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제일 원인 제공자는 김일성이라는 건 객관적 사실이고,
한국사에서 가장 ㄳㄱ중 한명이죠.
김원봉이 한국전쟁에 북한군으로 참전하였다하나 김원봉이 월북한 것 자체가 당시 남한의 이승만과 미군정이 친일부역자들을 요직에 앉히고 친일매국노였던 경찰에게 수모를 당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입니다.
김원봉의 의열단 활약의 공을 깎아내리려고 한국전쟁 참전을 말하는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당시로선 김원봉의 입장에서 민족통일전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일이고, 김원봉은 결국 김일성에게 축출되는데, 당시 북한의 상황도 단순히 지금과 같은 김씨 독재국가와 동일한 상황으로 볼 수 없습니다. 김원봉은 사회주의자 이전에 민족주의자였습니다.
앞에 말했다시피 한국전쟁의 배경이 당시 냉전의 대리전이고 타국의 이권이라는 맥락에서 일어났다 할지라도 가장 큰 책임은 김일성에게 있고 한국전쟁의 결과가 엄청난 과오이니 굳이 김원봉의 잘못을 추궁할 수 있다쳐도 그의 독립운동까지 깎아내릴 일은 아니죠.
공과는 똑바로 봅시다. 결과론적으로 김원봉을 욕하며, 관심법으로 불순한 사람 취급하는 건 굉장히 잘못 되었습니다. 항일독립지사 중 좌파가 많고 실제로 김구보다 활약을 많이 한 게 김원봉이오. 공과 과를 따질 수는 있다하나 김원봉을 이승만 따위로 격하시키는 짓은 잘못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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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9월, 북한정권이 수립되면서
김원봉은 북한 내 서열 7위에 해당하는 국가검열위원장에 올랐고
이 밖에도 노동상,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의장 등 여러 고위직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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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알기론 6.25 전쟁 때에는 국가검열위원장이었죠.
이건 군 관련 직책은 아니었던걸로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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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검열성(國家檢閱省)은 1948년 9월 설립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의 중앙 행정 부처이며 감찰, 감사 업무를 관장한다.
1959년 8월 폐지되면서 업무가 최고검찰소로 이관되었다가, 1960년 다시 부활하였다.
김원봉의 경우 명백한 전범입니다. 김일성의 남침시기에 그는 국가서열 7위에 해당하는 직위였습니다.
그가 전쟁책임 없다면 북한에 전쟁책임 있는 사람이 몇명이나 되는 지 의심스럽습니다.
젊은시절 한때 좋은 뜻 안품어본 사람 없습니다.
이완용조차도 젊은 시절에는 개화파의 일원으로 조선 개혁운동을 했다고 하더군요. 모든 것은 공과 과를 비교하여 후세에 얼마나 큰 도움을 줬는가로 평가해야합니다.
공과를 평가할때 공을 평가하면 김원봉의 젊을때 업적은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한 '시도'를 했다는 것 그리고 조선독립이라는 뜻이 옳았다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전과가 크게 존재하는 건 아닙니다. 쉽게 말해 뜻만 좋았다는 거지요.. (사실 이 뜻 부분에서도 김원봉의 경우 조선독립이 아니라 조선 공산화를 위해 싸운 것이므로 평가할수 없다는 분 있습니다. 일리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 시점에서 이는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려운 혼재된 시대였으므로 뜻부분을 폄하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도 이 두가지가 얼마나 엄청난 차이인지 구분하지 못했을 겁니다. 조선 공산화와 조선독립의 차이를 알고 조선 공산화를 위해 그런게 확실한 경우는 뜻도 평가하기 힘듭니다.)
과를 평가하면 수백만이 죽은 6.25 남침시기에 그는 서열 7위였습니다. 그 사망자의 1/20정도를 그의 잘못이다 봐주더라도 그는 수십만 한국인의 목숨을 앗아간 사람입니다.
뜻을 평가하면 지금의 대한민국 지역까지도 공산화 시키겠다는 것입니다. 뜻 나쁩니다.
공과 과를 비교하면 과가 압도적입니다. 수십만명의 생명의 무게입니다. 이게 실수로 죽인것도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국민들이 친일파라서 김원봉을 비하하는 게 아닙니다. 잘못을 했으니 김원봉을 비하하는 겁니다.
독립운동의 영웅 김원봉이 왜 복으로 갈수밖에 없었는가 부터 찾아 보세요. 걍 김원봉 같은 독립투사 까는 일뽕이라면 모르겠네요. 다시 보니 쪼렙이네,,,
광복후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고 일제 강점기때 일본 앞잡이를 하며 독립투사들을 사냥하던 노덕술을 경찰청장 자리에 앉힙니다. 물론 주요 보직에 친일 매국노들을 두루두루 등용 한건 아실테고 여튼 이에 노덕술 역시 경찰 주요 보직에 친일 매국노를 불러 들이고 향후 지들이 살기위해서 김원봉등 독립투사를을 잡아 빨갱이 누명을 씌워 극심한 고문을 하고 옥에 가두죠.
이때 김원봉이 한 말이 유명하죠 "독립운동을 하면서 일본놈들에게 당해 본적 없는 고문을 광복이 된 지금 친일파들인 동포에게 받게 될줄이야" 이때 고문 후유증이 남아 고생 했다고도 하죠,
이후 남한에서는 행적을 감추게 되고 동족상잔인 625이후 북쪽에서 이름이 보이게 되는 겁니다.
님이 김원봉 입장이면 남한에 남아서 수시로 고문을 당하고 옥살이 하며 살아갈수 있겟습니까? 그 당시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은 공산당이란 이념적사상보다 민족주의가 더 앞선 이념 이었기에
남한에서는 활동을 못하기에 북으로 가 공산당에 녹아 들어간게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남쪽에서 버린거죠.
