본의 기후 환경은 거의 같다고 봐도 됨. (지도를 보세요)
일본쪽이 좀 더 북쪽과 남쪽에도 영토가 있었던 정도죠. 남쪽이 농업에 좀 더 유리했을 것은 당연하겠고요.

제가 주장하는 근거라니요 ? 님께서 거론한 출처 보고 얘기하는겁니다.

조선 말기는 소빙하기, 잦은 대기근과 더불어 지방 관료들의 폭정이 심했을 때입니다. 생산량이 적다고 지배계층이 자기 몫을 줄일리 없으니 농민들 입장에서는 자기 손에 남는게 대폭 줄어드는거죠. 오죽하면 동학혁명이 나왔겠습니까 ?

저 블로그 글이나 좀 제대로 읽으세요. [ 제 1 차 토지 조사 사업이 끝난 후의 조선 통계 ] 라고 말하고 있죠.

일제가 들어오기 전엔 근대적인 부동산 등기 제도도 없었습니다.

농토 소유/소작 관계가 명확해지고, 지배계층에 의한 수탈이 없어지고, 저수지 같은 것들과 농업 시설이 정비되는 것등의 효과가 없다고 말하면 억지겠죠.

일제는 수탈을 위해서든 뭐든 어쨌든 식량 증산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기후가 좋아지고, 식량 증산을 목표로 성의를 다 하는 행정기구가 존재한 1918 년은 당연히 1879 년에 비해 식량 생산 폭증해야 맞죠. 일본 통계 시점인 1879 년의 조선은 훨씬 적었을 것은 당연하다는 얘기입니다.

아 그리고 일본의 인구 통계라는 것은 좀 더 조사해보셔야 할 것 같네요. 일본 역시 19 세기에서 20 세기로 넘어오면서 식량 생산량이 증가했을 것이고 인구도 따라서 늘어나는 것은 당연할테고요.

하여튼 1879 년과 1918 년은 완전히 다른 상황인데, 시점이 다른 시기의 통계를 뒤섞어 비교하는 것은 말이 안 됨.

그 블로그도 왜 그리 애매하게 써놨는지 모르겠는데, 글의 대부분을 소빙하기 거론한 것을 보면 그 의도가 제 말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 같네요.
                         
eo987 16-11-22 12:21
   
님 그냥 근거를 가지고 오세요 그런 망상은 일기장에 작성하시고 계속 이야기하지만.
더군다나 당시 일본의 면적 절반가까이가 위도상 거의 1도차이인데 소빙기에 대한 이해가 없으니까 그냥 그렇게 대충 치부해버리는 거잖아요
식근대 논쟁도 모르고  자꾸 그런 주장을 하시면 이야기가 안된다니까요 근거를 가지고 해야지 ...에이고



그리고 토지조사사업의 취지가 뭔데 그 전에 명확한 토지소유개념이 없어요 조선시대 양전 몰라요? 이게 무슨 기본도 안되어 있는

그리고 이 사람 재미있네 점점
결론까지 멋대로 ㅋㅋㅋ
                         
archwave 16-11-22 12:48
   
경도와 위도를 착각하신거 아닌가요 ? 지도 좀 보시라니까요.

그러고 보니 저 위에 다른 분에게 [님 그러니까 위도가 낮으면 농업생산성이 높다고 생각하는거에요? 혹시? 어이가 없네 정말....] 이런 얘기하셨던데..

상식부터 좀 갖추세요. 당연한겁니다. 한국이 무슨 추워야 더 잘 되는 곡물 위주이기라도 한가요 ?

동남아 가면 쌀을 이모작이 아니라 아예 삼모작도 한다죠.

지도 펼쳐보세요.

일본의 영토중 한반도보다 북쪽인 곳은 극히 일부이고 그것도 당시 일본의 영토인지 아닌지 애매 (확인 안 해봄) 하고 그걸 제외해도 한반도보다 더 넓은 영토.

일본 영토 대부분이 한반도와 같은 위도이거나 더 남쪽입니다.
                         
eo987 16-11-22 12:51
   
님 기후에 영향을 주는 것은 위아래의 높이를 나타내는 위도지 좌우를 나타내는 경도 아닙니다 -_-

그리고 동남아 농업생산성이 어떻게 되는지가 알고 이야기 하는 거에요?
이젠 웃음만 나오네 에이그...참

님 기후가 따뜻하고 비가 내린다 즉 온난기후의 장점은 이러하여 농사를 자주 지을수 있다겠지만 문제는 그러한 기후로 인해 온갖 문제들이 발생해요 더불어서
동남아를 비유하다니요? 일본열도에서도 동남아국가들은 위도에서 십수도 떨어져 있어요 좀 갖다 붙일것 갖다 불이세요 물론 동남아 농업생산성 보면 말이 바뀌겠지만...
                         
archwave 16-11-22 13:30
   
님께서 [엄연히 위도가 다르고] 이런 말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현재의 한국과 일본을 기준해서 혼동하셨던거 같기에 한 말이죠. 이걸 왜 제 탓을 하나요 ?

조선(한반도) 과 일본은 위도가 다르다 할 것 없다는 얘기를 한거에요.

위도가 달라서 뭐가 달라진다 해도, 오히려 농업생산성에서 일본이 조금이라도 더 유리하다는 얘기였고요.

자신이 문제되는 발언을 해놓고 왜 날 탓하는지 원..
                         
eo987 16-11-22 14:24
   
슬슬 자아분열 단계인가요?
아님 문장이 길어지니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한 파악이 힘든건지...
제가 말한 위도의 다름은 서일본 간사이 지역에 해당되는 일본의 약 절반가량의 토지를 이야기 했고 위도가 낮다고 농업생산성이 높다라는 말은 틀린거라고 주장을 한건데 그걸 지적하니까 내가 문제되는 발언을 했다라고 하니...이게 무슨....
                         
archwave 16-11-22 14:57
   
위에서부터 죽 내려오면서 누가 무슨 말을 먼저 했는지 좀 살피세요.

혹시 날 다른 사람과 혼동하고 있는건지..
                         
eo987 16-11-22 15:05
   
님 같은 분은 드물어서요 ^^
          
archwave 16-11-22 10:27
   
또 하나 생각해봐야 할 점은..

계량 단위의 혼선도 고려해봐야 합니다. 석, 두 등등의 단위가 다를 가능성요.

현대인은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지역에 따라 시기에 따라 계량 단위들이 변화했습니다. 한반도와 일본 사이는 물론이고, 한반도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석] 이 정확히 얼마였는지 불분명하다는 얘기.

현대에 와서도 쌀의 경우 생산량을 말할 때 도정하기 전과 도정한 후가 달라서 혼선이 오는 경우가 많죠.
               
eo987 16-11-22 11:53
   
님 경제학자가 그 계량단위가 안 맞추고 통계를 낸다는 거에요? 이게 뭐지?
자꾸 비상식적인이야기를 하시네..음 일부러 이러는 건지 아님 알지를 못해서 막 던지는 건지
명백히 자료가 주어졌으면 그것에 따라 결과를 해석해야지 이쯤 되면 의심스러워 지기 시작하는데 ..하여간 님과는 더욱 대화를 해봐야 바닥을 보겠네요 가지고 있는 지식의 정확한 ^^

그리고 계량단위가 다르다니요? 통계청 통계는 모두 일본인들에 작성한 것인데?
더군다나 그걸 오늘날 인용하는 명문대 경제학자들이 그거를 방치하고 그렇게 수십년동안 있다는 거에요? 뭘 하자는건지 대체...
                    
archwave 16-11-22 12:27
   
현대에 와서도 소위 그 경제학자들이 쌀 통계 인용할 때 한쪽은 [도정하기 전] 기준, 다른 한쪽은 [도정한 후] 의 것을 인용해서 말하는 경우가 자주 보입니다.

경제학자들은 역사학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각 지역, 각 시대별로 같은 단위라도 실제 양이 다 다른 것을 철저히 다 알고 있었다고 보는 것도 무리죠.

현대는 kg 단위로 딱 정해져있지만요.
아 [근] 을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한 근이 몇 g 일까요 ?
지금 기준으로는 비상식적인데, 옛날 기준으로는 상식일 수 있습니다.
                         
eo987 16-11-22 12:28
   
님 그러니까 같은 일본정부가 통계한 것이라니까요? 1918년에 그리고 도량단위 측정하는데 경제학자랑 역사학자가 무슨 상관이에요 더군다나 제가 인용하는 분들은 경제사학인데?
무슨 초등이랑 이야기 하는 것도 아니고..
                         
archwave 16-11-22 12:41
   
계량 단위는 동일한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겠네요.

이 부분은 일단 철회하겠습니다만, 나머지 제 의견은 모두 그대로 유지합니다.
                         
eo987 16-11-22 12:46
   
님 딱히 님이 뭘 주장하든 제 눈에는 그냥 뭘 모르는 중구난방 좌면우고 해 보일뿐이에요 모든 주장이... 아래부터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보죠 하나하나 ^^
                         
archwave 16-11-22 13:27
   
뭐 하나마나한 얘기 조금 추가.

한국에서 1 근은 600 g 이고, 중국에서 1 근은 500 g 입니다.
한국에서 1 평은 약 3.3 평방미터이고, 중국에서 1 평은 1 평방미터죠.

한국정부가 중국을 통계낼때 중국기준으로 근 단위를 쓸지, 한국기준으로 쓸지 애매.
그 옛날 지역마다 다를 경우는 어찌 했을지도 궁금해지는 대목이죠.
( 특히 1 되는 같은 시기에도 지역마다 다르기도 했음. 뭐 사람마다 달라지기도.. )

그래서 저는 통계 볼 때 미터법과 kg 단위로 제대로 잘 환산된 것만 봅니다.
                         
eo987 16-11-22 13:34
   
-_-
님 도량형 단위는 기본적으로 조선시대에 크게 2번 바꿔요
첫째는 세종대 정해진 1석=15말(시장기준)~20말(국가기준)
1말(두)= 5리터 =4.85kg
길이는 대부분 영조척

그리고 마지막의 큰 변화는 일제시대 접어들면서 일본형으로
1석=180리터 약 144kg
1두(말)은 18리터=15kg

대체 이런 기본적인 사안을 두고 무슨 말씀을 하는건지 그러니까 밥먹고 연구만 하는 학자분들이 이런 기본도 모른다고 하는건지 무슨 같은 일본에서 조사한 것을 두고 도량형 타령을 하질 않나. 뭘 하자는건지...대체

대체 전근대 사회를 어떻게 이해를 하고 있길래 지식은 없이 망상수준으로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 창조를 하는지도 알수 없고 조선시대 도량형에 대한 시대마다의 엄격한 관리나 기준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이런 말씀을 태연하게 하시는 것인지

조선시대 토지소유관계가 불명확했다라는 말도 하고 내~참
방대한 양의 토지조사 책인 양인이 수백권 분량으로 그대로 남아있는데 현재에도 에이고 님아~님아...
                         
archwave 16-11-22 14:08
   
양인이 아니라 [양안] 얘기시죠 ?

양안이 있었다 하나 그 양안조차 정확한 토지 소유 조사가 아니었습니다.
토지 면적이 기재된 것도 아니었는데요.
토지 면적이 기재되지 않았다는 것 알고 계셨나요 ?

또한 토지 소유주가 바뀌면 등기하는 그런 식이 아니었습니다. 소유주 바뀌든 말든 관계가 없었죠. 그냥 20 년 주기로 조사하는 식이었을 뿐입니다.

더군다나 1719 년 이후 191 년동안 제대로 갱신되지 않았습니다.

1910 년까지 토지 소유주가 전혀 안 바뀌었을까요 ?

토지 소유 관계가 불분명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일본은 세금을 걷기 위해서라도 실소유주 누가 어느 정도 면적 토지 소유하고 있는지 조사할 필요가 있었고 그게 [토지 조사 사업] 입니다.

조선이 토지 관련 기록을 제대로 유지하고 있었다면 그럴 이유도 없었죠.
                         
eo987 16-11-22 14:14
   
뭐라고요 토지면적이 기재가 안되어 있었다고요 -_-
석두락으로 기재되어 있는데요
대체 그럼 토지의 등급은 왜 존재하나요? 양전척은 뭐고?
그리고 님이 말씀하신 것은 경자양전이라는 전국적 토지 단위이지 조세 관리를 위해 지역적 양전은 꾸준히 진행되었어요 좀 어설픈 지식으로 엉렁뚱땅은 그만 두세요 제발~

님 일본에서 진행한 토지조사사업이란 우선 무주지라고 불리던 무소유지에 대한 국가귀속과 분배의 목적과 더불어 지주제의 강화를 통해 조세의 일원화를 목표로 한거에요 동시에 그리고 근대적 도량형으로 재편을 도모한 것이고요 
또 ~또
그리고 토지소유가 불분명하다라는게 뭔 말인지요 구체적으로?
                         
archwave 16-11-22 14:39
   
토지문서라는게 뭔지 알고 계시죠 ?

조선시대에는 공적인 소유 증빙이 없었다니까요. 개인들이 [어디 어디 내 땅] 이런 식으로 토지문서 만들어서 갖고 있었을 뿐이죠. 소유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동네 사람들이 [저 땅은 누구 소유 맞다] 판결 내려주는 식이었고요.

지금 땅문서 챙기는 사람이 있나요 ? 없죠. 공적인 소유 증빙 제도가 있기 때문에 문서가 따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개인들끼리 땅문서 사고 팔면 그걸로 끝. 어디 신고해야 할 이유도 없고요.

양안이란 것도 20 년마다 한번 조사할 뿐이었고요. 그나마 실제 면적 표기한 것이 아니었고, 양안에 기록된 것이 실제 소유주라는 증빙이 되는 것도 아님. 세금을 누구 이름으로 내고 얼마나 낼지 기록하는 것에 더 가까웠죠.

그러고도 유지되었던 것을 보면, 그 당시는 현대 사회보다 더 신용 사회라 해야 할지.. 인구 이동이 적은 농업 기반 사회라 그럴테죠.

개인들의 소유권만이 아니라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국유지/공유지의 소유권도 크게 흔들렸습니다.

오죽하면 1719 년 이후 전혀 조사하지 않았던 [양안] 을 무려 179 년만인 광무개혁 (1897 년) 때 다시 조사하면서도 결국 실소유주, 실제 면적을 제대로 조사하지 못 했을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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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안은 생산량 기준 땅 가치를 기록한겁니다. 목적 자체가 세금 매기기 위한 것이었고, 현대의 부동산 등기 개념과는 백만광년 떨어진 것임.
                         
eo987 16-11-22 14:46
   
님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토지매매가 활발해요?
심지어 한 집안에서는 장기간에 걸쳐 토지매매문서에 수십명의 노비도 등장해요 거래 상대로
어떻게 소유권이 불분명한데 매매가 되냐고요?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0753&cid=46630&categoryId=46630
관에서 토지의 소유권 매매를 공증하는 제도를 입안 이라고 하는데 버젖이..
더불어서 환불매매 규정까지 명시되요 아무것도 모르는 님아...


님 저랑 지금까지 장난치시는 거에요 아님 일뽕짓거리를 하시는 거에요? 인간이길 포기하시고? 님 심지어 조선시대 행정제도에 대해 그렇게 무지하다면 더이상 기대할 것도 없지만 최근에는 조선시대 중죄인의 판결문이 추안급국까지 정리되서 90권분량으로 등장하는 판에 님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대체 어느시대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거에요?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그럼 어떻게 양안을 작성하고 양전을 해요?
대체 무슨 말이에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거냐고요?
애초에 토지소유관계를 관에서 직접 나와서 분명히 하고 그것을 관계로 조세를 부과하는 건데 어떻게 소유관계에서 국가에서 파악을 못 하냐고요?
그리고 실소유주를 밝히지 못하다니요 그게 어느 부분에서 그렇다는 거에요?
아니 그러면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땅없던 농민에게 60년대 토지개혁처럼 땅을 나누어 주던 사업이라는 거에요?

그리고 지금 땅문서 챙기는 사람이 없는 것 이라는건 뭔 말이에요? 아파트 매매 계약서고 뭐고 다 문서잖아요? 심지어 오늘날 전산화가 이루어져도 음 내가 이런 사람이랑 뭘 하고 있는건지 ..대체

참고로 님아 양안의 작성을 양전이라고 하고 경국대전에 명시적으로 20년마다 전국적 토지조사를 명했지만 실제로 전국적 토지조사는 조선시대후기에 갑술-경자 두차례 이행되었어요 자꾸만 실상을 모르고 그때 그때 땜방식 인터넷 검색만 하니까 그렇게 되는 거아니에요 에유 정말 초딩 교육시키는 느낌이네용...
                         
archwave 16-11-22 15:31
   
님께서는 [조선시대는 중앙집권제가 확립되었고, 모든 제도가 완전하게 마련되어서 돌아가고 있었다] 는 도그마에 빠지시니까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시는겁니다.

그리고 뭐 좀 자기 뜻과 벗어나면 일뽕이니 뭐니..

그 링크거신거 보니 한숨이 나오네요. 아니 자신의 논지도 제대로 입증 못 하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반대인 것을 링크하시면 저더러 어쩌란건지..

우선 지금 말하는 시대는 19 세기 조선말기쯤이란 것부터 확실히 짚고 넘어가아겠네요.

링크하신 문서에 나온거 보면..

[입안제도는 조선 후기까지도 일부 행하여지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실시 초기부터 철저히 시행되지 못하였으며, 조선 후기에는 입안 없이 신구문기(新舊文記)의 인도로써 매매가 성립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입안제도는 [공적 소유 증빙] 으로는 별 의미도 없는 것이죠. 부동산 등기 제도가 완비된 현대에도 소유 분쟁이 일어나는데, 저런 수준의 것으로 무슨 공적 소유 증빙이 되겠습니까 ?

또한 [토지 문기] 만이 사실상 유일한 증빙이 되는 셈인데, 이건 [ 토지거래에 대한 매매계약서 ] 죠. 이걸로는 소유 증빙이 안 됩니다.

A 가 B 에게 토지를 팔았다는 사실이 [토지 문기] 로 증명이 된다.
A 가 C 에게도 토지를 팔았고, 역시 [토지 문기] 로 증명이 된다.

위의 경우 소유자는 누구인가요 ? B ? C ? 둘중 하나가 위조문서 받은 것이라면 그걸 뭘로 증명하죠 ? A 가 살아있으면 몰라도 죽은 다음이라면 ? A 의 후손도 B 와 C 중 누구 소유인지 판단 못 한다면 ?

매매계약서는 소유 증빙 자료가 되지 못 합니다.

A 가 B 에게 팔았다는 계약서 AB
B 가 C 에게 팔았다는 계약서 BC

BC 라는 문서가 유실되면 이 땅은 누구의 소유가 되는걸까요 ? B 인가요 ? C 인가요 ? 유효한 문서가 없으니 소유지 없는 땅이 되는건가요 ? 사적으로 갖고 있는 계약서에 의해서만 증빙될 수 있다면 [공적 소유 증빙] 이 아닙니다.

--------------

현대에서는 등기가 우선입니다. 땅문서를 사적으로 갖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죠.

아파트 매매 계약서는 대금지불, 등기, 입주 까지 마치고 나면 더 이상 갖고 있을 이유가 없죠.  등기 이전되고, 전주인이 집을 비우고 나면 갖고 있을 이유가 ? 이건 매매 행위에 필요한 문서일 뿐입니다. 소유 증빙에 필요한 문서가 아니죠.

뭐 혹시라도 분쟁이 생길 경우를 대비하는 것에 불과하고, 등기되어 있고 잘 살고 있는 집을 누가 뺏어가는 경우는 없습니다. 간혹 있기는 한 모양이던데, 그런 경우에 매매계약서가 효력이 있을리도 없고요. ( 상속 관련해서 정당하지 않는 자가 상속 받은 후 팔아치운 그런 경우 ? 이건 애초에 판매한 자의 소유권부터 부정되는거니까 매매 계약서는 있어봤자 말하자면 장물을 샀다는 증거일 뿐 )

그리고 전월세에서 등기 안 하고 임차할 경우에나 계약서를 갖고 있을 필요가 있죠. 이건 소유권과는 관계없는 얘기인거고요.
                         
eo987 16-11-22 15:50
   
에유....
님 제 도그마를 걱정하지 마시고 우선 자신의 지식을 그 시간에 점검하는게 어떨까 해요
^^
그리고 재 개인의 뜻이 아니라 님이 주장하시는 말의 정당성 이나 타당성이 판단의 근원
이겠죠 말씀을 그런식으로 하면 안되고요
더불어서 제가 언제 모든 토지의 소유관계가 입안으로 결정된다고 이야기 한게 아니잖아요님이 그런 제도 자체를 부정하니 충분히 그런 국가의 공증제도가 존재했다는 사례를 보여 드린 것이죠 더불어서 입안이란 말 그대로 매매시의 공증이지 이미 님이 말씀하신 소유관계의 정확성은 뒤에 이야기한 양안과 양전에 의해 각 지방의 관에서 수립되어 중앙으로 올라가는 시스템인데 어째서 제가 이걸 두고 입안을 토지소유관계로 이야기를 할수가 있을까요? 제말 선별적 기억은 자제하시고요 

[입안제도는 [공적 소유 증빙] 으로는 별 의미도 없는 것이죠. 부동산 등기 제도가 완비된 현대에도 소유 분쟁이 일어나는데, 저런 수준의 것으로 무슨 공적 소유 증빙이 되겠습니까 ?]그렇게 믿고 싶으시다면 별수는 없지만 그런식의 주장을 하고 다니시면 님이 무슨 취급을 받을지 인간적으로 걱정이 될 정도네요...