이원봉 선생은 우리 민족사에 아픈 역사로 남겨야 하는거지 공산당은 싫어요의 대상이 되면 않되는 겁니다.
2000년대 초 대한민국 국가적으로 당시 공산당에 적을 두고 독립운동을 하던 독립투사 모두에게 건국 훈장 애국장 애족장등 훈장들을 수여 하면서 당시 공산당 당적을 가진 독립투사에 대한 이념 논쟁은 공식적으로 끝난겁니다.
근데 이런글을 올리는 이유가 무식해 식견이 딸리는건지 아님 걍 독립투사를 까기 위한건지 심히 의심스럽군요.
참고로 이승만 정권아래 승승장구 하던 노덕술이 경제력을 축적해 후손들 교육 잘 시켜서 그 후손인 노재봉은 국무총리까지 지내게 됩니다. 차라리 이런걸 까도 까야 하는게 아닐까요?
사실이 아닌 글이군요.. 김원봉의 경우 2005년 그 동생이 한국에 건국훈장을 신청한바 있습니다만 심사 결과 탈락한 사람입니다.
그에게 존재하는 것은 북한 김씨왕조 건국의 공로를 인정받아 북한에서 수여한 로동훈장만 존재합니다. 그의 북한 서훈이 박탈되지 않은걸로 봐서 진짜로 숙청된건지도 솔직히 의심스럽습니다. 어느정도 북한의 상황을 나쁘게 표현할수 밖에 없는 탈북자 1인의 증언밖에 없으니까요..
그가 노덕술에게 고문을 당했다라... 사실인지 확인되지 못한 주장입니다.
그는 1948년 김구선생과 같이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때 북으로 갔다가 주저 앉았을 뿐입니다. 그가 북에 눌러앉은 이유를 설명하는 편지에서 노덕술 얘기는 나온바 없습니다. 다만 정세가 안좋다는 얘기만 나왔지요. (댓글에서 김원봉이 했다는 발언은 출처가 어디신가요?)
게다가 내용중에 이승만 얘기가 나오는 게 납득이 안되는 군요. 김원봉은 이승만이 대통령되기전에 이미 월북한 사람입니다.
-사실이 아닌 글이군요.. 김원봉의 경우 2005년 그 동생이 한국에 건국훈장을 신청한바 있습니다만 심사 결과 탈락한 사람입니다.
--> 제 댓글 어디에 김원봉이 건국훈장을 받았다고 나오나요? "2000년대 초 대한민국 국가적으로 당시 공산당에 적을 두고 독립운동을 하던 독립투사 모두에게 건국 훈장 애국장 애족장등 훈장들을 수여 하면서 당시 공산당 당적을 가진 독립투사에 대한 이념 논쟁은 공식적으로로 끝난겁니다." 여기서 모두는 잘못 작은글이네요.
그리고 2천년초 정책으로 일제강점기시에 공산당 당적을 가지고 독립운동을한 분들에게도 대한민국 애국장 애족장을 수여 한건 사실 이고 이때 독립투사들에 대한 공산당이란 이념 논쟁은 끝난거죠.
그때 김원봉은 님 얘기대로 심사 탈락한건 다 아는 사실이고 거기에 대해 아직도 여러말이 나오고 있고 최근 재조명 되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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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노덕술에게 고문을 당했다라... 사실인지 확인되지 못한 주장입니다.
그는 1948년 김구선생과 같이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때 북으로 갔다가 주저 앉았을 뿐입니다. 그가 북에 눌러앉은 이유를 설명하는 편지에서 노덕술 얘기는 나온바 없습니다. 다만 정세가 안좋다는 얘기만 나왔지요. (댓글에서 김원봉이 했다는 발언은 출처가 어디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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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amu.wiki/w/%EA%B9%80%EC%9B%90%EB%B4%89#fn-9 "1948년 남북연석회의 때 김구, 김규식과 함께 북한으로 건너가는데 그대로 잔류하여 월북인사가 된다. 그가 월북하게 된 동기에 여러 이유가 있는데, 아무래도 가장 큰 이유는 옛 친일파들이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권세를 누리던 당시 정국에 매우 큰 절망을 느낀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특히 앞서 설명된듯 노덕술에게 공개적으로 조롱당하고, 수 차례 고문을 받은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된것으로 보인다. [9]"
물론 노덕술의 경찰청장 임명은 48년 건국이후 라지만 그 이전에도 일제 강점기 평남 보안과장으로 독립투사들을 잡아 들이던 노덕술은 미군정하에서 수도청 수사과장으로 옮겨 경찰 고위직을 유지하며 빨갱이 사냥을 이유로 독립투사들을 잡아 들이고 고문에 앞장 섭니다.
거기에 김원봉이 포함 되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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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내용중에 이승만 얘기가 나오는 게 납득이 안되는 군요. 김원봉은 이승만이 대통령되기전에 이미 월북한 사람입니다.
--> 48년 7월 이승만이 대통령취임을 하고 48년 4월 남북 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김구와 함께 월북 합니다. 물론 대통령 취임 전이긴 하나 미군정하에 친일 매국노의 등용으로 빨갱이로 몰려 고문과 재판을 받고 47년 4월에 풀려나 남한에서 잠적하게 되고 다음해인 48년 4월 남북 연석회의 참석때 월북해 북한에 남게 되는거죠.
여기에 김원봉은 함께 올라간 김구와 달리 북한에 남게된 이유로 친일매국노들의 당시 독립투사들의 구금 고문등을 이유로 들고 있는겁니다.