뒤에 A-B는 애초에 이야기할 가치가 없으니 생략하고요
님 소유증빙 자체가 애초에 매매를 위한 중요한 증명의 수단인데 무슨 말씀이신가요?
더군다나 현재에도 각종 문서로서 본인을 증명하는 시스템이 일반적인데 그걸 부정하는 행태는 또 뭐고요? 게다가 현대에도 계속해서 문서를 통한 대리 행사가 가능한 시대인데... 진정으로 첫줄부터 지금까지 근거가 없이 본인의 생각으로만 이야기를 진행하시는 행태가 안타깝습니다. 인터넷 공간에서야 익명성을 무기로 그냥 우기면 그만이고 어쩌할 수단도 없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터넷에서만 이겠죠 현실이 아니라 물론 님이 지금 하시는 주장은 파악부터 사실관계 그리고 근거도 없다시피 해서 이걸 보시는 분들에게도 어떤 취급을 당할지 뻔하지만...
eo987 16-11-22 12:19
   
"우선 당시 일본은 고기 먹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가축을 키워서 잡아먹는 것은 엄청나게 비효율적이죠.
육식을 금지함으로서 좀 더 적은 곡물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이게 뭔 말인가요?


 
"일본은 어업 생산량에서 조선보다 훨씬 유리했다는 점을 명심하시고요.  "
당시에 원양어업을 했다는 거에요 일본이? -_-

갈수록 가관이라는 것은 이걸 두고 하는 말이겠죠?

"무역이란 것도 있습니다. 다른 국가에서 곡물을 입수하는 것에서도 일본이 조선보다 우위 ( 왜구들의 노략질 포함 )"단순히 곡물 생산량만 갖고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님

일단 이걸로 종합했을때 위에서 말했던 님의 지식의 바닥을 어림 파악이 되네요 저도 ^^
     
archwave 16-11-22 12:38
   
고기 1 kg 생산하는데 곡물이 몇 kg 들어갈까요 ?

고기가 무게당 칼로리가 높은 것을 감안한다 해도 고기는 곡물에 비해 비효율적입니다. 몇 배 차이는 우습죠.

곡물을 그냥 먹었으면 몇 만명이 먹고 살 수 있는데, 그 곡물로 가축을 키워서 잡아먹으면 1 만명분량도 안 된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고기 외에 술도 그렇겠네요. 술도 곡물을 매우 비효율적으로 소모시키죠.

누가 일본이 원양어업했다고 했나요 ?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건지.

지도를 펼쳐놓고 보세요. 연안어업할 수 있는 바다의 크기를 일본과 한반도 비교해보세요.
괜히 일본이 어류 생산/소비량 모두 높겠습니까 ? 이건 현대에 와서만 그런게 아니라 옛날에도 마찬가지. 어업이 발달했으니 왜구들도 그리 규모가 컸죠.

원양어업이 가능해져서 한국도 먼 바다에서도 잡아옴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어업 규모 차이가 큽니다. 원양어업이 불가능했던 옛날에는 일본과 한반도의 어업 규모 차이는 훨씬 더 컸을 것은 뻔하죠.

하다 못해 갈치만 해도 한국 바다보다 일본 바다에서 더 많이 더 큰 놈들이 잡힙니다. 한일어업협정이 아직 갱신 안 되서 한국 어부들이 일본의 EEZ 에서 고기 잡지 못 하는데요. 그 덕에 갈치 어획량이 대폭 줄어들었을 정도입니다.

한반도는 삼국시대, 고려시대가 오히려 대외무역이 활발했습니다. 조선시대는 무역을 극도로 축소시켰던 시대죠.

저 위에서도 자꾸 상식 얘기하시는데, 님이야말로 상식 좀 쌓으세요.
          
eo987 16-11-22 12:45
   
님 워낙 중구난방이라 하나씩 이야기 할 필요가 있겠네요 님같은 분들 상대하는데 효율적이거든요 이게 우선 거두절미하고 

1.당신의 말을 그대로 옮겨 적으면

"우선 당시 일본은 고기 먹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가축을 키워서 잡아먹는 것은 엄청나게 비효율적이죠. 육식을 금지함으로서 좀 더 적은 곡물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습니다."" 

님 말대로 가면 가축사육을 금지했다라고 해야지 왜 육식금지랑 가축을 키워서 잡아먹는데 동치적 표현이 되는 건가요?기본적으로 결국 이야기 하려는 것은 가축사육에 필요한 곡물이나 노동력이 많이 소모되어서 비효율적이라는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것 같은데 그러니까 육식만 금지하고 가축을 그대로 키워도 된다는거에요? 더군다나 당시의 주요 가축인 소나 말은 중요한 농업생산물의 기구의 일종인데 그럼 기본적으로 축력을 이용한 농업이 불가능 하다는 것 아니에요 대체 무슨 주장인지 횡설수설 .어쨌든 이 이야기부터 해보죠 우선은
               
archwave 16-11-22 12:57
   
아주 쉬운 이 문제조차 이해 못 하시고 엉뚱한 얘기 시작하시네요.

고기 먹는 것을 금지한 이유가 뭐겠습니까 ? 곡물 소비를 줄이기 위해서입니다. 곡물이 충분하다면 금지할 이유가 없죠. 종교적 이유로 특정 고기 (인도의 소고기 금지등) 를 금지할 수는 있겠지만요.

생산도구로서 소를 키울 경우 늙어죽을 때까지 부려먹습니다. 그 소들이 소비하는 곡물은 필수적인 비용이고, 그 소없이 사람이 할 경우 그 사람들이 소비할 곡물 생각하면 곡물 소비는 더 늘어나죠. 즉 생산도구인 소를 키우는데 들어가는 곡물은 효율적인 것임.

잡아먹기 위해 소를 키울 경우, 어느 정도 크면 더 이상 먹이지 않고 잡아먹어야 합니다. 더 키워봐야 고기 양이 늘어나지도 않는데 곡물만 꾸역 꾸역 쳐드시니까요.

즉 들어가는 곡물(사료) 총량대비 산출 가능한 고기 양이 가장 효율적인 시점에서 잡아먹어야죠. 이렇게 한다 해도 소고기 1 kg 을 얻기 위애 곡물이 얼마나 필요할까요 ? 고기의 양양가가 더 높다는 것을 고려해도 비효율적임.

괜히 고기 먹는거 금지한게 아닙니다. 예로부터 금욕을 강조하는 경우 빠지지 않는게 고기 먹지 말라 또는 적게 먹어라하는게 다 그런 이유.

만약 고기먹는게 더 효율적이었다면 반대로 금욕의 상징으로 곡물 먹지 말라 했겠죠.

제가 횡설수설하는게 아니라, 님께서 기본적 상식이 없으니까 이해를 못 하신겁니다.
                    
eo987 16-11-22 13:01
   
님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육식을 금지하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농업경제를 근간으로 하는 전근대 국가에서는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관습법이에요 당연히 조선에서도 수시로 소를 도살하는 행위는 엄격히 관리했고요 이번에도 무슨 말도 안되는 망상을 하시는지요? 그리고 말 자체에도 모순이 있잖아요 결국 가장 효율적인 것은 부려 먹을대로 먹다가 늙은 소를 먹는게 가장 합리적인 방법인데 그러니까 이런 방법을 일본에서는 하고 조선에서는 안했다는 거에요? 그 근거가 뭔데요?
또한 님 일본에서는 육식이 자제 된 이유가 뭐가 그렇데 단순해요 어디서 풍설하나 듣고 자꾸 지식이나 근거가 없이 말을 할려니까 그러는 거잖아요 기본적으로 일본은 17c접어들면서 1600~1720년까지 기존 농지가 2배가까이 급증하고 동시에 인구도 2.3~2.5배가량 증가해요 경지의 증가와 맞추어서 그러면서 동시에 발생하는 현상이 바로 농가당 가축량의 감소에요 즉 이로 인해 축력의 이용 부족으로 더욱 그 규제가 강력해 진 것인데.. 이것을 일본 역사인구학의 창시자인 햐야미교수는 일본에서 근면혁명이 일어났다고 표현하고 유명한 저서도 있는데 말 그대로 급증하는 인구를 농촌에서 감당해 내지 못해 대신 축력을 줄이고 사람으로 그 노동력을 대처해서 근면혁명이 존재했다라는 학설인데 무슨 엉뚱한 방향에 근거도 없는 이야기를 하시는지 계속 계속..들어주기 힘드네요 점점..역사는 님의  마구잡이 생각이 아닙니다  그리고 보니 이젠 철학적 느낌도 나고
                         
eo987 16-11-22 13:29
   
[괜히 고기 먹는거 금지한게 아닙니다. 예로부터 금욕을 강조하는 경우 빠지지 않는게 고기 먹지 말라 또는 적게 먹어라하는게 다 그런 이유.

만약 고기먹는게 더 효율적이었다면 반대로 금욕의 상징으로 곡물 먹지 말라 했겠죠.

제가 횡설수설하는게 아니라, 님께서 기본적 상식이 없으니까 이해를 못 하신겁니다.]

이이상 님과 대화할 가치를 못 느끼네요 저는...
                         
archwave 16-11-22 13:43
   
조선에서 돼지나 닭 키우고 먹는게 금지되었다는 얘기 들으신적 있나요 ?

소 도살 관리한 것은 생산도구 관리 측면이란거 당연하죠.

돼지나 닭 등 기타 육식 금지한 적이 없습니다.

일본은 돼지, 닭, 말 등등 온갖 육식을 모두 금지했다니까요.

님께서는 자꾸 [소] 만 생각하시니까 혼동하시는거 같은데, 좀 그 좁은 범위에서 벗어나보세요.

중동에서는 돼지고기가 잘 상하니까 먹지 말라는 생활 지혜가 율법이 되고 종교 교리가 되었죠. 인도도 아마 생산도구 의미때문에 소 먹지 말라는게 종교 교리가 되었을법도 하네요.

일본이 육식 금지한 것도 675 년 당시에는 위에 내가 말한 이유일지 종교 (불교 ?) 때문인지 불확실하지만 그게 1200 년이나 지속된 것은 곡물 소비 때문이라는게 합당한 얘기겠죠.

사실 종교 때문이라고 하긴 억지인게, 물고기 잡아먹는 것은 전혀 금지하지 않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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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리고 부려먹을대로 부려먹다가 잡아먹는게 가장 합리적인게 맞는데, 이럴 경우 소 개체수가 턱없이 적습니다.

소 수명은 20 년가량이죠. 그런데 잡아먹는 용도로는 1~2 년만 키워도 벌써 경제적 효용성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즉 생산도구로서 활용다가 잡아먹는 경우 먹을 수 있는 소의 양은 먹기 위해 키우는 경우보다 수십분의 일입니다.

특히 먹기 위해 사육할 경우는 생산수단으로 쓸 때보다 개체 수가 엄청나게 더 많아지겠죠. 수십 대 일 정도가 아니라 훨씬 더 큰 개체 수 차이를 보일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조선에서는 [곡물 소비 줄이기 위한 육식 금지 또는 제한] 을 한 적이 없습니다.

-------------

일본이 돼지, 닭, 말등 모든 육류 (물고기 제외) 금지한 것은 빼도 박도 못하는 [곡물 소비 줄이기 위한 것] 이 맞습니다.

그 가축들이 먹을 사료면 더 많은 사람이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이죠.
                         
eo987 16-11-22 14:01
   
님 애초에 일본에는 닭이랑 돼지가 없어요 근대 통계에도 잡히지 않을 만큼 미미해서
그리고 소나 말은 당시에 세습신분제 사회였던 일본에서 무사들의 주요 교통수단으로 말의 경우는 당연히 육식이 금지되고 나머지 소의 경우는 조선에서도 농용으로 철저히 도살을 관리했다니까요? 더군다나  그게 언제부터 그렇게 철저해졌는지에 대한 정책적 이해를 설명해 죠도 무슨 말이 안맞는 말씀을 무지하게 하시는 거에요 계속?
그리고 애초에 도살의 금지가 강화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구압의 압박이 높을수록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인데 님 말대로 하면 조선쪽이 훨씬 인구압의 압박이 덜했다라는 의미이고 그 말은 곧 농업생산량에 있어훨씬 우위에 있었다는 말인데 자신의 주장의 무엇인지도 잊어 버리고 계속 같은 말을 또하고 또하고 그냥 인터넷에서는 서로 얼굴 볼일 없으니까 하는 행동인건지.. 그리고 언어구사에 좀 문제가 있어 보이는데 너무 조리있지 못해서 대체 하고자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파악이 안되요 근거는 둘째치고 그리고 주장에 대한 근거를 내셔야 한다니까 계속 무슨 돼지 닭을 금지했다라는 거짓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시고....

또 그 개체수에 대한 말은 님은 스스로 이해를 하고 계신건가요?
어째서 소를 철저히 관리했다라는 측면에서 동의를 하시면서 동시에 육식의 예를 드는게 소인가요? 갈수록... 좀 책이나 몇 권 제대로 읽고 하시는게..누구도 동의 못할 머리속 생각은 그만두고
                         
archwave 16-11-22 14:16
   
님께서 [당시의 주요 가축인 소나 말은 중요한 농업생산물의 기구의 일종인데 그럼 기본적으로 축력을 이용한 농업이 불가능 하다는 것 아니에요] 라는 말씀을 하셨기에 [소] 를 얘기하게 된거죠. 님 때문에 소가 주화제가 되어버린 셈인데, 그걸 왜 제 탓을 하나요 ?

일본이 675 년부터 무려 1200 년 가까이 육식 금지시켰으니 돼지나 닭이 당시 일본의 통계에 안 잡히는게 당연하죠. 먹지도 못 할거 아까운 곡물 소비하며 키우는 사람 없을테니까요.

일본은 육식을 완전히 금지시켰기에 먹지 못 할 거 키우지도 않았기 때문에 키워야 할 목적이 뚜렷한 소/말 이외에는 없었던겁니다.

675 년 이전에도 돼지/닭이 없었을까요 ? 그럼 왜 금지령에 돼지/닭이 거론되었을까요 ? 어차피 없는데 금지하고 자시고 할게 없을텐데요.

육식 금지되니까 더 이상 안 키워서 없어진겁니다.

원인과 결과를 뒤집지 마시기 바랍니다.

----------------------

내가 위에 쓴 댓글들을 좀 차분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통계니 역사 해석이니 뭐니 그런 것을 다 떠나서 명확한 사실이고 상식이니까요.
                         
eo987 16-11-22 14:18
   
아이고 그렇군요 ㅋㅋㅋㅋ 에이그 별
님 675년에 돼지랑 닭이 구체적으로 항목에 나온다는 거에요?
당시 간무가 철저히 불교적 이념으로 사냥과 더불어 육식 심지어 생선까지 금지한 령인데 이게 그리고 그대로 지켜졌다고 생각하는거에요? 이게 뭔지 내가 무슨 수준과 대화를 하는건지..언제는 수산량에서 더 좋은 환경을 들먹이다가 육식의 금지령을 이야기 하는데 정작 그 금지령에는 생선이 포함되어 있고 자기의 주장은 상식이라고 우기고 ..
더군다나 에도시대에 조선의 쇠고기를 환단이라고 해서 일본인들이 명물로 여겼는데 어떻게 인간이 전근대 육식을 금지했다고 그게 그대로 지켜졌다고 생각해서 심지어 그래서사육이 없었다고 하고 음...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이쯤되면 슬슬 정체를 규정지어도 되는게 아닐까..
                         
archwave 16-11-22 15:59
   
eo987 님 하신 말씀 인용

[님 애초에 일본에는 닭이랑 돼지가 없어요 근대 통계에도 잡히지 않을 만큼 미미해서 ]

위와 같은 말을 해놓고는 왠 딴소리들인지..
                         
eo987 16-11-22 16:01
   
파악이 잘 안되시는 것 같은데 어떤 딴소리인지 물어도 될까요? ^^
eo987 16-11-22 12:30
   
님 제발 근거를 가지고 좀 이야기를 해요 서로 ^^
그런식이 인터넷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스스로 떳떳히 어디에서나 이야기 할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님 보면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전혀 아는게 없는...
eo987 16-11-22 14:32
   
님 주장하는 내용 쭉 열거하면 뭐가된다?
1.조선의 토지조사문서에는 면적이 안나와있다 -_-
2.일본은 토지의 소유관계를 명확히 해주었다
3.일본의 농업생상성이 더 높았다 위도가 낮아서
4.일제는 초기부터 여러가지를 정비해서 농업생산량을 높였다.
5.일본인들은 1200년동안 7c에게 천황이 명령을 하니 육식을 금지해서 심지어 돼지랑 닭도 사육을 안했다.
6.조선이 일본보다 생산량이 높게 나오는 이유는 어쩌면 학자들이 도량형을 헷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7.정작 소의 도살을 금지했다고 하면서 육식의 예로 소만을 이야기한다
8.조선시대에는 공적인 토지 소유관계가 없었다 그냥 그때그때 재판으로 가린다

등등 그렇지만 근거는 없다 그럼에도 이것은 상식이다 -_- ㅋㅋㅋ 에고 그냥 웃음만 나오네요 .
왜 그러고 사시는지...
     
archwave 16-11-22 15:44
   
1. 생산량 기준으로 기재되지만, 토지 등급등이 있어서 실제 면적을 역으로 계산할 수는 있다.
흔히 실제 면적 단위인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 실제로는 생산량 기준 척도인 경우도 많음.

2. 이건 일본의 의도가 세금 잘 걷기 위해서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 점은 사실.

3. 농업생산성이 더 높았다고 한 적 없음. 다른 사람 말과 헷갈리는건지. 아님 침소봉대하는건지.. 위도로 보면 약간 유리하다고 하긴 했지만, 이게 농업생산성이 더 높았다고 말한 것으로 들린다면 곤란. ( 농업생산성이 위도 하나로 결정될리가 없잖은가. )

4. 역시 사실임. 물론 조선 사람 잘 먹고 잘 살라고 해준 것은 아님.

5. 사육했다 안 했다는 말 한 적 없음. 육식 금지하니 사육해야 할 이유도 사라졌다고 했을 뿐. 키우는 것까지 금지된 것은 아니었으니 몰래 암시장에 파는 정도는 있었을테죠.

6. 도량형은 그냥 이 가능성도 있지 않나 하는 정도로 부록으로 붙인 말. 그리고 도량형 때문이라는 말은 위에 이미 철회했음. 글쓴이가 링크한 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19 세기의 소빙하기를 지나간 후인 조선의 생산량이 소빙하기였던 시절의 일본의 생산량보다 높게 나오는 것이 그리 이상하지 않다는 얘기.

7. 소만 얘기한 적이 없음. 글쓴이가 줄창 소만 거론해서 댓글도 소를 얘기한 것일 뿐. 남이 한 댓글을 제대로 읽기 바람.

8. 분쟁이 생겼을 때 공적 소유 증빙 방법이 없었거나 있더라도 유명무실했던 것은 명백한 사실. 특히 조선후기에는 더더욱.
          
archwave 16-11-22 15:54
   
위 1 번에 보충.

면적이 직접 표기되었든 간접 표기되었든 일단 표기되었으니까 문제가 없다는 것은 매우 한심한 얘기임. 이걸로 무슨 소유 증빙이 되나요 ?

측량/지도 기술이 고도로 발전된 현대에도 땅의 실제 위치 문제로 분쟁이 일어나는데 ?

실제 땅의 정확한 위치, 형태, 면적이 잘 기록된 그런 것도 아닌 문서로 어떻게 소유 증빙을 하죠 ?

조선시대때 현대의 등기 제도와 비슷하다 할 수 있는 [입안] 제도가 있음에도 왜 초기부터 유명무실했을까요 ?

드넓은 평야에서 뭘 기준으로 저 위치는 누구 땅 그런거 확인할 수 있을까요 ?

그 시절은 기술적으로도 가능한 시대가 아니었음. 적어도 측량 기술 정도는 있고 나서야 가능한 것이 공적 소유 증빙임.
               
eo987 16-11-22 16:28
   
이걸 뭐 일방적으로 가르키는 입장이니 ..손해만 보고 근거도 없는 이야기에 근거로 일일히 대응을 해주니 배로 피곤하고 애초 상대할만한 가치가 없는데 시작을 해서 에유~

1.일단 조선시대토지세도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니 헛소리를 지속적으로 하고있다.
일단 조선시대의 토지파악 방식은 혼합식으로 생산량의 절대기준인 1결이 나올수 있는 토지의 절대면적으로 구하는 것이다 예를들어 전분6등법과 같이 존재하던 모든 토지를
6개로 나누고 1등급 토지는 3000평에서 1결이 나온다고 절대적인 기준의 척도를 가지고 파악하는 것이다 즉 어느 양안에 토지가 6등급이라고 하는 것은 이땅의 12000평에서 1결이 생산된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이해를 할수 있을련지...)

2.-_- 기본적으로 일본의 토지검사는 태합검지라고 한다 애초에 일본은 번국제도로서
영지에 소속된 민의 토지매매 이동의 자유 심지어 작물재배의 자유권도 없었다.
(에유 아는게 없으니)

3.유리 하지만 농업생산성이 높지는 않다 무슨 말인건지..

4.근거를 물어도 어차피 이야기를 못할 것이기에 생략

5.암시장이 등장했다 사육을 금지해서 키우지도 않았는데 몰래 키워서 판매도 한다 더군다나 암시장에

6.그냥 한 말이다

7.소만 이야기 안했다  그런데 돼지도 없고 닭도 없고 심지어 말은 세습신분층인 무사의 이동수단이라면 결국 남는 건 소뿐인데 그럼 지금까지 뭘 가지고 이야기 한것임?토끼?

8.역시 근거가 아닌 믿음이다 ^^

보충은 아래 댓글 참조
                    
archwave 16-11-22 17:08
   
1. 아래에 따로 댓글 달겠습니다.

2. 일본 제도인데 그걸 왜 한반도의 토지 조사 사업에 적용 ?

3 남의 말을 좀 잘 보세요. [유리 하지만 농업생산성이 높지는 않다] 이렇게 말한 적 없습니다.
[유리하다 하지만 그걸로 농업생산성이 높다 낮다 말할 수 없다] 입니다. 농업생산성이 높다고 말한적 없다는 말은 낮다는 말로 들으신건가요 ? 서로 관련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5. 사육 금지했다는 말을 대체 누가 했나요 ? 남이 하지 않은 말을 좀 가져다 붙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애초에 돼지/닭이 거의 없다는 말을 꺼낸 것은 님이심.

7. 육류는 곡물에 비해 비효율적이라는 얘기를 하는데, 소를 물고 늘어지신 것은 님이심. 육류 소비가 금지된 일본이 같은 양으로도 더 효율적 섭취가 가능했다는 얘기를 하는겁니다.
                         
eo987 16-11-22 17:13
   
2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메이지혁명 당시 시행된 조치를 찾아보길 무지하면 용감이군요 정말..

3. 님의 기본적인 입장을 다시 되새겨보시길요. ^^
물론 구절을 찾아 드릴수도 있지만

4.일본이 675 년부터 무려 1200 년 가까이 육식 금지시켰으니 돼지나 닭이 당시 일본의 통계에 안 잡히는게 당연하죠. 먹지도 못 할거 아까운 곡물 소비하며 키우는 사람 없을테니까요. (님 제정신이 아니시네요 역시 ^^)

7.님 소는 조선에서도 도살을 금했다니까요 처벌하고? 남의 말을 기본적으로 안들으시거나 기억을 못하시는듯... 그리고 어째서 인구압(이 뭔지는 아시는지...)의 비례해서 님의 처음 주장처럼 조선쪽의 곡물양의 충분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막대한 소를 육류용으로 키우고 있어요? 당장 곡식이 없어서 사람이 죽는데 제대로 아는게 없구나 정말..이해도 없고
                         
archwave 16-11-22 17:24
   
4. 통계에 안 잡힐 정도로 적다는 것을 말하는겁니다. 아무려면 돼지, 닭도 살아있는 생물체인데, 누가 일부러 잡지 않는 이상 멸종할리는 없잖아요. 위에 말했듯 암시장도 존재할테고..

7. 소만 물고 늘어진건 제가 아니라 님이십니다.

조선은 돼지, 닭등은 금지한 적도 없다는 말은 안 들으셨나요 ?

대체 누가 조선쪽의 곡물양이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나요 ? 정말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네.

님께서 하신 말은 일본과 조선의 곡물 생산량 ( 그것도 시기가 다른 것끼리 비교 ) 를 통해 일본의 인구가 많은게 납득 안 된다는 얘기를 하셨잖아요.

제가 하는 말을 다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할께요.

1. 조선의 곡물 생산량은 인구 대비 더 많았지만, 육류 소비를 위해 소모하는 사료들이 있었다.

2. 일본의 곡물 생산량은 인구 대비 더 적었지만, 육류 소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곡물 소비 효율이 더 높았다. 즉 같은 생산량이면 더 많은 인구 부양 가능 ( 여기에 어획량이 한반도보다 많은 것도 일조 )

위 말을 하는데 소 얘기만 줄창 하면서 한반도나 일본이나 육류 소비는 마찬가지였다고 물고 늘어지시고 싶은 모양인데 그만하세요. 소고기만 육류인게 아닙니다.
                         
eo987 16-11-22 18:02
   
구제불능. ^^
eo987 16-11-22 14:36
   
결론:"나의 말에 근거는 없다 하지만 상식이다" 무슨 선언같네요 심오한....
"그리고 일본은 무조건 앞서있다" 맹신이고 

이 두가지를 종합해보면 님은 무엇이다? ^^
왜 저러고 사는지 인터넷에서만...아니면 역사를 만쭈리로 배운건가...

끝으로 적어도 이 가생이에서는 앞으로 제가 님을 집중 마크할 이유가 생겼네요
보통 님같이 뭘 모르시는 분은 두분류에요 하나는 그냥 자기가 뭘 몰랐구나 하는 부류와
님처럼 몰라도 우기거나 그때그때 인터넷 검색해서 대처하시는 분들 님은 후자중에서도 매우 강성이라 생각되서 더욱 그렇고 하시는 말씀이나 행동도 어떤 분인지 쉬이 짐작이 가서요
     
archwave 16-11-22 15:48
   
스토킹하시겠다고요 ? 참..

위에서부터 죽 댓글을 천천히 다시 잘 읽어내려오시기 바랍니다.

특히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부터 잘 살피시고요.

다른 사람이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한다고 여겨진다면 , 그 전에 자신이 했던 말중에 관련된 것이 있는지도 잘 살피시고요.
          
eo987 16-11-22 15:55
   
님아 우선 제대로된 지식부터 이야기를 하실수 있는 수준으로 자신을 만드는게....
애초에 기본적인 지식도 이렇게 오류가 많다면 어쩔까요? ^^
그런말도 좀 수준이 되시고 나서 하셔야
     
archwave 16-11-22 15:56
   
뭐가 무조건 앞서 있다 맹신인가요 ?

실제로 앞서 있었으니 앞서 있었다 하는거죠.

현대적 지도를 만들 수 있는 측량 기술을 누가 먼저 갖고 있었나요 ?

이거 없이 공적 소유 증빙이란건 말도 안 된다는 것은 아시겠죠.

현대의 기준으로 과거를 생각하지 마시고, 과거 그 시대의 기술 수준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세요.
          
eo987 16-11-22 15:57
   
예? 조선시대에는 단위나 길이 무게를 재는 제도나 수단이 없었나요?
님이야말로 현대를 논하기 전에 과거의 기본적인 지식부터 쌓으시는게 좋지 않을까요?
앞으로의 인생을 위해서 그리고 현대적 지도랑 무슨 상관이죠 이건 또?
님 이미 학계에서 조선시대 양안에 대한 당시 토지구분에 대한 분석은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님인 김건태교수님이 거의 마무리 하신 작업이에요 수년전에 제발 정신차리세요 계속 무지함을 자랑마시고...
               
archwave 16-11-22 16:05
   
공적 소유 증빙이란 것은 완벽하게 객관적 기준에 의해 어디 어디는 누구 땅이란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얘기에요.

언제 어떻게 사라지거나 위치가 변경될지 모를 논두렁 따위가 아니라 좀 더 명확한 기준이 필요한거죠.

현대적 지도가 없이 이게 가능하리라 보시나요 ?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는 기술없이 이게 가능한가요 ?
( 설마 이게 GPS 나오고 나서야 가능했다 믿지는 않겠죠 ? )
위도, 경도 표시된 한반도 지도가 나온게 언제죠 ?

왜 조선시대에 현대의 등기 제도와 비슷한 [입안] 이란 제도가 있었는데도 초기부터 유명무실했는지를 고민 좀 해보세요. 당시 백성들은 반정부적이어서 거부했을까요 ?
                    
eo987 16-11-22 16:07
   
뭐라고요? 당시 사람들이 바보인가요? 아님 모두 도둑인가요? 기본적으로 양전에 나와있는 토지를 근거로 해서 지역별로 갱신하고 있는데 관에서 조사를 나오면 당시 일부 분쟁은 있을수 있어도 논두렁이 무너졌다고 토지 자체가 이동을 하는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근본적인 소유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경계의 불문명 때 소요되는 작은 분쟁일 뿐이죠 ..더군다나 당시 양안에는 명백히 방위와 모양을 표시하고 있고요 님아 이건 대체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켜야 하니
                         
archwave 16-11-22 16:09
   
그럼 질문 좀 할께요.

왜 현대의 등기 제도와 비슷한 [입안] 이란 제도가 초기부터 유명무실했는지 이유를 아시면 불쌍한 중생에게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eo987 16-11-22 16:16
   
님 입안이란 현재의 등기제도와 유사하지 않습니다 일단 그건 양안제도겠죠 적어도 토지에 대해서는
입안제도의 글을 정독하신게 맞나요? 직접 발췌까지 하셨으면서 그런 주장을 하시면 어떻하죠? 입안이란 말 그대로 토지의 매매시 거래 당사자간의 문서를 통한 매매행위를 관이 직접 소유권의 이전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지 어떻게 그게 오늘날의 등기제도 일까요?
등기는 소유권 그 자체이고 입안이란 매매의 증명이겠죠 우선 이해를 좀..

그리고 기본적으로 어째서 입안이 초기부터 유명무실 했는지에 대해서는 님 방식으로 생각하면 어떻게 토지의 소유관계로 분쟁이 끊임 없었다면 그것이 유명무실해 질수 있었을까요? 전근대 사회에서 토지야 말로 부의 원천인데?
                         
archwave 16-11-22 16:50
   
님께서 링크하신 [토지문기] 에서 발췌했던 겁니다. 그 문서에 [입안] 에 관해 나온 것을 전부 인용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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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에 있어서 토지나 가옥의 매매에는 매매계약이 있은 지 100일 안에 관계관청에 보고하여 입안(立案)을 받도록 법으로 규정하였다.

관청에서 입안을 발급하는 절차는 ① 매매계약이 성립된 뒤 매수인이 매매계약서를 첨부하여 입안을 신청하는 소지(所志)를 관에 올리면, ② 관에서는 이를 검토한 뒤 입안발급 결정처분(題音:뎨김)을 소지 여백에 기재하고, ③ 관에서 매도인과 증인, 필집(筆執:문기 작성자)으로부터 매매사실을 확인받는 초사(招辭:진술서)를 받은 뒤 입안을 발급하였다.

소지·문기·초사·입안의 순서로 점련(粘連)하고, 점련한 부분과 여러 곳에 관인을 찍은 뒤 입안신청자에게 넘겨 주었다. 입안제도는 조선 후기까지도 일부 행하여지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실시 초기부터 철저히 시행되지 못하였으며, 조선 후기에는 입안 없이 신구문기(新舊文記)의 인도로써 매매가 성립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토지문기 [土地文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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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제도상으로는 (측량의 부정확 문제는 일단 재껴두고) 매매의 증명은 확실히 되는거죠. 음 현대의 등기 제도라기보다는 [공증 제도] 에 더 가깝다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매매의 증명이 된다면 소유권 증명도 되는 것 아닐까요 ?

이에 반해 양안 제도는 당사자의 신고에 의해 하는 것이 아니라 관청이 20 년마다 한번씩 일제히 조사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서, 원하는 시점에서 소유권 증명하는 역할을 전혀 하지 못 합니다. 양안으로서 오래전의 소유자를 확실히 하고, 원하는 시점에서는 입안으로서 소유권 증명할 수는 있겠지만요. 제도적으로는 그렇죠.

하지만 두 제도 모두 조선 후기에는 유명무실했던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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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기본적으로 어째서 입안이 초기부터 유명무실 했는지에 대해서는 님 방식으로 생각하면 어떻게 토지의 소유관계로 분쟁이 끊임 없었다면 그것이 유명무실해 질수 있었을까요? 전근대 사회에서 토지야 말로 부의 원천인데? ]

님께서 하신 위 질문에 대한 답변.

양안, 입안 모두 유명무실했기에 분쟁에 도움이 안 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죠.

분쟁에 도움이 되었다면, 현대에서 집 매매/임대 어느쪽이든 하자 마자 등기하러 달려가듯이 관청에 등록부터 하고 봤을텐데요.

제도 자체 취지는 좋은데 왜 유명무실하게 되었을까는 결국 기술적 문제를 봐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인 것이고, 위에 제가 질문했습니다. 다른 이유 뭐가 있을지 가르쳐달라는 것이고요. ( 제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시니까 질문하는 것임 )
                         
eo987 16-11-22 17:00
   
....
입안제도는 매매의 거래시에만 파악되는 소유관계잖아요 그렇죠 그것이 조세의 파악도 아니고 또한 전근대 토지의 매매가 오늘날처럼 활발했지도 않고 그럴수도 없는데 자꾸만 오늘날의 등기개념을 적용하실려고 하니까 이상한 주장을 하고 계신것 이고요 또한 지역단위의 토지조사에서 그 자체의 기록적 소유권이 완전히 전환되는 경우는 비로서 양안에 소유자의 이름이 명백히 올랐을때 가 되는 것이겠죠 그것이 곧 조세와 함께 국가의 확고한 공인 그 자체이고 ? 즉 전체 소유권의 명시는 양안 이고 입안이란 매매의 거래시에만 파악되는 변화이고 그리고 양전이 발생할시 당연히 관에서 소유하고 있던 이러한 입안문서는 이에 반영되어 양안에 오를테고 아닌가요? 그리고 무엇보다  입안 자체가 양안 즉 토지대장에 바로 등록되는 형태가 아닌데요? 단지 양전이라는 토지대장에 오를수있는 증거이고 ? 자꾸만 그렇게 무리한 주장을 하시면 슬슬 ^^

양안과 입안이 유명무실했다고요?
다시 선별적 기억을 하시는데 입안이란 말 그대로 비단 토지뿐 아니라 모든 소유권의 이전 심지어 노비의 이전까지도 포괄해서 인안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링크해드린 사전에 보면 토지의 경우만 유명무실해 졌고 노비등은 매우 활발해서 막줄에는 자료가 방대하게 존재한다고 하고 있고요 그리고 어째서 토지는 유명무실해 지고 노비등의 동산은 잘 이행되었을까요? 간단하죠 토지는 말 그대로 부동산 이라서 자유의지나 임의적 탈취가 불가능해요 즉 절도가 불가능 하다라는 말 ^^
님 그리고 양안이 유명무실했다면 조선은 어떤 기준과 근거로 조세를 수취했죠
또 한번 새로운 학설 등장인가요? 기대되는데요 더군다나 조선시대 세금 수취의 구체적인 과정과 항목을 알수있는 수많은 자료들이 존재하는데요?
부역실총 양역실촌 부역전서 등등 구제불능이네 정말...ㅋㅋ
                         
eo987 16-11-22 17:05
   
님 그리고 되도록이면 댓글 좀 빨리 안될까요 인터넷 그때 그때 찾아가면서 없는 지식 꾸역꾸역 하시는 것은 알겠지만 좀 심하셔서요 ^^
                         
archwave 16-11-22 17:09
   
이거만 붙잡고 있는게 아닌데요.

댓글 쓰다 말고 딴짓도 하고 오고 뭐 그러고 있습니다.

지금도 뭐 좀 먹고 화장실 다녀왔음.
                         
eo987 16-11-22 17:15
   
그러시군요 그런데 그 시간에 한글 자라도 더 입력을 하시는게...
그리고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챙기시고 ^^
eo987 16-11-22 16:37
   
뭘 하자는 건지 그냥 가르쳐달라는 말을 하기가 힘든건지 무엇하나 제대로된 근거나 지식은 없고 대체 어디서 이야기 한 것들은 알게 된건지 에이고..
archwave 16-11-22 17:16
   
일등급 토지를 2253 평 갖고 있으면 그걸 어떻게 표기하죠 ? 0.751 결 갖고 있다고 기록하나요 ?
( http://arim.pe.kr/liguard_bbs/view.php?code=li_history2&number=816&page=6&keyfield=&key= 참고 )

A 토지 3000 평에서 1 결이 생산된다. 등급은 정확히 1 등전.
B 토지 3500 평에서 1 결이 생산된다. 등급은 정확히 2 등전
C 토지 4200 평에서 1 결이 생산된다. 등급은 정확히 3 등전

D 토지는 1 결이 나온다. 등급은 2 등급으로 산정되어 있음.

문제냅니다. D 토지 면적은 몇 평일까요 ?

저 등급이란 것이 소숫점 등급이 있다는 얘기 못 들어봤습니다.

2 등전이라 등록되었다는 것은 1 결당 중간값을 취해도 3250 ~ 3850 평으로 매우 넓은 범위입니다.

면적으로 환산했을때 가능한 범위가 매우 넓어서 최고치는 최저치보다 무려 18.5 % 나 큽니다.

면적을 기록하고 있지 못 하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생산량 기준으로만 기록하고 있죠.

----------------------

생산량 기준으로 함으로서 애초에 표기 단위 자체가 면적을 말하지 못 한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역으로 환산해서 대략 말할 수 있긴 한데, 무려 18.5 % 오차까지 내포하는거죠.
 
만약 등급이 1 등급, 2 등급 식이 아니라 1.13 등급 이런 식으로도 되어 있었다면 얘기가 다르겠죠.

조선시대의 토지 조사가 철저히 시행되었다 해도 문제가 많았던 것임.
     
eo987 16-11-22 17:19
   
결-부-속-파 단위인데요?
인간이신가요 혹시? ^^
답변 부탁이요 !
          
archwave 16-11-22 17:32
   
글쎄. 결, 부, 속, 파 이 단위가 문제란 것이 아닙니다.
아 맨 위에 쓴거때문에 하신 말씀일텐데, 왜 그 말을 했는지 설명을 빼먹었군요.

그거만 딱 눈에 띄신 모양이군. 고작 한 줄. 그 뒤의 내용은 안 읽으셨나.

진짜 중요한 문제 [등급] 이 내포한 문제점은 어찌 해결할까요 ?

그것도 결, 부, 속, 파 식으로 등급 안에 또 등급이 있나요 ?

등급은 도대체 어떻게 세분하느냐 이 얘기입니다. 1.534 등급 이런게 있나요 ?
첫줄은 이거 언급하려 한건데, 정작 써놓고 왜 그 말했는지 설명 부실했던것은 사과드립니다.

등급이 소숫점 이하 (아라비아 숫자 체계이든 결/부/속/파 식이든) 세분화 안 되면 면적을 산출할 수 없다는 것은 잘 아시겠죠 ?
               
eo987 16-11-22 17:55
   
정신을 차리시는게..좋지 않을련지 뭐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별수 없긴 하지만
1등급
결1(3000평) 부 0.1(300평) 속 0.01(30평) 파0.001(3평)

1등급토지가 1결1부1속1파= 3333(평)
안되니
이제는 소숫점 자리를 말하기 시작하고
정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이군요
eo987 16-11-22 17:27
   
그만하죠
기본이 안되어있는....
     
archwave 16-11-22 17:34
   
바로 위 댓글이나 읽어보세요.

결 같은 식으로 표기하는 것은 면적을 나타내지 못 했고, 곡물 생산량만 표기했다는 것을 인정하시면 됩니다.
archwave 16-11-22 17:39
   
더 이상 시간 낭비하기 싫고..

조선 시대의 토지 관련 제도는 철저히 곡물 생산량 위주로서 세금 걷기 위한 기준이었을 뿐이고, 면적조차 제대로 나타내지 못 했으며, 역으로 환산해도 면적값은 매우 오차가 컸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

그 제도들마저 제대로 시행되었다면 공적 소유 증빙이 가능했겠지만 제도 시행 초기부터 유명무실했었음.

이게 틀린 말이라면 따로 글 발제하시길.. 이 글에는 댓글 더 안 답니다.
archwave 16-11-22 22:21
   
제가 중대한 실수한 것을 바로 잡습니다.

조선시대에 토지 면적 조사하는 것도 현재 ( 물론 당시 일본의 방식과도 ) 와 근본적으로 큰 차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1 등급인 토지와 2 등급인 토지는 면적 재는 자가 달랐다고 봐야 맞는 것이었네요.
그러니까 1 등급용 줄자와 2 등급용 줄자가 따로 있는 것에 해당. 6 가지 등급별로 줄자가 따로 있는거죠.

이게 번거로워서 조선 후기로 가면 면적 재는 자 자체는 모두 같지만, 등급에 따라 일정 상수를 곱해서 결을 말하는 식이었고요.

결 수치와 등급 수치를 알면 원래 토지 면적을 정확히 역산 할 수 있는 것이 맞습니다. ( 물론 측량 정밀도, 계산 정밀도는 별개의 얘기 )

위 문제로 eo987 님을 피곤하게 해드린 것을 사과드리며, 아울러 이건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문제인데도 왜 설명해주지 않으셨는지 아쉬움이 남는다는 뱀꼬다리를 남깁니다.
     
eo987 16-11-23 22:00
   
일단 매너있는 사과감사해용 ^^
근데 비단 이문제 뿐 아니라 전체에서 제 질문이나 지적에 답을 안하신 문장이 많은 것은 좀 생각을 해보셔야 하지 않을까 하네요.

그리고  이 글에서도 문제가 많은데요 일단 일본은 당시 생산량 개념의 토지가 아니에요
절대면적의 기준이죠 더불어서 한국의 전기는 제외하더라도 후기 조세법의 기본이던 대동법이나 전분6등급보다 그 세부가 더 빈약했고요

그냥 논문 한편 제대로 정독하지 않고 막연한 생각이나 그때그때 인터넷 검색으로 땜빵하시는 수준의 전형이신데 그냥 간단한 논문 한편 추천하는 걸로 마무리 할께용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토지소유권의 법적 고찰" 2016 09월 최신 논문이고요 작성자는 법학과 교수이니 더이상 쓸데없는 말씀은 하지 마시고요
          
archwave 16-11-23 22:58
   
제가 한 말중 수정하지 않은 것은 그냥 그대로라고 보시면 되는데요.

일본이 생산량 개념 토지라고 한 사람이 안 보이는데, 무슨 뜬금없는 얘기신지 모르겠네요.
( 적어도 제가 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고요. )

일본은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면적 ( 절대면적 ) 기준이라는 것은 따로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명백했던 것인데.. 왠..

그리고 말 나옴 김에..

한국 국사에서 [일제의 토지 조사 사업은 토지 수탈을 위한 것이었다.] 식으로 교육되었던 탓인지 몰라도 그런 식의 시각을 갖는 사람이 많은데, 당시 토지 조사 결과 99.5 % 는 신고한 그대로 인정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0.5 % 만이 소유권 불분명 또는 분쟁이 있었다는 얘기죠.

그리고 조선 후기로 가면서 국유지/공유지/사유지의 소유 관계가 불분명해지는 일이 많았다는 것도 사실이었고요.

개인들끼리 분쟁에서 결국 진 사람은 뭐라 핑계댔을까요 ? 일제에 의해 땅 뺐겼다 이런 식으로 말하기 쉽겠죠.

국유지나 공유지를 점유해서 쓰던 사람의 경우는 더욱 심하겠죠. 일제에 의해 내 땅 뺐겼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을거고요.

우리가 싫든 좋든 한반도는 일본에게 왕실에서 왕실로 넘겨졌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만약 조선의 소유권 증빙제도가 제대로 되어 있었다면, 그냥 토지 장부만 건네주고 받으면 끝날 일이었죠. 일제가 새삼스레 토지 조사 사업을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냥 장부 받아서 결 같은 단위만 환산하면 끝난다는 얘기.

조선의 토지 기록이 부실했기 때문에 토지 조사 사업이 필요했던겁니다. 0.5 % 가 분쟁지였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죠. ( 이 0.5 % 라는 것이 면적 얘기가 아니라 건수인 것 같은데.. 이렇든 저렇든 마찬가지 )

조금 전에 쪽지 보내셨던데, 아무리 봐도 님께서는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혼동하시는 것 같습니다. 댓글에 누가 쓴건지 나오니까 잘 보시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말을 섞어서 혼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eo987 16-11-24 10:24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

[조선시대에 토지 면적 조사하는 것도 현재 ( 물론 당시 일본의 방식과도 ) 와 근본적으로 큰 차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님 토지면적의 조사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그리고 토지면적 조사의 핵심은 무엇이고요? 당시 일본과 그 방법이나 개념 그리고 상세함에서 큰 차이가 존재해요 그리고 제가 말씀한 논문을 찾아 읽으실 환경이나 능력이 안되시면 보내드릴수도 있으니 메일주소를 쪽지로 알려 주시길 바래용~계속 자기만의 세상에서 살으시면 정신적으로 행복은 하시겠으나 과연 성숙한 하나의 인격체는 영원히 요원하지 않을까요 ?
봉명이 16-11-23 01:32
   
글쓴이 말하는거  쪽바리처럼 말하네 지가 처물어보고  지적질하는 짓은 왜 하는거냐?
어디서 배워 처먹은 버릇임
     
eo987 16-11-23 21:50
   
에이고 이젠 별소리를 다 듣네요 ^^
인간이세요 혹시? 아니신가...
촐라롱콘 16-11-23 10:24
   
웬 댓글이 이렇게나 많이 달렸나 싶어서 궁금해 들어와 봤더니....

eo987 이 인간이 나한테만 빈정거렸던 것이 아니라, archwave님한테는 아예 그냥

댓글마다 거의 빼놓지 않고 인격모독에 빈정거림을 달고 다니네......

그럼에도 archwave님은 정말 평정심을 잃지않고 대부분의 댓글에서 계속 빈정대는 상대에게

도리어 정중하게 대함은 물론 자신의 오류가 드러나면 이를 인정하고 사과하기까지 하시니.....

정말 성숙한 인격의 풍모가 느껴집니다........!!!     

그리고 eo987 이 인간아! 님이 제시한 주제의 의문점이 시작되는 사실 자체가

[일본보다 경지면적부터 생산성 그리고 이걸로 인해서 생산량도 더욱 많은데
어째서 인구가 절반이나 60~70%밖에 안되었을까요??]

잘못되었으니 제대로 된 답이 도저히 나올 수가 없을 수 밖에...........^^

당시 일본보다 조선이 경지면적의 차이는 그렇다치더라도 생산성, 생산량이 더욱 많다니......???

이건 도대체 무슨 새로운 학설인지......???? 아니 새로운 소설의 장르라고 해야 하나......^^

당연히 총 식량 생산량이 절반 정도에 불과하니 인구도 절반밖에 안되지.......

흔히 우리가 알고있는 일본 각 지역(번)들의 석고제를 기반으로 한 합산총계는 사실상

17세기 전반에 파악된 자료인데..... 이 자료를 18세기 심지어 메이지유신 이전의 19세기

초중반까지 적용시키려고 하는 것이 결정적인 문제임..... 사실상 에도시기를 거치며

실제로 농업생산량은 3배 가까이 늘어났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공인된 사실인데.....

가령 10만석 가량으로 신고된 번이 그 다음해 11만석이 되었건, 세월이 좀 지나 그 동안에

개간과 영농기술의 발달 등의 배경으로 실제생산력이 20만석이 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10만석 이상으로는 절대로 신고하지 않지.... 왜냐하면 석고 규모에 따라 각종 세금납부나

부역의 부담이 해당 번에 부과되므로 영주들조차 당연히 정확한 생산량 신고를 기피했으며

에도막부는 조선과 비교하면 지방장악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영주들의 협력이 없이는

정확한 각 번의 실제생산규모를 파악할 길이 요원하거든....... 

그리고 이건 나도 앞선 댓글에서 미처 본문자료의 통계시기를 확인하지 못하여 실수한

부분인데..... 20세기 초반의 일본농업생산량과 인구와의 괴리는(특히 조선과 비교해서는....)

1920~30년대에는 물론 당연히 일본본토를 비롯하여 조선과 대만, 만주를 비롯한

일본세력권내의 각 지역들이 산업구조상(농업까지 포함하여)완연한 분업관계를 형성하게

되지만.....

그 이전시기인 구한말~일제초기라 하더라도 적어도 농업분야에 한정해서는 조선은

일본의 농업을 비롯한 산업구도경제권에 편입되는 시기임.....

19세기말 ~ 20세기 초기 일본은 전체산업에서 공업비중이 늘어나 농민들이 노동자로

흡수되는 비중이 커지고, 청일-러일전쟁, 1차대전을 거치며 병력,군수산업분야로

흡수되는 농민층이 늘어나 농촌은 노동력부족으로 인한 생산성 하락을 겪게되지......

당시 조선으로부터의 쌀수입이 늘어나게 된 것도 이같은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고...... 
.
.
.
그리고 님이 내게 내뱉은 [님 그러니까 위도가 낮으면 농업생산성이 높다고

생각하는거에요? 혹시? 어이가 없네]

도리어 내가 정말로 어의가 없네요~~~

위도 자체만을 절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계절풍 기후지역에 한정되어서는

위도가 저위도일수록 기온과 강수량 측면에서 적어도 벼농사에는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사실 자체를 아예 모르는건지 원.......

중국만 하더라도 한반도 남부지방 보다도 위도가 낮은 양쯔강 유역의 강소-절강성이 풍년이 들면

과장을 보태어 중국 전역(그들 표현으로는 천하)이 풍족하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로 생산량이

압도적이었는데......

다만 19세기 말기 이전의 동남아지역 일대는 당시까지만 해도 인구가 희박하고(전반적으로

현재 인구의 1/10 이하) 풍토병과 밀림, 해충등으로 인해 많은 지역이 개간되지 못했기 때문에

농업생산력이 현재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빈약했고......

동남아 일대 하천의 잦은 범람을 조절하고 수리시설이 정비되고 개간이 이루어진

후에야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늘어난 것이고.......

중국의 최남단 인근이랄수 있는 주장강 유역도 인구가 유입되고 풍토병이 어느정도 극복되고

개간이 이루어진 후에야 비약적인 생산력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이고.......... 

이런 저급한 인격의 소유자하고는 아예 상대하지도 말아야 되는데 또 참견하게 되었네~~~

eo987님 지리공부부터 더 하고 질문하세요......!!! ^^
     
eo987 16-11-23 21:49
   
일기는 일기장에 쓰시는게 덜 부끄럽지 않을까요? 님은 이번이 몇번째인지 ...
다른 분들한테
면박도 많이 당하셔놓고 계속 이러시네요 인터넷에서만 통할 말을 주저리 주저리 에유~
님 메이지혁명 당시 일본의 직업 구성을 보면
농민 80% 무사7% 에타,히닌이3% 상공업및 조닌이10% 가량이에요
더군다나 일본에서 면직물을 통한 산업혁명이 발생한 기간은 1890~1920년대까지고요..
역시 또 일방적 교육하는 느낌이네요 그런 지식으로 뭘 하고 계신건지 대체

그리고 님 당시 영주인 다이묘들은 막부에 직접 세금을 내는 형태가 아니에요 단지
영지의 급에 맞는 군사력을 제공할 의무를 질 뿐이죠 그리고 막부는 수백개의 다이묘를 직접권한으로 이봉이나 전봉할수도 있었고요 애초에 세금을 직접 다이묘별로 징수 했다면
참근교대제나 천하후신이라고 해서 재정에 큰 타격을 줄수있는 여러 조치들을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었겠죠  솔직히 이쯤되면 저도 님한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지거리를 하고 싶기도 하지만 그냥 무지해서 그러는 거라 이해하고 넘어 가도록 할께요
대신 인생을 좀 바르게 사시길..최소한 야비하지는 말아야죠 무식은 해도 ^^

끝으로 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지 글간에 연결성이나 근거가 빈약해서 파악 하기가 여전히 힘드네요 뭐 그렇게 위아부짓을 하시는 걸 말릴수야 없지만 왜 그러고 사는지에 대한 의문도 항상이고 어차피 설득의 대상이 아니니 그렇다 쳐도
     
archwave 16-11-23 23:00
   
위도 얘기는 그리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 보이는데요.

일본이 한반도보다 좀 더 남쪽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차이가 그렇게 크지도 않고 오히려 무시해도 큰 지장 없는 범위인거 같고요.
          
eo987 16-11-24 10:22
   
아래 댓글을 참조해주세용~
archwave 16-11-23 23:30
   
하도 말이 많아져서 저도 살짝 검색해봤습니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olico&logNo=220420606825

위 문서에서 일부 인용합니다. ( 정확히 어디를 인용했는지는 다음 문구에서 숫자 나온걸로 위 페이지 검색하시면 되겠네요. )

-----------------------------------------------------------------------------
1871 년 일본의 인구 3440 만명. 수확량 4681 ~ 6000 만석
조선 석은 일본 석의 절반
따라서 일본의 생산량을 조선 석으로 표기하면 대략 1 억석에 해당.

조선의 19 세기 중엽 추계 총생산은 2564 만석 (일본 석 기준으로 환산한 수치)

일본의 생산량은 조선의 대략 2 배

-----------------------------------------------------------------------------

일본의 통계는 소빙하기였던 1879 년 것.
조선의 통계는 알본 것보다 무려 39 년후이고 소빙하기도 이미 끝난 1918 년 것.

이런 식으로 비교한 자료를 인용하진 마시길..

왠만하면 좀 동 시기 통계를 비교하든가..
     
eo987 16-11-24 10:19
   
님 자꾸 전체적인 지식이 없이 그때그때 자신의 편향성에 맞는 인터넷 검색만을 가지고 오시니까. 제가 참 상대하기가 힘든데요 계속요 우선 가장 기본이 되는 자료의 신뢰성을 이야기 할때 제가 언급한  교수분들의 자료를 모두 무시하고 이번에 교과서 국정화를 주도한 이영훈교수님의 자료 한 마디로 18~19c 위기론에 근거한 경제 통계를 기반으로 하시면 곤란해요 왜냐하면요 ^^
그렇게 되면 조선의 농업생산성은 토지의 붕괴부터 시작해서 정확히 조선말이 조선중기에 비해 전체 생산성이 40%에 불과했다라는 이론이거든요 그리고 이런 논리를 통해 일제의 식민지배나 박정희등의 친일파들을 옹호하는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고요 즉 님이 언급하신 그 책은 저는 이미3년전에 읽은 서적인데 2500만석x2.5=일본석으로 6000만석이 넘어서 이미 일본의 메이지유신 당시의 총 생산량을 능가하는 수치가 되는 것이고 조선 중기에 이를 비판한게 바로 배항섭이나 허수열 김건태교수님 같은 분들이되죠 대표적 학자분들로요

그리고 다시한번 타인이 작성한 글을 전혀 읽지 않는다라는게 명백한데 일본과 한국의 위도차이가 대략 1도가량인데 님 위도1도는 평균 온도에서 최소1 최대 2도의 분포를 가지게되요 그리고 소빙기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으니 고작1~2도라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그건 정말 무지의 소산일 뿐이고요 아키님 현재 그많은 고기후 연구와 그중에서도 소빙기의 기본이 연평균 기온이 1~2도 가량 하강했기에 격렬한 사회 경제적 위기가 발생했다라는 게 요지인데 고작 위도1이라고 하시면  어쩌자는 것이신지....음
더군다나 현재 일본 학계에서 소빙기를 이야기할때 와의 연대로 전혀 틀리시고요 현재 일본 학계에서는 약 100년간 정체되었던 인구가 다시 급격히 증가하게 되는 1830~40년대를 여러 프록시를 이용하여 소빙기기후의 완화시점으로 보고있어요 한국의 경우는 거의 확실히 1890년대라 하고용 제가 링크한 블로그분 게시물을 읽으면 다 나와 있는 내용을 참....구제불능
          
archwave 16-11-24 14:03
   
왜 이리 다른 소리하는건가요 ?

저 취에 촐라롱콘님이

[큐슈 등을 비롯한 일본남부지방은 대체로 조선보다 위도가 낮아 
벼농사로만 1년에 2모작을 할 정도로 조선보다는 기온이 온난하고 토지가 비옥하고
강수량이 풍부하여 자연환경만으로도 조선보다 우위에 있으며.....]

위와 같이 말씀하시니까

eo987 님은

[님 그러니까 위도가 낮으면 농업생산성이 높다고 생각하는거에요? 혹시? 어이가 없네 정말]

이러셨죠 ?

그러셔놓고는..

제가 [위도 얘기는 그리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 보이는데요. ] 이렇게 말하니까

이번엔..

eo987 님이

[일본과 한국의 위도차이가 대략 1도가량인데 님 위도1도는 평균 온도에서 최소1 최대 2도의 분포를 가지게되요 그리고 소빙기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으니 고작1~2도라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그건 정말 무지의 소산일 뿐이고요 아키님 현재 그많은 고기후 연구와 그중에서도 소빙기의 기본이 연평균 기온이 1~2도 가량 하강했기에 격렬한 사회 경제적 위기가 발생했다라는 게 요지인데 고작 위도1이라고 하시면  어쩌자는 것이신지....음]

이러시는데..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으신겁니까 ?

저 위에선 위도 때문에 일본이 농사 잘 된다는 얘기를 말도 안 된다 하시다가..

이젠 1~2 도 차이나 난다. 엄청나다 ?
               
eo987 16-11-24 14:44
   
제가 감당할만한 지능의 소유자가 아니시네요 ^^
          
archwave 16-11-24 14:22
   
일본이 소빙하기를 탈피한 것은 1830~1840 년이고, 한반도는 1890 년에야 탈피했다 ?

한반도와 일본의 지리적 위치가 뭐가 그리 큰 차이가 난다고 소빙하기 탈피 시기가 무려 50~60 년 차이가 나나요 ?

위 글 출처로 밝힌 것을 보니 한반도와 중국의 차이도 30 년 정도로만 보는 것 같은데, 그보다는 지리적 유사점이 많을 한반도와 일본이 50~60 년 차이 ?

위 글 출처로 가보면 조선 중기 이후 강수량 그래프가 있습니다.

일본쪽 강수량 그래프 있으면 한 번 제시해보세요.

일본이 1850 년쯤부터 인구 증가하기 시작한 것은 개항, 메이지유신덕분이라고 봐야죠.

참고로 중국은 1845 년에 소빙하기 끝났다는데 오히려 1850~1900 년사이 인구증가율은 그 이전/이후 어느 때보다도 떨어집니다.

-----------------

참고로 조선쪽 강수량 그래프를 보면 1918 년 경은 강수량 폭증으로 근 40 년만의 대풍을 기대할만 하죠.
               
eo987 16-11-24 14:47
   
위 글의 출처 어디서 중국의 소빙기를 언급하죠??? -_-
님 사람이 그냥 넘어가주니까 자꾸만 이런 행동을 하시는데 그냥 공부를 하세요
그 시간에 엉뚱한 소리들 자꾸만 들고와서 어설픈 행동은 자제해주시고요
더군다나 님 중국과 한국의 영토의 크기가 50배에요 오히려 출처에서는
그래서 중국과의 비교는 힘들다고 언급하는데요 전 게시물에서? 또 없는 말을 만들어 내기 시작하는군요 음 그리고 1918년뿐 아니라 통계는 1910년부터 시작되는데요?
이건 뭐 초등생이랑 대학교수준을 이야기 하는것과 마찬가지니
                    
archwave 16-11-24 15:05
   
자신이 출처로 등록한 글에 있는 것을 보고 말하는건데.. 이건 뭐..

[한반도에서 소빙기가 끝난 시점은 대체적으로 1870~1880y사이로 나타났으며]

[한가지 특기할만 점은 이는1845년 중국과 19세기 초반~중반에 소빙기가 끝난다는 일본의 시점보다 수십년 뒤쳐진 결과이다.]

위와 같은 문구가 있습니다. 한반도가 1875 년이라 하면 중국의 1845 년과 30 년 차이죠.

[1918년뿐 아니라 통계는 1910년부터 시작되는데요? ] ---- 이 말씀은 도대체 왜 하는거에요 ? 한반도 통계를 1918 년거 제시했잖아요. 그러니까 1918 년쯤 강수량을 말하는거죠.
                         
eo987 16-11-24 15:50
   
님 뒤에 글을 자세히 읽으세요  제가 위에서도 언급 했지만 중국의 영토는 한반도에 50배로 그래서 글쓴이님께서 단순한 비교는 힘들다고 하시니까요 그리고 정작 일본에 대한 언급은 님이 계속해서 주장하시는 말과는 전혀 다른데 이 부분을 그대로 인용하신다니요

님 농업적 생산량이란 어느 한해의 풍년으로 장기간 최소 수년에서 길게는 수십년이 급작스레 변화는 성격이 아니에요  1910~1918년도의 통계를 봐야지 1918년 통계는 그해 님의 생각으로는 강수량이 많았을 것 같으니까 생산성이 유독 많았을 것 같다라는 주장을 하시면 안되죠
          
archwave 16-11-24 15:00
   
위도 갖고 완전히 말을 180 도 뒤집다니..

위도가 1~2 도 차이가 나려면 일본이 한반도보다 남쪽으로 111~222 km 내려가 있어야 하는데, 한반도와 일본 열도 비교해보면 그 정도 차이날거 같지 않네요.

그리고 위도니 뭐니 그게 그리 결정적이지 않은 것은 통계가 증명합니다.

[단보당 생산량] 을 보면 한반도나 일본이나 [1 석/단보] 정도이고 그리 오차 나지도 않습니다. 그 정도 오차는 그냥 같다고 봐도 될 정도로요. 링크하신 출처 말고도 자료 있습니다. 한번 찾아보세요. 물론 일제시대때 통계죠.
               
eo987 16-11-24 15:52
   
차이나 날 것 같지가 않다가 아니라 한반도의 최남단과 일본의 최남단 적어도
관서의 경계인 오사카까지는 현재 구글맵에서 보면요 무려 250km~350km차이가나요
또 근거가 아닌 자기의 생각으로 이야기를 하시네 또 나쁜버릇 -_-

"열도 비교해보면 그 정도 차이날거 같지 않네요."
ㅋㅋㅋ 인상깊은 대목이네요 정말 에구
eo987 16-11-24 10:32
   
인터넷에는 단순한 지식은 있을지 몰라도 결국 그 수준이라는게 어떤지는 알지 못하고  어설프게 들은 지식을 근거로 땜빵식으로 머리를 채우니 참 문제네요 문제 님같은 분들 논문도 못읽어 책도 안읽어 인터넷만 검색하는...에휴 물론 그런게 자신의 생각을 확증편향시키는데 도움이 될 지는 모르고 인터넷에서 척을 하는게에는 어느정도 먹힐순 있지만 학문에서는 그냥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뿐인데
     
archwave 16-11-24 15:07
   
논문이나 책 읽으시려면 여러가지 방향에서 접근한 것을 고루 읽으세요.

님께서는 취향에 맞는 한 쪽으로만 보고 있으니 도그마에 빠져서 난리잖아요.

학자들의 논문마다 아 다르고 어 다른 수준을 넘을 정도로 말이 다른게 참 많죠. 그런거 교차검증도 좀 하세요.
          
eo987 16-11-24 15:54
   
그런데 정작 님의 출처는 모두 인터넷인데...그것도 어떤 분 말씀처럼 그때그때 검색해서 얻은 지식이라 앞뒤도 안맞고 내용도 틀리고.. 이쯤되면 확실히 정상적인 사고를 하시는 분은 아니네요 ^^
eo987 16-11-24 15:58
   
블로그 글도 그냥 넘어가 위도는 생각으로 말해 ㅋㅋㅋ
1918년은 자기가 생각하기에 비가 많았을 것 같으니까 유독 풍년이었을 것 같고
역시 글의 전체를 안읽으니까 중국의 소빙기도 대충대충 동시에 자신이 말하고 있는 일본 소빙기 기간은 그대로
인용하고 대체 머릿속에 뭐가 드신건지 에이구~
처음에는 가축수를 이야기하다 정작 가축수는 일본이 더 많고 그 다음에는 600년대 불교교리를 전파한걸로 육심이 금지되었다고 하다가 어떤때는 수산물 환경이 훨씬 좋았다고 하고 결국 판단은 이 글을 보시는 분들께 맡길수 밖에 그리고 이쯤이면 님의 정체도 어느정도 파악이 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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